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 혁명과 하스몬(Hashmon) 왕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대표적으로 헬레니즘의 꽃을 피운 곳은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알렉산더의 수명은 짧았지만 그가 전파한 헬라 문화는 상당히 오래 지속하였다. 애굽과 시리아가 150년 전쟁을 치르면서도 그 문화는 여전히 헬라 문화였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헬라 문화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와 버가모 지방에서는 오히려 헬라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럼 헬라 문화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1. 공회당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건축 문화였다.
2. 신체를 수련하는 연무장(체육관)이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3. 민중이 함께 즐기는 노천극장이 여러 곳에 건설되였다.
4. 자유로운 사유와 발표가 있어서 국민의 교양을 높여 갈 수 있었다.
5. 그리스식 의상을 즐겨 입었다.
6. 그리스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앞선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7. 그리스의 어느 철학파에 속하여 자긍심을 높여 갔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개방적 사고방식으로서 자유 시민의 기상을 길러 나가는 풍습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벨론 포로 이전의 유혹은 가나안인들의 우상숭배였으나 바벨론 귀환이후에는 헬라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그들은 여러 도시에서 집단적으로 살면서 “쉬나고게”라는 회당에서 민족교육을 해 가면서 현지 문화에 동화되기도 하고 헬라 문화에 유혹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도 상당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가리켜서 70인역(Septuagint=LXX)이라 한다. 모세오경은 아마도 B.C. 250년 경에 번역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서 구약 전체가 결국 다 번역되었으며 더 나아가 외경들까지도 번역을 하였고 그 사본 중에 한 부가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치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 그 나름대로 열심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진취적이면서도 개화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증거로서 율법을 헬라어로 번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프톨레미의 도서관 사서였던 데메트리어스가 유대인의 율법에 관하여 왕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왕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을 보내어,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장로 72명을 보내 선출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12지파에서 각 6명씩 72명이 선출이 되어 알렉산드리아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파라오 섬에서 72인이 72일에 걸쳐서 번역을 했는데, 각각 별실에서 따로 했는데 72일후에 72개의 번역본을 대조하였더니 완전히 일치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70인역이 영감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72개의 번역본의 일치설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에 이러한 번역문학이 시도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신약시대에 와서 보면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 번역판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또 이로 말미암아 선교가 쉬웠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신약성경에서 인용하는 구약은 대개 70인역에서의 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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