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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니케 [Berenice] 1세 ~ 4세

영국신사77 2007. 5. 26. 01:19
                베레니케 [Berenice] 1세 ~ 4세
 
 

            베레니케 1세 [Berenice I]

 

 

  ?~?

  BC 317경~275년경에 활동한 이집트의 왕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3번째 부인이자, 아르시노에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의 어머니이다.

 

   처음에는 베레니케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2 번째 왕비 에우리디케의 시녀로 이집트에 왔다. 에우리디케는 당시 마케도니아의 섭정인  안티파테르의

셋째 딸로,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정략상 그녀와 결혼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베레니케와 결혼하면서, 왕족이 아닌 그녀를 마치 왕의 의붓누이인 것처럼 가계를 꾸몄다.

 

  BC 308년 베레니케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를 낳았으며, 그후 결혼 27년째 되던해인 BC 290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베레니케를 이집트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BC 285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에우리디케의 소생을 무시하고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2번째 부인은, 자신의 누이이자 베레니케 1세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가 되었다.

 

 

 

               베레니케 1세와 프톨레마이어스 1세

 

 

  BC 322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BC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그 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베레니케 2세 [Berenice II]

 

 

  BC 269경~221(48세).

  키레네(지금의 리비아에 있음)의 왕 마가스의 딸.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와 결혼해 키레네와 이집트를 다시 결속시켰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가와 동맹을 맺으려 했던 마가스의 왕비는, 마케도니아의 디미트리오스 왕자를 베레니케의 남편감으로 지목함으로써, 베레니케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결혼을 방해했다. 그러나 베레니케는 디미트리오스를 살해하고, BC 245년경 프톨레마이오스와 결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시리아에서 살해된 누이(안티오쿠스 2세의 미망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출정할 때, 베레니케는 남편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머리카락 한 타래를 바쳤다. 왕실 점성가는 이 머리카락이 하늘로 올라가, 나중에 '코마 베레니케', 즉 '베레니케의 머리카락'이라고 명명된 별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베레니케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된 필로파로르를 비롯해, 아르시노에 3세, 마가스, 어려서 죽은 베레니케 등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베레니케 2세는 남편보다 오래 살았지만, 아버지 마가스와 함께 음모를 꾸민 혐의를 받고, 도리어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게 독살당했다.

 

 

 

              베레니케 3세 [Berenice III]

 

  ?~BC 80.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딸로, 이집트 왕족 중에서 가장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격렬한 내란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이거나 또는 클레오파트라 4세의 딸이며, BC 101년 이전 숙부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첫번째 결혼을 했다.

 

  BC 101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미망인이며 태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죽자, 정식 여왕이 되었다.

 

   BC 87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태후인 클레오파트라 3세를 암살했다고 여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이집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한 후, 이집트로 돌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도굴해, 자신의 용병에게 임금을 지불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를 다시 추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베레니케 3세와 함께 소아시아의 리키아로 피신했다. 리키아에서 남편이 살해된 후, 베레니케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귀국 후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했으며, BC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죽자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데르는, 로마의 딕타토르(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돌아와 베레니케 여왕과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베레니케 3세나 알렉산드리아 시민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베레니케가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녀를 살해하려 했으나, 도리어 분노한 알렉산드리아인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식 통치는 막을 내렸다.

 

 

 

 

                  베레니케 4세 [Berenice IV]

 

 

  ?~BC 55.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맏딸.

 

  클레오파트라[7세] 여왕의 언니로, BC 58~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이집트에 없는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후 이집트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처형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BC 58년 시민 봉기가 일어나려 하자, 이집트에서 도망쳐 로마로 갔다. 그가 이집트를 떠난 직후 왕비가 죽자, 베레니케가 여왕에 추대되었다.

 

  BC 5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뇌물과 술수를 동원해 로마 제국을 매수해, 이집트로 돌아가 복위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이에 맞서, 그들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비난을 반박하고, 그의 실정(失政)을 보고하기 위해 대표단을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대표단 일행과 자신을 의심하던 몇몇 로마인까지 살해한 후, BC 57년말 소아시아에 있는 에페소스로 갔다. 다른 일이 터져 로마에서 그 사건이 잊혀지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지원을 얻어내게 되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인들은 베레니케 4세와 짝지을 왕자를 물색했다.

 

  BC 56년, 베레니케는 폰투스 왕국의 왕자라고 전해지는 아르켈라우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가비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해, 이듬해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베레니케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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