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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王朝 [7~15 세]- (2)

영국신사77 2007. 5. 26. 01:01
                프톨레마이오스 王朝 [7~15 세]- (2)
 
      프톨레마이오스 7세[Ptolemaeos VII Neos Philopator]
 

 

   ?~BC 144.

   아케메네스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아들로, BC 145년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미성년으로 즉위했으므로, 어머니의 보호 아래 어머니와 공동통치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숙부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했다.
 
   당시의 이집트 고대 자료를 보면, 왕위계승에 있어서 프톨레마이오스 7세의 입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는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적어도 1명 이상 있어서, 재위 초기에 부자가 공동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여러 자료로 보아, 프톨레마이오스가 BC 147년에 공동 통치자가 된 것 같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2세의 지지를 받아, BC 145년 7월에서 8월말 사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부왕의 군대들은 시리아에 분산되어 있었고, 이때문에 이들 모자는 제한된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반대파들이 젊은 왕의 숙부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왕위 찬탈을 권유하자,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퇴위당했다.
 
   이듬해인 BC  14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고,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처형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Ptolemaeos VIII Euergetes II]

 
 

    피스콘[Physcon;그리스어로 '배불뚝이'라는 뜻] 또는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 2세라고도 함.

   ?~BC 116.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던 중 분할 통치를 했고, 로마에 추종하면서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개입을 부추겼다.
 
    BC 170~164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통치를 했으나, 그 이듬해에는 혼자 이집트를 다스렸다.
 
    BC 163~145년에는 키레나이카(지금의 리비아에 있음)의 왕으로 있었으며, BC 131~129년 잠시 추방당했던 때를 제외하고, BC 145년부터 BC 116년[29년간] 죽을 때까지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아들 프틀레마이오스 7세와 공동통치를 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미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끊임없이 다툼을 벌여 내란이 일어났고, 이는 이집트의 경제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올챙이라는 뜻)은 형인 프톨레마이오

스 6세 필로메토르가 사망하자, 그의 누이이자 형의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아들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필로파토르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카의 즉위식과 자신의 결혼식을 함께 거행한 다음, 제일 처음 한 일이 방금 제위에 오른 조카를 살해하는 일이었다. 그러자 새로운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삼촌이며 의붓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칼을 피해 자신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2세의 품으로 달려갔지만, 생명을 연장는데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왕을 죽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은, 다시 형수이며 자신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이혼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였다.

 

   이 둘 사이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둘 사이에서 후일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부부간의 의무는 어느정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통치 말기인 BC 118년 왕국을 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BC 1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탐험대가 홍해와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달하는 최초의 대양 항해를 완수했다. 이것은 이집트가 향료 무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Ptolemaeos IX Soter II]

 
 

    별칭은 Lathyros

   (그리스어로 '병아리콩'이라는 뜻).

   ?~BC 80.

    BC 2~1세기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로 태어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및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짝을 이루어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스렸다.
 
  BC 88년 단독으로 통치를 하게 된 뒤부터는, 동방과의 무역을 발전시키며 로마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는 이해할 수 없는 조처를 취함에 따라, 그의 왕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이 모후는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알렉산드로스를 더 좋아했으나, 국민들의 감정에 못이겨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제휴해 왕위를 유지했다.
 
  그녀는 BC 115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그의 여동생이며 왕비로서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도록 강요하고, 대신 좀더 온순한 성격인 그의 막내 여동생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재혼하도록 했다. 이듬해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나간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 간에 잠재해 있던 적대감은 BC 110년 10월 어머니가 그를 이집트에서 쫓아내고, 둘째 아들을 키프로스에서 불러들이면서 마침내 폭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BC 109년초 이집트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3월 어머니는 또다시 그를 쫓아냈다.
 

  BC 108년 5월 어머니와 화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3번째로 이집트에서 도망쳐 키프로스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BC 107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요구하는 한 계승권자를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이에 맞서 유대인의 왕과 동맹을 맺고, 전력을 다해 또다른 셀레우코스 왕위 요구자를 지원했다. 오래 계속된 전쟁 끝에 어머니가 죽자(BC 101),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키프로스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인들로부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2번째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항해 도중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혼자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딸로서 죽은 동생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3세를 불러들여, 그녀와 함께 왕위를 유지했다. 그가 BC 88년 이집트로 돌아오기 직전에 상(上)이집트의 테베에서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으나, 3년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테베는 항복했고, 그 보복으로 약탈을 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흑해에 면해 있던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달라는 로마의 요구를 거부했다. BC 88년 로마가 아테네를 약탈한 뒤,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이 도시의 복구를 도왔고, 이런 이유로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BC 80년에 죽었고, 딸인 베레니케 3세가 그 뒤를 이었다.

 

 

 

 

 

 

                베레니케 3세[Berenice III]
 
 

   ?~BC 80.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딸로, 이집트 왕족 중에서 가장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격렬한 내란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이거나 또는 클레오파트라 4세의 딸이며, BC 101년 이전 숙부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첫번째 결혼을 했다. BC 101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미망인이며 태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죽자, 정식 여왕이 되었다.
 
   BC 87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클레오파트라 3세를 암살했다고 여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이집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한 후 이집트로 돌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도굴해, 자신의 용병에게 임금을 지불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를 다시 추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베레니케와 함께 소아시아의 리키아로 피신했다. 리키아에서 남편이 살해된 후, 베레니케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귀국 후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했으며, BC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죽자,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데르는, 로마의 딕타토르(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돌아와 베레니케 여왕과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베레니케나 알렉산드리아 시민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베레니케가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녀를 살해하려 했으나, 도리어 분노한 알렉산드리아인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식 통치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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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10세 [Ptolemaeos X Aleksandros I]

 

 

  ?~BC 88.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107~88 재위).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의 주도 아래,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더불어 이집트를 번갈아 통치했으며, BC 105년경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벌어진 내란에 개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인 그는,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반대로 인해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는 데 실패했다. 그뒤 BC 114년 키프로스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BC 110년 클레오파트라 3세와 공동통치하던 그의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어머니의 책략으로 이집트에서 쫓겨나자, 프롤레마이오스 10세는 키프로스에서 돌아와, 형의 뒤를 이어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를 공동통치하게 되었다.

 

  BC 109년초 가족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뒤, 형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다시 돌아와 왕위를 차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키프로스 섬의 왕이 되어 그곳으로 떠났다. 이후 형과 어머니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재차 벌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BC 107년 이집트로 돌아와, 다시 어머니와 공동통치했다. 그러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공식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사실상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어머니에 반대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벌어진 내란에 휘말렸다.

 

  BC 101년 어머니가 죽자 전쟁은 끝났고, 그는 형과 화해하는 한편, 형의 딸인 베레니케 3세와 혼인했다.

 

  그는 이집트인의 권리를 확대했으나, 이들은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며 계속 압력을 가했다.

 

  BC 88년 상(上)이집트의 테베 지역에서 자신들의 왕조를 세우려는 이집트인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쫓아냈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용병들을 모아 이듬해 돌아왔으나, 군대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제전(葬祭殿)을 파헤치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분노를 사, 또다시 쫓겨났다. 그뒤 소아시아의 리키아 해안지방에 대한 습격을 꾀하다가, 피살당했다.

 

  그와 같이 떠났던 베레니케 3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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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11세 [Ptolemaeos XI Aleksandros II]
 

   BC 115경~80.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적통왕(嫡統王).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3세와 혼인한 뒤, 그녀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다. 뒤에  베레니케 3세 왕비를 살해하고 왕권을 독점했으나,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피살당했다.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이다. 이집트를 공동통치하고 있던 할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아버지가, 셀레우코스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안전을 위해 상당한 양의 재물과 함께 에게 해에 있는 코스 섬으로 보내졌다.
 
   아버지가 죽던 BC 88년경, 아나톨리아 북부에 있던 폰투스 왕국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는, 로마의 장군을 물리치고 코스 섬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점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를 포로로 생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잘 대접받고 교육까지 받았으나, BC 84년 미트라다테스가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는 틈을 이용해, 로마의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로 도망쳤다.
 
  로마로 호송된 그는, BC 81년 큰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죽을 때까지,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질로 로마에 머물렀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죽은 뒤, 왕비 베레니케 3세가 단독으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자, 술라는 독단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귀국시켜 그녀와 혼인하게 했다.
 
   베레니케와 공동통치한 지 약 19일 뒤, 자신이 단독으로 통치할 것을 계속 주장하던 왕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
 
   베로니케 3세 왕비를 매우 존경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그 보복으로 그를 죽였고,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적통은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Ptolemaeos XII Auletes]

 

  정식 이름은 Ptolemaeos ⅩⅡ Theos Philopater Philadelphus Neos Dionysos Auletes.

(Auletes는 그리스어로 '플루트 연주자'라는 뜻)

   BC 112경~51.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적법하지 못한 왕위 계승자라는 위치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로마에 의지해 왕위를 지켜야 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완전히 로마 공화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 2명이 갑작스레 변사를 당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BC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불러들여 왕위에 앉혔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의 여왕으로 그의 할머니였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안전을 위해 BC 103년 후일의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소아시아 반도에 면한 에게 해의 코스 섬으로 보냈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로, 그보다 앞서 왕위에 올랐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도 함께 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해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폰투스 왕국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BC 88년 붙잡혔으나, BC 80년 시리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의 역사가이며 정치가인 키케로에 따르면, 이때 그는 자신의 형제가 키프로스의 왕이 된 사이, 시리아를 떠나 이집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집트로 돌아온 직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여동생으로 보이는 클레오파트라 5세와 결혼해, BC 76년 이집트의 의식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로마의 민주파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죽을 때, 이집트를 로마에 넘기도록 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는 의심스러운 사실을 들고 나와, BC 65년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키케로를 비롯한 로마의 귀족들은 이같은 이집트 병합에 반대했고, 로마의 지지가 필요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보내, 집정관인 폼페이우스 장군을 지원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데다가, 로마에서의 위치도 여전히 불안했던 그는, BC 59년 당시 로마 집정관의 일원으로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6,000탈렌트의 뇌물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왕위를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로마는 이듬해 키프로스를 빼앗았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키프로스의 왕은 자살을 했다.
 

   키프로스를 상실한 데 대해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의 왕비와 맏딸인 베레니케 4세를 섭정으로 이집트에 남겨놓고, BC 58년 로마로 떠났다.
 
  그는 로마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별장에 기거하면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뇌물을 사용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이 보낸 대표단을 암살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때 왕비가 죽자, 시민들은 베레니케 4세를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로 세웠다. 원로원이 답변을 미루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계속해서 뇌물을 나누어주었고, 따라서 그는 로마의 사채업자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다.
 
   BC 57년말,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지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적극적인 지원은 피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자, 그는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인 에페소스로 갔다.
 
   BC 55년 프톨레마이오스는, 폼페이우스의 부관이며 시리아 속주총독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1만 탈렌트를 주기로 약속하고, 로마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킨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반대세력을 이끈 맏딸 베로니케 4세을 처형했다.
 
   죽기 바로 전인 BC 51년, 그는 둘째 딸이었으나 이제는 맏딸이 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맏아들을 공동 섭정으로 선포했다.

 

 

 

 

 

                   베레니케 4세 [Berenice IV]

 

 

  ?~BC 55.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맏딸.

 

  클레오파트라[7세] 여왕의 언니로, BC 58~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에 없는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후 이집트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처형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58년 시민 봉기가 일어나려 하자, 이집트에서 도망쳐 로마로 갔다. 그가 이집트를 떠난 직후 왕비가 죽자, 베레니케가 여왕에 추대되었다.

 

  BC 5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뇌물과 술수를 동원해 로마 제국을 매수해, 이집트로 돌아가 복위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이에 맞서, 그들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비난을 반박하고, 그의 실정(失政)을 보고하기 위해 대표단을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대표단 일행과 자신을 의심하던 몇몇 로마인까지 살해한 후, BC 57년말 소아시아에 있는 에페소스로 갔다. 다른 일이 터져 로마에서 그 사건이 잊혀지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지원을 얻어내게 되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인들은 베레니케 4세와 짝지을 왕자를 물색했다.

 

  BC 56년, 베레니케는 폰투스 왕국의 왕자라고 전해지는 아르켈라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비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해, 이듬해 프톨레마이오스를 복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베레니케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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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13세[Ptolemaeos XIII Theos Philopator]
 

  (Theos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신'이라는 뜻)

  BC 63~47 알렉산드리아 근처.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자신과는 남매간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말기에, 이집트군을 이끌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에 대항하다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죽은 뒤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다.
 
  BC 49년 아버지의 옛동맹 세력들을 계속 유지할 생각으로, 로마의 장군이자 삼두정의 일원이었던 폼페이우스에게 함선과 군대를 지원했다. 뒤이어 테오도투스와 내시인 포티누스, 그리고 아킬라스 장군이 이끄는 궁정의 일파가, 프톨레마이오스와 의지가 강한 그의 누이 사이에 경쟁 의식을 부채질하면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와 함께 BC 48년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에서 쫓아냈으나, 그녀는 재빨리 아랍인들로 군대를 조직해, 이집트의 북동쪽에 있는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포위했다.
 
  반대 세력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 테살리아의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폼페이우스가,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펠루시움에 나타났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고자 한 궁정 일파의 지시에 의해 그는 살해당했다.
 
  얼마 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왕궁을 접수했으며, 싸움을 벌이고 있던 파당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자신의 중재안에 따르도록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킬라스 장군을 군대와 함께 남겨놓고, 포티누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막사로 갔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사이 클레오파트라는 양탄자에 몸을 말고 몰래 왕궁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족들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서로 화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포티누스 일파는 로마와 이집트인 협력자들에 대해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켰다. 아킬라스가 군대를 끌고와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자, 프톨레마이오스의 막내 여동생인 아르시노에는 이집트 원주민 군대로 몸을 피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포티누스를 처형하도록 설득하는 사이에, 아킬라스는 아르시노에와 다툰 뒤 피살당했고, 이로써 궁정의 파벌은 사실상 무너졌다.
 
  카이사르는 아르시노에와 그녀의 스승이 이끄는 원주민 군대의 강한 압력을 받아, 프톨레마이오스 대신 아르시노에를 이집트의 왕위에 앉히는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으나, 카이사르는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인 페르가몬에서 온 증원군의 도움을 받아, 책략을 써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때 죽었는데, 도망치려다 익사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PtolemaeosⅩⅣ

                                  Theos Philopator Ⅱ]

 

(Theos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신'이라는 뜻).

BC 59경∼BC 44. 7.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BC 47~44년 유명한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동 통치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BC 44년 그를 암살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자신의 형제인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벌어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죽자, 카이사르에 의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공동 즉위했다.

 

  BC 46년 클레오파트라 7세가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로 갔을 때, 그도 동행했다. 로마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고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귀국한 뒤, 아마 그녀의 지시로 이 젊은 왕은 살해되었을 것 같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그녀의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프톨레마이오스 15세[Ptolemaeos XV Caesar]
 
 

   정식 이름은 Ptolemaeos Philopator Philometor Caesar. 별칭은 Caesarion.

   BC 47. 6~30. 17세에 피살됨. 

   율리우스 카이사르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 태어난 이집트의 왕(재위 BC 44~30, 14년간  집권).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와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BC 30년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살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일부 고전 작가들이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아버지가 카이사르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BC 46년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오자,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했다.
 
   카이사르가 BC 44년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갔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친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도록 교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은 왕위 계승으로는 자신이 첫번째의 서열에 있었으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삼두정의 일원으로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정을 통하기 시작한 뒤인 BC 34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 '왕 중의 왕'이라 칭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가리켜 '왕 중의 여왕'이라 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31년 삼두정의 다른 일원인 옥타비아누스와 벌인 악티움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상(上)이집트의 홍해 연안에 있는 항구인 베레니케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꼬임에 빠져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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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근친혼   
http://blog.naver.com/nonamegi75/140006106689

   고대 이집트의 창조신화에 보면, 남신 슈와 여신 테프네트 사이에 두 남매 게와 누트가 태어났다고 한다. 대지의 신인 게브는, 천사의 신이자 자신의 누이누트와 결혼하여,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를 낳았다.

 

  이들 가운남신인 오시리스와 세트는 각각 자신들의 동생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아내맞이하였다. 특히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결합으로 태어난 호루스는, 이집트 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시스,

오시리스와 함께 3대 신으로 추앙받다.

 

  호루스는 고대 이집트 왕들이, 자신을 '살아있는 호루스' 라고 할 정도로 배받았던 신이었다. 파라오는 자신이 호루스가 상징하는 태양신 라의 자손이고 하였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현재의 파라오는, 태양신 호루스의 현현으로 보았고, 은 파라오는 죽은 자의 신인 오시리스가 현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재왕비와 죽은 파라오의 왕비는, 생명을 주는 이시스 신의 현생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이집트인들의 사고방식을,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아래와 같은 명확한 삼단논법으로 표현하였다.

 

 

      '아버이인 신과 아들인 신이 존재성과 영원성을 함께 가진다면, 신의 어머니는 신의 아내이기도 하 다. 고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의 아내이다'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누이와 노골적으로 혼인한 사례는 많지 않다. 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라오가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예가 가끔 있었다.

 

   근친혼의 예를 보자면, 18왕조의 파라오 아모스가 자신의 누이인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고, 투트모세 2세가 이복자매인 하트세프수트와 결혼하였다.  투트모세 3세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계모인 하트세프투스는 투트모세 3세가 어른이 될 때까지, 섭정이 아닌 완전한 파라오로 통치했다. 이는 하트세프투스가 '신의 아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파라오의 왕비는 남편인 파라오가 죽어도 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신성이 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왕조의 이런 사고방식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그대로 스며들어, 클레오파트라 1세, 베레니케 3세, 아르시노에 3세, 베레니케 4세, 클레오파트라 7세 등과 같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공동통치를 하거나, 부친의 부재중에 왕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근친혼의 이유는, 신성을 부여 받은 사람은 신이기 때문에, 일반인과 결혼할 없다는 사고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신과 직접 사을 나누게 되면, 그 뜨거운 불꽃에 타버린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신성의 재와 인간이 결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진 왕이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신성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형제, 자매 밖에 없다는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이집트에서 신화를 통해 하나의 의식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이집트를 계승한 이방인들이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 부터였다.

 

   이집트를 통치하게된 그리스인들은, 이 나라의 파라오법을 통해서, 왜 자신들이 근친혼을 할 수 밖에 없는가를 최소한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근친혼은 파라오의 신성을 계승하고 이어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가계도(家係圖)를 보면, 근친혼의 모습을 한 눈에 파악할 수 다. 그런데 근친혼도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까지는, 어떤 유형존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파라오는 2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4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만이 누이와 결혼한 반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게스테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는 이방의 여성과 결혼하였다. 이런 교차적인 혼인은, 근친혼에 따른 어떤 폐해를 막아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이후의 이 왕조 근친혼의 가계도는, 사람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고 하면 근친상간을 연상하게되는가를 보여고 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올챙이라는 뜻)은 형인 프톨레마이오

스 6세 필로메토르가 사망하자, 그의 누이이자 형의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아들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필로파토르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카의 즉위식과 자신의 결혼식을 함께 거행한 다음, 제일 처음 한 일이 방금 제위에 오른 조카를 살해하는 일이었다. 그러자 새로운 파라오는, 삼촌이며 의붓 아버지인 피스콘의 칼을 피해 자신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2세의 품으로 달려갔지만, 생명을 연장는데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왕을 죽인 피스콘은, 다시 형수이며 자신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이혼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였다.

 

   이 둘 사이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둘 사이에서 후일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부부간의 의무는 어느정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의 지배권과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한 이집트 파라오의 근친혼 제도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이후 왕권을 승계기 위한 야심가들의 편법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이집트인들이 고래로부터 지녀온 '파라오 법'의 근본 정신인, 신적인 결합을 통해 신적인 통치력을 계승한다는 핵심적인 정신은 사라지고, 외형적인 형식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실제로 왕권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던 파라오의 근친혼이, 략적 이용으로 변질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5세 이후 이집트의 정정이 불안정하되는 커다란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