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역경의 열매] 전옥표 위닝경영연구소 대표 (1)~(6)

영국신사77 2008. 2. 21. 13:06
 
 
 

 

[역경의 열매] 전옥표 (1) 불교집안 장남 몰래 간 주일학교… 신앙 첫 발


  나는 철저한 불교 집안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님 두 분이 계셨지만 장손 집안에 아들이 없자 아버지는 다급한 나머지 일 년여를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불공을 드려 나를 낳았다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이따금씩 아버지를 따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곤 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아주 독실한 모태 신앙인이셨다. 어릴 때부터 우리를 무릎에 앉혀놓고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을 들려주시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어머니의 찬송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닐 엄두는 감히 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주일 성수를 하시는 어머니에게 아예 이혼하자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셨다. 특히 제사 때가 되면 두 분은 심한 말다툼을 하시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이었다. 옆집 친구가 하도 같이 가자고 하길래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아버지 몰래 주일학교를 따라갔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나를 보신 선생님은 처음 나왔다고 노트 두 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을 냉큼 받아든 나는 참 염치도 없이 "선생님, 다음 주에 나오면 또 뭐 주나요?" 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하하' 웃으시더니 "그래, 다음 주에 나오면 연필을 주마. 그러니 꼭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노트 두 권을 받아들고 신바람 나게 집으로 달려 들어오는데 아뿔싸, 문 앞에서 아버지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얼른 등 뒤로 노트를 숨겼다.

'이제는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생각하며 그 자리에 딱 얼어붙어 서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들어가셨다. 내친 김에 나는 그 다음 주에도 주일학교에 가서 연필을 타오고 또 그 다음 주에도 가서 다시 노트 두 권을 상으로 받아왔다.

그런데 세 번째 교회에 간 날, 주일학교 선생님은 3주 후에 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가 열리는데 1등을 하면 큰 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상 받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기필코 그 상도 내가 받으리라 작정하고는 그 길로 잘 아는 동네 형을 찾아갔다. 집에서는 성경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교회라곤 세 번밖에 안 나갔고 성경이라곤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요한복음 내에서만 출제가 된다고 하니 죽어라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부터 내게는 '이기려는 근성', 즉 '이기는 습관'이 내재되어 있었던 같다. 3주 동안 요한복음을 외우고 또 외웠다. 마침내 성경퀴즈대회가 개최되었다. 아슬아슬한 몇 고비를 넘겼지만 마침내 나는 성경퀴즈대회 1등상을 거머쥐었다. 그때 놀라는 표정들이란!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들 제일 '초짜'가 1등을 했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상품이 '솥단지'였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커다란 솥이었는데, 그 큰 솥을 혼자 들 수가 없어 여러 친구들과 함께 들고 왁자지껄 떠들며 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만 아버지와 문 앞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그 솥이 뭐냐?" 움츠러든 나를 대신해 친구들이 대답했다. "예, 옥표가 성경퀴즈대회에서 1등 먹어서 탄 상이에요." 순간 아버지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녀석, 1등 욕심 많은 건 날 닮았구먼. 그래, 정 그렇게 교회 다니고 싶으면 다녀라. 대신 학교 성적 떨어지면 안된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는 걸 허락해 주셨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어쨌거나 처음엔 상 타러 멋모르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평생 주님과 동행한 삶을 시작하게 해준 셈이다.

약력 1957년 경북 김천 출생, 성균관대 경영학과, 경영학 박사, 전 삼성전자 상무,

        '이기는 습관''청소년을 위한 이기는 습관' 저자,

        잠실 신천교회 장로, 현 위닝경영연구소(opj7@naver.com) 대표



 

 

[역경의 열매] 전옥표 (2) “모든 일에는 귀천 없다 고난이 성공의 큰 밑천”


  교회에 다니는 게 자유로워지자 어머니는 틈만 나면 내게 구원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영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어머니 말씀이 나도 모르게 내 세포 하나하나에 심겨져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특히 이사야 43장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어머니의 그 큰 가르침과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어머니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셨지만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서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학생인 내가 손수레를 끌면서 어머니 일을 거들고 농사지은 채소와 곡식들을 시장에 내다파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길거리에서 아는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그야말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다. 공부 못지않게 농사일을 거들며 일을 배우는 것도 나중에 네 삶의 중요한 경험과 지식이 될 것이다. 자부심을 가지려무나. 남들이 온실에서 곱게만 자랄 때 너는 역경을 무릅쓰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어머니의 눈시울이 항상 발갛게 물들어 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가정 형편이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게 그런 환경이 없었더라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다 이겨낼 수 있었을까 싶다. 어머니는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 강사로 오시면 꼭 나를 교회당 맨 앞자리에 앉혀서 말씀을 듣게 하셨다. 좋은 말씀을 많이 듣다 보니 으레 필기구를 갖고 체계적으로 경청하는 방법을 읽힐 수 있었고 덕분에 안목을 많이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경북 김천에 있는 대광장로교회에서 박경순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중·고등부 학생회장까지 맡아 당시 50여명이었던 학생회를 200여명으로 성장시키는 등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당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게다가 학교 자습시간에 왜 주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역설하면서 종종 신앙간증까지 하곤 해서 친구들은 모두 내가 신학대학교에 갈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전갈이 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새벽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김천에서도 8㎞나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었다. 캄캄한 밤에 그 시골길을 티셔츠가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시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그런데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 집이 대낮처럼 불이 환히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들어서자마자 누님들이 나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벌써 소천하신 것이다. 향년 49세.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직 당신을 위해 성공해야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게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목사님께선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고 하셨지만 하나님이 너무 야속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은 내게 사랑을 주시고 항상 기도로 응답해주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변화는 그야말로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소천을 계기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신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너무도 어리석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 모양이다. 나 역시 불효하게도 어머니를 잃고 나서야 평상시 그분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랐다. "너는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이다."

 

 



[역경의 열매]전옥표(3)군종병 제대하며 믿음 서약 삼성전자 입사 주님께 감사


  대학졸업 후 군종병으로 군 생활을 보냈다. 전역을 하면서 주님께 서약했다. “부족한 제가 앞으로 평생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 후 국회의원 비서로 취직하여 지역구를 관리하던 중 삼성전자 신입사원 공채에 응시했다. 주님의 은혜로 합격했다.

신입사원 1년차 시절 모두들 마케팅 전사교육에 참석하게 되었으나 나는 며칠간 연간 경영전략을 수립하는데 참석하게 됐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몇몇 임원들과 함께 호텔방에서 지냈다. 내게는 필경사 역할이 맡겨졌다. 임원들이 칠판에 몇 줄 적고 토의하면 그것을 깨끗이 정리하여 빈칸을 채우고 정서하는 일이었다.

  처음에 그 일이 주어졌을 때만 해도 ‘내가 왜 교육도 못 받고 이런 일이나 하고 있어야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것이 내게 얼마나 큰 행운이자 기회인지 깨달았다. 언감생심 신입사원으로서는 꿈도 못 꿀 찬란한 경영 전선의 별들의 노하우와 생각을 직접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는커녕 나뭇가지 하나 만져보지도 못한 내게 경영이라는 커다란 ‘숲’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호흡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는 경험이 부족해 그분들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경영 전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회사 임원들의 고민과 숙제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비록 하찮은 필경사 역할이었지만, 훗날 일을 해나가면서 그때 들었던 그 귀동냥과 ‘받아쓰기’ 학습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학습이 내게는 삶과 비즈니스의 ‘멘토’ 역할을 해준 셈이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골로새서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였다. 삶의 현장에서 주께 하듯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커다란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런 기회와 지혜를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를 세우신 작업이었다. 주님은 제자를 부르신 후에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그들의 본이 되셨다. 평생토록 멘토가 되어주셨다.

 

 

  일을 하다보면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다. 더 이상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아이디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남들은 막 앞서가는 것 같은데 자신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거나 뒤처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온다.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멘토를 찾아야 한다. 인생에는 내가 배워야 할 상대, 내가 따라하고 싶은 역할모델(Role Model)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비단 선배나 상사일 필요는 없다. 후배든 동료든 배울 게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찾아가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그런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보고 따라 해보기라도 해야 한다.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하는 존재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해도 처음에는 자신보다 앞서 간 선배 예술가들의 작품을 읽고 보고 듣고 자랐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베껴 쓰고, 흉내 내고, 따라 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차별화된 영역을 개척해냈다. 역사상 위대한 경영자들도 처음에는 신입사원이었고, 초보 장사꾼이었다. 무슨 일이든 출발점은 제로(0)다. 이것을 체득한 사람은 이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다.

내게 있어 삶의 역할모델은 돌아가신 어머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어떤 경우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늘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에게 의지해 사는 법을 몸소 보여주셨다.

어느 날인가 그 강건하신 분이 골방에서 엉엉 울고 계셨다. 깜짝 놀라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온 가족들과 이웃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시면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계셨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나도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눈물의 기도 덕분에 숱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나마 신앙적으로 튼튼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역경의 열매]전옥표(4)‘긍정적 사고’ 가르친 어머니 말씀따라 사는 법 몸소 실천


  많은 사람들이 내게 지혜와 관련된 질문을 한다. 나는 단호히 말한다. "지혜의 원천은 주님께 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전략마케팅 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2001년 가을, 나를 비롯한 우리 마케팅팀은 새로운 드라마 한 편을 쓰기로 했다. 당시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김치냉장고, 에어컨 등 소위 '백색가전'이라 불렸던 주요 가전제품들이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삼성이 가진 브랜드파워는 경쟁사들에게 다소 밀리거나 박빙의 승부를 하는 상황이었다.

  2001년 김치냉장고의 대명사는 만도의 '딤채'였다. 전문 브랜드숍인 삼성 매장에 와서도 소비자들은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딤채'를 찾았다. 삼성에서는 '다맛'이란 김치냉장고가 나오고 있었지만 '딤채'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에어컨 역시 삼성의 '블루윈'과 LG의 '휘센'이, 세탁기는 삼성의 '파워드럼'과 LG의 '트롬'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소비자조사를 해 보고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보니 소비자들은 어느 특정 가전사가 아니라 단품별 개별 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선도적인 제품명이 해당 제품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 삼성의 개별 브랜드는 숙성 기간이 짧아 이미지 측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미 개별 브랜드로 절대강자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싸움의 공식'과 '모래판의 룰'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 나오더라도 열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심한 압박감에 매일 밤늦게까지 직원들과 토의하고 고민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브랜드 인지도와 제품에 대한 인식을 고급스럽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퇴근을 해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식욕까지 사라질 지경이었다. 그때 지혜를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무 성과도 없이 몇날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제품들은 속속 도입계획이 완료돼 갔으나, 마케팅 전략은 확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생산파트의 전략마케팅팀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부서의 직원들이 함께 밤을 새워가며 난상토론을 하고 연구를 거듭했다.

 

  그렇게 머리를 맞대서 나온 결론은 '개별 브랜드'가 맞부딪치는 현재의 시장 양상을 '통합 브랜드'로 돌파하자는 것이었다. 즉 회사 브랜드도, 제품별 개별브랜드도 아닌, 가전제품만의 통합브랜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렇게 한번 브랜드 인지도가 생성되면 제품별로 따로따로 들었던 마케팅 비용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노출도 극대화시킬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우리는 마쓰시타의 통합 브랜드인 '파나소닉'과 GE사의 통합 주방브랜드인 '캔모어' 등 여러 사례들을 수집해서 브랜드 전략구상을 1차로 보고했다.

  그러나 사내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마케팅은 잘 모르겠지만 기존에 사용하던 브랜드는 어떻게 할 것이며, 통합브랜드가 제품의 특징과 연결이 안 되어 소비자에게 혼선만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사내 마케팅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의 반응 역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역경의 열매] 전옥표 (5) 인내로 탄생한 ‘통합브랜드’ 기쁨의 단 거두듯 고공행진


  나는 고심 끝에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글로벌 마케팅 시장을 전담하고 있던 김병국 부사장을 만났다. 다행히도 그분은 "통합 브랜드 전략은 세계적인 대세"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국내 마케팅을 총괄하던 나와 해외를 총괄하던 김 부사장이 한 목소리로 주장하니 결국 우리 의견에 힘이 실렸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결재 단계에서 윤종용 부회장께서 몇 가지 조언과 함께 "꼭 성공하라"며 기꺼이 승인을 해주셨다.

  결국 전격적으로 신규 '통합 브랜드'를 도입하기로 결정, 브랜드 네이밍을 발주했고 여러 대안 가운데 우리는 독일어로 가정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진 '하우젠'을 선택했다. 지금은 이미 통합 브랜드가 브랜드 전략의 기준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대단한 모험이라 할 만한 선택이었다.

 

  마침내 2002년 9월 '하우젠' 브랜드를 단 신제품군이 출시되었고 전국적으로 광고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브랜드는 삽시간에 신제품들과 함께 인지도가 올라갔고 판매량도 급증했다. 대성공이었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2003년 초 마침내 우리는 '글로벌 마케팅 대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졸저 '이기는 습관'에서도 얘기했지만, 여러 가지 이기는 습관 중에서도 나는 이 '집요함'이라는 습관이 인생의 숨바꼭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내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리다. 그분은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말씀하셨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인내하신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정진해야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에게는 늘 어렵고 힘든 조직들이 떠맡겨지곤 했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른바 '문제조직'을 맡아 간신히 살려놓으니 또 다시 경기, 강원, 인천 지역의 유통 총괄지사장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지역은 당시 삼성전자 전국 지사 가운데 매출 달성률과 평가점수가 전국 최하위였다. 부임하자마자 늘 그랬듯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선 이 지역 중 규모가 제일 큰 한 직영점을 불시에 방문했다. 이유 없는 꼴찌는 없는 법이다. 보나마나 적당히 시간들을 때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다들 너무나 열심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좀더 면밀히 관찰해 보았다. 우선 일에 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고객응대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일에 더 쫓기는 듯 보였다. 나는 관리자를 불러 직원들이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바쁘냐고 물었다. 관리자의 대답을 듣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선 판매사원의 경우 평가 관리 항목이 무려 48가지에 이르렀다. 관리할 항목이 너무 많다 보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지 몰라 마음만 조급한 '쫓김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 무엇 하나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그때그때 상부의 지시를 최우선하여 소위 '땜방식'으로 일을 처리해내고 있었다.

  즉, 위에서는 즉흥적으로 이 일 저 일을 마구잡이로 시키는데 밑으로 가면 갈수록 일에 과부하가 걸리는 이른바 '병목현상'이 심각했다. 전략적인 고민이나 체계적인 프로세스도 없이 직원들을 닦달하는 것으로는 성과가 나올 리 만무했다. 꼬여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는 무엇일까? 바로 '킹핀(Kingpin)'을 찾아 공략해야 했다. 볼링을 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한 방에 스트라이크를 하려면 반드시 5번 핀을 쓰러뜨려야 한다. 그것이 '킹핀'이다.

  그런데 특이한 현상이 눈에 띄었다. 고가제품, 즉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의 판매 비중은 전국 평균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데 밥솥과 같은 생활가전품의 비중이 터무니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매장을 찾는 방문객 수나 구매고객 수가 매출액 대비 다른 지사보다 현저히 낮았다. "바로 이것이다. 밥솥! 밥솥이다!" 나는 무릎을 탁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즉시 참모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는 각 매장에 밥솥을 30개 이상씩 진열토록 하십시오."



 

[역경의 열매] 전옥표 (6) 밥솥 진열대서 상설 시식행사 입소문에 타제품 매출도 껑충


  "네? 팔아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밥솥을 뭐 하러 30개씩이나? 그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가 훨씬 마진이 좋은데요."

  매장에 밥솥을 30개 이상씩 진열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하자 대뜸 반론이 들어왔다.

  "일단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밥솥을 그냥 놔두는 게 아니라 꼭 밥을 지어 두도록 하십시오. 그 밥솥에 1시간, 3시간, 5시간 경과라고 표시해 두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그리고 고객들이 직접 시식을 해볼 수 있도록 하세요. 또 우리 밥솥 바닥이 절대 밥이 눋지 않는 재질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밥솥을 거꾸로 세우고 안쪽의 통이 보이도록 진열해 놓으세요. 이제부터 나는 밥솥만 챙길 겁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했다. 현장도 모르는 사람이 내려와서 '무식한' 짓을 한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지점장들은 내가 나타나면 암호처럼 "밥통 떴다"면서 자기네들끼리 놀려댔다. 그러나 밥솥 행진은 초지일관 계속됐다. 그리고 두 달 후, 매출이 전국 2위권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밥솥에 밥이 지어져 있는 것을 신기해하던 고객들이 밥맛을 보고는 밥솥을 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소문까지 냈다. "밥솥 사려거든 거기로 가세요. 밥까지 지어 놓았어요." 그렇게 손님들이 몰려들더니 처음엔 밥솥만 보러 온 손님들이 점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등을 구입해 갔다. 내방객 수가 늘어나니 구매 고객수도 늘고 단골 고객 수도 늘어날 수밖에.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한 '킹핀'이었다. 모름지기 조직의 리더라면 일을 지시하거나 문제 해결을 할 때 반드시 이 킹핀을 찾아내 공략해야 한다. 이것이 현장에서 내가 그토록 강조하는 '이기는 습관'의 하나다.

  2006년 가을, 시골에서 큰누님이 전화를 했다. 황급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작은 누님이 난소암이라는 것이었다. 배가 커다랗게 부어오르고 걷지도 잘 못한다며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원실을 잡을 수가 없으니 빨리 좀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고생만 많이 하고 딸들 시집도 아직 못 보냈는데…. 하나님은 왜 이런 큰 시련을 주시는지…." 큰누님은 끝내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누님 앞에서는 내색을 않고 마음을 담대하게 가지시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청천벽력 같은 그 소식에 나 역시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가눌 길 없었다. "주님! 어머니도 일찍 데려가시더니, 이제는 누님마저…."

  집무실에서 울면서 기도했다. "주님, 작은 누님은 아직 쉰셋밖에 안되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천국에 보내고 혼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이제 겨우 먹고 살 만한데 어찌 이리도 무심하시나요? 도와주셔야 합니다. 안 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누님을 살려 주시면 제가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통성 기도를 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을 하고 왜 주님께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여기저기를 수소문해 마침 병실이 있는 대학병원에 간신히 입원을 했다. 그러나 정밀진단 결과 병원에서는 수술도 불가하고 겨우 2∼3개월 정도밖에 기대할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설마 하면서도 희망을 가졌던 가족들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날 이후 누님의 병세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이제는 모두들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기도를 하며 주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하나님, 왜 이렇게도 시련을 많이 주십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많은 잘못 중에서도 주님, 제가 잘한 것 한 가지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기억하셔서라도 누님을 살려 주시옵소서. 히스기야왕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던 주님! 누님을 살려 주시옵소서. 누님을 살려 주시면 제가 주님께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겠습니다. 그동안 세상적이었던 것들 모두 다 내려놓겠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