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靈論

10.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차영배교수

영국신사77 2007. 8. 17. 22:18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  

                                                                성령세례

    고전 12:13,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방면으로 행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즉 성령의 세례를 말합니다.
      둘째, 우리가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 즉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방면, 즉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여 행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로부터 흘러나서 생수의 강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는 성령의 충만과는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세례>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 '담그다' 또는 '적시다'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즉 물 세례가 우리의 온 몸이 물속에 들어가 잠긴(덮인) 경우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어서 성령께서 나를 덮는 경우와 같습니다.

  성령세례는 마치 우리가 옷을 입는 것이나 버스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버스를 타면 버스 안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면 그저 버스 안에 있게 됩니다. 그 상태에 있기만 하면 버스의 힘이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줍니다.

 

  성령세례는 또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원하는 곳까지 올려 줍니다. 또한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령을 줍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8)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행 11:15-16)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눅 24:49)


  사도행전에는,

"성령과 권능으로 기름 부음을 받다",

"성령이 임하시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다",

 "성령을 (물붓듯) 부으시다"

등으로,

누가복음에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다"

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는 모두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1. 성령세례의 목적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령세례의 목적은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한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생활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되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의 삶이 수동적· 이기적이 되어서, 오히려 은혜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는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증인된 삶을 살 때, 비로소 더욱 큰 은혜가 있게 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목적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서, 또는 성령의 세례의 목적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 은혜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활기를 잃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영적인 삶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과정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는 목적을 명확하게 알고 간절히 구하고,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면 적극적으로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후에, 권능을 입고 복음 전파의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와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눅 4:14-19)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처럼 누구든지 복음 전파의 삶을 살고자 성령세례를 구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뜻을 따라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공생애의 삶이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든, 가르치든, 가정에 있든 관계없이,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2. 성령세례의 결과
  성령세례의 결과로 큰 변화가 따라옵니다.

누가복음 24:49에서,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으로 표현하듯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20에,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는 말씀에서,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의 결과로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고 하심을 보았습니다.

  즉 이는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것으로, 성령의 세례를 가리키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 다이나믹한 삶, 힘있는 삶, 변화를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덮으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24:49의 ,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의 말씀이 응답된 삶입니다.

  마치 우리가 버스 안에 들어가면 버스가 힘이 있어 우리를 싣고 가듯이, 또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면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올려 주듯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같은 능력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진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은사'(선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고전 12:7-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멸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사도 베드로의 경우
  사도 베드로의 삶을 예로 보면,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기 이전과 이후의 그의 삶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모두가 주를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그는 끝까지 주를 따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순절 이후에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앉아 있는 산헤드린에서도 담대하게 주를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이를 영광으로 여기며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능력 있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성품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서, 이전에는 경쟁심과 비교의식을 가졌었으나, 이후에는 겸손과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성령세례 받기 전@@
-제자의 삶(마 4:18)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함
-거듭난 삶(마 16:16-17)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
-열정적인 삶(마 26:31-35)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회개하는 삶(마 26:69-75
세 번 부인하고 나가서 심히 통곡함
************************************
---> 경쟁의식, 서로 높아지려함, 두려움, 실패와 좌절, 열정은 있으나 

       연약함, 사람의 일을 생각함(마 16:23), 중요한 기도 시간에 잠을 잠(마 26:36-45)

@@오순절에 성령이 임함(행2:1-4)@@

@@성령세례 받은 후@@
-성령의 충만함, 방언 말함(행 2:4)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믿게 됨
  앉은뱅이가 걷게 됨(행 3:6-10)
  그 결과 남자만 오천 명이 믿게 됨
-공회 앞에서 담대히 증거함(행 4:8-12)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행 5:6-10)
-애니아의 중풍병을 낫게 함(행 9:33-34)
-죽은 다비다를 살림(행 9:40)
***********************************
---> 베드로의 삶에 전적인 변화가 일어남
     : 이적과 기사, 담대함과 큰 확신, 겸손과 자기 희생,

       주를 끝까지 따름, 승리의 삶(행 2,3,4,5,10,12장)

  이같은 변화는 오순절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성령세례는 이처럼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성령세례의 기록은,

       ① 오순절에 120명 가량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 임하심(행 2:1-4),

       ② 빌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사마리아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성령받게 함(행 8:14-17),

       ③ 회개하는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어 성령으로 충만케 함(행 9:17-20),

       ④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로의 집에 성령이 임함(행 10:44-46),

       ⑤ 사도 바울을 통해 에베소에 성령이 임함(행 19:1-7) 등 다섯 군데에 걸쳐 등장합니다.

['행 19:1 아볼로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과 19장의 에베소에서의 성령세례 사이에는 30년이란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성령의 역사가 단지 다섯 번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있었을 테지만, 성령께서 대표적인 몇 가지 사건만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후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1)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최초의 사건이므로, 안수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듣는 사람들 가운데 임할 때 아무도 안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후에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안수하는 문제]

[행 10:1 가이사랴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안수를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를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7에, "두 사도가 성령을 받기 위해 안수기도를 하였다"고 하지 않고,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강력하고도 단호한 표현입니다. 즉 누군가가 성령의 세례를 받는 장면을 객관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기록되었습니다.

 

  더구나 마술쟁이였던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행9:18-19)라고 한 것을 보아,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다섯 번 언급된 성령세례의 장면을 종합해 볼 때,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방언의 은사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눈의 치유가 일어난 것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방언 기도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방언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4:18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한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일반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귀한 선물을 주시는 것을 사모하여 구하는 것은 지극히 신앙적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령세례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홍성건> 6장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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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성령세례 및 성령의 충만
게재일 : 1999-12-22    분류 : 교육(목회)    기자 : 차영배

  성령세례가 중생과 같은가, 아니면 성령의 첫충만과 같은가 라는 문제는, 평신도들은 물론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심하다. 그 이유는 성령세례와 중생에 관한 확실한 성경적인 증거를 이해하지 못한 데 있고, 심지어 성령충만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러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분들은, 그 체험에만 치중하여 본질적인 의미와 목적을 잊어버리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주로 성령세례, 곧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 중생

  중생은 먼저 복음의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감화로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거듭남으로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중생시점의 불확실성이라는 교리가 정립된다.

 

  이와 동시에, 또는 약간의 시차를 두면서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 만물보다 거짓된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신자의 존재 전체에 이르기까지 거듭나는 획기적인 역사가 일어나, 생명에 이르는 큰 회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제2중생(루터),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칼빈), 넓은 의미의 중생(바빙크) 등으로 불리워지는데, 첫중생과는 달리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님재림하실 때,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거나, 홀연히 우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입을 때 중생의 절정에 이른다.

 

이와 같이 계시의 역사적 진전성을 고려에 넣어야만, 중생교리도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바로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첫 중생을 중시해야만 교회가 건전하게 자라난다. 초신자들에게 조용히 복음의 비밀을 거듭하여 다양하게 가르칠 때,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거듭나, 주 예수를 유일한 구주로 알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복음을 가르치거나 전파하지 않고, 성령의 감화만으로는 거듭나지 않는다.

                                                 2. 성령세례 또는 성령으로의 세례

  성령세례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고 삼위 하나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로마가톨릭처럼 성례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충족조건이란 인간에게는 사실상 없다. 값없이 성령을 마신다는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사 55:1).

 

["사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선물로 주시는 성령이 너무나 귀중한 보배이므로, 이에 견줄만한 공로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성령 또는 성령세례를 받는다(갈3:1-5).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오순절신학은 방언을 성령받은 증거로 주장했기 때문에,

  이것이 강력한 힘이 되긴 했으나,

  성경이 가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

  다 사도가 아니고 다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다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밖에 「아바 아버지」라고 크게 부르는 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심과, 동시에 확신에 가득찬 우리 자신의 자증이므로 중요하다. 큰 회개, 생명에 이르는 회개, 독자를 잃은 부모가 애통하듯 부르짖는 탄식도 중요한 증거다.

 

  마지막으로 성령충만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 마음이 성령세례로 청결해지면 즉각적으로 성령의 충만이 이루어진다. 모든 성령의 충만이 다 성령세례는 아니나,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성령세례는 율법의 완성에 이르게 한다. 율법은 몽학선생이기는 하나(갈 3:24), 그 궁극적인 목적은 새 계명을 이루는 데 있다. 이로써 복음의 절대성이 확보되면서(갈 1:8), 그 목적인 율법의 완성 곧 성화에 이르게 된다.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물붓듯이 부어지므로(롬 5:5),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된다. 로마가톨릭처럼 「주입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법정적인 칭의에 이른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주입된다. 그리고, 영화와 성화가 손을 잡으면서 고난이 따른다. 성화와 영화를 분리시키는 신학은,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획기적인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회개, 곧 성령세례를 무시한 성화는 불가불 세미펠라기안주의의 신인협동주의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고, 율법을 무시하고 종교적인 현상에만 치우치게 되면 자유분망한 신비주의로 전락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치우침을 막으시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다. 주님의 크신 은혜로 영광을 얻었으면, 또한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 8:17).

                                                                  3. 성령의 충만
  성령의 충만과 윤리적인 선행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성령충만으로 선행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은 예외없이 진(眞)은 아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무엇을 충만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을 의미한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곧 성령으로 충만하게 됨을 의미한다(요 7:38-39).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나 「성령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 곧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문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는데,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은혜만 있으면 족하다.

  갓난아기는 물을 어떻게 마시는가를 염려하지 않는다.



                                                                                                                 차영배(부산신학교 학장)

                                                                      출처:기독신문(
http://www.kidok.co.kr/print_article/default.asp?id=6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