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애가 없으면 충무공도 없다 |
류성룡 선생 逝世 400년 추모제전
이순신·이여송·고니시 후손 참가… 화해의 장도 마련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7.05.07 23:11
-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서울을 떠난 임금의 피란행차가 임진강 건너편에 이르렀다. 도승지 이항복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형편이 부득이하다면 명나라로 망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
-
그 말을 들은 좌의정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한 걸음이라도 나라를 벗어나게 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 만약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민심은 한꺼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항복은 뒤에 가서야 그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고 문집인 ‘백사집’에 기록했다. 그 좌의정이란 다름아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었다.
-
그는 전란 극복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전쟁 발발 직전 전라도 정읍 현감이었던 이순신의 존재를 알아보고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사람도, 전쟁 중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정치와 외교, 군사작전을 총괄해 국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했던 사람도 바로 서애였다.
올해 2007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오는 10일부터 20일까지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열리는 ‘서애 류성룡 선생 서세(逝世) 400주년 추모제전’은 서애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행사다. 국가의 위기상황을 타개한 지도력과 정파를 뛰어넘은 화합의 메시지는 21세기 한국에도 여전히 절실한 덕목이다.
-
10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의 주제발표를 맡은 정만조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원래부터 서애의 경세론에 실용적인 특징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래서 조정을 들끓게 했던 붕당(朋黨)의 폐해를 비판하며 “권력이 분산돼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권력 주체가 있는 권신(權臣) 체제가 낫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애는 ▲임금이 5일마다 조회를 열어 정사를 집무하는 조종시사법(祖宗視事法) ▲의정부의 대신이 정무를 의논해 품처(稟處·윗사람의 명령을 받아 일을 처리함)하는 대신서사법(大臣署事法)을 건의했다. 이는 군주가 국정운영의 주체가 되고 관료제가 뒷받침하는 정치형태를 추구한 것으로, 사림(士林)의 공론을 앞세워 붕당을 옹호했던 주류 정치관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한다. 서애는 특히 “초야에서 공론을 빙자한 무뢰배들의 사악한 주장이 쏟아지면 국정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며 우려했다.
학술대회는 11일 육군사관학교 홍무관과 15일 안동 시민회관 대강당에서도 열린다. 노영구 국방대 교수가 ‘서애 선생의 국방사상과 국방정책’(11일)을, 이태진 서울대 문과대학장이 ‘재상 류성룡의 구국전략 재조명’(15일)을 발표한다. 12일 개막행사에는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후손들도 참가, 화해의 손을 맞잡을 예정이다. 이 밖에도 개막행사와 서화전, 유물전시회, 무용·국악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린다. 〈표 참조〉 (02)3413-7474~5, (054)857-1767
|
|
요약 |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던 문신 겸 학자.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였으며 군대양성을 역설하였다.
| | |
본문 |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 의성 출생.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 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 ·경상 ·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그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바둑의 애호가였다. 1995년 9월 특별대국에서 이창호(李昌鎬)와 맞대결한 유시훈(柳時熏)은 그의 14세손이라고 한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 《징비록(懲毖錄)》 등이,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
|
이미지 |
|
류성룡이 왜군이 처들어 올 지 대비를 반대한 이유
nangsa1 (2007-05-01 )
식민지 사관에 세뇌받은 사람들은 당파싸움 때문이라고 간단히 밀어 붙이는데요...
그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으나,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현실성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 5천만중에 50만 군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사실 버겁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그나라 국민총생산액중 퍼센트로 따져서 우리나라만큼 군비를 지출하는 나라도 열손가락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
그런데 조선시대 그당시 인구 다 합쳐봐야 2백만~5백만(한말에 5백만이었음)에 불과한 상황에서 10만 군사를 유지할수 있었을까요? 더우기 그 시대의 군역은 양인들만이 대상이었고, 이 양인들은 "농사"라는 국가의 존폐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을 하여야만 합니다. 몇 백만에 불과한 인구중, 양반빼고, 여자빼고, 아이들, 노인 빼고 나머지 사람들중 10만을 정규군으로 유지한다... 이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막강했던 고구려 시절,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군도 정규군은 10만이 안되었었습니다. 그때 그때 징병을 해서 군사를 만들어 전쟁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돌아가며 군사훈련을 시켰었죠.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유럽 그 어느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세금의 원천인 농사군등 양인들을 군사훈련으로 묶어놓으면 임금도 굶어야만 하는게 당시였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경제활동은 농사외에는 미비했기때문에 국가의 모든 수입은 대부분 농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되었었습니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이의 10만양병설이 전설이 되고, 반대했던 유성룡과 그일파가 욕을 먹고 있지만, 그 당시 10만양병설을 받아들여 군사를 키웠다면 몇년 안가 나라 전체가 뿌리체 뽑혔을 것입니다.
또, 10만의 군사를 훈련시키면 나라전체가 불안에 떨고 소요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농민들이 불안해 유민(떠돌이)이 되면 국가는 세금을 거둘 상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유민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내내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세뇌교육을 시켜 농민들을 혹사시켜 세금을 거둬온 것이지요.
어쨋든, 당파의 영향이 전혀없지는 않았겠으나,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가장 큰 이유로 반대했다고 분석되고 있습니다.
kaustin316 (2007-05-04 00:44 작성)
왜 유성용이 반대했는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당시의 역사와 기록을 볼때는 조선이 유래없는 태평성대의 시대였다는 겁니다...
그당시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고 통일과업을 이루었지만 전통적 지방세력이였던 영주와 사무라이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이있었고요...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했지만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지방세력들의 불만을 잠재울 생각으로,전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나라와의 전쟁이 필요했습니다.. 공동의 목표가있다면 잠시나마 전국을 공동체로 만들수 있었고 내전에 휩싸일 염려도 없었던거지요..그래서 가장가까운 조선을 전쟁상대로 택하고 대륙침략에 꿈을 가지고 차곡차곡 전쟁준비를 합니다...
율곡 이이는 왜나라에 사찰로 보내지게 됩니다..그당시도 국가간 교류는 활발했으면 서로간에 오가던 상태였습니다...지금으로 친다면 율곡이이는 국가정보요원으로 파견된거지요..이이는 자신이 왜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모두 얘기하며 조선은 왜나라에 대비해서 군사를 10만명은 확보해야한다고 했죠...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당시 조선은 눈을 감고살았습니다. 자신이 보지못한것에대해 믿으려 하지않았고요...조선이라는 나라가 武는 무시하고 文을 중시했던 나라였던 것은 아시겠죠...지금으로 치면 군인들은 무시하고 사무직 공무원만 우대했던 특이한 나라였습니다...그리고 전쟁이 없이 나라는 평온한 태평성대의 시대였구요...문인들만 들끓어 넘치니 당파싸움은 심해지고 말싸움만 많은 상태였죠...문인들은 군인이 많아져봐야 쿠테타의 가능성만 많아지고 또 군비가 많이 들어가니 오히려 국가재정을 망칠거라 본것입니다...물론 국가경제에 군비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더욱 곤경에 빠질 염려도 있지만, 왜나라는 전쟁준비중이라 말하는데도 모두 들으려하지않는 사람들만 넘쳐난거죠..
유성룡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봅니다..10만양병설에 도움을 준다면 나머지 관리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을 뿐더라, 자신 역시 역적으로 몰릴수도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결정적으로는 유성룡이 참 유능한 학자이고 후에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권율 이라는 훌륭한 장수들을 등용하고 간신배들의 말에 굴하지않고 자기뜻을 펼쳤던 분이지만
유성룡자신도 조선의 위기상활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이이의 10만양병설을 나라가 평온하니 그럴필요는 없다고 자신도 생각하고 말을듣지않죠
10년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과함께 궁을 버리고 도망갈 때 유성룡은 10년전 그일을 생각하며 땅을 쳤다고 합니다..내가 그분을, 그분의 능력을 망각한 것에 대한...
류성룡은 조선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재상이었습니다.
조선의 붕당중 동인의 수장이었죠~ 처음에 임진왜란을 예측한 율곡
이이 선생의 10만 양병설을 부정했기에 누구보다 전란의 책임이 있었
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온화한 성품과 냉철한 두뇌를 바탕으로 문관이었지만 군사들을 이끌
고 곳곳에서 전장을 진두 지휘했고 같은 동인
계통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발굴하여서 해상권을 장악하는 등의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었죠~ 또한 외교능력에 있어서도 명나라 원군의 장수들을
중간에서 조절하면서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이끌 수 있게한 일등
공신의 한사람입니다. 영의정이 된지 불과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파직되는 아픔도 겪은 인물이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임금에 충성하는
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충직한 충신중의 충신이었죠~ 류성룡이 만약
그 당시에 없었더라면 조정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고 왕이며
조정대신들은 나침판을 잃고 방황했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항상 영웅이 탄생하여 나라를 구하곤 했습니다.
류성룡이 그런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류성룡의 공과(功過)
임란 팔년을 이끌어 간 사람은 류성룡이었다고 평해지기도 한다. 그는 조선관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류성룡은 김덕령을 죽여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선조에게 진언하였다. 류성룡은 율곡 이이가 왜군 침공에 대비하여 십만 양병을 건의하자 반대하였고, 히데요시가 침공을 공개 선언했을 때도 전쟁 대비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징비록’에 왜군 침공 대비를 못한 책임을 신립에게 전가시키는 듯한 내용이 있다. 류성룡은, 당대 조선 최고 명장이며 군실력자인 신립과는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류성룡으로 하여금 신립이 조정 실세가 되게끔 하는 전쟁대비를 반대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반 신립, 전쟁대비 반대는 류성룡 한 사람이 아니라 관료집단 견해였다.
류성룡이 말단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수사가 되게 한 데에도 사적인 정분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징비록’의 이순신 부분에도 사적인 정감이 들어 가 있을 수가 있다. 이 책의 이순신 부분이 현대적 관점으로 보아도 고급식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일 뿐이다.
사실, ‘징비록’을 보면 적지 않은 류성룡의 오류, 오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책에 있는 이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그의 평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방어 준비를 착실히 하지 않아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있다. 자신은 함락되고 말 것을 벌써 예상하였다고 하지만, 자기 변명적인 것인 냥 느껴진다. 왜냐하면 진주성 전투에 대한 그의 시각이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의 진주성 전투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적이 기진하여 퇴각하게 되었는데, 북문을 지키는 김천일의 군사들이 성벽이 무너진 것으로 지레짐작하여 제일 먼저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로 인하여 성이 함락된 것이다.”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 원인을 김천일의 과실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나 안방준은 그가 편찬한 ‘진주서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류성룡은 진주성 함락은 김천일의 실책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천일이 죽음에 이르러 통곡한 것을, 죽음을 두려워하여서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도대체 류성룡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김천일이 진주성 인민을 죽였다고 비난하는데 슬프다! 그가 진주성 방어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적의 기세가 꺾이지 않아 호남 오십여 성은 모두 짓밟혀지게 되어, 그 참화(慘火)는 진주성 것보다 훨씬 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호남 한 개 도의 사람 수가 진주 한 개 성의 그것과 어찌 같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어느 역사연구가는 류성룡이 진주성 함락책임을 김천일에게 돌린 것은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였다고 지적하였다.
“‘징비록’이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문제가 있는 저술서이다. 진주성 전투의 주력인 전라도 의병의 지도층 인사들은, 즉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우신 양산숙 등, 서인계 혹은 친 서인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인 류성룡의 적대 당 사람들이었다. 당색 차이로 인하여 류성룡이 그들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출처-<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경향미디어 간(刊)>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