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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Wilberforce, William] <엠파스>

영국신사77 2007. 3. 22. 00:25

                    윌버포스 [Wilberforce, William]

 

 

  1759. 8. 24 잉글랜드 요크셔 헐~1833. 7. 29 런던.

  영국의 정치가·박애주의자.

 

  1787년부터 영국의 해외점령지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나아가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탁월한 투쟁을 벌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시절에는 후일 총리가 된 소(小)윌리엄 피트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출중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동료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1780년 피트와 나란히 하원에 들어가 곧 의회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급진주의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때문에 나중에, 특히 프랑스 혁명기에 프랑스의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어(1792. 9) 곤란을 겪었다. 1815년부터 곡물법(수입곡물에 대한 관세조치)을 지지하고 노동계급의 선동에 대한 탄압 조치를 옹호했다.

 

  윌버포스의 노예폐지론은 1784~85년에 받아들인 복음주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일부 기반을 둔 것이다. 1787년 풍속 개혁을 위한 선언협회(Proclamation Society:외설물 출판 억제를 목적으로 함)와 노예무역폐지협회(반노예제협회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 등의 창설을 도왔다.

 

  그는 동료 토머스 클라크슨, 그랜빌 샤프, 헨리 손턴, 찰스 그랜트, 에드워드 제임스 엘리엇, 재커리 매콜리, 제임스 스티븐 등과 아울러 보통 '성자단'(聖者團)으로, 1797년 이후는 클래펌파(Clapham Sect)라고 불렸으며 이 그룹의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하원에서는 달변에다 지칠 줄 모르는 반(反)노예제 입법의 후원자로 활동했다.

 

  1807년 3월 25일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노예무역 폐지안이 법률로 확정됨으로써 첫번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법률은 법률 확정 이전에 노예가 된 사람의 법적 지위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몇 년 간 윌버포스는 다른 문제에 매달려 있다가 1821년부터 토머스 포얼 벅스턴 경과 함께 모든 노예의 즉각적인 해방을 주장했다. 1823년 '영국령 전역의 노예제도 완화와 점진적 폐지를 위한 협회'를 창설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 또한 반노예제협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의회 내 노예제폐지 운동의 지도권을 벅스턴에게 넘겨주고, 1825년 하원에서 은퇴했다.

 

  윌버포스가 추구하던 노예제도 폐지법은 그가 죽고 난 1개월 후에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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