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클레오파트라 水中宮 | 2004/08/12 2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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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온 고대 알렉산드리아
헤라클레이온(Herakleion)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약 20Km 동쪽에 위치하였던 도시로 기원전 약 6~7세기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알렉산드리아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매우 번성하였던 도시로, 기원전 45년에 이집트를 방문했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시민들의 생활은 매우 풍족스럽고 도시는 화려했으며, 도시 곳곳에는 이시스, 헤라클레스, 세라피스 등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온은 주로 그리스와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과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의 기록에는 종종 등장하고 있으나, 이집트와는 교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집트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헤라클레이온이 실존하지는 않는 전설속의 도시로만 여겼었지요.
그러나 2000년 6월, 프랑스의 고고학자 고디오가 이끄는 국제 탐사팀이 아브키르만에서 전설속의 고대 도시인 헤라클레이온과 메노티스의 발견을 공표함으로써 역사속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탐사팀은 이시스 여신상과 파라오의 머리, 스핑크스의 머리 등의 유물들을 건져 올렸고, 바다속의 많은 건물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도시가 헤라클레이온으로 불리운 까닭은 아마도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모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도시에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매우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면서 점차 그 영화가 몰락하여, 결국은 지진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마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바닷속에 남아있는 건물들의 기둥이 모두 한쪽으로 쓰러져 있는 모습 등에 의해 지진으로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고대의 알렉산드리아는 나일강의 불규칙한 범람으로 하여 일부가 바다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는데, 그 가라앉은 도시속에 프톨레마이오스 궁전이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대미를 장식한 여왕이었지요. 그녀는 로마의 권력 앞에서 왕조를 지키기 위해 케사르 및 안토니우스와 정략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끝내 로마와의 해전에서 패하였고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왕조는 그녀와 케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케사리온)를 끝으로 기원전 30년 막을 내리고 말지요.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던 알렉산드리아는 서기 365년의 대지진으로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발굴해 낸 것이, 앞에 기술한 고디오와 그의 탐사팀이었습니다. 고디오는 알랙산드리아 근처의 앞바다들을 체계적으로 탐사하였는데, 이로써 고대 알렉산드리아와 헤라클레이온, 메노티스 등을 계속 발견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나라의 많은 탐사대들이 바다속의 유적들을 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육지와는 다른 여건으로 하여, 헤라클레이온의 완전한 발굴은 50년, 알렉산드리아는 10년의 세월이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헤라클레이온] 현실로 나타난 전설 바다 속 고대도시
프랑스 수중고고학자 프랑크 고디오가 발굴한 거대한 해저 유적의 모습들
“실제 나이는 1200살이나 되겠지만, 내 눈에는 17살밖에 안 된 앳된 소녀로만 보입니다”
지난 2000년 6월 3일, 4.5m 높이의 검은 대리석제 이시스 여신상을 바다 밑에서 끌어올린 프랑스의 수중 고고학자 프랑크 고디오 (Franck Goddio)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인양되는 검은 화강암제 이시스 여신상.
그날 그가 공개한 이시스 여신상은 비록 머리와 팔 일부가 떨어져 나가긴 했으나, 고대 이집트인들이 풍요의 여신으로 떠받들었음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몸매의 선은 부드러웠고 볼륨은 풍부했다. 프랑스가 혁명의 성공과 공화국 탄생을 기념하여 1848년 이래 10년마다 선발해 오고 있는 미인 ‘마리안느’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가발라 알리 가발라 이집트 문화재청 장관은 “우리는 그동안 무덤과 신전, 모스크 등을 수없이 발굴해 봤지만, 이번처럼 도시 전체를 온전히 발굴한 것은 처음”이라며 ‘해저 고고학사에 가장 흥미로운 발견’이라고 자평했다.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인근의 작은 어촌 아부 키르(Abu Qir) 해안에서 6km 정도 떨어진 수중에서, 이집트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지난 2년여 발굴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는 프랑스 팀은, 이날 해저 6~8m 지점에서 저택과 정원, 항만시설 그리고 거대한 조각상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Herakleion)과 메노우티프(Menouthif)를 찾아냄으로써, 이제까지 오직 전설과 기록상에서만 존재했던 이들 도시의 실재를 증명해냈다. 이는 1921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King's Valley)에서 거둔 투탄카맨 왕의 황금마스크의 발굴에 필적하는 성과인 것이다.
헤라클레이온은 이집트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인들의 여행기에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존재를 의심한 사람들이 많았다. 기원전 450년쯤 이집트를 몸소 여행한 유명한 ‘역사’를 쓴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시민들의 생활은 매우 풍족스럽고 도시는 화려했으며, 도시 곳곳에는 이시스, 헤라클레스, 세라피스(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으뜸신으로 숭앙됐던 신으로 오시리스와 아피스, 제우스, 디오니소스의 합성품이다) 등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는 헤라클레이온은,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 파라오 지배 말기 아주 혼미했던 시대에 건설되어, 기원전 4세기 말 알렉산드리아가 등장할 때까지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과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린 반면, 이집트 쪽과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비잔틴시대의 동전과 석관 등이 함께 발굴된 것으로 볼 때, 헤라클레이온은 적어도 9세기 말까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때 갑작스런 지진으로 파괴된 후 수몰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이 정도의 역사와 규모를 가진 도시이기 때문에, 발굴팀이 해저 도시 유적을 완전히 발굴하는 데에는 앞으로 50년은 족히 걸릴 것으로 내다봤고, 이집트 문화재청은 발굴품 가운데서 극히 일부만 박물관으로 옮기고, 나머지 대부분은 해저에 그대로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해저 도시 방문’이라는 새로운 관광의 세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고고학은 ‘땅을 파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바다 밑바닥이나 그 아래를 파헤치는’ 수중(marine) 또는 해저(underwater)고고학으로까지 발전했다. 지하고고학에서 최고, 최대의 성과를 내놓았던 이집트는 최첨단 수중고고학 분야에서도 여전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어, 이집트는 지상과 지하, 해저 할 것 없이 보물로 가득 찬 땅임을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수중고고학 분야의 보고는 나일강의 입구이자 지중해로 나가는 관문인 알렉산드리아이며, 그 주인공은 이번에 헤라클레이온의 실재를 증명한 프랑크 고디오다. 그러나 그 시작은 아주 우연히 이루어졌다. 1960년대 중반, 한 아마추어 다이버가 순백색의 아름다운 카이트바이 성채 앞 바다 속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이시스 신상을 건져냈던 것이다.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파로스등대의 꼭대기에 장식으로 설치돼 있던 것이었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나일강 하구 쪽으로 큰 파도가 늘 일고 있는 바다에 섬이 하나 있소. 파로스라고 불리는 섬으로 배를 대기 알맞은 포구가 있지요”라고 했던 이곳에, 항구를 열면서 도시의 건설자였던 알렉산더대왕이 부근에서 배가 좌초되는 사고가 잦자, 항로의 표시이자 위험을 알린다는 뜻에서 높이가 무려 135m나 되는 등대를 세운 것이었다. 14세기에 있은 대지진으로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모두 잊고 있었는데, 그 흔적이 드러나자 이집트 정부는 흥분했고, 유네스코와 대영박물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등에서는 서둘러 해저탐사반을 파견했다. 다량의 유물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1968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작업은 중지되고 말았다.
고디오가 이집트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은 시나이반도의 반환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발굴작업이 시작된 90년대부터였다. 그는 92년 자석탐지법을 이용하여 해저 유적지도를 작성했고, 그것이 토대가 되어 불완전하나마 파로스 등대는 물론 안티로도스섬 궁전, 로키아스 곶, 이시스 대신전, 안토니우스의 피난지였던 티모나움 등 수많은 전설 속의 유적들이 바다 속 어디 쯤에 있는지가 밝혀졌다. 수중고고학의 세계는 그렇게 서서히 열렸는데, 그는 그때 “그리스, 로마의 역사가들이 서술한 모든 것이 바다 밑에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하여 고대도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낼 것이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나폴레옹 원정군의 주력함 ‘오리엔트호’의 선체 발굴
그후 그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강태공이 즐겨 찾고 맛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는 아부 키르 앞 바다에서 나폴레옹 원정군의 주력함이었던 ‘오리엔트호’의 선체를 발굴했다. 포만 120문이나 되는 거함 오리엔트는 1798년 8월 1일, 이 아부 키르 해안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만나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여 가라앉고 말았는데, 바로 그 배를 찾아낸 것이다. 선체에는 금화와 은화, 동전 등이 있었고, 역시 군함답게 항해 장비와 총, 칼 등의 무기류와 개인소지품 등이 발견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동쪽으로 60km 쯤 떨어진 라시드란 곳에서 1799년 7월, 한참 영국군에 쫓기고 있던 프랑스 원정대가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저 유명한 ‘로제타스톤’(지금은 대영박물관이 소장)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해독작업을 해낸 사람도 프랑스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스와 샹폴레옹이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이 작업을 끝내기가 무섭게 42살이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해독해내는 데 기여한 공로는 이외에도 워낙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나폴레옹 원정대의 일원으로 이집트 땅을 밟은 175명의 전문학자들이 그곳에서의 자신의 체험과 관찰 보고, 스케치 등을 지리, 건축, 비문, 생활상, 언어, 풍습 등으로 구분하여 24권으로 된 방대한 양의 ‘이집트지(정식 명칭은 이집트지0000000- 프랑스군의 원정 중 이집트에서의 관찰 및 조사보고서)’를 발간한 것이다. 그 책은 1809년부터 14년간에 걸쳐 차례로 나왔는데 유럽인들에게 이집트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를 계기로 파리는 때아닌 이집트 패션의 경연장이 되어, 장차 세계적인 유행의 도시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닦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지금 이집트박물관 앞 마당에서 동상이 되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방문객들을 맞아주는 오귀스트 마리에트. 외국인이었지만 이집트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그는, 심지어는 1867년 만국박람회 당시 이집트전시회를 참관했던 프랑스 왕비가 “전시품 중 몇점을 프랑스에 놓고 갈 수 없느냐”하고 물었을 때, 단호하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고 했을 정도로 강직했다. 그는 그 일 이후 다시는 조국 프랑스를 찾지 않았고 이집트박물관의 건립에만 매달렸다.
이제 그들의 먼 후배인 수중고고학자 프랑크 고디오가 그 바통을 건네받은 것 같다. 이번에 큰일을 저지른 그가 앞으로 또 무슨 일을 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권삼윤 문명비평가)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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