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믿음간증歷史

[역경의 열매]―김광석회장 (21)~(23:끝)

영국신사77 2007. 4. 6. 00:04
            [역경의 열매]―김광석회장 (21)~(23:끝)

 

 

 

 

[등록일시]:2005-02-10 오후 5:26:04

        [역경의 열매―김광석 (21)]

 

                       건축헌금 교회완공 눈물의 감사예배


김 목사의 표정은 아주 당당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헌금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예비해놓은 것을 받으러 왔다는데 감히 그 뜻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교인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서울로 건축헌금을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나를 비웃었지요? 자, 이것 보세요. 김 회장님이 내가 올라올 것을 미리 아시고 봉투에 건축헌금을 준비해 놓았잖아요. 이래도 내 말을 믿지 않겠습니까?”

김 목사의 말에 나도 감동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준비해놓은 돈을 교회 건축에 사용하게 됐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실까. 만약 이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김 목사를 향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묘한 사건과 절묘한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

교인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를 드렸다. 김 목사 눈에 이슬방울이 맺혔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격적인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내 방이 순식간에 통곡의 기도실로 변했다. 직원들은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방을 기웃거렸다. 이것은 기도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은혜의 잔치였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선수들끼리는 눈빛 하나로 통한다.

또 세월이 흘렀다. 김영길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 목사가 갑자기 방문하거나 전화를 해오면 솔직히 가슴이 뜨끔뜨끔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형님,드디어 교회가 완공됐습니다. 형님 교회나 마찬가집니다. 입당예배 때 꼭 내려오셔서 축하해 주세요.”

“축하합니다. 당연히 내려가야지요.”

나는 아주 공손한 말투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입당예배 때 직원들을 데리고 부산에 내려가 아주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의 설교는 은혜와 감동이 넘쳐났다. 그는 이미 훌륭한 목회자로 변해 있었다. 타종교 신도회 회장을 지낸 사람을 택하셔서, 작은 힘이나마 교회 건축에 기여하게 해주신 은혜가 고마워 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다.

3년 전 어느 주일에 우연히 부산 열방교회를 방문했다. 부산에 출장갔다가 그곳에서 주일을 맞은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까 생각하다가 열방교회를 떠올렸다. 열방교회는 이미 3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수십명의 러시아 선원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김 목사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교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교회를 지어주신 분입니다. 김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목회를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감동시키신다. 지금도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어린 아이, 그가 바로 김광석이다. 기도를 드리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어찌하랴. 나에게 주책이라고 말한들 또 어쩌랴.

 

   주책,그것은 ‘주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말이다. 열방교회 예배를 통해 가장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역경의 열매―김광석 (22)]

 

                       오갈데 없는 보육원생 데려와 학교 보내


예수를 믿기 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내 마음 속에 늘 고통의 가시로 남아 있던 아픔이 하나 있었다.

1976년 12월24일.

피보약국을 운영하던 나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중앙정보부 조정관을 따라 나섰다.

“요새 김 사장님 얼굴 보기가 대통령 보기보다 힘들어요. 내가 지금 아주 좋은 곳에 가는데 한번 따라와보지 않겠소?”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불광동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장에 들러 떡과 과일을 잔뜩 샀다.

“연말을 앞두고 고아원 또는 양로원을 찾아가는구나.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로군.”

그는 예상했던 대로 광탄보육원으로 들어섰다. 보육원생들은 마치 가족을 만난듯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이 보육원은 원생들로 ‘무궁화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 미국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나는 조정관의 은밀한 선행에 감동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보육원을 방문했다. 어떤 때는 아이들을 데려가 함께 봉사했다. 이듬해 봄 원장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보육원은 만 16세가 넘는 아이들은 수용할 수 없어요. 이번에 두 명이 이에 해당되는데, 한 아이는 갈 곳이 정해졌어요. 그런데 한 아이는 오갈 데가 없어요. 김 사장님께서 이 아이를 직원으로 채용해주시면 안될까요?”

“문제 없습니다. 저에게 보내세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냥 쉽게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몇개월 후 한 아가씨가 원장이 보냈다며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찾아왔다. 사고무친한 아이를 잘 보살펴주는 것도 선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운영하는 약국에 취직시켰다. 자연히 숙식도 집에서 해결했다.

“중학교는 졸업했느냐?”

“아뇨. 중학교 1학년까지 다녔어요.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나는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켰다. 매사에 적극적인 아이는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 무렵 나는 거액의 벌금형을 받아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점을 보았고 그것을 아내에게 모두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가 오늘 점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시련을 겪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군요. 우리집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 줄 당신이 잘 알잖아요.”

나는 아이를 내보낼 수 없었다. 나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사고무친한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었다.

“앞으로는 저 아이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집을 나가주어야 할 것이오.”

아내에게 참 못할 말을 했다. 아내는 내 말이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잘 참아주었다.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두었다.

“걱정마라. 대학에 못가는 대신 아주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아빠를 믿어라.”

 

 

 

 

 

[등록일시]:2005-02-14 오후 5:38:55

             [역경의 열매―김광석 (23·끝)]

 

                      “내가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절망에 처한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절망적인 사람은 바로 나였다. 거액의 벌금과 구치소 생활…. 그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이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꿈을 접은 대신,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줄 것을 아이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에 취직시켰다.

   예수를 믿으면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그 아이는 예수를 영접했고, 아주 훌륭한 젊은이를 만나 결혼했다.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다. 몇년 전,우리 부부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 아이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저의 오늘이 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세요. 이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우린 손을 마주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의 고통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확인의 눈물이었다.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많은 복을 받았다. 새벽기도는 나를 ‘종달새형 인간’으로 바꾸어놓았다. 원래 나는 친구들과 밤늦도록 어울려 지내기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시작한 이후, 그런 것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보통 밤 아홉시가 되면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귀가한다.

“나는 새벽기도를 드린다네. 그래서 저녁에는 일찍 자야 해. 그걸 이해해주게.”

   그리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새벽기도는 ‘시간의 십일조’다. 새벽기도를 준비하는 4시부터 귀가하는 6시 20분까지가 바로 하루 24시간에 대한 시간의 십일조인 것이다.

 

   보통 밤늦게 이루어지는 교제는 삶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밤늦도록,TV 드라마에 몰입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결한 삶에 무슨 유익이 될까?. 옛날 효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부모님 침소를 찾아가 문우를 드린다. 크리스천들도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문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새벽기도 가치관이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새벽기도를 드린다.

   새벽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세속의 탁류에 쉽게 휩쓸렸을 지도 모른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성결한 삶에 대한 약속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고, 육신이 건강하고, 재미난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향락들을 억제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허물어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이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며, 세속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새벽기도는 세상의 유혹을 차단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온통 감사뿐이다. ‘내가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정을 하면 몸이 오싹해진다. 예수없는 인생은 한없이 공허할 뿐이다. 세속적인 기쁨은 움켜쥐면 쥘수록 허무하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내 젊은 시절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감히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주님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합니다. 착한 종은 항상 주인의 말에 기쁘게 복종합니다. 제 삶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정리=임한창기자 hc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