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8.24~1833.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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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영국의 정치가로 의회개혁과 로마카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고 ‘선언협회’를 설립하였다.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켰으며 복음주의자그룹의 중심인물로 해외선교운동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 | | |
본문 |
잉글랜드 요크셔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1780년 대학동창인 소(小) W.피트와 함께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의회개혁과 로마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다. 1784년경부터 I.밀너를 통해서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아 형법개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국민의 도덕적 교화를 위한 조직인 ‘선언협회(Proclamation Society)’를 설립하였다.
1787년 노예무역폐지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1807년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켰다. 박애주의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그룹의 중심인물로서 해외선교운동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그가 죽던 1833년 영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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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 2007.02.08 18:40:26 |
노예무역 폐지 주역 윌버포스,
2월18일 ‘어메이징 그레이스’ 부르기 운동 | |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운동의 주역인 크리스천 의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의 이야기가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재현된다(사진).
영국 노예무역 폐지 200주년을 맞이해 오는 23일 미국 영국 등지에서 개봉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려는 당시 영국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맞서는 윌버포스의 고뇌와 결단 및 용기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 24세의 약관의 나이에 최연소 수상에 오른 윌리엄 피트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친구인 윌버포스를 적극 도와주는 진한 우정도 담고 있다. 영화의 압권은 1807년 영국 의회가 대영제국의 노예무역 폐지를 가결할 때 윌버포스에게 격렬히 반대했던 의원들도 기립박수를 보내는 장면. 이오언 그러퍼드가 윌버포스,앨버트 피니가 노예상 존 뉴턴 역을 맡았다. 존 뉴턴은 윌버포스가 처음 정치를 그만두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복응전파에 매어 달릴려고 할 때, 윌버포스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은 정의로운 정치가가 되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다. 그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Amazing grace,how sweet the sound)’를 썼다.
한편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2월 18일 주일에 모든 세계 교회가 함께 부르자는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는 최근 세계 교회를 향해 윌버포스의 업적을 기리면서 오는 18일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헌신을 다시 한번 다짐하자고 호소했다. NAE는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미성년 노동자들,채무에 몰려 노동하는 이들과 성노예 등 2700만명이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영국교회는 내달 18일 ‘하루,하나의 노래,한 목소리’라는 캐츠 프레이즈를 내걸고 어메이징 그레이스 주일 지키기 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영국성공회는 또 내달 24일 런던 템즈강을 건너 런던 시내까지 과거 노예무역에 연루됐던 죄를 참회하기 위한 십자가 순례를 진행한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 |
2백년 전 2월 23일 ‘해방의 날’을 기억하라
영국 노예무역폐지법 통과의 주역 ‘윌리엄 윌버포스'
2007-02-18 오후 8:31:55
‘노예해방’ 하면 떠오르는 것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1809~1865)이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1863)’보다 50여 년이나 앞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영국 노예들의 자유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다.
1780년 21세의 나이로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1787년 노예무역 폐지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켰다.
이후 그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인물로서 사회 악습을 타파하며 ‘영국의 양심’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리고 그가 주님 곁으로 돌아간 1833년 영국 전역에서 80만 명의 노예가 자유를 얻었다.
노예해방, 하나님이 주신 ‘사명’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젊은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일생을 바쳐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사명을 주셨다. 하나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국 사회의 악습을 개혁하는 일’이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상 국가였다. 2백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북아메리카로 실어 나르며 영국이 벌어들인 수입은 당시 국가의 수입 중 1/3을 차지했다. 거기에 노예산업으로 인한 선원 고용효과와 선박 수요도 영국 경제에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윌버포스는 이런 영국의 세태에 대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당당히 맞섰다. 그는 “영국이 진정 위대한 나라가 되고 싶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제도는 하나님을 자극하는 일”이라며 노예제도 지지파를 비판했다.
그는 150회의 대국회 논쟁은 물론 탄원서 제출운동, 설탕 불매운동, 책자 출판 등 대중 여론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노예제도 지지자들에게서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 두 차례의 암살시도 등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뜻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리더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게 지켰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도 윌버포스의 열정에 감복해 1791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는 편지를 보내 그를 격려했다.
“사명 다하고 죽으니 감사할 뿐”
이렇게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한 결과,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노예해방의 아버지가 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사회 악습을 타파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쳐 ‘영국의 양심’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윌버포스의 오랜 투쟁 끝에 1807년 2월 23일, 영국 하원의회는 그에게 유례없는 찬사를 보내며 ‘노예무역폐지법’을 통과시켰다. 하나님의 법에 충실하려는 그의 노력이 사회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너뜨리고 영국 역사에 새 이정표를 그은 것이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나라, 영국’을 위해 달려 나갔다. 가난한 이들을 농락하던 복권을 폐지하고, 저소득층 무상의료지원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과다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어린이노동 보호법’을 제정했다.
또한 상류사회 남자들의 ‘결투제도’ 폐지에 앞장서 귀한 목숨을 지키려 노력했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족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시간을 사회봉사에 쓰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윌버포스의 노력은 1833년 7월 27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46년만에 그 결실을 맺었다. 영국 의회가 노예제도 자체를 없애는 ‘노예제도 폐지법’을 의결한 것이다. 이 법안의 통과로 80만 명에 달하는 영국의 노예들이 자유를 얻게 됐다.
노예제도폐지법이 통과되고 불과 사흘 후, 하나님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얻는 이득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2월 18일, ‘어메이징 그레이스’ 함께 부르자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언 3: 3~4).
윌버포스는 개인적 영달을 버리고 오직 주의 법만을 따름으로써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었다.
그는 기득권층에 맞서는 용기로 인해 모욕과 반대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흑인들에게 ‘자유’라는 귀중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열린성경연구회 ‘빛과 흑암의 역사’ 관계자는 “윌버포스는 영국 의회라는 전쟁터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였다”고 말했다.
윌버포스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법에 충실한 삶’이라고 압축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이 곧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는 헌신된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부패한 사회에 얼마나 큰 빛을 비출 수 있는지에 대한 증거로 남았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영국 젊은 정치가의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됐다. 윌버포스의 전기를 지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가트 린’은 “한 사람의 맑은 영혼이 한 나라 전체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적었다.
그런 윌버포스를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는 23일, ‘노예무역 폐지법’ 200주년을 맞아 윌버포스의 생애를 그린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개봉된다. 또한 미국복음주의협의회(NAE)도 2월 18일 주일에 맞춰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세계 모든 교회가 함께 부르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도 이번 주일, 모두 함께 손을 잡고 교회에 가서 윌버포스의 생애를 기리며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원제: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을 불러보는 것은 어떨까.
▲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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