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록펠러 [Rockefeller, John Davison]

영국신사77 2007. 6. 20. 13:00

                  록펠러 [Rockefeller, John Davison, 1839.7.8~1937.5.23]

 

 

요약

미국의 실업가·자선가.
국적 미국
활동분야 경제, 자선사업
출생지 미국 뉴욕주() 리치퍼드
본문

 뉴욕주() 리치퍼드 출생.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를 설립하고, 1863년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설립한 것이 번창,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의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어 오하이오 스탠더드 석유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에 록펠러가 사장으로 취임, 타회사의 흡수 ·운임할려계약() 등의 방법으로 급속히 사업을 확대하여 나갔다.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조직하였다. 1899년 오하이오의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점금지법(반트러스트법) 위반의 판결을 받은 이 회사는, 지주회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뉴저지주()에 지주회사 뉴저지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하여, 실질적으로 석유업계의 지배를 계속하여, 미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유전과 정유소를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반()트러스트법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해체되었다. 그 후 록펠러는 재계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하였다. 1890~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그 후에도 3억 5,0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록펠러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였다.

 

 

 


이미지 더보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출생 : 1839년 7월 8일
사망 : 1937년 5월 23일
출생지 : 미국
직업 : 해외기업인해외 역사인물
소속 :  스탠더드오일러스트(미국) 회장, 전 록펠러재단 이사장
기본정보
본명 John Davison Rockefeller
가족사항 아내 , 1남 4녀
경력
경력기간 경력내역
1859   ~   상사회사  설립
1863   ~   클리블랜드  정유소 설립
1870   ~   오하이오스탠더드  석유회사 설립
1882   ~   스탠더드 오일러스트 조직
1890   ~   1892 시카고대학 설립 기부
1899   ~   뉴저지주 지주회사 설립
1911   ~   반 트러스트법 위반, 해산 명령
1912   ~   자선사업 몰두


 

                           록   펠   러 센 터 (Rockefeller Center Area)

 

                                                                                                                       anma99  (2003-10-10 05:13)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광대한 오랴과 비즈니스의 복합 빌딩 군으로 '도시 중의 도시'라 부른다. 동서는 5번가~아메리카 가, 남북은 48~52번가 일대에 걸친 지역에 20여 개의 빌딩이 즐비하며, 수많은 기업과 외국 영사관 및 상점이 들어서 있다. 이들 빌딩에 출입하는 인원은 하루 25~3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컬럼비아 대학의 농장이었으나, 1928년 J.D Rockefeller가 2069년까지 빌린 것이다. 당시 록펠러는 여기에 오페라 극장을 지으려 했으나 대 공황으로 취소하고, 그대신 일대 상업도시를 세우리로 결심했다.

 

 RCA빌딩을 비롯하여 센터의 핵심을 이루는 14개의 건물은 1931년부터 194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700대의 차를 수용할 수 있는 이스턴 항공 빌딩 안의 차고, 하루 700~1000대의 트럭 화물을 싣고 내릴 수 있는 지하 플랫폼 등, 시대에 앞선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설계에 반영되어 있다.

 

 설계는 유엔 본부와 링컨 센터의 설계에도 참여한 월리스 해리슨이 담당했다.

  위치 5th Ave 와 7th Ave 사이, 48th St. 와 51 St 사이의 대규모 빌딩.











  내용출처 : [기타] http://ny4u.hihome.com/Rockefeller.html

 

 

 

 

 

                                 [만물상] 록펠러 재단


 
  1913년 미국 콜로라도주 탄광에서 광원 9000여명이 형편없는 작업환경을 견디다 못해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가 고용한 무장 구사대와 광원들이 충돌하면서, 파업은 1년 넘게 끌었다. 이듬해 민병대가 광원들이 머물던 천막촌을 기습해 불을 지르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여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50여명이 죽었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참혹한 ‘러드로의 학살’이다. 이 탄광의 소유주가 존 데이비슨 록펠러였다.
 

  ▶1870년대엔 ‘클리블랜드의 대학살’이 있었다.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세워 석유산업을 한 손에 움켜쥐는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거꾸러뜨린 일을 가리킨다. 총격전까지 벌어지진 않았지만, 폭력사태로 사망자도 여럿 나왔다. 그때부터 록펠러는 ‘악의 화신’으로 꼽혔다. 침대 곁에 권총을 둬야 했을 만큼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

 

  ▶그 록펠러가 오늘 ‘위대한 자선가’로 불리는 것은 프레드릭 게이츠라는 목사를 만난 덕분이다. 1891년 시카고대 후원모임에서 만난 이후, 30년 넘게 게이츠는 록펠러의 자선사업 책임자이자 가장 충실한 가신(家臣)이었다.

 

 게이츠는 그저 돈을 나눠주는 즉흥적 방식에서 벗어나,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관을 세우자고 록펠러를 설득했다. “회장님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습니다. 불어나는 것보다 더 빨리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회장님은 물론, 자녀 모두가 그 눈덩이에 깔려 죽을 것입니다.”

 

  ▶게이츠의 설득으로 탄생한 것이 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이다. 처음 미국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의회로부터 재단 설립 인가를 받는 데만 3년을 씨름해야 했다. 곡절 끝에 록펠러의 자선기관들은 교육·의료·과학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록펠러는 악명(惡名)을 거의 지웠을 뿐 아니라, 기업인 사회 공헌의 세계적 모델로 남아 있다....

 

 

 
 
                                                                                                                     김기천 논설위원 kckim@chosun.com
                                                                                                                                              입력 : 2006.02.08 18:44 20'


                  

 

 

 

 

 

'偉人*人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부자 록펠러  (0) 2007.06.20
록펠러의 삶  (0) 2007.06.20
조지 마셜 [George Catlett Marshall]  (0) 2007.06.19
그룬트비히(N. Grundtvig)  (0) 2007.06.16
요세푸스 [Josephus, Flavius]  (0) 2007.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