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푸른 눈의 파라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영국신사77 2007. 5. 26. 01:27

                푸른 눈의 파라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처 블로그 > Αεροπτερα - Chronicle of Odysseus
원본 http://blog.naver.com/ksk880831/35575570

 

 

 
 

 

 


 

        1. 대왕의 유해를 확보하라! - 디아도코이 전쟁(BC 323~301)

 

  왕조의 시조가 되는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최측근이었다. 셀레우코스나 안티오코스가 단지 부하 장군에서 출발했던 데 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자란 친구사이였다. 또, 알렉산드로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면서 BC 329년에는 페르시아 마지막 황제인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아 공을 세웠으며,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는 일익을 담당하고 그곳 수비대장으로 임명받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매우 신뢰한 듯 하며, 그를 제국령 중 가장 부유한 지역인 이집트의 태수로 임명할 생각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듯 하다.

 

대왕이 열병에 걸려 사망하자, 이집트의 태수가 된 프톨레마이오스는 곧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등과 손잡고 제국의 분할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존경하는 노장인 안티파트로스를 거스를 수는 없어 그의 딸과 혼인하여 안티파트로스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안티파트로스는 너무 늙었기에 곧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카산드로스가 폴리페르콘에 대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에 의해 축출되기에 이르른다.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와 함께 반 안티고노스 연맹을 이끌기에 이르른다. 이 연맹은 셀레우코스의 주창으로 이루어졌으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그의 스폰서격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있었다.

 

디아도코이 전쟁을 위한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리비아와 그리스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었고, 에게 해 역시 이집트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안티고노스를 공격하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키프로스의 획득이었다. 드디어 BC 315년 시리아에 있던 안티고노스의 이집트 침공으로 디아도코이 전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군은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밀쳐내지 못하고 결국 BC 312년의 가자 전투에서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 안티고노스가 태자인 데메트리오스를 패배시킨 디아도코이들에게 한 "그대들은 오늘 풋내기를 이겼지만 다음에는 명장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는 말은 바로 이 때 한 것이다.

 

디아도코이 전쟁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안티고노스 측의 공격으로 그리스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으며, BC 306년에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를 기록함으로써 안티고노스가 최고조로 기세를 올릴 수 있었다.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의 지원은 말뿐이었고, 사실 도와준다고 해도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모하게 이집트를 돕는 대신 안티고노스의 후방을 계속해서 갉아먹어 이집트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본분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새 바빌론으로 돌아와 있던 셀레우코스의 주도 하에 리시마코스가 참전한 BC 301년의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전사하고 데메트리오스만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제 셀레우코스와의 동맹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는 예전의 셀레우코스가 아니었고, 안티고노스를 대신하여 아시아 전토를 차지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그에게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한 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대왕의 유해는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져 대왕의 유지대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해는 어느 새인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돌아가 있었고 그는 자신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재빨리 그 유해를 안장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초기에 반역자 취급을 받은 것은 이것 때문이지만, 결국 이 유해를 손에 넣음으로써 장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항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손에 넣게 되었다.

 

 

                  2. 나일 강의 범람 - 전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1~145)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BC 305~283)는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초대 왕이 되었다. 소테르(구원자)라는 칭호는 BC 304년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게테스에 대항하여 로도스에 지원군을 보내준 데에서 기인한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은 디아도코이들이 남은 영토를 가지고 싸우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바빌로니아의 셀레우코스에게 분배되어 있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리하여 시리아 남부와 소아시아 남부 해안이 이집트의 해외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동방령의 확고한 지배가 더 시급했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오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후방을 위협하기 위해 최근에 소아시아 북서부를 손에 넣은 리시마코스와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사이에도 계속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 군도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이집트는 이런 이유로 해군력의 우위를 계속 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내정에도 힘썼다. 저 유명한 무세이온(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그의 지시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 건설에는 소극적이었는데, 상이집트의 항구도시인 프톨레마이스를 하나 세웠을 뿐이다(이 도시는 장차 향료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을 파라오로 선포하고 각종 의식은 그리스식 보다는 이집트식을 따름으로써 이집트인의 지지를 확보하고 권력 승계를 편안히 이룰 수 있었다. 살아생전에는 직접 전쟁에 나서기보다는 주로 주변국을 이간질시켜 전쟁을 치루게 하는, 전형적인 외교 정치가 타입의 대외 정책을 구사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 중 가장 유능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왕과의 짧은 공동통치 이후 제 2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리시마코스와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동맹을 깨뜨렸다. 그런 이유로 셀레우코스는 안심하고 BC 281년 코루페디온에서 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킬 수 있었다. 필라델포스라는 그의 별칭은 "애자왕(愛姉王)"으로 더욱 유명한데, 그가 리시마코스의 딸을 쫓아내고 얻은 새 아내가 그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집트 국내에서는 고대 파라오 시대의 부활을 연상케 해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곧 셀레우코스 제국과 안티고노스 왕국을 공격하여 지중해 지방에 영토를 확장했고 에티오피아, 아라비아에도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인도와 로마에까지 사절을 파견하여 그들과 우호관계를 다졌다.

 

  그러나 이런 이집트의 황금기에도 실수는 있었다. 쓸데없이 마케도니아의 3대 왕인 안티고노스 2세를 자극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8~261)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가 지원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으며, 이 때를 틈타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케도니아 왕국이 손을 잡고 이집트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제 2차 시리아 전쟁은 그렇게 이집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필라델포스는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그들의 승리를 무력화 시켰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케도니아 왕국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그리스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이 재건되어 있던 상태였다. 또, 필라델포스의 치세에 이집트는 헬레니즘 세계의 제 1의 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이미 무세이온들은 여러 나라 출신들의 학자들로 붐비고 있었고, 필라델포스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제 1의 문화도시로 손꼽히며 최고의 번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단 알렉산드리아 뿐만 아니라 필라델포스의 치세 자체가 헬레니즘 문화의 최성기로 일컬어지게 된다. 필라델포스는 어떤 학문, 종교, 사상이던지 단지 학문으로서 받아들이고 거기에 심취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기독교사상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며, 오늘날에도 그 권위가 인정되는 그리스어판 [70인역 성경]은 필라델포스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왕이 된 것은 아버지 못지 않게 유능한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64~221)이다. 아버지인 필라델포스에 의해 일찍이 공동통치자로 임명되었던 그는 단독 통치자가 되자마자 키레나이카를 다시 지배하에 두었다. 그리고 살해당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제 3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안티오키아를 지나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까지 진격했으나 국내의 소요와 트라키아까지 손에 넣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에 위협을 느낀 마케도니아의 출병으로 인해 국내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잠시 손에 넣기도 하였으며 킬리키아와 에페수스까지 이집트 제국에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남쪽으로의 식민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해 국내의 생산을 늘렸으며, '카노푸스 칙령'으로 새 달력을 공포했으며(잘 쓰이지는 않았다), 이집트인의 마음을 묶기 위해 고대 파라오 시대의 성상들을 재건하기도 하였다.

 

  에우에르게테스는 이제 더 이상 전쟁은 불필요하다고 보고, 외교 정책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이는 더욱 더 돈독해져 헬레니즘 세계의 전쟁에서 이집트가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의 지배권은 마케도니아에게 있음이 분명해져가고 있었으며, 셀레우코스 제국은 날마다 부쩍 느는 군사력을 가지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다. 에우에르게테스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양 국가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망명객으로 받아주기는 하되, 억류하는 방식을 씀으로써 두 국가의 반감이 더 심해지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쓰기도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죽었을 때, 이집트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력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21~205)는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주변에 믿을만한 세력이 없이 결국 측근에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 측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소시비우스이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공격을 받게 되자, 시간을 끄는 전략으로 그를 격퇴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전권을 장악하자마자 부패의 늪에 빠져들었고, 거기에다가 필로파토르는 방탕한 군주로 정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필로파토르의 시대에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를 라피아에서 대패시키는 데 성공한 이후로, 그에 대해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의 이 반란을 힘겹게 진압한 이후에는, 오로지 폐쇄정책으로만 일관하였다. 이후 이집트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뒤처지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후 왕위에 오른 것은 겨우 6~7살의 어린아이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BC 210~BC 180)이다. 에피파네스는 필로파토르의 시절부터 계속된 측근 정치의 희생물로 내려앉게 되었다. 필로파토르가 사망하자, 소시비우스는 바로 에피파네스를 옹립하고 자신이 전권을 쥐었다. 소시비우스에 의해 이집트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케도니아 왕국은 이집트의 해외령이었던 그리스 반도와 에게 해 연안의 도서 지방을 차지할 것을 획책하기도 했다. 소시비우스는 BC 202년 은퇴하고, 그의 후계자로서 아가토클레스가 권좌를 쥐었다.

 

  그러자 분노한 군중들이 에피파네스를 옹위하고 아가토클레스를 죽였다. 같은 시기 비슷한 이유로 일어난 펠루시움의 총독인 틀레폴레모스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런 혼란을 틈타 시리아 남부를 침공해왔다. 그러나 BC 196년 로마의 중재로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는 화해하게 되었고, 다시 혼인 동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혼인 동맹의 조건이 이집트에게 매우 불리했다. 이집트는 이 때 사실상 시리아 남부를 상실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점으로부터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집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공격에 수세로 몰려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피파네스는 선왕인 필로파토르의 시대로부터 계속된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상이집트의 총독에게 더 큰 권한을 위임했는데, 이것은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BC 187년까지 이집트의 남부는 계속해서 분란에 시달린 것으로 보이며, 성인이 된 에피파네스는 아직도 측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BC 190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에게 대패하자, 이집트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이집트는 외교적으로 점차 로마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치세는 매우 불우했으나, 에피파네스는 이집트어, 그리스어, 아람어의 3개 언어로 병기한 ‘로제타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왕이 되었다. 그는 BC 180년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다음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경~145경)이다. 이 왕의 즉위년도와 사망년도는 불분명하다. 에피파네스와 클레오파트라 1세의 아들이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공주였으나, 이집트의 편에 서서 셀레우코스 제국과 항상 대립해오던 터였다. 필로메토르 역시 두 명의 선왕과 마찬가지로 어린나이에 즉위했던 모양이다. 아무튼간에, 이 이집트의 여왕은 BC 176년에 사망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필로메토르는 궁정 관리들에게 크게 의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이 공동 왕위를 요구해왔다.

 

  궁정 관리들은 자신들의 약화된 힘을 생각지 않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코엘레 시리아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이들의 공격은 BC 170년에 격파되었고, 역으로 이집트의 중요한 요새도시인 펠루시움이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안티오코스 4세는 나일 삼각주를 휩쓸고 다니면서도 이집트를 굳이 멸망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신,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꼭두각시 왕을 세우고, 외삼촌인 자신(클레오파트라 1세의 동생이다)이 섭정을 맡게 해주면 물러가겠다고 하면서, 도시 펠루시움과 키프로스 섬의 할양을 요구했다. 이집트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는 즉각 포위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로마는 포필리우스 라에나스를 사절로 파견했다. 그는 안티오코스 4세를 만나자마자 고압적으로 로마의 요구사항을 들으라고 하며, 왕의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에서 나오려면 대답을 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의 관계가 여기서 결정적으로 역전되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는 당황한 채로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대신 로마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시리아 남부 통치권을 영원히 인정해주기로 했다. 같은 시기,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패배시키고 그 왕국을 영원히 멸망시킴으로써,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적 입지에 크나큰 타격을 주게 된다.


  BC 164년, 필로메토르는 반란을 일으킨 피스콘의 군대에 떠밀려, 왕좌를 버리고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필로메토르는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왕위를 필로메토르에게, 키레나이카의 왕위를 피스콘에게 주었다. 피스콘은 로마에 계속 키프로스를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로마가 응해 키프로스가 피스콘에게 넘어갔다.

 

  필로메토르는 무력으로 키레나이카를 공격해 피스콘을 패배시킴으로써 전날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피스콘을 굳이 쫓아내지는 않고 다시 키레나이카의 왕으로 앉히고 곡물을 원조해주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필로메토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외교적으로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자 필로메토르는, 전날 자신의 왕좌를 위협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해 복수하기로 했다. 이번 전쟁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키프로스를 손에 넣기 위해 그를 도발한데에서도 그 발생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곧 셀레우코스 제국은 안티오코스 4세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의 반란으로 대혼란에 빠져버리게 된다. 필로메토르는 발라스에게 자신의 딸을 주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결국 발라스는 정통 왕가를 물리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가 된다. 그러나 발라스와의 동맹은 곧 깨어졌고, 필로메토르는 그를 치기 위해 시리아로 진격한다. 내란에 지친 시리아의 사람들은 이집트에게 시리아를 바치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이집트가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만 현실을 직시한 필로메토르는 그 제의를 거절하기로 했다.

 

  발라스는 곧 정통 왕가 출신의 데메트리오스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그러자 필로메토르는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했는데, 그 역시 데메트리오스에게 패하고 거기서 전사하고 말았다.

 

  필로메토르는 뛰어난 외교술을 지닌 왕이었다. 그의 시대에 이집트의 입지가 많이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측근들의 영향력은 강했고, 특히 그의 시대에 처음으로 대립왕이 나타나면서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졌고, 이후 극심한 왕위 쟁탈전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필로메토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 필로파토르(BC 145~144)가 즉위했으나, 재위 1년만에 새로이 반란을 일으킨 피스콘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3. 최후의 파라오들 -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144~30)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혹은 에우에르게테스 2세; BC 170~164, 144~116)은 여러차례의 반란 끝에, 마침내 단독 왕위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집트의 왕위를 유지하게 되는데, 지배층의 사이에서 인기는 좋았지만, 이집트인들은 그를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대립왕으로서 필로메토르의 누나이면서 아내였던 클레오파트라 2세가 등장하게 되자, 그는 다시 고된 내전을 치러야만 했다.

 

  이 내전이 시간을 질질 끌게 되면서,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내전 이외에도, 이집트 내에서 그의 통치에 도전하는 반란이 끊이지를 않았다. 사실, 그에게 붙여진 ‘피스콘’이라는 별명 자체가 “뚱땡이”를 뜻하는, 약간은 경멸적인 것이었다. 그의 오랜 치세동안 이집트는 끊임없이 약화되고 있었으며, 외교적인 위치도 계속 몰락하였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필로메토르가 BC 145년 사망하자, 왕위 계승자가 된 피스콘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BC 131년에 피스콘에 대해 반란을 이끌면서, 이집트를 15년 넘는 파괴적인 내전에 몰아넣었다. 이 내란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마까지 끌어들이면서 116년까지 질질 끌었다.

 

  피스콘도 이런 상황을 직감하고, 치세 말기인 BC 118년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파라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BC 117년에는 상선단을 홍해로 파견함으로써, 당시 매우 활발해져 있던 인도양 무역에 뛰어들게 된다. 이 “인도양 네트워크”는 서쪽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홍해 방면 항구도시였던 상이집트의 프톨레마이스 항에서 시작하여, 인도를 거쳐 동쪽으로는 자이툰(천주)에 이르는 장대한 항로였다. 이집트는 이리하여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 할 적당한 방책을 찾게 된 것이다. 피스콘의 사후에 그리스인들은 본격적으로 이 인도양 네트워크의 무역로에 뛰어들었으며, 이것은 후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서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데, 피스콘은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하겠다는 어이없는 조처를 취함에 따라 ,결국 이집트가 다시 내분에 휩싸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피스콘이 사망하자, 권좌에 오른 것은 그의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혹은 소테르 2세;BC 116~80)였다. 라티로스는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한데,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싫어하고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이하 알렉산드로스 1세;BC 107~88)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라티로스는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머니의 비호 속에 키프로스 총독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주 자식의 아내 문제에 간섭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라티로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계략으로 인해, BC 110년에 이집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BC 109년에 잠시 이집트로 돌아왔으나, 1년도 못채우고 다시 쫓겨났다. 그는 모자지간의 정에 호소해, 마침내 어머니와 화해하는데 성공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에 부담을 느낀 모양인지, 그의 화해 요청을 수락한 것이다. 그리고 BC 108년 다시 이집트를 탈출해 키프로스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내전에 돌입할 준비를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라티로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알렉산드로스를 싫어했다. 이들의 내전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분에도 번져, 서로 다른 제위 요구자를 지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알렉산드로스는 20년 가까이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라티로스를 왕위에 세우기 위한 반란을 획책하다가, 그 계획이 들통나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 알렉산드로스도 이집트인에게 여전히 인기가 없었는데, 마침내 BC 88년 그에 대한 이집트인의 불만이 폭발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죽었다. 그러자 라티로스가 다시 왕위에 올라, 8년동안 단독으로 이집트를 다스렸다. 라티로스는 소테르 2세라고 칭하기도 한다. 로마가 폰투스 왕국을 공격할 때 지원을 요청했으나, 라티로스는 이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파괴된 아테네를 재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등 로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취했다. 민중의 지지속에 안정된 왕위를 누린 후 BC 80년에 사망했다.


  라티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베레니케 3세(BC 80)가 여왕으로 단독 왕위에 올랐다. 베레니케 3세는 그의 남편과 왕위를 공유했으며, 남편인 알렉산드로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로서 왕위에 즉위한 알렉산드로스 2세(BC 80)는, 곧 베레니케를 살해하고 왕위를 독점했다. 그러나 분노한 이집트 민중이 알렉산드로스 2세를 살해하였다.

 

  적법한 후계자가 사라지자, 이집트인의 옹립한 사람이 라티로스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BC 80~58, 55~51)였다. 그는 이집트와는 인연이 별로 없었는데,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안전을 위해 그를 많은 재물을 주어서 당시는 이미 로마령이 되어 있던 코스 섬으로 보내두었었다. 앞서 라티로스가 폰투스 왕국에 대한 공격을 거절한 것은 폰투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로마령 코스를 정복한 후 아들인 아울레테스가 그에게 인질로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울레테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아울레테스는 형제인 알렉산드로스 2세가 왕이 되자, 폰투스를 떠나 이집트로 돌아온 것 같다. 아울레테스는 즉위하자마자, 로마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민주파는 그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는 계속 로마에 뇌물을 뿌려 마침내 그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BC 65년의 폼페이우스 동방 원정때에는 군대를 보내 그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인 BC 63년, 이집트의 오랜 경쟁자였던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군의 무혈 입성으로 멸망하였다. 같은 해에 유대 왕국 역시 멸망하였다. 이집트인들도 그를 왕으로서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같지 않다. 그는 마침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뇌물의 효과는 즉시 드러났다. 그의 왕위 계승에는 더 이상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는 어쨌든 키프로스를 빼앗아갔다. 아울레테스의 형제였던 키프로스 왕은 자살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왕은 마침내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로마에 가서 뇌물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왕의 막대한 뇌물로 인해 더욱 풍족해질 수 있었다. 왕의 이런 행동에 실망한 이집트인들은 아울레테스가 섭정으로 남겨두고 간 그의 맏딸인 베레니케 4세(BC 58~55)를 이집트의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아울레테스는 에페수스의 로마군을 금 1만 탈렌트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바로 돌아와 반란 세력을 이끌게 되었던 딸 베레니케 4세를 살해함으로써 왕위를 확고히 했다.


로마의 힘에 의지하는 여전히 불안한 왕위를 유지한 후에 아울레테스는 둘째 딸인 저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 테아 필로파토르(BC 51~30)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BC 55~47)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테오스 필로파토르는 곧 로마의 내전에서 동방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폼페이우스를 지원했다. 그러자 테오도토스, 아길라스, 포티누스가 이끄는 궁정 세력은 테오스 필로파토르에게 클레오파트라를 쫓아낼 것을 권유했다. 이리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쫓겨나게 되었으나 곧 세력을 결집하여 펠루시움을 포위했다. 그 때 내전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의지해 도망쳐오자 궁정 세력은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고자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궁정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위임했던 권한에 이용하여, 그는 궁정 세력의 내분을 조정하였다. 이 때, 클레오파트라는 양탄자 속에 들어가 왕궁으로 잠입하여 카이사르를 만나게 된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테오스 필로파토르의 입지가 크게 약화된다. 테오스 필로파토르는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연합하여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궁정 세력과의 복잡한 내분이 전개되는 가운데, 마침내 페르가뭄에서 온 로마 증원군을 맞이한 카이사르에게는 거칠 것이 없어, 테오스 필로파토르와 아르시노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도망가게 된다. 그는 이 때 나일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배가 뒤집혀 익사하게 된다. 곧이어 그의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BC 47~44)가 클레오파트라의 공동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카에사레온이 태어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독재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3살 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에사레온(BC 44~30)이 공동왕이 되었다. ‘카에사레온’이란 그리스어로 “작은 카이사르”를 의미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사망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인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동맹 협상을 했다고 하지만 의심스럽다. 당대 로마인들은 그녀를 싫어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거취에 그리 신경을 쓰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BC 44년 바로 그 해 카이사르가 암살당함으로써 그녀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들 카에사레온을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로마의 내전의 동향을 주시하였다. 그녀는 3명의 후보자 중 안토니우스를 선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처세에는 문제점이 별로 없었는데, 안토니우스의 연인이 되고서부터 그녀의 무절제한 행동이 시작된다. 도처에 적을 만들었으며, 필요 이상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해서 오히려 안토니우스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힘을 계속해서 소진시켰으며, 조금밖에 성과가 나오지 않은 동방 원정을 가지고 안토니우스와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는 로마인들을 분개시켰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빠져 로마의 영토를 자기 멋대로 그녀에게 선사했으며 마침내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의 적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전쟁에서 우세한 위치에 있으면서, 열심히 싸우는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가 도망가자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안토니우스 역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자결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그녀는 스스로 코브라에 물려 숨지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는 두뇌가 명석한 여인이었고, 정치를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할 사람을 잘못 선택하였으며, 용감함이 지나쳐 무모함으로 바뀌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왕국도 잃고 그녀 자신의 후반부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가 죽고 유일한 왕으로 카에사레온이 남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제위에 방해가 될 카에사레온은 죽이고 나머지 안토니우스의 자식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등은 살려주어 각별한 예우로 로마인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BC 27년 “아우구스투스”로 불리우며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황제 직할 속주로서 기사급의 장관이 다스리는 속주가 되었다. 로마의 곡창으로 불리웠으며, 후에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게 이 지역을 빼앗길 때까지 이집트는 수도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제국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