강남제일교회(현 서울 방이동 임마누엘교회)를 섬길 때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갔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먼 여행이었다. 영어회화가 걱정됐다. 급하게 회화책을 한 권 샀고 기본 회화 몇 가지를 준비했다.
여행 준비와 흥분 때문에 식사도 못하고 탄 오전 9시30분 비행기였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팠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자 한쪽에서 배식이 시작됐다. 다행이었고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부터 했다. 준비한 회화도 점검했다.
‘Could you give me food!’ 그 다음은 ‘Thank you!’
그런데 승무원이 가까이 와서 묻는데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내가 먼저 말하려는데 승무원이 먼저 말하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Could you give me 도시락!”.
승무원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시 물었고, 다시 말해도 알아 듣지 못했다. 창피해진 나는 그냥 “No”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옆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와 빵 그리고 야채 등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을 먹고 있으니 화가 났다. 나는 하나님께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외쳤다.
그러자 하나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배가 고픈지 잘 아시잖아요.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아무리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알아서 도시락 정도는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선교여행이 걱정이 되네요.”
하나님께서 한참을 웃더니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대학도 졸업하고 대학원도 다니니 밥 얻어먹을 정도의 영어회화는 하는 줄 알았지. 아니면 진작 영어 못하니 도와달라고 했으면 내가 사랑하는 안찬호를 도와주지 않았겠니? 앞으로는 이렇게 해라, 그러면 될 테니”라며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나는 홍콩에서 내려 걸프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역시 외국인 승무원. 기내식이 배식됐고 내 차례가 왔다. 승무원이 나를 보고 뭐라고 물으려는 순간, 나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곧바로 눈을 감았다. 대꾸도 안 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내게 묻기를 포기하고 옆 사람에게 먼저 뭘 먹을지 물어보고 기내식을 건넸다. 나는 그 순간 눈을 떠 그 옆 사람의 도시락을 가리켰다. 그러자 승무원이 알았다며 기내식을 줬다. 정말 맛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가르쳐주신 것은 확실하네요. 앞으로 모든 것을 먼저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어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아셨지만 내가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내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마사이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나는 큰 고민에 싸여 있었다. 나는 이미 탄광촌 아이들을 상대로 목회하고자 했고 선교여행 이후에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눈에 밟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나는 주님의 명령이 있기를 전적으로 바라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아프리카로 가라고 명하셨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프리카가 두렵고 아이들의 적응이 걱정됐지만 나는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1991년 1월, 나이 40에 임마누엘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그해 3월 케냐로 향했다. “주님, 이제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 아멘.”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안차호 선교사 약력
△1952년 충남 연기 출생 △강릉고교 자퇴 △삼척시 경동탄광서 7년 광원생활 △검정고시로 고교졸업 자격 △감리교신학대-대학원 졸업
[역경의 열매] 안찬호 (2) 가난 찌든 탄광촌 생활에 방황 |
나는 1952년에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무속인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가업을 이어가기 바랐지만 아버지는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나셨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날품팔이와 남의 집 일을 돌보며 생계를 꾸려가셨다. 어릴 때 우린 늘 배가 고팠다. 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신발을 신어본 기억도 없다.
일곱 살 무렵이었다. 형이 ‘우유빵’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묻자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더니 목사님이 주셨어. 다음 일요일에 또 갈 건데 너도 갈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일요일을 학수고대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일요일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일러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찬송 소리에 눈을 뜨자 예배당의 아이들이 모두 우유빵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나도 달라고 하자 미국인 목사님은 서투른 우리말로 “남은 게 없다”며 난처해하셨다. 나는 너무 서러워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가난은 내가 교회에 나간 계기가 됐다. 나와 형은 이때부터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우리 형제가 교회에 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작은아버지가 사정없이 우리에게 매를 가했다. 우리는 교회 출석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교회를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가난하게 사느니 죽어버리자며 술을 마신 뒤 깨어나보니 교회였다.
여덟살 봄에 우리 가족은 강원도 명주군 탄광촌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셨다. 이전보다 훨씬 형편이 나아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탄광 사고로 아버지가 다치자 우리 가족은 다시 매일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학교에서 물로 허기를 채우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잠시 회복됐으나 규폐병으로 쓰러져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겨우 진학한 나는 학비를 벌기 위해 방학 때면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4홉들이 소주병을 들고 산에 올랐다. 술병을 비운 뒤의 일은 지금도 생각나지 않는다. 술이 깨 정신을 차려보니 교회 예배당이었다. 몸 위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학생, 일어나면 교회 뒤에 있는 목사관으로 오세요. 저는 이 교회 사모입니다”라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예배당에서 한참 동안 울고 난 뒤 감사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목사관에 찾아갔다. 사모님은 나를 방에 앉히더니 이내 따뜻한 밥상을 들고 오셨다. “학생, 시장하지? 많이 먹어요. 교복을 보니 강릉고 학생이네? 학생 같은 나이에는 누구나 한번씩 방황을 하지. 괜찮아. 많이 먹어”라고 위로하시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까 모든 문제를 혼자 지지 말고 하나님과 나누라”고 권고하셨다.
나는 난생 처음 포근한 사랑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얼핏 본 교회 이름은 강릉성결교회였다.
나는 다음날 아무도 몰래 학교를 자퇴하고 군에 지원 입대했다. 먹고 자는 일만 해결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7년 동안 군생활을 하고 제대했으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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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안찬호 (3) 탄광사고 극적 생존… 믿음의 길로 |
7년 동안 군생활을 했으나 고교 중퇴 학력으로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탄광촌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삶에 대한 회의 때문에 하루하루를 술로 허비했다.
탄광 막장은 지하이기 때문에 위험 요인이 많다. 지하 10m를 내려갈 때마다 온도는 1도씩 올라간다. 따라서 해발 마이너스 4500m의 막장은 섭씨 35도가 넘는다. 습도도 90 이상이라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뿐 아니라 탄가루가 날려 앞이 안 보이는데다 통풍도 안돼 숨조차 쉬기 어렵다. 대형 선풍기로 밖에서 공기를 주입하지만 역부족이다. 그야말로 어둡고 덥고 좁아서 갑갑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광원은 작업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안전이라든지 인권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다. 워낙 위험한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않도록 욕을 해대는 것이 감독관의 일이다. 굴 속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소리가 큰 사람이 최고다.
그래도 이런 건 참을 만하지만 작업 중 일어나는 사고는 어찌 할 수가 없다. 갱도가 무너져 깔려 죽는 사람, 탄광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로 질식해 죽는 사람, 낙석에 맞아 죽는 사람이 허다하다. 가스 폭발 사고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처참하다. 사고가 나면 수많은 사람이 불에 타 죽는다.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조차 없다. 또 무서운 것은 지하수에 연결된 물통이 터지는 사고다. 물통이 터지면 물과 석탄이 반죽이 돼 엄청난 힘으로 휩쓸고 지나간다. 싹 쓸어가기 때문에 작업 도구도, 사람도 남아나지 못한다.
새벽 4시쯤이었다. 나와 고씨 아저씨가 막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갱도가 풀썩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삽으로 무너진 통로를 정신 없이 파냈다. 하지만 고씨 아저씨가 나를 말렸다. 나는 “당신은 세상을 살 만큼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련이 없겠지만 난 아직 젊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죽으려면 당신이나 혼자 죽어.” 그러자 아저씨가 “당신은 살 수 있어!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탄에 묻혀 죽을 거야. 발버둥치고 몸을 많이 움직이면 산소가 적어져 그만큼 수명을 단축할 뿐이야. 좀더 살고 싶으면 잠자코 내 말을 들어”라고 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아저씨를 때리면서 죽기 싫다고 발버둥쳤다.
얼마쯤 지났을까. 기진맥진한 내게 아저씨가 물었다. “예수를 믿느냐?” 난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아무 쓸모도 없는 예수 타령인가 싶었다. 나는 “예수는 알지만 안 믿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씨 아저씨가 “어쩌면 우린 살아나가지 못할지도 몰라.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당신이 어디로 갈 것 같아”라고 물었다.
난 천국에 갈 자신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내 손을 잡고 “지금도 안 늦었다. 나를 따라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아저씨의 말을 듣기로 했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삼고 이제까지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나는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고씨 아저씨는 죽고 말았다. ‘아저씨가 날 살리고 자신은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고씨 아저씨처럼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 이때의 서원이 아프리카 마사이족 선교 비전의 씨앗이 됐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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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안찬호 (4) 믿음도 잠시 다시 술꾼 전락 |
무너진 갱도에서 복음을 전해주고 죽은 고씨 아저씨의 노력도 헛되이 나는 다시 술꾼으로, 싸움꾼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또 한 차례 내게 새 사람이 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 기회를 통해 내 삶을 변화시키시고 좋은 아내를 선물로 주셨다.
어느 날, 싸우다가 다쳐서 병원에 실려갔다. 치료를 받으면서 무심코 간호사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게 됐다. “서울이나 부산에 가서 깡패질을 할 것이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탄광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등쳐 먹으며 좀팽이 깡패노릇만 하다니! 쯧쯧….”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치료 도중 뛰쳐나왔다. 간호사가 한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고씨 아저씨가 떠올라 스스로를 한탄하며 실컷 울었다.
나는 그 간호사가 고마웠다. 한번 더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간호사에게 만나자고 부탁했지만 당연히 거절당했다. 나는 간호사의 뒤를 밟아 그녀가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도 교회에 나갔다. 그녀는 청년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나도 금요일 청년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겁을 먹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큰 기회가 찾아왔다. 다니던 회사에서 한국에 처음 들여온 고가의 굴착기 운전기사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학력은 상관없고 오직 영어 필기시험과 인터뷰만으로 뽑는다고 했다. 나는 실력은 고사하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응시했다.
영어 필기시험은 커닝으로, 면접은 앞 사람에게 물어봐서 치른다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면접 번호는 2번이었다. 앞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는 순서였다. 나는 포기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면접관들 앞에 서자마자 나는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금방 기가 죽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시 기도를 드렸다.
영어 질문에는 “예스” “노” “오케이” 세 마디만 했다. 물론 질문 중 하나도 알아들은 것이 없었다.
며칠 후 정말 어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합격 통보가 날아온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필기시험은 커닝을 했으므로 다른 응시자들과 비슷한 점수를 받았다. 문제는 영어 면접이었다.
면접 때 내가 “할렐루야”라고 외치고 기도하자 면접관들이 내게 “당신 크리스천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나는 뜻도 모르고 “예스”. 두번째는 당신도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역시 모르면서 “노”. 그리고 “당신을 불합격시켜도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는 마지막 물음에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나 “오케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합격했고 이후 굴착기 사용과 정비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 회사의 신임을 얻었다. 교회 청년회 일에도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마음이 부회장인 그녀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마스 카드 만들기 등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했다. 물론 술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청혼을 받아들여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와 나는 1977년 결혼했다. 아내는 싫은 것을 남에게 맡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내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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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안찬호 (5) 허위학력 알고도 시집온 아내 |
처음 목회 사명을 받은 것은 죽음 직전에 고씨 아저씨를 증인으로 삼아 “나를 살려주시면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서원한 때였다. 부흥회 때마다 강사들의 기도와 안수를 통해 하나님은 내게 빨리 신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선뜻 따를 수 없었다. 아내는 계속 나의 목회 사명을 놓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 승우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더 이상 아내를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학력을 아내에게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늦게 아내에게 학력을 속인 것을 고백했다.
모든 것이 잘못 될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내기가 몹시 두려웠지만 말을 꺼냈다. “여보, 내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해도 난 상관없어요. 내가 지금 고백하지 않으면 난 영원히 죄책감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소. 사실 난 고교 중퇴자요.”
결혼한 지 6년이 돼서야 고백을 한 것이다. 속이 후련했다. 내 말을 들은 아내는 나를 붙잡고 엉엉 울어댔다. 나는 아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울음을 그친 아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장롱을 열고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벌써 이혼서류를 만들어 놓았구나 생각하고 힘없이 받아들었다. 봉투 안에는 몇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장의 서류가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바로 내 고교 퇴학증명서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발급 날짜를 살펴보니 1996년 12월이었다. 아내는 이미 결혼 전에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체했던 것이다. 다른 것들은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원서, 편입원서 등 모두 나를 위해 마련해놓은 서류들이었다. 아내는 일찍부터 검정고시 공부를 시키거나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내가 스스로 진실을 밝힐 때까지 기다려온 것이다. 언젠가는 고백하겠지라고 기다리면서 6년 동안 새벽마다 주님께 간구한 것이다. “우리 남편을 진실하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미안하오. 내가 죽일 놈이오. 당신 말에 따르겠소.” 아내의 손을 부여잡은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아내도 울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난 10년 아니, 20년이라도 기다리기로 하고 기도해왔어요. 그리고 당신이 고백하는 날 내 소원도 말하려고 했어요. 내 기도 제목은 당신이 주의 종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살려주시고 나를 만나게 하신 것은 당신이 하늘 나라 확장에 쓰일 주님의 도구였기 때문이에요.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당신을 드리도록 해요. 우리 회사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가요. 그리고 공부하세요. 제가 모든 뒷바라지를 할 게요.”
나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울면서 기도했다. “주님, 절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이 세상에 쓸 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저입니까? 전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토록 원하신다면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그 다음날 나는 아무런 미련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역경의 열매] 안찬호 (6) 감신대 진학… 방학없이 학업몰두 |
서울로 이사한 우리 가족은 잠실1동 주공아파트 411동 409호에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보며 출석할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데 ‘강남제일교회’ 버스가 지나갔다. 곧바로 전화를 했다. 사무원이 상냥하게 안내해줬다. 지금까지 우리 가정을 돌봐주시며 한가족처럼 지내는 정현모 속장님을 만났다.
그 다음 주일부터 강남제일교회에 나갔다. 김국도 담임목사님이 설교하셨다. 김 목사님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도계 동광감리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강사로 오셔서 은혜를 주신 분이었다. 그때의 감격이 생생히 남아 있었는데 그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날 곧바로 강남제일교회에 등록했다. 새 신자 소개 시간에 김 목사님이 10년 전 부흥회 때 잠시 봤던 아내를 기억하셔서 더욱 감격스러웠다.
신학을 하려면 신학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아내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우리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실력도 없고 자신도 없어 주위 사람들에게 경험 삼아 도전한다고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꼭 합격하고 싶었다. 열심히 기도하며 공부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주님의 은혜였다.
곧 대입을 준비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원서를 썼으나 낙방했다. 감신대 캠퍼스의 큰 나무 밑에서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이 학교에 꼭 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합격할 것입니다. 내년에 다시 와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 뒤 교회에 갔더니 담임목사님이 후기 신학대 진학을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재수하겠다며 목사님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러자 목사님은 내게 나이도 많고 대학에도 떨어졌으니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시며 역정을 내셨다. 아내와 나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그래도 목사님은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거기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우리 부부는 계속 목사님 다리를 잡고 애원했다. 그러자 목사님이 우리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런 각오와 결심, 인내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당부하시며 우리를 받아주셨다.
1년 후 나는 다시 감리교신학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아내가 새벽기도를 마친 뒤 첫번째로 원서를 제출했다. 수험번호 1번으로 시험을 치렀다. 내 성적은 신학과 커트라인 점수였다. 동점이 나를 포함해 5명이나 됐으나 신학과에는 3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가 적은 순서대로 합격시킨다는 학교측 설명을 듣고 종교철학과로 진로를 바꿔야만 했다. 거기에서 1학년을 마치고 신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총 53학점을 더 획득해야 했지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드시 신학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에도 학교에서 살면서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4년 만에 신학 전공 자격을 획득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 2년 만에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뒤에서 울며 기도한 아내의 공도 컸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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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안찬호 (7) 3일분 식량 갖고 마사이 땅 밟아 |
1991년 3월18일, 나는 3일분 식량을 준비해서 케냐 마사이 땅을 밟았다. 소변이 너무 급해 무조건 차를 세운 식당 앞에서 한 원주민이 내게 인사를 해왔다. “선교사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대답을 듣자 그가 소리쳤다.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계십니다. 난 이곳에서 매일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제레미아 전도사입니다”라고 자기 신분을 밝혔다.
난 너무 놀라 어떻게 날 기다렸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물음에 “나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우리 마사이 족에에 복음을 전할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벌써 한 달을 기도하고 있는데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 ‘그래, 내가 보내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이곳에서 기다리다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매우 감격스러워했다.
나는 그 순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선교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매우 위험한 곳”이라며 마사이 마을로 향했다.
5시간 정도 걸어가더니 그가 말했다. “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마을은 마사이 족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저는 못 들어가지만 선교사님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믿고 더 들어가자 마사이 청년들과 추장이 창을 들고 나를 둘러싸며 위협했다. 두려워 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들의 말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창으로 위협하며 마을로 끌고 갔다.
나는 기도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때 추장이 내게 뭐라고 물었지만 난 눈을 감고 기도만 했다. “주님! 전 두려워요. 제게 용기를 주소서.”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얼굴에 닿았다. 나는 겁이 나 눈을 감은 채 “예스, 예스”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내게 눈을 뜨게 하더니 화를 내며 또 뭐라고 물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뜻으로 “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뭔가 얘기하더니 다시 내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죽든지 살든지 주님 맘대로 하시라는 의미로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들이 환한 얼굴로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마사이 족들은 선교사들이 마사이 경계선을 넘어들어오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응답이 공교롭게도 이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너 이곳에 들어오면 죽이겠다. 그래도 들어올 것인가”란 협박에 다른 선교사들은 죽음이 두려워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는 “예스”라고 외쳤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죽인다고 해도 들어가겠다고 응답한 게 됐고 이 말에 놀란 그들이 내 뜻을 재차 확인한 질문에 내가 “노”라고 응답, 처음 답변을 강조한 꼴이 됐다.
“그렇다면 마사이 마을에서 자기들과 같이 살 것인가”라는 그들의 마지막 물음에도 “오케이”라도 아무렇게나 말한 내 대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 결과 마사이 족들은 그동안 찾아왔던 선교사들과 다른 내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주님이 예비하신 결과였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