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小 피트[the Younger Pitt:윌리암 피트]와 조지 3세

영국신사77 2007. 3. 23. 12:42
小 피트[the Younger Pitt:윌리암 피트]와 조지 3세
 
                             

 

 

                                  피트[Pitt, William, the Younger]

1759. 5. 28 잉글랜드 켄트 헤이스~1806. 1. 23 런던(47세에 서거). 영국의 총리(1783~1801, 1804~06).

 피트, John Hoppner가 그린 유화(부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기간 중, 총리로 재직하면서 총리직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생애


 

   소(小)피트는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정치가인 채텀 백작 1세 윌리엄 피트(大피트)의 둘째 아들이다. 대피트는 프랑스와의 7년전쟁(1756~63)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다. 어머니는 총리 조지 그렌빌(1763~65 재임)의 누이인 헤스터 그렌빌이었다.

 

   피트의 성격이 매우 민감했으며, 아버지가 사립학교를 혐오했기 때문에 그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조숙한 소년으로 14세에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룩 홀에 진학했다. 건강이 줄곧 나빴기 때문에, 1776년 귀족의 아들을 시험 없이 졸업시킬 수 있게 하는 낡은 특권을 이용해 졸업했다.

 

   아버지가 1778년에 죽으면서 연 300 파운드가 안 되는 수입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피트는 1780년 21살에 법률업에 뛰어들어 서부의 순회재판구에서 일했다. 1780년 9월에 케임브리지대학교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출마했지만 나이가 어려 낙선했다(→ 의회). 그러나 4개월 후 자신의 후원자와 의견이 갈라질 때는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웨스트몰랜드에 있는 애플비 선거구의 의석을 얻었다.

 

 피트는 성공적인 처녀연설을 했다. 그리고 1782년 3월 새로운 내각이 수립될 것이 명백해지자, 놀랄만한 자신감을 갖고 낮은 직책은 수락할 용의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1782년 7월(23세), 총리가 된 셸번 경 밑에서 그는 재무장관이 되었다. 1783년 2월 셸번 경의 동의하에 그는 야당으로 간 찰스 제임스 폭스에게 손잡을 것을 제의했지만, 폭스는 셸번 경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전기작가 조지 톰라인(후에 피트의 전기를 썼음)에 의하면, 당시 피트는 폭스에게 자신은 셸번 경을 배신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폭스와의 그러한 만남은 피트와 폭스간의 오랜 정치적 대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폭스는 놀랍게도 항상 왕이 바라는 대로 따라가려고 한 노스 경과 손을 잡고 셸번을 패배시켰기 때문에, 셸번의 내각은 끝이 났다.

 

 조지 3세는 자신이 미워하던 폭스에게 각료자리를 주려는 연립내각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트로 하여금 내각을 조직하게 했다. 그러나 피트는 하원에서 다수를 획득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 요청을 거절했고, 결국 왕은 폭스와 노스에게 그 일을 맡겨야 했다. 포틀런드 공작이 명목적인 총리가 되고, 개혁파와 반개혁파가 혼합이 된 새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피트는 이미 전에 자신이 직접 관여했던 의회개혁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선거권의 확대를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부패를 방지하고 선거구를 더욱 현실에 맞게 만들 조처를 제안했다. 비록 그의 결의안들이 부결되었지만, 개혁파들은 폭스보다는 피트를 의회지도자로 여겼다.


              피트의 제1차 내각(1783~1801, 24세~42세))


  1783년 12월(24세), 상원에서 폭스의 동인도 법안이 부결된 후, 조지 3세는 즉각 연립내각을 해산할 기회를 포착하고는, 피트에게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피트가 단지 왕의 도구로서의 총리직을 맡지는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의 첫번째 조처는, 자신의 의견에 따라 폭스와 동료들을 새로운 내각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스는 동료인 노스 경이 배제된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1784년 1월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사실상의 불신임 결의안이 39표 차로 통과됨으로써 피트의 정부는 패배했다. 그러나 피트는 사임하기를 거부했으며, 조지 3세는 폭스-노스 연립에 다시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왕위에서 물려나려고 했다. 피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막후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는 총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참고 기다렸다. 점차 의회 내의 연립세력으로 이루어진 다수파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많은 의원들이 총선에서 의석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면서, 피트가 의회에서 해산이 불가할 만큼 충분한 다수를 획득하리라는 희망으로 2~3월에는 피트 편으로 넘어갔다. 3월 8일 야당은

1표 차이로 다수를 획득했고 3월 25일 의회는 해산되었다.

 

   18세기에는 어떤 정부도 총선에서 패배하지는 않았으므로 1784년 피트의 승리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권의 영향'으로 새로운 하원은 국고에 의해 선출되었다. 임명제와 부정을 통해 피트는 다수파를 획득했고, 비밀자금으로 투표권을 매수했다. 물론 개방적인 선거구에서는 여론이 피트를 도왔지만, 피트가 '국민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왕의 임명을 시행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피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선거구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의원 선거에서 단지 한 차례(1790)만 경선을 벌였다.

 

   피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국가의 신용은 미국 독립전쟁이 초래한 재정지출로 손상되어 있었다. 국가의 채무는 2억 5,000만 파운드나 되었는데, 그당시 엄청난 액수였다. 피트는 적자를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밀수를 조장하는 높은 관세를 매김으로써 밀수를 감소시켰다. 감사 제도를 확립하여 정부수입에 대한 부정을 감소시켰다. 또한 관세와 현물세를 간소화했으며, 그것들을 단일한 기금으로 집어넣어 국가의 모든 채무에 대한 지불을 담당하게 했다.

 

   1786년에는 새로운 원칙하에서 감채기금을 도입했다. 즉 100만 파운드의 재정흑자는 증권을 구매하는 데 전용되었고, 28년 동안 복리로 축적되었다. 28년이 지나게 되면 수입은 한 해에 400만 파운드가 되었다. 1792년에는 모든 새로운 공채에는 1%의 감채기금이 첨부되어 45년 내에 상환되도록 법령으로 정했다. 그러한 제도는 평화시에는 상당히 잘 운용되었는데, 이는 매년 수입잉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93년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낮은 이자의 공채를 높은 이자로 빌린 새로운 돈으로 상환했다.

 

   폭스의 동인도 법안은 부결되었지만, 그 법안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인도에서 영국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그 행정을 동인도회사의 손에 맡겨두는 것보다는, 정부가 감독할 필요가 있었다(→ 대영제국). 그래서 피트는 그 자신의 동인도 법안을 제출했다(1784). 그는 동인도회사의 이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통제부(Board of Control)라는 새로운 정부 부서를 창설했다 . 그는 또한 총독부를 봄베이와 마드라스의 하위정부를 모두 관장하는 최고기관으로 만듦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권위의 분산을 종식시켰다. 1786년에는 보충법령을 통해 참사회에 대한 총독의 권위를 증대시켰다.

 

   1773년 이후 벵골의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1785년에 귀국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영국의 권위를 크게 증대시켜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탄핵을 받아야 했다. 피트는 정직하게도 헤이스팅스에 대한 탄핵은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었고, 아시아 민족들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영국이 불의와 억압의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조사를 지지했다. 그러나 탄핵을 한 인사들은 정당하지 못한 원한으로 일을 처리했다. 재판은 7년간이나 질질 끌어 마침내 헤이스팅스는 방면되었지만, 그는 재판비용으로 빈털털이가 되었다.

 

   제국에 관련된 또다른 하나의 문제는 캐나다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1791년의 제헌법으로 퀘벡은 프랑스 주민이 압도적인 로어 캐나다와 ,영국 주민이 압도적인 어퍼 캐나다로 나뉘었다. 유형수들이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되었을 때 총리직에 있던 피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유형지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피트의 대외정책은 별반 성공적이지 못했다. 1788년에 그는 프로이센 및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질상으로는 그 동맹은 오직 한 가지 목적에만 유용했다. 즉 프로이센의 외교적 지지로, 1790년에 피트는 눗카 해협 문제로 인한 분쟁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었다(→ 눗카만 논쟁). 그래서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해안에서 교역과 정착의 독점권을 갖고자 하는 스페인의 요구는 마침내 분쇄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에 대한 피트의 개입은 그러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흑해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확립하고자 애썼다. 1791년 3월 피트는 그녀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 크림 반도를 제외한 모든 정복영토를 술탄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투르크를 지원하는 그의 정책은, 전내각의 지지를 받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심하게 타격을 받은 정부는, 정책을 선회해야 했다.

 

   비록 영국정부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유럽의 전쟁에 직면해 중립을 고수했으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 평화의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1793년 1월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처형사건이 아니라, 프랑스 군대가 중립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통치자를 쫓아내려고 하는 어떠한 유럽 국민에게도 군사적인 원조를 약속했던 1792년말의 도발적인 법령들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군대에 대해 승리한 이후 승리를 자신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도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여기고 있어, 1793년 2월 1일 영국과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했다.

 

   피트는 프랑스 왕정을 복위시키기 위한 개입은 거부했다. 그는 영국의 사활이 걸린 무역 및 식민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프랑스 혁명은 1785년에 피트에 의해 제안된 법안이 부결된 이후, 잠잠하던 의회개혁 운동을 제기시켰다. 그러나 개혁의 대의는, 개혁옹호자들이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사태를 인정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불신을 받았다. 급진주의자들의 현명하지 못한 시위들은, 정부로 하여금 억압적인 법률에 호소하도록 만들었다.

 

   1792년 5월 선동적 언론에 대한 포고령이 발포되었으며, 정상적으로는 재판 없이 구속하는 것을 금지하는 인신보호법이, 1794년에 정지되어 1801년까지 효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혁명은 아일랜드에서도 새로운 반목을 일으켜, 오래된 종교적 불화를 악화시키고 1798년에는 반란을 불러일으켜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792년에 이미 피트는, 두 나라의 궁극적인 통합만이 아일랜드의 종교적인 문제의 해결방안이라고 주장했다. 1798년의 사건들로 인해 그는 통합이 급박하게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대규모 부정으로 통합조처는 아일랜드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트 내각의 반대, 특히 왕의 반대로 인해, 그는 보충적인 조처들(가톨릭의 해방과 가톨릭과 비국교도 성직자에 대한 봉급지불)은 통과시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피트는 1801년 2월 3일 사임했으며, 그의 친구 헨리 애딩턴이 정부를 구성했다. 그 위기로 말미암아 왕은 또다시 정신이 이상해졌으며, 3월에 회복된 후 그는 피트로 인해 병이 났다고 하면서 피트를 비난했다. 피트는 왕의 재위시에는 결코 가톨릭 문제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애국적인 동기로 인해 피트는 새로운 내각을 지지하기는 했으나, 1802~03년 회기의 수개월 간 그는 월머 성에서 머물며 의회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았다. 월머 성에서 그는 남동 5항(Cinque Ports : 중세 때 특권이 부여되었던 잉글랜드 남동 연안의 5개항)의 장이라는 오래된 관직을 가지고, 지방의 의용 병력을 조직하는 일을했다.

 

   1803년 3월 애딩턴은 피트에게 정부에 참여할것을 권했지만 피트는 총리로서가 아니면 정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전쟁은 1803년 5월에 다시 발발했다. 피트는 차츰 정부의 재정 정책과, 증대되는 침략 위협에 대한 정부의 대비책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애딩턴을 지지하는 다수파는 점차 와해되었고, 결국 그는 사망했다.

 

   4월 30일 왕은 피트가 새로운 내각을 조각할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그는 정당을 초월한 정부가 바람직하다고 답변했으나, 폭스를 배제시키려는 왕의 결심에는 동의했다.


                          피트의 제2차 내각(1804~06)

 

   피트의 제2차 내각은 제1차 내각에 비해 약체였다. 그것은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애딩턴의 그룹이 야당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대항한 제3차 대 프랑스 동맹(피트의 주도로 구성된 러시아·스웨덴·오스트리아의 동맹)은 1805년 울름과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 붕괴되었다 . 그리고 그해는 10월에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거둔 승리(이 승리는 영국에 대한 침략의 위협을 종식시키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국 해군력의 우위를 확보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난 속에서 저물어갔다(→ 트라팔가르 해전).

 

   피트의 건강이 더욱 나빠져갔다. 그는 1805년 11월 9일에 런던의 길드 홀에서 마지막 대중연설을 했다. 1806년 1월 15일쯤에는 그의 몇몇 동료들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그를 사임시킬 각오를 했고, 또 왕도 그의 후임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몇 주 후 죽었고, 2월 22일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빚을 청산하기 위한 4만 파운드의 지불안이 만장일치로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1801년에도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재정상의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1만 2,000파운드를 모아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돈에는 무관심하고 공사에만 몰입해 있었던 그는, 상당한 수입을 무책임한 하인들과 상인들이 낭비해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적 생활과 성격

 

   비록 의회와 내각에서는 유창하고 강력했지만, 그는 사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했고, 상식적인 면이 부족했다. 그는 항상 눈에 두드러지게 사회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정부의 성원들조차도, 그를 가까이 하기 힘들다는 불평을 했다.

 

   1801년 그의 사직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당대의 어떤 사람은 "아무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또 그에 대해 아무런 치사도 없으며 어떠한 기부금도 없다. 어느 곳에서도 어떠한 동요도 없다"라고 썼다. 그가 죽기 오래 전에 포르투갈산 포도주에 대한 탐닉으로, 한층 악화된 육체적 질환은 그의 활동을 감소시켰다.

 

   피트의 경험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에는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 땅조차 그에게는 대부분 낯선 곳이었다. 그는 결코 문인이나 독창적인 사상가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후원에 있어서, 그는 문학·과학·예술을 무시했다. 그는 그가 펼치는 모든 일에 대해, 오랫동안 지나치리만큼 성공을 자신했다. 결국 건강이 나빠지고, 1805년 나폴레옹이 큰 승리들을 거둠으로써 이러한 낙관주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처음에는 의회개혁운동과 관련을 가졌지만, 1785년 그의 법안이 부결된 이후 그 문제를 다시 다루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초래된 사회문제들을 다루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공직에 있었던 긴 세월 동안, 야만적인 형법, 가혹한 수렵법, 감옥 행정, 지방통치 등을 개혁하기 위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솜씨가 매우 좋았던 그는, 그 시대에 탁월한 토론 솜씨로 하원을 지배했다. 의회에서의 그의 행동은 조심성, 확고한 태도, 전무후무한 탁월한 능력 등이 혼합된 것이었다.


                                   역사적 중요성

 

   피트의 활동이 가지는 헌정적 의미는, 자주 오해되어 왔다. 그는 근대적인 총리는 아니었다. 어떤 시기에도 그는 그 자체의 존재를 선거구민에게 의존하는 하원의 다수를 지배하는 잘 조직되고 응집력 있는 정당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결코 국가가 선택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 왕의 신뢰를 유지하는 동안에만 총리직을 유지했다.

 

  그는 아일랜드 정책이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1801년 사임했다. 후임자가 전시총리로서 부적격했기 때문에 피트가 3년 뒤에 다시 총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그는 자신의 조건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왕의 조건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는 하원의 지지에 의존하기보다는 왕의 호의에 더욱 의존했다. 최대의 위기는 정신병에 걸린 왕의 지지를 잃어버린 1788~89년 겨울에 찾아왔다.

 

  만약 야당을 후원한 방탕한 웨일스 공이 섭정이 되었더라면, 피트는 틀림없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왕의 지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총리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각에서 그의 절대적 권위에는 명백한 제한이 있었다. 내각에서 여러 동료들은 당시의 중요한 안건들에 있어 그에 반대했다. 더욱이 피트는 빈약한 지성, 심각한 비합리적인 편견(물론 이런 편견은 당시 영국인 대다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음)을 가진 군주를 다루어야만 했다. 비록 내각에서 가지는 피트의 우위가 종종 과장되어왔지만, 여러 부서의 일을 감독·조정하고 또 왕의 신뢰를 받을 총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그의 내각 이후에 결코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이러한 지위를 피트가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굳센 성격 덕택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총리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권력에 있었던 19년은 종종 최초의 영국 총리로 간주되는 18세기 초기의 로버트 월폴 경의 재임기간보다 7년이나 더 길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가까웠던 노스 경의 재임기간보다 길었다.

 

  이제껏 피트가 새로운 토리당의 지도자로 등장했다고 종종 주장되어왔다. 확실히 왕의 대권을 인정한 각료로서, 그는 왕에게 국민들의 선택을 강요하려고 한 휘그당의 전통과는 다른 토리당의 전통을 대표했다.

 

  그러나 그는 하원에서 다수를 지배하는 정당의 위대한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개인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50명을 넘지 않았다.

 

  지속적인 노력, 탁월한 웅변, 강력하고 유창한 연설 실력을 갖춘 의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무역 폐지법안, 의회개혁법안, 가톨릭 구제법안 등을 통과시키는 일에는 실패했던 것이다.

 

 

 

 

 

                              조지 3세[George III]

정식이름은 George William Frederick(Georg Wilhelm Friedrich).

1738. 6. 4(구력 5. 24) 런던~1820. 1. 29 런던 근처 윈저 성. 영국 왕(1760~1814 재위), 하노버 선제후(1760~1820), 왕(1814~20 재위).

 조지 3세의 초상이 새겨진 영국 산업혁명기의 2펜스 짜리 ...
    그의 통치기에 영국은 7년전쟁(1756~63)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주요열강으로 부상했으나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는 패배를 맛보았다. 말년에는 간헐적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왕세자인 웨일스 공(후의 조지 4세)이 섭정으로 국사를 대행했다.


                        초기생애

   조지 3세는 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스와 작센고타의 오거스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조부인 조지 2세에 대해 터무니없는 반감을 품게 되었다. 어린 조지는 지적인 능력에 조화되지 않는 강렬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이성과 감성의 불균형적인 발전으로 그는 배우는 것을 잘 깨닫지도, 너무 태평해서 자신을 제어하지도 못했다. 11세가 될 때까지도 글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평생동안 주변의 근친들에게 쏠려 있었다.

 

   조지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었을 때, 겨우 12세에 불과했다. 18세 성년식 날 미래의 책임과 의무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무능력을 통감하고 심리적인 부담감에서 오는 고통을 경험했음이 분명하다. 자신감의 결여에서 파생된 외고집 기질은 이미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비정상적인 허세는 스스로를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정형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조지는 뷰트 백작 3세 존 스튜어트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는데, 뷰트 백작은 왕세자에게 영감을 주는 스승으로서 나중에 총리가 된 인물이다. 끈질긴 집착력과 목적달성을 위한 책략 등 훗날의 행태로 미루어 조지에게는 뷰트 이상의 정치적 잠재력이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1760년 7년전쟁 중에 국왕으로 등극했을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한 정치감각도, 존 스튜어트의 무능력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761년 조지 3세는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귀족 가문에서 적당한 신부감을 검토해보도록 뷰트에게 지시를 내렸고, 뷰트는 메클렌부르크 슈트렐리츠가의 샤를로테 조피를 선택했고, 같은 해 9월 8일 결혼했다. 공적인 의무감에서 이루어진 이 결혼이 50년 이상을 별 탈 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의 안전에 긴요한 수단이 되었음은 물론, 왕비의 강인한 인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밖에 존 스튜어트가 조지에게 베푼 공헌이 있다면, 식물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고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고무하는 등 과거 반세기에 비해 왕실이 보다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불안정(1760~70)


 
뷰트 백작은 어린 국왕의 위태로운 과대망상증을 부추겼다. 영국정부는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결여하고 있었으며, 의회 지도자들은 정부에 협조하기보다는 정부 시책을 트집 잡기 위해 안달이 나 있었다. 화합이 어려웠던 것은 각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국왕의 제1과제는 상원의 원로귀족들을 통합시키는 데 있었지만, 뷰트의 입김 아래 어린 국왕은 자신의 의무를 음모와 책략을 통해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것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지 3세가 국왕으로 책봉되었을 때 영국 정치를 좌우하고 있던 인물은 대(大)피트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였으나, 국왕과 뷰트는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761년 10월 스페인과의 전쟁문제로 피트가 사임하고 곧바로 재정비리 의혹을 산 뉴캐슬이 사퇴하자 이들의 해임은 논란이 분분한 새 내각에 대한 비난의 초점이 되었다. 뷰트 정부는 정국 안정과 평화시의 재정 회복이라는 2가지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다.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 평화는 영국을 유럽 대륙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고, 이후 거의 30년 동안 영국은 유럽 열강들의 새로운 동맹형성으로 말미암아 숱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조지 3세 역시 만족스러운 상태는 아니었다. '브리튼의 이름으로 길이 칭송될' 것이라는 뷰트의 귀띔과는 달리, 즉위연설을 통해 국가의 목표를 천명하는 국왕의 모습은 결코 대중의 호감을 얻지 못했다. 1765년 급진파 의원 존 윌크스는 언론을 동원해 국왕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았고 피트와 뉴캐슬을 동정하는 '애국적인' 신사들은, 평화는 어설픈 사기극이며 국왕이 뷰트와 협잡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1763년 4월 뷰트는 총리직을 내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야 자신의 어리석음이 대영제국의 정치체계를 붕괴시켰으며 새로운 체제의 구성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왕은, 친척인 조지 그렌빌과 컴벌런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 피트, 그리고 그래프턴 공작 3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조지 3세 통치기의 첫 10년은 이렇듯 내각의 불안정으로 결말이 났으며, 7년전쟁의 지출로 타격을 입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극복할 어떠한 타개책도 강구되지 못했다. 해외무역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동인도회사의 막대한 수익은 본국 경제에 실제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고, 아메리카 식민지에 자체 행정비용을 부담시키려는 시도는 본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식민지 정책 또한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었는데, 그렌빌이 발의한 인지세법(1765)은 이듬해 로킹엄 경의 주도로 폐기되었고 간접세 부과를 위한 '타운센드 법'(1767)은 산출량에 대한 견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차세(茶稅)를 제외하고는 주민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국 불안정에 대한 비난은 조지 3세 개인에게로 돌아갔다. 휘그당 의원이자 정치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에 따르면, 국왕은 불성실하고 막후에서 음모만을 일삼고 있으므로 내각을 이끌어갈 인물이 못 되었다. 영국 정치가 개선되려면 정당의 규율을 바탕으로 내각의 통일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결속의 매개체가 되어야 할 것은 국왕이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로 구성된 정치 조직이며 합의된 원칙에 근거하여 국정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조지 3세의 통치 초기는 근대적 의미의 정당정치를 발아시키는 토양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일련의 계략을 통하여 정국의 혼란을 야기시킨 잘못은 국왕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지 3세는 1766년 이후 뷰트 백작을 접한 일이 없었으며 국왕의 측근들도 이른바 '앞잡이들'이 아니라 과거와 같은 지도력을 기대하는 복고주의자들일 뿐이었다. 굳이 거론하자면 정치감각과 경험의 부족이 있을 뿐, 하원을 통제할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국왕의 허물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770년이 되자 조지 3세는 상당한 정치력을 갖추게 되었고, 아직도 외고집에다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기는 했지만, 정치 현실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바람직하지 못한 인물을 총애하는 오류를 범하지도 않았다.


                        노스 경 내각(1770~82)

 

   1770년 조지 3세는 다행스럽게도 하원을 다스릴 만한 말재주와 설득력을 갖춘 노스 경을 발굴해냈다. 긁어서 부스럼을 낼 필요없다는 식의 노스의 정책은 행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지방 자치구 의원들의 의심을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10여 년에 걸친 소요의 시기에 이어 새로운 안정정국이 12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집권초기부터 노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분쟁과 파벌 간의 반목들이 되살아났다. 치명적인 최대의 논쟁거리는 아메리카 식민지 문제였는데, 의회 내 지방유지들과 국왕 모두가 아메리카 스스로 자체의 방위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식민지의 안녕을 보장해준 7년전쟁의 빚을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노스 경 역시 아메리카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게 된 책임은, 조지 3세가 국왕의 대권을 주장한 데 있었다기보다는 의회의 영도자임을 자처한 데서 기인했다. 식민지인들은 본국 국왕의 지상권에 굳이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를 의회와 연결시키려는 조지 3세의 태도는 좀처럼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국왕과 하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노스 경은 식민지의 무례한 언동을 예삿일로 받아넘길 수만은 없었으며 1775년 4월 마침내 아메리카와의 전쟁에 착수하게 되었다(→ 미국독립전쟁).

  

   1779년에 이르러 의회지도자들은 깊어져가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국왕은 재정적인 곤란에도 불구하고 교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본국 정부에 대한 불복종이 승리를 거둘 경우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 또한 반기를 들고 나설 것이며, 1778년 이후 프랑스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으므로 영국에 앞서 재정파탄을 겪게 되리라는 논리에서였다. 조지 3세는 이렇게 특유의 필사적인 집착욕으로 전쟁을 2년 더 연장시켰고, 1779~82년 국왕에 대한 평판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1780년 의회는 조국에 재앙을 안겨준 책임을 들어 노스 내각에 질책을 가했으나, 야당이 애국심이 부족하고 구심점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현실에서 믿을 만한 대체세력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무렵 국민들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종식시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정부의 배후에는 뿌리 깊은 부패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총리의 거듭되는 사퇴의사 표명을 통하여 비난의 화살은 온전히 왕실과 조지 3세에게 돌아갔다.

 

   1782년 노스 내각의 붕괴로 말미암아 실추된 국왕의 위신은 뒤이은 셸번 내각(1782~83)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바닥 끝까지 내려앉았다. 노스 경은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접촉하여 연립내각의 구성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 상황에서 조지 3세는 왕위포기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소(小)피트 내각(1783~1806)

 

   국왕은 그러나 1년이 지나기도 전에 형세를 역전시켰다. 국민들의 성원 속에서 조지 3세는 18세기 영국 정치사상 가장 고압적인 형태의 국왕 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폭스와 노스의 '동인도회사 개혁안'이 회사의 공직임명권을 통하여 그들의 권력을 영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을 때, 국왕은 국가 이익의 수호자로서 바야흐로 시기적절한 조치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조지 3세는 상원에서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것임을 선언했으며, 법안은 무효화되고 각료들의 사퇴가 줄을 이었다. 조지는 새로운 애국지사 소(小)윌리엄 피트를 총리로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소피트라는 카드에 위험이 전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피트의 세력은 하원 내 소수파에 불과했고 경질된 각료들은 당장에라도 헌법상의 정변을 단행하기라도 할 태세였다. 모든 것은 1784년 3월의 총선 결과에 달려 있었으나 국민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한편에서는 왕실의 재정적 위기를 깊이 인식하고 조지 3세의 대권행사에 압도적인 찬의를 표명했다. 일단 승리를 거두고 나자 국왕은 더이상의 권력시위를 시도하지 않았으며 피트가 구상하고 있던 정책이 상당부분 마음에 내키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위 속에서 숱한 비난과 불평불만을 견디어냈다. 피트는 국왕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국왕 역시 피트가 아니었으면 폭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으며, 소장의 총리는 별 이의 없이 막대한 통치권력을 이양받았다.

 

   측근들에 대한 국왕의 히스테릭한 집착은 자식들에 대해서는 지나친 소유욕의 형태로 나타났다. 1783년 성년에 이른 맏아들 웨일스 공이 왕가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조지 3세는 엄청난 비애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국왕의 절망감은 이내 한없는 분노로 바뀌었는데, 왕자가 정치적으로나 사적인 교류에 있어서 폭스의 무리와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왕실의 얼마간 경직된 분위기에 비하여 왕세자의 주변은 활력이 넘쳐흘렀고 방종한 느낌마저 들게 되었다. 아들들이 하나하나 주변을 떠나가는 가운데 조지는 심한 조울증 증세를 나타냈다. 조지는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퇴위의사를 거론했지만, 1788년의 왕실 성명에 따르면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다만 국왕의 이성일 뿐이었다.

 

   과중한 국사는 이러한 국왕에게 신경쇠약증을 안겨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세기의 의학보고에 따르면, 조지 3세는 ' 포르피린증'으로 알려진 신진대사상의 유전병을 앓고 있었다. 신경계 전체에 퍼진 진홍색 색소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과 비정상적인 흥분, 마비증상, 섬망상태를 몰고왔으며 조지는 적어도 4차례 이상 직무를 떠나 몸져 누워야 했다. 포르피린증은 그러나 보편적인 의학소견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조지 3세의 건강상태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면서 피트와 폭스 사이에는 왕세자의 섭정권 행사를 놓고 격론이 일었으나 그러는 동안 조지 3세의 건강은 호전되고 있었다. 국왕은 또 광기의 악몽이 찾아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18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정책의 기본방침보다는 부차적인 세부사항에 골몰하고 있었다.

 

   소피트의 정책노선은 점차 국왕의 신임을 얻었고 노스 공뿐만 아니라 폭스 세력의 지지까지 확보하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 혁명정부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거의 모든 휘그 당원들이 정부 시책에 보조를 맞추었으며 폭스는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외로운 반대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영국의 귀족들과 중산시민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은 국가의 사활이 걸려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노령의 국왕은 선의로 충만한 연민의 대상으로부터 그들이 수호해야 할 구체적 권위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지만, 이토록 확대된 정치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조지 3세의 의지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 국왕은 농업생산을 독려하거나, 조급한 심정으로 말끝마다 '뭐, 뭐, 뭐?'를 되풀이하면서 과거의 정치분쟁, 군사전략 또는 셰익스피어의 단점들을 늘어놓거나, 스스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는 등의 일로 소일하고 있었다. 조지는 공주들의 생활을 사사건건 트집 잡는 일이 잦았는데 왕자들과는 달리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하던 국왕은 그러나 세기가 바뀔 무렵 피트의 아일랜드 정책으로 말미암아 내정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로마 가톨릭교도에 대한 억압을 끝낼 것을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가톨릭교도 해방). 소피트의 견해로 아일랜드의 반란은 단순히 영국과 아일랜드 의회의 결합책만으로는 조정이 불충분한 것이었으며 이에 덧붙여 가톨릭 해방을 위한 과감한 정치선언이 수반되어야 했다. 총리의 제안을 국가의 기강을 뒤흔드는 자멸책으로 받아들인 조지 3세는 국왕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해방안을 철회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그결과 피트는 사임하고 헨리 애딩턴(후의 시드머스 자작 1세)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되었다. 1804년 애딩턴 내각이 붕괴하고 피트가 총리직에 복귀했을 때 신임총리는 과거와는 달리 이미 가톨릭 해방안을 포기한 상태였다. 국왕이 그토록 단호하게 억압조치의 해제를 거부했던 근거는 스스로 하원 내 평의원들의 입장을 간파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정작 피트로서는 문제를 막바지 실력대결로까지 확대시킬 의향이 전혀 없었다.


                               말년(1806~20)


  1806년 1월 소 피트가 죽자, 조지 3세는 휘그당의 폭스를 거국연립내각(1806~07)의 외무장관으로 맞아들였다. 폭스마저도 총애하게 된 국왕은 같은 해 그가 사망하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휘그 내각은 비록 단기간의 집권에 그쳤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강화를 시도했고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국왕이 내정에 친히 간섭하여 각료들의 해임을 추진했던 것은 가톨릭 억압조치의 완화제안에 대해서뿐이었다.

 

   가톨릭 문제에 대한 2번째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즈음, 조지 3세의 건강은 또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국왕은 거의 시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문서의 철저한 검토를 고집했으며 국사의 수행을 위해 개인비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렌빌 경은 국왕이 군대의 고위직급에 대한 가톨릭교도의 등용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으나 조지 3세는 오직 시드머스 자작만이 제안의 심각성을 일깨워줄 뿐 각료들 모두가 자신을 현혹시키려 하고 있다고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국왕은 국교회에 대한 신성한 의무감으로부터 각료들에게 가톨릭 문제를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요구했지만, 내각은 이와 같은 분별 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포틀런드 경(1807~09), 스펜서 퍼시벌(1809~12), 리버풀(1812~27)을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토리 내각이 향후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국왕은 살아 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여생을 보내야 했다. 늘 가까이 했고 왕자들에 대한 절망에 한 가닥 위로가 되어 주었던 막내딸 아멜리아 공주의 죽음(1810)은 쇠약한 고령의 국왕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가져다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극도의 착란 상태가 찾아들었고, 의회는 웨일스 공의 섭정권을 인정하고 소피아 왕비에게 조지 3세의 보호감호를 위탁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조지 3세는 간혹 평정상태를 되찾기는 했으나 끝내 착란증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820년 1월 29일 윈저 궁에서 눈을 감았다.

 

   '조지 윌리엄 프레더릭'이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지 3세의 통치기간은 능력범위 이상의 과제를 부여받은 한 선의의 인간이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역경의 세월들이었다.

 

 

 

                                                                                           A. Aspinall

에듀넷-브리태니커 학습백과

 

 

 

                          조지 3세 [George III, 1738.6.4~1820.1.29]

 

 

  영국의 왕(재위 1760∼1820).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