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神學 · 敎理· 교회사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영국신사77 2007. 4. 2. 15:02
 
   틸리히 [Paul Johannes Tillich, 1886.8.20~1965.10.22]

요약
독일의 신학자. 종교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히틀러에 의해 추방되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신학은 존재론적이었다. 또한 신학과 철학을 문답 관계로 보는 것이 특징이었다. 저서에 《조직신학》 등이 있다.

 

  베를린대학 ·튀빙겐대학 ·할레대학 등에서 신학 ·철학을 공부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목사로 복무하였다. 전후 베를린대학 강사로 출발, 마르부르크대학 ·드레스덴대학 ·라이프치히대학 등에서 교수로 있었다. 종교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그 운동을 추진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추방당하여 1933년 미국으로 망명,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 ·시카고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퇴직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있었다.

 

  그의 사상은 M.켈러 및 F.W.J.셸링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적 요소가 짙었으며, 그 나름의 독특한 존재론적 신학을 전개하였다. 신학과 철학을 문답의 관계로 이해하여, 상황 속에 포함되는 물음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함과 동시에 그 대답을 그리스도교의 여러 상징에서 찾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저서에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1951∼1963) 《존재에 대한 용기:Courage to Be》(1952)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1955) 등이 있다.

 

 

                          폴 틸리히의 신학적 위치



  지성인을 위한 사도로 자처했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 1965)는 독일 루터파 목사였다. 동시대에 활동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함께 현대 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20세기 조직신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운다. 바르트는 전후에도 독일에서 학문활동을 계속했으나 틸리히는 그의 종교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히틀러에 의하여 1933년 미국으로 추방당한후 계속 미국적 상황에서 그의 독특한 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폴 틸리히/ 흔들리는 터전 外
 
 
출처 블로그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원본 http://blog.naver.com/chjime/110012548995
 
 
 

 

 

  20C 가장 뛰어난 신학자를 뽑으면 흔히 20세기 3대 신학자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를 뽑는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너무 일찍 죽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을 얘기할 때 바르트와 틸리히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둘을 평행선 상에 놓고 (말년에 친구가 되었다고는 하나) 많이들 얘기를 한다. 위로부터의 신학이니 밑으로부터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니 인간으로부터 시작이니.

 

"인간 상황은 질문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답변한다"가 틸리히의 사상을 잘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틸리히는 의심과 질문의 신학자였다.

 

"예수와 함께 갈 수 없거든 회의주의자 빌라도와 함께 가라"라고 틸리히는 말했다. 여기에 바르트는 "죄인은 용서 받을 수 있으나 의심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나는 누군가 이 말을 틸리히의 귀에 속삭여 주면 좋겠다"라고 응했다.

 

하튼, 여기서 틸리히의 사상을 내가 어찌 감히 다룰 수 있진 않다. 내가 구입하여 읽은 틸리히에 관련된 책 또한 위에 사진으로 있는 세 권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틸리히의 사상을 다루긴 힘들다. 함석헌 선생과 비슷한 점이 있어 언제 함 다룰까 싶기도 하지만 아직으로선 무리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을 이해를 못하지만, 그래도 그의 설교는 은혜스럽다...

 

그의 첫 번째 설교집 [흔들리는 터전]에 있는 "기다림"이란 설교이다.

 

 

"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편 130편 5-7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24-25절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는 둘이 다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여 잇는 인간 실존을 기다림이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갈망하는 기다림을 그리고 있고 사도의 서신은 참을성 있는 기다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가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소원할진대 우리들은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의 조건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지지 않음, 보이지 않음, 알지 않음, 파악하지 않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는 종교는 아무리 그것이 황홀하고, 활동적이요 합리적일지라도, 언제나 스스로 빚어낸 신의 형사으로써 신을 대체하고 있느 것입니다. 우리들의 종교 생활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따위 창조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을 더 잘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교리의 껍데기 속에 갖혀 있는 신학자를 나는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한 권의 책 속에 갇히어 있는 성서 학도를 머리에 그려 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조직 안에 갇히어 있는 교회인을 마음에 그려 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자기의 경험 안에 죽치고 있는 신자를 생각해 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가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지고잇고 또 그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자타에게 확신케 하는 일 없이 일요일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이나 이교도에게 또는 회의주의자나 무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선포하는 동시에 우리들도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우리들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항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을 가졌노라는 표명적 혹은 암시적 주장에 기인하는 것이요, 따라서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잇어서 그렇게도 결정적이던 '기다림'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데 연유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신도들이 기다림을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오로지 종말만을, 즉 모든 것의 심판과 성취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요, 그러한 종말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고 그릇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누구에게 소유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가지가지의 물건을 소유할 수 있듯이 우리가 이를 파악할 수 있는 것, 지식(知識)할 수 있는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인격보다도 저급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친밀한 사귐에 있어서일지라도 거기에는 '못 가짐', '모름', '기다림'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히 감추어져 있고 자유롭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장 절대적이요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저를 가지지 못하는 동안만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

 

그러나 기다림이 가지지 않음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가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사실은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아직은 현실이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바람과 참음을 가지고서 기다린다면 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의 능력이 이미 우리들 안에서 실효적인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근원적 의미에 있어서 기다리는 자는 그의 기다림의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