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한국문화

`중국사만 알아서 되겠나` 서문부터 자주성 내비쳐 기록 입증되며 신빙성↑ [중앙일보]

영국신사77 2007. 3. 13. 14:48
`중국사만 알아서 되겠나` 서문부터 자주성 내비쳐 기록 입증되며 신빙성↑ [중앙일보]
키워드로 푸는 역시 <5> `삼국사기`는 사대적인가
관련기사
관련링크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주관해 편찬한 '삼국사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그 책과 편찬자는 여러 비판에 시달려왔다. 대표적인 비판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물든 역사서라는 것이었다.

그런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단재 신채호(申采浩)다. 단재는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1135)을 "조선 역사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자주적 사건"으로 평가하면서, 그것을 진압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견해는 그의 강직한 지사적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너른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또 다른 중요한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는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단군신화가 수록되었지만, '삼국사기'에는 그것이 빠져있다는 대조적 사실도 그 사대성을 보강하는 논거로 작용했다.

'삼국사기'는 그 실증성에 대해서도 도전을 받았다. 일제시대의 관학자(官學者)들은 실증적 관점에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믿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서로 적대적 관계였던 이들이, 비판의 논점은 달랐지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퍽 역설적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먼저 사대성과 관련해 '삼국사기'는 당시로서는 자국사의 독자성을 깊이 인식한 역사서였다고 재평가됐다. 당시 중국에 대한 사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제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것을 현재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중국사만 잘 알고 우리 역사는 거의 모르는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했다는 '서문'의 내용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삼국을 '우리(我)'라고 표현한 사례 등은 매우 주목된다. 특히 성리학적 역사해석이 적용된 조선시대의 사서들이 오히려 '삼국사기'의 '자주성'을 비판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초기 기록에 대한 신빙성 또한 여러 고고학적 발굴의 뒷받침을 받으며 매우 높아지는 추세다. 한국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증적 서술을 담은 수준높은 역사서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사대와 자주'라는 대립적 관점보다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범(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2007.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