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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피 / 토마스 목사

영국신사77 2007. 7. 17. 23:33
이중표목사
  순교의 피 [98.04.05]
  

< 98. 4. 5 칼럼 >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연코 복음의 전파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었기에 비로소 이 민족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처음으로 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과 신앙인들은 이 민족의 위대한 은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이 귀한 복음을 전하되 피와 눈물로 그리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저들이 흘린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한 분이 있으니, 바로 토마스 목사입니다. 이 분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분입니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대동강변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극에 달했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8천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순교당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났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무척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이끌려 사지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평양 감영 군사들이 셔먼 호를 공격하자 셔먼 호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토마스 목사는 뱃 전에 올라가 입으로 목이 터져라 "예수, 예수"를 외칩니다. 그는 '예수'를 외치는 한편으로는 성경과 전도지들을 대동강변으로 마구 던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 자신도 한 권의 성경책을 껴안고 물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포졸들에게 붙잡혀 대동강변에서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참수를 당하는 순간에도 토마스 목사는 자신의 품속에 있던 성경책을 꺼내 자신을 죽이려던 포졸에게 주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는 결국 조선 땅을 변변히 밟아 보지도 못한 채, 대동강변에 피를 뿌리며 순교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를 죽였던 박춘권이라는 이 포졸은 수십 년 후에 부흥회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바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최치량이라는 소년은 대동강변에 갔다가 토마스가 던졌던 성경을 발견하고는 이 성경을 자기 집으로 가져와 벽지로 바릅니다. 후에 이 집은 여관이 되었는데 20년 후 마펫이라는 선교사가 평양에 전도하러 와서 이 집에 머물다가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최치량은 한국 교회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이 집은 평양 시내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됩니다. 그외에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 목사가 던졌던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마침내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흘렀던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찬사를 받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씨"라고 말하며, 본훼퍼와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복음을 위해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는 자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합니다. 순교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신앙 고백이며, 그리스도인의 최대 영광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런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는 단지 핍박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자기를 죽이는 자도 역시 순교자입니다. 매일 자기를 죽이는 것은 보다 힘든 길입니다. 단번에 죽는 일은 오히려 쉽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 안일한 신앙 생활에 빠져 있어 편하게만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경건의 모양만 흉내내려 합니다. 이는 순교의 피를 흘린 선배들의 신앙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순교자적 각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욕심과 자기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로 순교이며, 별세 신앙입니다. 자기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바로 순교의 영광이며, 별세의 은혜입니다.
2001-05-04 10:3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