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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혁명과 하스몬왕조/하시딤 2

영국신사77 2007. 5. 23. 23:13
                 마카비혁명과 하스몬왕조/하시딤2 
 
 
출처 블로그 > oxhill4952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oxhill4952/110004943481
 
 
 

1.하시딤(Hasidim)


                                      1-1.하시딤

  하시딤(Hasidim)이란 용어의 어원은,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세드는 우리 한국말로는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어려운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하면서도 한 가지 뜻으로만 번역할 수 없어서 여러 가지로 번역된 용어이다.

 

 

하시딤의 용어에 대한 여러 가지로 번역된 내용

 

    인애(仁愛)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신7:9)

    충절(忠節)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롯1:8)

    신의(信義)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삿1:24)

    우정(友情)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삼상 20:8 삼하9;1)

    모범(模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잠31:26)

    관용(寬容)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왕상20:31)

    경건(敬虔)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친절(親切)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바벨론에서 귀환해 온 유대인들 세계에, 헬레니즘의 문화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서 세속화가 가속화될 때,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하면서 경건과 충절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시딤(Hasidim)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하시딤 중에서 율법주의적, 형식주의적 하시딤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바리새인이고, 신비주의적, 금욕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사람들이 엣세네 파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들과, 끝까지 유대인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의 사상을 고수하려는 사람들도 헬라어를 모르면 소통이 안되니, 할 수 없이 헬라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팔레스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런가 하면 반나체의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혐오하면서, 경건을 지키려는 하시딤의 보수적인 경향도 두르러지게 강화되었다.

 

  무분별하게 헬라화 되는 유대인들을 개탄하면서 일어난 하시딤의 운동도, 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고 지지자도 많았다. 이때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완전히 헬라화하기 위하여, 하시딤 같은 유대정통파와 유대교를 박해하며 이방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그 신상을 섬길 것을 요구하였다.

 

  모딘(Modin)이란 작은 마을에서 노제사장 맛다디아스에게, 이방 신에게 모범적으로 좋은 본을 보이라고 강요하였으나, 맛다디아스는 이방신의 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런데 어떤 겁쟁이 유대인이 안티오커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제단으로 나아가자, 이에 격분한 맛다디아스는 제단으로 나아가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커스의 사절까지 죽여 버렸다. 그는 다섯명의 아들과 함께 이방신의 제단을 헐어 버리고 산으로 피신하여, 안티오커스의 군대로부터 피신하면서 투쟁을 준비하였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합세하였다. 처음에는 게릴라전을 벌였다. 산지 요새에 있다가 틈만 보이면 안티오커스의 군대를 습격하여 관리들을 살해하였고 헬레니즘에 물든 사람들도 살해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방어를 하지 않고 있다 학살을 당할 뻔한 후로는, 안식일에도 방어를 하는 것으로 수정을 했고, 오래지 않아서 맛다디아스가 죽고 그 아들들 가운데 유다 마카비우스가 계승하였다.  그가 유격전을 감행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자, 많은 유대인들이 마카비의 깃발아래로 모여들었다.


                  1-2. 유대왕국과의 관계 그리고 하시딤운동


  유대왕국에서는 안티오코스 4세와 개혁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그리스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있었는데, 일련의 것들이 유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체육학교를 개설하고, 모든 젊은이들과 제사장들까지 나체로 운동을 시키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을 사게되었다.

 

  한편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사독가(家)출신 대제사장 시몬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 3세가 대제사장 직책을 위임받게되었다. 그는 친 이집트 세력인 보수파에 동조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안티오코스의 눈에 가시와 같았기 때문에 기원전 175년 결국 축출되었으며, 제사장 직책은 그의 형제인 '야손'이 안티오코스에게 거액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매수하였다.

 

  야손은 자기 형과는 반대로, 개혁파에 동조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식 도시로 재건한 후, 시리아의 수도를 본받아 안티오크로 개명할 것을 재가해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기원전 172년, 성전관리인 시몬의 형제인 '메네라오스'가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게 되었다. 결국 야손 또한 축출되었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유대주민들의 반발 속에서 보수파에 의해 '아크라'라는 그리스식 요새에 감금 당해 버린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러한 행동을 반란의 신호라고 단정해버리고, 시리아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군시킨다. 시리아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추방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 퇴역군인들 및 시리아인 식민지개척자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재개발 한 후, 아폴로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총독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그리스의 신 제우스와 그의 동료신들(아테나와 디오니소스)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제우스신을 섬기며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하였으며, 거부하는 자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당했다. 


  그러자 이와같은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화 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에, 강한 반발이 불일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건'을 의미하는데, 이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회개운동' 이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티오코스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주위에 울타리를 칠 것을 주장했다. 일몰에서 시작해서 일몰로 끝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일몰 몇시간 전부터 안식에 들어가고, 다음 일몰 몇시간 이후까지 안식을 취했다. 

 

  그러나 하시딤 운동에 참가한 자들은 안디오코스 4세의 칙령에 따라 무참하게 살해됨으로 수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견디다 못한 하시드들은, 대다수가 유대 사막지대로 피신했다. 그러자 시리아 관리들은 하시드들의 은거지를 색출하여 잠복해 있다가, 안식일에 처들어가 학살을 단행했다.

 

  하시드들은 안식일을 지키기위해, 습격을 당해도 도망도 저항도 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따라서 공격자들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위반자들을 쉽게 처형할 수 있는 잇점을 살리려고, 안식일을 택해 공격을 가하곤 했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1천여명을 살해한 기록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 어머니의 일곱 아들이, 모두 하시딤운동에 가담했다가 전원이 순교를 당한 사례도 발견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시드파 즉 하시딤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람들, 즉 율법학자들을 하시드라고 한다. 이 하시드들이 나중에 분열이 일어나 여러 분파로 나뉜다. 

 

  성경에서 흔히들 바리세인과 사두게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다 하시드파에서 발생한 것으로, 율법에 이어서 정통성을 결합시켜버림으로써, 1세기당시 이스라엘의 빈자들에게 많은 고초를 주었다.  이들과 분리원칙을 따지던 계파로는 에세네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묵시주의적인 페쇄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