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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1장의 북방왕(시리아)과 남방왕(이집트)의 역사적 고찰

영국신사77 2007. 5. 27. 22:29
다니엘 11장의 북방왕(시리아)과 남방왕(이집트)의 역사적 고찰
 
 
 

                          [1] 페르시아

 

   다니엘 11장 2절의 계시가 주어진 당시에는 페르시아의 국부(國父) 고레스 시대였으므로, 그 후에 페르시아에서 일어날 "세 왕과 "넷째 왕"은 역사적으로 아래와 같다.

 

 

첫째 왕 :

 

 

 

캄비세스 2세(재위 BC 529~522, 7년간) - 고레스의 아들로서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 유능한 동생 스메르디스를 몰래 죽여 후환을 없애려 했으나, 자신이 오히려 귀국 길에 변사(變死)했다.

 

둘째 왕 :

 

 

 

 

가우마타[가짜 스메르디스]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에 나간 동안, 자신을 캄비세스의 동생인 스메르디스라고 사칭(詐稱)한 바르디야(Bardiya)가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그도 2개월만에 귀족들에게 암살당하고, 다리오가 왕위에 올랐다. 

 

셋째 왕 :

 

 

 

다리우스 1세(재위 BC 522~486, 36년간) -가짜 스메르디스(Smerdis)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재위 2년에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중건령을 내렸다.

넷째:

 

 

 

 

 

크세르크세스 1세(BC 486~465, 21년간)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에스더의 남편인데, 성경에는 아하수에로 왕으로 나온다. 4년간의 전쟁 준비를 끝내고 그리스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기세로 대원정(大遠征)에 나섰으나 패전하였다. 그 후 몇 명의 왕이 더 일어나 그리스 원정을 계속했으나 오히려 파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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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니엘서 11장에 등장하는 그리스 남북왕조의 왕들

                                              (연대는 모두 재위 기간의 BC임)



 

 

 

북방 왕 시리아의 셀루쿠스 왕조

남방 왕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

(11:5)

(11:6)

(11:7~9)

(11:10)

(11:10~14)

 

 

 

 

 

 

 

(11:15)

셀루쿠스 1세

( 312~281년, 31년간)

안티오쿠스 1세

(280~262, 18년간)

안티오쿠스 2세

( 261~246년, 15년간)

셀루쿠스 2세

(246~225년, 21년간)

셀루쿠스 3세

(225~223년, 2년간)

안티오쿠스 3세

(223~187년, 36년간)

셀루쿠스 4세

(187~175, 12년간) 

안티오쿠스 4세

(175~164년, 11년간)

(11:5)

(11:6)

(11:7~9)

(11:10~13)

(11:14~15)

 

 

(11:17)

프톨레미 1세

(305~282년, 23년간)

프톨레미 2세

(285~246년, 39년간)

프톨레미 3세

(246~221년, 25년간)

프톨레미 4세

(221~203년,18년간)

프톨레미 5세

(203~181년, 22년간)

 

 

 

클레오파트라 6세

(51~30년, 21년간)

 

 

 

 


 

                            [2]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王朝) [셀레우코스 1~4세, 안티오쿠스 1~4세]-

 

 

 

         셀레우코스 왕국[Seleucid Kingdom, BC 312~64]

 

 

 

  가장 강성했을 때는 유럽에서 트라키아(트라케) 지방부터 인도 변경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제국(BC 312~64, 248년간 존속).
 

   이 왕국의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이 지역을 분리시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해체되어가는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들이 지리한 권력투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했던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BC 312년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내준 병력을 사용하여, 가자에서 디미트리오스와 싸워서 이겼다. 곧이어 같은 해에,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이곳에 셀레우코스 왕국 건설했다.
 
    BC 305년부터 왕국의 힘을 키운 다음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서쪽에서는 BC 301년 잇수스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BC 281년에는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를 병합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BC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BC 246~225),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 대왕(BC 223~187)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때에는 철저한 행정개혁이 특징이었다. 그는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으로 늘 긴장되어 있는 2중권력체제를 제거하고, 이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체제에서 따온 여러 요소들을 근대화시켰다. 즉, 문관과 무관의 권력을 통합한 각지의 지방관(Stratgoi)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서쪽은 사르디스가, 동쪽은 셀레우키아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아나톨리아와 그 휘하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함으로써, 중동지역 전역에 막대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헬레스폰토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를 지나는 전략 요충지 타우루스의 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의 상업과 무역도 지배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시리아 정착지, 그중에서도 특히 안티오크[안디옥]는 왕국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중동의 토착문화보다 그리스 풍습과 관습들이 우세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전(全) 역사를 통해 보면, 지배층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출신들이었고, 도시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스 문화의 주도권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기간(BC 175~163)중에 절정에 달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 문화 증진책이 도를 넘어,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에게 바치는 조각상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BC 165년에 시작된 마카베인들의 봉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4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마카베인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국의 유대교도들에 대한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창건함으로써 끝이 났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국은 BC 3세기경이 되면서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BC 190년 처음으로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뒤로, 셀레우코스 왕국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미 셀레우코스의 명에를 벗어던졌으며, 카파도키아와 아탈리드 페르가몬이 독립했고, 다른 지역들도 켈트인들과 폰투스, 비트니아에게 빼앗겼다.
 
  또 BC 3세기 중반경에는 파르티아·박트리아·소그디아나가 독립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 시리아(레바논)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BC 200) 일시적이나마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어느 정도 확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죽고(BC 164), 시리아의 콤마게네와 팔레스타인의 유대 지역을 잃은 후부터, 쇠퇴는 가속화됐다.
 
   BC 141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편지역 전부를 잃었고, 디미트리오스 2세(BC 141)와 안티오코스 7세(BC 130)의 노력도, 이 왕국의 급속한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64년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을 때는, 이전의 강력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와 실리시아 동부지방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보잘것없는 지배력만 가지고 있었다.

 

 

 

 

                   셀레우코스왕조 (BC358-BC163)

 

 


  이 왕조는 귀족 안티오코스가 세운 왕국[셀레우코스 1세의 아버지가 안타오코스]이라, 안티오코스(혹은 안티고노스)왕조라고 한다.


  셀레우코스1세 (BC358-280, 재위 BC 312~280, 32년간)는 시리아제국의 셀레우코스왕조를 건설한 왕이다.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바빌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에우메네스와 싸워 패하여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회복하여, 영토를 이란과 마케도니아와그리고 인도북서부까지 다스리고, 찬드라굽타와도 관계를 맺었다.

  BC312년부터 왕조를 열고 왕호를 사용하였다.

  안티오코스1세(BC280-262)는 광대한 영토에 자기 이름의 도시를 많이 건설하여, 지배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때에 만든 도시 중에 *시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이 성경에 등장한다.

  또 시리아의 수도겸 맹주로 있었던 *다마스쿠스(다메섹)도 설명하려고 한다.

  지중해연안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빼앗아 돌레마이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들린 곳이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에게 패하여 영토를 잃었다.
안티오코스2세(BC261-247)는 부왕이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 라오디케(라오디게아)로 왕비의 이름으로 건설한 도시가 7교회의 하나이다.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Ⅰ Nicator,재위 BC 312~280, 32년간)

 
*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358/354 마케도니아 에우로포스~281. 8/9 트라키아 리시마키아 근처.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BC 323)에 벌어진 내분 속에서 그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고, 다시 시리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권력을 잡기까지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알레산드로스 수하의 장교로서 페르시아 제국 정복전에 참전했고, BC 326년에는 히다스페스 강변에서 마케도니아 보병대를 이끌고 인도의 포루스 왕과 싸웠다.

 

   BC 324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동화시키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때 셀레우코스도 박트리아의 왕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하지 않은 마케도니아의 귀족은 셀레우코스뿐이었다.

 

   BC 323년에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는 헤타이로이(hetairoi : 동료들) 기병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섭정왕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총독(satrap) 프톨레마이오스를 축출하려고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집트에 가서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가담했다.

 

   BC 321년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애꾸왕)가 페르디카스의 후원자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에 대한 정벌전의 지휘를 맡았다.

 

   BC 317년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를 도왔지만, BC 316년 에우메네스가 처형된 뒤, 안티고노스는 그에게 영지의 수입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갔다.

 

   BC 316~312년에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편의 제공으로 이집트에 머물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리시마코스(트라키아의 왕),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를 요구한 사람)가 동맹을 맺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동맹전쟁(BC 315~311)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이 되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군대를 지휘하여, 시리아 남부 가자 전투(BC 312)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다시 주의를 돌려, BC 312년 8월에 작은 병력으로 바빌론을 다시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 력으로 BC 312년 디오스(Dios) 1일(10. 7), 바빌로니아 력으로는 BC 311년 니산(Nisan) 1일(4. 3)로 기록되어 있다.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의 동쪽은 장군인 니카노르에게, 서쪽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공격하게 했지만, 결국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했다.

 

  BC 311년 안티고노스는 다른 적들과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셀레우코스는 여기서 제외시켰다.

 

                             왕조의 기반 강화

 

   그뒤 몇 년 간 셀레우코스의 치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미 획득한 지위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BC 305년 다른 '후계자'(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디아도코이'라고도 함)들처럼, 그도 '왕'(바실레우스)이라 자칭했다. 그는 이란의 동부지역(위쪽 총독령들)을 지나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굽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고, 영토를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BC 303 년, 인도에서의 전쟁을 끝낸 것은, 서부지역에서 정세가 변화한 탓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 부자에 대항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을 때, 셀레우코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BC 302년 겨울에 소아시아로 되돌아가,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다(BC 301).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연합국들간에 분할되었는데, 셀레우코스는 시리아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리아 남부지방인 코일레 시리아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것이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벌인 시리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셀레우코스는 그 지방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의 수도를 티그리스 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에서 오론테스 강 유역의 안티오크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그쳤다(BC 301~300).

 

   프톨레마이오스는 리시마코스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딸 아르시노에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에게 청혼하여, BC 298년 시리아의 로수스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가 실리시아·티레·시돈 등의 영토를 요구하자, 데메트리오스와 맺은 우호관계에도 금이 갔다.

 

   4년후인 BC 294년, 셀레우코스의 궁정에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아파마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가 새어머니 스트라토니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건강까지 해쳤다. 셀레우코스는 아들에게 스트라토니케를 주고, 그를 군의 총사령관직에 임명하여 위쪽 총독령을 맡기고, 공동섭정의 지위도 주었다.

 

   BC 285년 셀레우코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사로잡음으로써, 아시아를 정복하려 했던 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디미트리오스는 아파메아에 억류되었다가 ,BC 283년 그곳에서 죽었다. 이어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가(家)의 불화에 관계하여, 그의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암살했다.

 

   BC 281년 2월 리시마코스는 코루페디움에서 셀레우코스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왕국을 차지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목표의 실현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쳐들어가기 위해 유럽을 횡단했다.

 

  그러나 BC 281년 8월말 또는 9월초에, 셀레우코스는 이집트 왕위의 '후계자'로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유골을 셀레우키아에 묻고, 그에 대한 사후 숭배를 하게 했으며, 그를 제우스 니카토르라는 이름으로 공경하도록 명령했다.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강력한 군주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의 치세 동안에 최대의 판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데 크나큰 관심을 쏟아, 신도시도 많이 건설했다. 또한 학술적인 조사를 장려하여, 파트로클레스가 카스피해를 탐험했고, 메가스테네스가 갠지스 강을 조사했다.

 

   그의 인상적인 얼굴과 당당한 인격을 잘 전해주는 청동흉상이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현재 나폴리에 보관되어 있다.

 

                                                                                    J. Seibert 글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셀레우코스1세(BC358~BC280) 시리아

 

   알렉산더 대왕의 부장으로 동방정벌에 참가했고, 알렉산더대왕 사후 BC321년 바빌로니아총독에 임명되었다. 한때 에우메네스와의 전투에서 져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곧 옛 영토를 회복하였고, 이어 이란 박트리아 인도 북서부까지 원정하였다.

 

   안티오고스1세를 입수스 전쟁에서 물리친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원정을 준비하던중, 전날의 동맹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한다.

 

    

 

 

        2대 안티오코스 1세 [Antiochos I, BC 324~BC 262?]

 

  시리아의 왕(재위 BC 280~BC 262?).

 

  셀레우코스왕조의 초대 왕인 셀레우코스 1세의 아들. 광대한 영토에 많은 도시를 세워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BC 292년 이후 공동통치자로서 부왕의 영토 중 동쪽 부분을 다스리다가, BC 281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왕이 되었다. 치세기간에는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사업을 대부분 유지하였다.

 

   BC 279년 그리스안티고노스 2세와 조약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소아시아에서는 BC 276∼BC 275년 침입자인 야만족 켈트인()을 격파하여 소테르(Sōtēr:)의 칭호를 받으며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에게 빼앗겼고, 또 신흥 세력 페르가몬에우메네스 1세에게도 져서 점차 영토를 잃었다.

 

 

제목 : 안티오코스 1세 왕묘
출처 : © encyber.com
설명 : 터키의 아나톨리아 남부의 소도시 아디야만주 북동쪽. 시리아의 왕(재위 BC 280∼BC 262?).

관련

   항목

: 넴루트다이유적, 시리아의 역사, 안티오코스 1세

 

제목 : 안티오코스 1세 왕묘 사자상
출처 : © encyber.com

 

 

 

                            [터키 여행지]넴루트다이 유적지   
http://blog.naver.com/tiger6107/140009052407
넴루트다이유적지의 머리석상
 

  안티트로스 산맥 남동쪽 기슭 넴루트다이(넴루트산)에 있는 거대한 무덤유적으로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콤마게네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재위 BC 69∼BC 34)가 건설하였다.

 

  해발 2,150m의 산 정상에 돌을 잘게 부숴 만든 높이 50m, 지름 150m의 인공산이 있으며, 그 밑에는 곳곳에 바위 덩어리가 흩어져 있다. 1953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지하널방으로 통하는 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인공산 정상 아래 북·동·서 세 방향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테라스가 있다. 북쪽 테라스에는 길이 80m의 벽이 세워져 있는데, 양쪽 끝에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동쪽 테라스에는 돌로 된 단 위에 높이 약 9m에 이르는 신들의 거대한 석상이 있다. 석상은 5개로서 양손을 무릎에 얹고 의자에 앉아 있는 형상이며, 머리 부분은 아래로 굴러떨어져 있다.

  서쪽 테라스에도 안티오코스 1세를 비롯한 여러 신들의 석상이 있다. 몸체는 크게 부서지고 발부분만 남아 있으나, 굴러떨어진 머리 부분은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석상 뒤쪽에는 4변이 각각 4m에 이르는 석판에 '왕의 점성술사'라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1987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3대 안티오코스 2세[Antiochus II Theos]


 

본문


 

   BC 287경~246.

   중동을 지배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261~246 재위).

 
   BC 261년 아버지 안티오코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통치기간 대부분을 아나톨리아의 많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집트와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마케도니아의 통치자 안티고노스와 의기투합해서 동맹을 맺고, 아버지가 입었던 피해를 복수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항하여 제2차 시리아 전쟁(BC 259~255)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가 해상에서 이집트 함대를 쳐부수는 동안,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 에페수스, 페니키아 해변을 비롯하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다시 찾았다. 안티오코스는 밀레투스를 되찾은 뒤, 그 지역의 독재자를 쫓아냈다.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신으로 섬겼다. 뒤에 '테오스'(신)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는 제국 전체에 걸친 숭배의식을 정립시켰다.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에도 자유를 주었으며, 나아가 조상들이 했던 대로 자신의 영토에 도시 건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안티오코스는 BC 253년경 첫번째 왕비인 라오디케와 헤어지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인 베레니케와 정략 결혼했다.
 
   그는 BC 246년 라오디케에게 죽음을 당했고, 두 여왕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가 뒤를 이었으며, 또다른 아들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에 관한 영어로 된 1차 자료에는 에드윈 로버트 베번의 〈셀레우코스 왕가 The House of Seleucus〉(2권, 1902, 재판 1966)가 있다.

 

 

 

 

              * 라오디케 [원어명 Laodikē, ?~?]
          
요약
시리아왕국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
원어명 Laodikē
국적 시리아
활동분야 정치
본문

   안티오코스 2세와 강제적으로 헤어졌고, 그 뒤 안티오코스 2세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4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자, 안티오코스 2세는 라오디케와 다시 결혼하고, 라오디케가 낳은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후계자로 지정한다.

  이후 라오디케는 자신을 몰아냈던 베레네케 모자와 이집트에서 온 시종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인 안티오코스 2세도 독살한다.

 

  이 소식을 들은 베레니케의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제3차 시리아전쟁(BC 246∼BC 241)을 일으켜 라오디케를 참수하였다.

 

 

 

 

       4대 셀레우코스 2세[― 二世, Seleucos II Callinicus]

본문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25.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의 아들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4번째 왕(BC 246~225 재위).
 

   안티오코스 2세는 아내 라오디케(셀레우코스의 어머니)를 버리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그러나 BC 246년 안티오코스 2세는 다시 베레니케 곁을 떠나 소아시아에서 지내던 라오디케와 셀레우코스에게 갔다. 라오디케는 그를 독살하고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왕으로 세웠다. 그동안 안티오크에 있던 그녀의 도당들이 베레니케를 살해했다.
 
   베레니케의 오빠이며 방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셀레우코스 2세의 영토를 침공해 동부지역을 병합시켰다. 아울러 그의 함대가 소아시아 해안을 휩쓸었다.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 내륙 지방에 피해 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이집트로 돌아간 뒤, 시리아 북부와 이란 인근지역을 되찾았다.
 
   셀레우코스 2세는 안키라(BC 235경)에서, 라오디케가 지원하는 자신의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에게 패해, 타우루스 산맥 너머 지역을 동생과 반도의 다른 실력자들에게 양도했다. 그중에서도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의 통치 아래 가장 크게 발전했다.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BC 228년 또는 BC 227년경에 트라키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1년 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5대 셀레우코스 3세[― 三世, Seleucos III Soter]


 

본문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23.

  셀레우코스 왕조의 5번째 왕(BC 225~223 재위, 2년간).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의 장남이다. 사촌 아탈로스 1세에게서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을 되찾는 과업에 착수하여, 우선 안드로마코스 장군을 보냈는데, 그는 아탈로스에게 참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지만 ,프리지아에서 암살되었다. 남동생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이 그 뒤를 이었다.

 

 

 

 

           6대: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

본문

  별칭은 Antiochus the Great, Antiochus Megas.[안티오코스 대왕]

  BC 242~187 이란 수사 근처.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재위 223~187, 36년간).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

 
  셀레우코스 2세의 아들로, 형 셀레우코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켰다. 이듬해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참칭하자,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의 충고에 따라, 남부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벌였던 이집트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몰론으로 기수를 돌렸다.
 
  BC 220년 멀리 티그리스 강의 제방에서 몰론을 격파하고, 메디아의 북서부지역인 아트로파테네를 정복했다. 그 직후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를 죽임으로써, 전대(前代) 통치의 영향력 대부분을 제거했다. 같은 해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에서 왕을 자처했지만, 자기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티오코스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란사).

 
  이제 안티오코스는 소위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을 벌이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인 피에리아,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BC 217년 시리아의 가장 남쪽 도시인 라피아에서,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군대(7만 5,000명 추정)와 접전을 벌였다. 그의 군대는 6만 8,000명이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군의 좌익을 패주시켰지만, 그의 군대는 중앙의 방진(方陣:중무장한 보병의 밀집대형)이 이집트의 새로운 방진에 의해 격파당했다. 뒤이은 평화조약에서, 안티오코스는 셀레우키아인 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는, BC 213년 아카이오스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BC 212~205)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카스피 해의 동남부)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하여,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
 
  아라코시아·드란지아나·카르마니아 등 이란의 속주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귀환한 그는, BC 205년 페르시스에 도착했으며, 페르시아 만 동부 해안의 상업국가 게르하의 시민들로부터 은 500탈렌트를 조공으로 받았다.
 
  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후, 안티오코스는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두 사람은 이집트 밖의 프톨레마이오스 영역을 분할할 것을 꾀했다. 안티오코스는 남부 시리아, 리키아, 실리시아, 키프로스를, 필리포스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차지하기로 했다.
 
  안티오코스는 코일레시리아에 침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 스코파스를 BC 200년에 요르단 강의 발원지 근처인 파니온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계속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는, 로도스, 페르가몬과도 전쟁을 벌리게 되었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의 도움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 5세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했다.
 
  이때 안티오코스는 그를 돕지 않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12세인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불과 5살의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다(→ 로마사).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팽창욕에 휩싸인 안티오코스 3세는, BC 198년에 페르가몬 왕국 일부, BC 197년에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를 점령했다.
 
  BC 196년에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일찍이 셀레우코스 1세가 BC 281년에 획득한 바 있었던 트라케에 진출하여, 이곳의 종주권을 선언함에 따라, 로마와의 지겨운 소모전과 외교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로마는 안티오코스에게 여러 번 사절을 파견하여, 유럽에서 물러날 것과, 소아시아의 모든 자치 공동체들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상 셀레우코스 제국의 서쪽 영역의 해체를 의미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이러한 로마와의 긴장상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에서 도망하여, BC 195년 안티오코스 3세에게 와서, 그의 고문이 되었던 것이다.

 
  안티오코스는 이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로도스·페르가몬, 그리고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와 결합했다.
 
  다만 그리스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이톨리아 동맹만이, 유일하게 안티오코스에게 자신들의 해방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를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들에게 의지해, BC 192년 가을, 단지 1만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하여, 에우보이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중부 그리스에서는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인 BC 191년, 2만 명 이상의 로마군이 트라케에서 안티오코스의 지원병력을 차단했고, 테르모필레(그리스에 있음) 고개에 있던 그를 포위공격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잔존부대와 함께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도망했고, 이곳에서 바다를 통해 에페수스로 건너갔다. 또한 그의 함대는, 로마·로도스·페르가몬 연합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했다.
 
  로마군은 BC 190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안티오코스는 이제 로마가 이전에 제시했던 조건에 따라 협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먼저 타우루스 산맥 이서 지방에서 철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안티오코스는, 시필로스 산 근처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잡다하게 끌어모은 7만 명의 병력으로, 로마와 그 동맹군 3만 명을 맞아 싸웠다.
 
  동부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파메아 평화조약을 맺고, 유럽과 타우루스 이서 지방의 소아시아에 위치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아울러 보상금으로 12년 동안 1만 5,000탈렌트를 지불해야 했고, 그의 코끼리와 함대를 양도했으며,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포함한 인질을 바쳤다.
 
  그의 왕국은 이렇게 하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부 이란으로 축소되었다.
 
  BC 187년 안티오코스는 크게 부족한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공물을 강요했던 수사 근처의 한 바알 신전에서 살해되었다.

 

 

                                                                                  H. Volkmann 글

 

 

 

 

 

 

 

           7대: 셀레우코스 4세[Seleucos IV Philopator,
                                    BC 187~175, 12년간 재위]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17경~BC 175.

 
  셀레우코스 왕조의 7번째 왕(BC 187~175 재위).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아들이다. 셀레우코스 4세가 물려받은 제국은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와 전쟁(BC 190~189)을 하기 전에 지배했던 것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당한 규모여서 시리아(실리시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 그리고 이란 근접지역(메디아와 페르시아)으로 이루어졌다.
 
  로마가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앗아가 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셀레우코스는 지출이 많은 모험을 피하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자 후계자인 디미트리오스가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것도, 이같은 현상유지정책과 조심성의 한 가지 이유였다.
 
  셀레우코스가 175년 중신 헬리오도로스에 의해 암살되자. 동생인 안티오코스가 왕위에 올랐다.

 

 

 

 

           8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os IV, BC 215?~BC 164, 11년간재위]

요약
시리아의 왕(재위 BC 175∼BC 164).
별칭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국적 시리아
활동분야 정치
 
  본문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14년간 볼모생활을 하였으며,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죽은 뒤에 즉위하였다.

 

  BC 169년 이집트에 침입,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였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이집트에서 철수하였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심취하여 헬레니즘문화에 입각한 제국주의 국가의 통일을 꿈꾸어, 유대교를 박해하여 마카베오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유대에 하스몬 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만년에 박트리아파르티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방원정을 계획, BC 164년 원정 도중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뒤 셀레우코스왕조는 쇠퇴하였다.

 

 

 

         안티오코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Antiochos Epimanes('狂人')라고도 함.

(Epiphanes는'신의 顯現'이라는 뜻)

BC 215경~164 이란 타바에.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재위 BC 175~164, 11년간).
                                    [개요]

  그리스 문화와 제도를 장려한 군주로 가장 유명하다.
  유대교를 억압한 결과 마카베오 전쟁을 야기했다(→ 헬레니즘, 이스라엘, 마카베오가).

 

                                  [초기 치적]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셋째 아들로, BC 190~18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패배하자 BC 189~175년 로마에서 인질생활을 했다. 이때 로마의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그것에 경탄했다. 그의 형 셀레우코스 4세는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그를 교환했다.
 
  셀레우코스 4세가 반란자 헬리오도로스에게 살해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그를 내쫓았다. 시리아의 정정(政情)이 불안했던 이 시기에, 이집트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은 코일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 이전에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양측은 모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BC 173년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와 안티오코스 3세가 맺은 아파메아 조약(BC 188)에서 주기로 한 전쟁 배상금 나머지를 모두 갚았다(→ 로마사, 고대 이집트).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먼저 침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에 선수를 쳤다. 펠루시움과 카시온 산 사이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정복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조카였으며(안티오코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음), 안티오코스는 로마가 간섭할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보호자 자격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대항 정부를 세우도록 간청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펠루시움에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여 이집트에 대한 접근에 안전을 기했다.

 
  BC 169(또는 168)년 겨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의 형제, 누이와 제휴를 맺고 로마에 새로이 원조를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안티오코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안티오코스의 함대가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자, 키프로스의 총독은 그에게 섬을 넘겨주었다.
 
  안티오코스는 BC 168년 이집트에 재차 침입하여, 키프로스와 펠루시움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하(下)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반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2일, 로마군이 피드나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자, 안티오코스가 거둔 승리는 빛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안티오코스가 서 있는 땅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벗어나기 전에 명확한 답변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같은 공개적인 모욕에 당황한 왕은, 곧바로 로마의 요구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그리하여 로마의 개입으로, 다시 현상유지가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지배권을 주장했던 남부 시리아의 영유권이 허용됨으로써, 안티오코스 4세는 영토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다.

 

                         [왕국의 헬레니즘화 노력]

 

  그는 동방인들, 즉 비(非)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육성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으로 왕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건설과 극장 장식에 헌금을 냈다. 그는 오론테스의 안티오크에 에피파니아(그의 이름을 본떴음)라는 구역을 새로 건설하여 시를 확장했다. 이 구역에다 도수관(導水管), 공회당, 시장,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는 사원을 세웠다. 그를 아시아의 '소테르'(해방자, 구제자)로 숭배하는 바빌론은,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되어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다른 에피파니아가 아르메니아에 세워졌다. 엑바타나(페르시아에 있음)도 에피파니아로 불렸고,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은,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페르시아 만에 있는 안티오크의 조폐소는,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어귀 지역 사이의 해양무역에 기여했다(→ 바빌로니아).
 

  안티오코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이 번성하고 있던 동양의 사원조직, 특히 유대 사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3세 시대 이래, 유대인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유대인은 두 파벌, 즉 종교적인 정통 하시드파(독실한 자)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했다.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개혁파를 지지했고, 상당한 자금을 받은 대가로 대제사장 야손에게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세우고, 젊은 층의 교육에 그리스 방식을 도입하도록 허락했다.
 
  BC 172년 안티오코스는 더 많은 공납을 받고, 야손의 자리에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BC 169년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전쟁중일 때, 야손은 성채만 빼놓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경쟁자 메넬라오스의 지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BC 167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강습하여 탈환하고, 헬레니즘화를 강화했다.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유대인 마카베오의 반란]

 

  그리스인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티오크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야훼 숭배와 유대인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왕의 조상(彫像)을 우상으로 세우며, 그 발 밑에 제물을 놓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신성 모독에 대항하여 반(反)그리스 유대인 지도자 유다스 마카베오는 게릴라전으로 하시드파 봉기를 일으켰고, 수차에 걸쳐 안티오코스가 진압하라고 보낸 장군들을 무찔렀다. 유다스는 부분적인 사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지구를 제외한 유대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마침내 BC 164년 12월, 제우스의 제단을 부수고 사원을 다시 정화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확실히 하시드 운동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그 힘이야말로 약 1세기에 걸쳐 독립 유대 국가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었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킨 BC 166년은, 안티오코스가 안티오크 근처 다프나이에서,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세상에 그의 힘을 과시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당시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방진군(方陣軍)과 로마 무기로 무장한 500명의 용병을 포함한 4만 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500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그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던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을 벌여 그 지역에서 세수입을 회복했으며, 그에게 등을 돌린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에게 종주권 인정을 강요했다. 또한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크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라비아 해안에 원정대를 보냈다.
 
  그는 BC 164년말 페르시스의 타바에(또는 가바에:지금의 에스파한으로 추정됨)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엘람(지금의 이란에 있음)에서 나나이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죽었다고 믿었다.

 

 

                                                                                      H. Volkmann 글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 
http://blog.naver.com/weddingkgm/140019789667
윤요셉 [ E-mail ]
  안티오쿠스4세 박해에 대하여..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헬레니즘 세계는, 당시 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통치하기 훨씬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가운데는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그 사회적인 지위 덕택으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더욱이 이 기간에는 토비아스와 오니아스 사이에 심한 경쟁이 있어,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 특히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아스 2세는 "돈을 아주 사랑하는 자"로서, 프톨레미 2세에게 매년 내는 20달란트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더욱이 토비아스의 아들 요셉은, 전국의 세리로서 자청하고 나섰다. 요셉과 그의 가문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가문은 나라에서 최고의 직책들을 맡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대제 때에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은 프톨레미에서 셀류커스에게로 이양되었고, 이에 따라 요셉과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이 새 왕조에 그들의 충절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에는 돈을 주고 권좌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토비아스가의 시몬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셀류커스 4세 때에 총리대신을 충동질하여,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몰아내고, 성전의 성금을 가로채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오니아스 3세는 셀류커스 궁정으로 달려가, 이 소요를 평정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기 까지 하였다. 이 두집안의 반목은, 형 셀류커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때 그절정에 달하였다.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 특히 친 시리아파 귀족들은 안티오쿠스가 등극하자, 그들의 목적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친 이집트파인 합법적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그들에게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니아스 3세가 잠깐 딴 나라에 간 사이에, 안티오쿠스 정부의 찬동을 얻고 왕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동생인 예수, 즉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물론 안티오쿠스는 그의 임명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즉시 예루살렘을 헬라적인 양식에 따라, 재정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경기장이 세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풍의 의복을 입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 특히 핫시딤이나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몹시 분노했으며, 헬라주의의 영향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제사장의 임명은 하나님의 소관으로서, 이방 왕이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그래도 대제사장 야손이 정통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때에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토비아드가문의 도움과, 보다 많은 뇌물을 왕에게 바침으로써, 야손을 몰아내고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의 생활방식을 고취하며 정통파에 대항했다.

 

  이 두 파의 적대 감정은 더욱더 심화되어, 마침내 헬라파와 정통파 사이의 싸움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이때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중에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야손은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잇따라 일어나는 싸움들은 "유대인 대 시리아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대인 대 유대인"의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일어섰고, 모든 헬라화 정책에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와, 그가 이미 공포한 대로 헬라 문화와 종교를 통하여 그의 왕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며, 팔레스타인도 이 정책대로 다스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로마의 권세가 날로 커져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그의 왕국을 통합시키겠다는 필요에서 더욱더 굳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메넬라우스를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그의 왕권을 모독한 행위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메넬라우스를 복직시켰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토록 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기명들을 훔쳐냈다.(제1마키비서 1:20-28)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주의자들의 후원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헬라화 정책은 대부분의 유대민중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드디어 그는 유대교를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바빌론 포로 때부터 유대교 신앙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온 유대교의 제도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금지하고, 할례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게다가 토라(즉 율법서)를 찢고 불살랐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리를 먹도록 했으며, 전국 각처에 건립되어 있는 우상제단에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러한 그의 악랄한 행동은, 성전 뜰에 제우스 제단을 건립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는데, 거기에 안티오쿠스 자신의 모습을 담은 신상도 세웠다

 

  이 제단이 바로 다니엘서에 있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 2마카비서 6-7장에 있는 "엘르아살과 7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바로 이 당시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신앙을 말살시키려는 정부 기관원들을 피하여, 도시와 마을들을 떠났다.

 

 



                                          발췌..신구약 중간시대(출판사: 컨콜디아사, 임태수 옮김)

 

 

 

 

 

                        [3]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王朝[Ptolemaeos dynasty]

요약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인의 왕조(BC 305∼BC 30).
본문
알렉산더 대왕 / 동상의 몸과 가면은 파라오 스타일의 조각이나, 얼굴은 그리스 자연주의 기법으로 조각된 석상.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워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디아도코이(Diadochoi)의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하여 창건되고, 왕가는 마케도니아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하여 발전의 기틀이 잡힌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3세 시대에 확대 발전하여, 최대의 판도로써 번영을 구가()하였고, 수도 알렉산드리아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뒤 내분·내란, 외정()의 실패 등에 따라 점차로 쇠퇴하였으며, 특히 BC 2세기 초 로마와 접촉하고부터 차차 로마의 동방진출의 제물이 되어, 결국 BC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프톨레마이오스 15세(케사리온:클레오파트라카이사르의 아들)의 죽음으로써 왕국은 멸망하였다.

 

   국왕은 관료제도와 용병제도를 기반으로 엄중한 통제경제를 실시하였고, 절대군주로 군림하여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번영은 눈부실 정도로 훌륭하였으며, 오래도록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                                   마케도니아의 정복
  •    BC 332년 가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억압 통치를 기꺼이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고, 결국 한번도 싸우지 않고 이 나라를 차지했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까지 가서, 그리스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아몬 신탁소를 방문했다. 이 신탁소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가졌더라면, 파라오의 전통 속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
  •    9년후인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제국은 여러 장군들의 분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집트 행정수반인 사트라프의 지위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18년 되던 해인 BC 30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대한 비문은, 페르시아인들한테서 땅을 빼앗은 그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에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 왕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후계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인 뒤에 나타난, 여러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이집트는 가장 부유해서, 그후 300년 동안 거의 내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꾸준히, 그리스화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와 관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 시의 성장과 그 중요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왕조가 가진 마케도니아-그리스적 성격은 적극적으로 보존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나일 삼각주 북서쪽에 있는 라코티스라는 작은 이집트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될 때까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는, 초기의 160년 동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 재위) 때의 문헌적·금석학적·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이 왕국의 행정과 경제가 철저한 개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농업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되었고 광범위한 관개 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많이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46~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페르시아인들이 가져간 이집트 신들의 신상을 도로 빼앗아와 인기를 얻었다. 에우에르게테스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22~205)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를 나약하고 타락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로파토르의 죽음과 젊은 프톨레마이우스 5세 에피파네스(BC 205~180 재위)의 즉위를 둘러싼 사건은 궁정의 음모 때문에 진상을 알기 어렵다.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동안, 남부에서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국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왕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타났다. 그후에도 수십 년 동안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BC 196년경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해외에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BC 196년에 소집된 종교회의는 이집트 신전에 대해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BC 168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을 이집트 총독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이집트에 대해, 보다 강력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BC 168년 여름 로마의 특사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나일 삼각주의 펠루시움 근처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사령부에 도착해,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안티오코스에게 명령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라이나스는 지팡이로 왕의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원 밖으로 나오기 전에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티오코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고, 7월말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떠났다.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피스콘)의 경쟁은,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이 키레네로 감으로써 해결되었다. 피스콘은 BC 145년 필로메토르가 죽을 때까지 키레네에 남아 있었다.
     
       피스콘은 BC 116년까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킨 BC 131~130년은 제외) 및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해외 영토가 거의 없고,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 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왕이 잇달아 바뀌는 불안정한 시대가 계속된 뒤, BC 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지배했다. 죽기 전 해인 BC 52년에 아울레테스는 딸 클레오파트라 7세 및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47 죽음)와 왕위를 공유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한 여왕으로, 로마와 손을 잡고 영향력을 키움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8년에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을 때,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 당한 것을 알고, 이집트에 머물면서 BC 47년에 여왕과 함께 나일 강을 유람하며 관광을 즐겼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이라고 이름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후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뒤따라 로마로 갔지만, BC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클레오파트라는 얼마 동안 로마 장군들의 파벌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년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BC 36~30년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장군과 동양 여왕의 유명한 연애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BC 34년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것은 죽은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책략임이 분명했다.
     
       가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과시용으로 자녀들에게 동쪽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로마 대중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밤마다 소란스럽고 퇴폐적인 연회를 베풀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선전은 무력 충돌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BC 31년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결과는 판가름났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함대가 퇴각했고, 안토니우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0년 8월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 도시에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유해를 만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유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런 상태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속주를 다스린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로마의 수도를 그리스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 로마 제국은 완전히 쇠퇴하고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의 막을 올렸다.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새 도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누려온 전통적 지위를 무너뜨렸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7세기 중엽에 이슬람 군대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로써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막을 내렸다.
     
     
     
     

                                                                                                              R.W. Baker/D.H. 글

     

    • 개요
    •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
      • 왕조 이전 시대
      • 초기 왕조시대(BC 2925경~2575경)
    • 고왕국시대와 제1중간기
      • 고왕국 시대(BC 2575경~2130경)
      • 제1중간기(BC 2130경~1938)
    • 중왕국시대와 제2중간기
      •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
      • 제2중간기(BC 1630~1540경)
    • 신왕국시대
      • 제18왕조(BC 1539~1292경)
      • 람세스 왕조(제19·20왕조)
    • 제3중간기와 후기 왕조시대
      • 제3중간기(BC 1075~656)
      • 후기 왕조시대(BC 664~332)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 마케도니아의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eos Ⅰ Soter)
                                                             * (Soter는 그리스어로 '구원자'라는 뜻)

     

        BC 367/366(또는 BC 364) 마케도니아~283/282 이집트[84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BC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BC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초기생애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BC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BC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BC 336~335년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원정에 참여했던 그는, BC 330년 가을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이 자리에 있을 때인 BC 329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원지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었음)에서 인더스 강으로 진격하던 중에(BC 327~325)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히다스페스 강(지금의 인도 젤룸 강)을 지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같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 대해 여러 번 표창을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페르시아인 아르타카마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인과 이란인들을 서로 섞으려 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행사였다.

     

                                   이집트 총독 시절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신중하고 믿음직한 군대 사령관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외교술과 전략적 능력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 점은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오랜 기간에 걸친 분쟁에서 입증되었다.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바빌론에서 열린 회합을 통해 거대한 제국의 여러 속주(satrapy)들을 장군들끼리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서 인접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고, 나일 강 유역이 갖는 지리적 고립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이곳을 헬레니즘 문화권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내의 행정을 정비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하고 키레나이카(리비아의 최동부 지역)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해안선 지역도 획득했다. 그의 생각은 이를 통해 군사적 안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우호 정책을 취해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유지했으며, 이집트 원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BC 32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BC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그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카산드로스는 그에 앞서 BC 319년 아버지가 죽자 ,그가 사전에 지명해놓은 계승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그는 BC 305년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15~311년 '제국의 계승자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키프로스를 얻었다. 이 전쟁중 그는 가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BC 312)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집트인 부대가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BC 310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BC 306년 키프로스를 다시 잃었다. 키레네도 한동안 상실했으며 BC 308년 손에 넣었던 코린트를 비롯해 인접한 시키온과 메가라에 있는 중요한 그리스 도시들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BC 306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근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 해전의 승자인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도움을 받아 BC 306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그를 추종하고 있던 나머지 총독들도 BC 305~304년 제각기 왕이라 칭했다.

     

                                    이집트의 왕 시절

     

       자신을 왕이라 칭한 프톨레마이오스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계속되는 안티고노스와의 전쟁 문제였다. 이제 전쟁의 초점은 로도스 섬에 집중되어 있었다.

     

       BC 304년 그는 로도스 섬의 주민들을 지원해 안티고노스에 대항했으며, 이때 '구원자'(Soter)라는 성스러운 칭호를 얻었고, 그뒤부터 그를 부를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해체는, BC 301년 소아시아의 입소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눈앞에 다가왔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에게 패배를 당했고, 이는 이들이 자기들의 왕국에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같은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간에, 시리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특히 대상(隊商) 무역로의 종착지 역할을 했던 시리아 남부의 항구들이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타협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코엘레시리아(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팜필리아와 리키아, 소아시아 남부의 피시디아 일부까지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08~306년 군사적 패배를 당해 타격을 입었고, 따라서 재위 말기 15년간은 전쟁보다 동맹과 정략 결혼으로 자신의 제국을 보전하고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BC 300년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의 리시마코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BC 299(또는 298)년 그에게 자신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를 주어 결혼하게 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의붓딸인 테옥세나를 시라쿠스(시칠리아 남동부)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시집보냈으며, BC 296년경에는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자기 딸인 프톨레마이스와 그를 약혼시켰다.

     

       디미트리오스의 매부로 이집트 궁정에 인질로 와 있던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는, 의붓딸인 안티고네를 주었다. BC 298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키레네를 복속시키고, BC 294년경에는 키프로스를 비롯해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인 티루스와 시돈을 손아귀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제국의 계승자들간의 전쟁(BC 288~286)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피로스와 함께 디미트리오스에 대항했다. 이집트 함대는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 1세가 BC 315년 결성해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 섬들을 포괄했던 군도 동맹(League of Islanders)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가 그뒤 수십 년 간 지중해에서 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군도 동맹 덕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현실적인 정치적 여건에 따라  동맹과 연합 관계를 바꾸어 감으로써,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해외 영토를 직접 통치하거나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방법으로 이집트의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정을 정비하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BC 290년 그는 아내인 베레니케 1세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세웠으며, BC 285년에는 베레니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BC 308) 둘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공동 섭정이자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이같은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 때의 형식을 따른 왕위 계승 규정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BC 283년에서 BC 28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었을 때, 권력 승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왕들은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데 몰두해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없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어떤 식으로 착취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중에 이집트인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건설한 유일한 도시는 상(上)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마이스였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군사 지휘관들을 이집트 내 각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 곁에 배치한 듯하며,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법적·재정적 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정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 이집트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폐제도를 도입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유화정책을 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4,000명이라는 보잘 것 없는 수에 불과한 자신의 군대에, 병사들을 충원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멤피스에서 이집트와 그리스의 종교를 융합시키는 사라피스 의식을 정례화했으며, 페르시아인들에게 파괴당한 파라오의 신전들을 복구했고,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편, 이집트의 귀족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자와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의 장소인 무제이온(Mouseion:박물관)을 세웠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건립했다. 그는 예술과 학문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글을 쓰는 작가였다.

     

        죽기 전 몇 년 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대한 신빙성있는 내용의 역사책을 썼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후세에 이 책을 대량으로 인용해 글을 쓴 역사가인 아리아노스를 통해 상당 부분의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생전에 몇 차례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에 이른 사람으로 찬양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모든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프톨레마이오스1세 (BC367~BC283, 84세) 이집트

      

       역시 알렉산더대왕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대왕이 죽은후 이집트로 건너가 기반을 잡고, 후에는 키레네를 병합하였으며, BC305년부터 왕이라 칭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외교적수단이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팔레스티나(유대지역)과 키프로스, 에게해의 여러도시와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매우 강성했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1세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그의 세력은 줄어든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후에 알렉산더대왕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그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7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15세(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 때 막을내리며, 그의 왕국은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와 달리, 친로마 정책 덕분에 수명을 연장하게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eos II Philadelphus]
     
     

     

    (Philadelphos는 그리스어로 '형제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BC 308 코스~BC 246.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번째 왕(BC 285~246 재위).
    [개요]

    교묘한 외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생애]

       처음에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지만, BC 283~282년 단독 통치자가 된 뒤 가족들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 권력 투쟁으로 그의 첫 아내 아르시노에 1세도 추방되었다. 아르시노에 1세는 트라키아의 왕인 리시마코스의 딸이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재혼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알렉산드리아 궁정 시인들은 이 결혼을 축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려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및 에게 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를 확대하는 한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에서도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집트가 인도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반영한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새로운 전쟁(BC 274~270)은 경쟁 왕국들의 기본 입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왕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8 ?~261)은, 에게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및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연합 세력과 맞서 싸운 제2차 시리아 전쟁(BC 260경~253)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작전의 실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 수완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는 우선 안티고노스를 부추겨 강화조약(BC 255)을 맺은 다음, 딸 베레니케를 자신의 적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내는 방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국과 이집트의 전쟁을 끝냈다.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안티오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인 라오디케를 쫓아내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당분간 셀레우코스 왕조의 적개심에서 해방되고 이집트 경제가 제공하는 재물의 뒷받침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그리스에 전념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다시 맞서 싸우라고 그리스를 부추겼다.
     

       마케도니아군이 그리스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거듭 발휘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그는 또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키레네 왕 마가스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상황을 더욱 개선했다. 그때까지 마가스는 상당히 골치아픈 이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쟁자들을 그의 외국 영토가 이루고 있는 넓은 완충지대 너머에 묶어둠으로써 이집트에 되도록 유리한 정세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그는 여기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심한 타격의 예봉은 모두 동맹국들에 돌리고 자신이 입은 군사적 상처는 외교수단으로 치료했다. 아내이며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특히 외교 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했지만, 당시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것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영향력]

       국내 문제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기록한 업적도 매우 인상적이다. 파라오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농업과 공예가 고도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감독과 그리스 행정관들의 도움으로 이 체계는 일종의 계획 경제로 발전했다. 나일 강 유역의 농민 대중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의 농촌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세금원을 개척하는 명수가 되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주요한 상업 및 수출 중심지 구실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종교만이 아니라 그리스 종교에도 강렬한 관심을 보여 지방의 성소들을 순방했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신전을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고 왕조가 종교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한 그는, 부모만이 아니라 자신과 왕비도 '테오이 아델포이'(형제 신들)로서 신성한 명예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리스인 통치자 숭배를 장려하는 가장 열렬한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 로마 시대 황제 숭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에 알렉산드리아는 예술과 과학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시인과 학자들에게 너그러운 후원자로 명성을 얻었다. 칼리마코스테오크리토스를 비롯한 많은 궁정 시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도서관을 확대하고 박물관에 자금을 공급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 박물관은 군주제에 좀더 강력히 반대하는 아테네 학파들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평형추로 세워진 연구 기관이었다(→ 교육사). 이곳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철학과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학과 자연과학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는 헬레니즘 문명의 절정기와 일치했다. 그 시대의 활력과 매력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생생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리스의 지도력이 낳은 결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평화 애호자는 아니었지만, 호전적인 군인 왕도 아니었다. 신중하고 계몽된 통치자인 그는, 외교적 능력에서 자신의 강점을 발견했고 광범위한 호기심에서 만족을 찾아냈다.

     

    • 생애
    • 영향력

     

     

     

     

     

     프톨레마이오스 3세 [Ptolemaeos III, BC 264~BC 221, 43년간]
    요약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제3대왕(재위 BC 246∼BC 221).
    국적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활동분야 정치
    본문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전성기의 왕.

     

      키레네를 재병합()하고, 다시 제3차 시리아 전쟁(BC 246∼BC 241)에서는 시리아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를 손에 넣어 영토가 가장 넓었다.

     

      그 후 20여 년 간은 대체로 평온하게 보냈으며, 예술을 보호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에 다량의 서적을 보충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s III Euergetes]
     
     

    (Euergetes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

    ?~?

     
      BC 264~221년[43년간 재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이집트와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하는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와 제3차 시리아 전쟁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BC 245년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랜 약혼 기간을 끝내고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딸인 베레니케 2세와 결혼함으로써, BC 258년 이래로 분리되어 있던 이집트의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로 갔다가, 안티오코스가 죽은 뒤 살해당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지체없이 코엘레시리아에 침입했다. 그 지역 도시들의 반란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은, 셀레우코스 2세의 군대를 쫓아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까지 밀고들어갔다. 그 와중에 소아시아 반도 해안가에 있는 일부 섬들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BC 245년경 제지를 받았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쳐들어가, 바빌론 근처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자료들을 보면, 국내에서 소요가 일어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고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기근과 나일 강의 수위 저하,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로도스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에 반대해 동맹을 맺은 것도 또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소아시아와 에게 해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카이아 동맹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흑해지역에서 2개의 동맹국을 확보함에 따라 더 한층 열기를 더해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242~241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물러났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2곳 모두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오론테스 강 유역과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와 트라키아를 가까스로 지켰으며, 킬리키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안에서는 아버지가 개발해놓은 알파이윰(오아시스와 비슷한 카이로 남서쪽의 저지대)에 대한 식민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또한 달력을 고쳐 BC 311년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원년으로 삼았다(→ 역법). 이집트 사제들의 회의에서 만들어 내놓은 일종의 선언문인 '카노푸스 칙령'은 4년마다 1일을 더하기로 하고, 1년의 일수를 365일과 1/4일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새 달력은 일반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쓰이지 않았다.
     
      사제들이 남긴 글이나 고대 문헌들을 보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약탈당한 성상(聖像)들을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시 복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전이 있는 상(上)이집트의 에드푸에 건설 작업을 벌였고, 여러 신전에 기부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계속 괴롭히고 있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피했으나, 지진으로 황폐해진 로도스 섬에 대해서는 원조를 보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려는 스파르타 왕의 계획에 대해서는, BC 222년에 피난처를 제공한 적은 있었으나, 지원금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소아시아에서는 그곳에 있는 한 왕국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며 많은 분란을 선동했던 인물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에서 망명지를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곧바로 그를 억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책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이집트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국내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집트를 남겨놓고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통치 시대에 대해서는 W. W. 탄의 〈헬레니즘 문명 Hellenistic Civilisation〉(3권, 1952), A. 부셰 르클레르의 〈라기데스가의 역사 Histoire des Lagides〉(1903) 제1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Ptolemaeos IV Philopator]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BC 238경~205.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221~205 재위).

    신하들에게 좌우되어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해왔던 시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이집트인들의 반란도 일어나 국내의 안정이 흔들렸다.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는 술에 취해 사는 방탕한 난봉꾼이며, 소시비우스로 대표되는 악명 높은 신하들에게 완전히 조종을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는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숙부와 형제까지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에 있던 뛰어난 장군이 변절하는 사건이 있은 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경계선에 있는 이집트의 코엘레시리아는 시리아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BC 219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자 소시비우스를 비롯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하들은 시리아와의 협상을 늦추며 그 사이에 이집트군을 재정비하고 철저히 훈련하는 전략을 취했다. 시리아의 위협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집트 원주민들을 보병과 기병으로 징집해 고대 그리스의 방진(phalanx) 전술에 따라 이들을 훈련했다. BC 218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안티오코스는 다시 진격을 시도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전진 방어선이 무너졌다. BC 217년 봄 새로 구성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라피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와 만났으나 방진 대형을 이룬 이집트 원주민 군대의 도움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전투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소시비우스의 조언에 따라 강화를 맺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는 코엘레시리아에서 물러났다. 라피아 전투를 끝낸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여동생인 아르시노에와 혼인해 BC 210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이집트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BC 205년에는 반란이 상(上)이집트까지 확산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들은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남쪽에 있는 이웃 왕국들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에게 해에도 몇몇 섬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갖고 있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시리아에 대해서도 소시비우스가 이 지역의 분쟁에 이집트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끼어들지 않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대외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외교적인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방탕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총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BC 205년 11월경 죽었다. 그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이 죽음을 비밀로 하다가 약 1년 뒤 왕비인 아르시노에를 살해하고 어린 왕위 계승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eos V Epiphanes]

     

     

    (Epiphanes는 그리스어로 '뛰어난'이라는 뜻)

    BC 210경~180.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 왕.

    왕위에 있는 BC 205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밑에서 일하던 부패한 신하 소시비우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뒤 5세밖에 안 된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소시비우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BC 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우스 일파가 어린 왕의 즉위와 그 부모의 죽음을 선포한 뒤 뛰어난 관리들을 모두 이집트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국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시아와 에게 해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소시비우스가 BC 202년 은퇴하자 그의 일파의 일원인 아가토클레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가토클레스의 등장에 불만을 품은 펠루시움(이집트의 동쪽 변경도시)의 총독 틀레폴레모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해 들어왔고, 그의 지지자들은 군중들을 선동해 아가토클레스를 물러나게 하고 다른 궁정 관리를 그 자리에 앉혔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운동장에서 그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을 외치며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한 궁정 신하의 암시에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들은 아가토클레스와 그의 가족들을 색출해내 이들을 학살했다. 권좌를 차지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랐던 틀레폴레모스도 얼마 안 가 제거되었다.

    이집트에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침공해 들어가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역공격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BC 201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무찌르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외교적 개입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BC 194(또는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혼인했다.
     

       이집트에서는 선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일어났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BC 19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며 항복해온 반란군에 대해서도 이들을 극도로 잔인하게 다루었다. 상(上)이집트에서는 BC 187(또는 186)년까지 계속해서 분란이 있었고, 그는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후견인과 고문들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더이상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테베 총독의 권한을 상이집트 전역까지 포괄하도록 확대했다. BC 196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칙령을 내려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넣었고, '로제타석'으로 알려진 이 비석은 1799년에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또는 그림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집트 원주민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 칙령에는 부채와 과세를 면제해주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또한 항복한 반란자들을 용서하고, 사원에 대한 기부금을 늘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꾸준히 그리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통치 말기에 그는 수완 좋은 환관 하나를 그리스인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했는데,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BC 180년 5월경 갑자기 죽었다.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고 왕비가 이들의 섭정이 되었다.

     

     

     

     
     
     
     
               * 클레오파트라 1세[Cleopatra I Syra]
     

    ?~BC 176.

    이집트의 왕비.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왕비로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의 섭정을 했다.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대왕)의 딸로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전쟁 및 국경분쟁을 종식시킨 리시마케이아 평화조약에 따라, BC 193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이집트가 되찾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던 코엘레시리아 지방의 징세권(영유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임)을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죽은(BC 180) 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어린 아들의 섭정을 하면서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시리아와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로마와도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균형 있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집트를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Ptolemaeos VI Philometor,
                                 BC 180~145, 35년간 집권]
     

     

    (Philometor는 그리스어로 '어머니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

    BC 180경~145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이집트를 점령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형제와 공동통치하는 모험을 벌여 다시 이집트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 사이의 아들로, 어머니와 공동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였으나, 시리아 편을 들지 않고 계속해서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함께 이집트를 잘 다스렸으나, BC 176년 어머니가 죽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2명의 야심만만한 궁정 관리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BC 173년경 그는 자신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혼인했고, 고문들의 의견에 따라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BC 170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통치에 합류했고, 코엘레시리아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의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는 BC 170년 이집트를 침공했고, 다시 BC 168년에도 쳐들어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맹국인 로마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BC 164년 10월경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쫓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로 도망쳐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따라 이집트를 분할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레나이카를,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했다.
     

       키레나이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2번이나 로마를 방문해 키프로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결국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능란한 외교술로 로마의 결정을 늦추게 하고, BC 154년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차지하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키레나이카를 다시 돌려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는 한편, 원조 명목으로 곡물까지 주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대(大)카토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훌륭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것은 그뒤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음모의 일환이었으나, 이집트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BC 155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키프로스를 차지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증오심을 일부러 자극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데르 발라스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BC 153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그를 지원할 채비를 서두르는 한편 ,그에게 자기 딸까지 주어 혼인하도록 했다.
     
       BC 148년경 그는 다시 한번 시리아로 진군했고, 그때 또다른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데르 발라스의 암살 기도를 물리친 그는, 발라스의 아내가 된 자기 딸을 새로운 왕위 요구자에게 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새로운 왕위 요구자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안티옥의 시민들과 시리아군은 이집트의 왕에게 시리아의 통치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이를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알렉산데르 발라스가 전투에서 패한 뒤, 살해당한 그 자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져 머리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해 며칠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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