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후반(1382) 이후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에게 붙여진 이름.
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철학자이며 신학자로서 비정통적인 그의 종교적·사회적 이론에는 여러 면에서 16세기 종교 개혁의 교리 내용이 담겨 있었다.
롤라드라는 이름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한 경멸어인데, 초기에는 경건한 체하지만 사실은 이단 신앙을 가졌다고 여겨진 유럽 대륙의 집단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위클리프는 1370년대 옥스퍼드에서 차츰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화체설(化體說: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을 부인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서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또한 교황직은 성서적 정당성이 없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와 같다고 보았는데, 14세기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붕괴되는 전조라고 환영했다. 결국 이단으로 몰려 1378년 옥스퍼드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고, 1384년 죽을 때까지 저술과 설교 활동을 계속했다(→ 로마 카톨릭교).
첫번째 롤라드 그룹은 위클리프의 몇몇 옥스퍼드 동료 학자들을 중심으로 헤러퍼드의 니콜라스의 지도 아래 모였다. 이 운동이 옥스퍼드 바깥에서도 추종자를 얻고, 1381년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 교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확산되자, 부당하게도 이 일이 위클리프와 롤라드파의 영향 때문이라고 몰렸었다.
1382년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코트니는 옥스퍼드의 롤라드파 사람들 몇 명에게 그들의 견해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 교리에 순종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 파는 도시민, 상인, 젠트리 심지어 말단 성직자 사이에서 차츰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왕실의 몇몇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다.
1399년 헨리 4세가 즉위하자 이단에 대한 탄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1401년 이교도 화형을 승인하는 잉글랜드 법이 최초로 통과되었고, 실제로 이 법이 통과되기 며칠 전에 윌리엄 소트레이가 화형당해 롤라드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1414년 존 올드캐슬 경이 이끄는 롤라드파 봉기는 헨리 5세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었고, 반란은 가혹한 보복을 불러일으켜, 롤라드파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지하로 몰린 이 운동은 소수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주로 상인과 장인들 사이에 영향을 미쳤다. 1500년경 롤라드파 부흥이 시작되었고, 1530년 이전부터 롤라드파와 새로운 세력인 프로테스탄트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롤라드파 전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촉진시켰고, 영국 종교개혁 때 헨리 8세의 반(反)교권주의 입법에 찬성하는 견해를 조성했다.
롤라드파 운동은 초기부터 위클리프의 학문적 정교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예전에 그가 썼다고 추정되던 영어로 된 대중적 소책자들도 실제로는 그가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초기 롤라드파의 가르침은 1395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12 결론 Twelve Conclusions〉에서 가장 잘 진술되어 있다. 이 문서는 영국 교회가 '계모인 거대한 로마 교회'에 예속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해서 로마 교회의 서품식은 성서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으므로 현재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비정상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화체라는 '거짓 기적'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오도하고, 포도주와 빵, 제단, 제의(祭衣)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마술과 연결된다고 했다. 또한 어떤 인간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는 세속의 재판관과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기도, 순례, 성상(聖像)에의 봉헌(奉獻)을 비난했고, 고해성사(告解聖事)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아가서 전쟁은 〈신약성서〉와 모순되며, 순결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녀들은 낙태와 유아살해의 공포에 떨고 있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미술과 공예가 쓸데없이 '낭비와 호기심, 허세'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12 결론〉은 롤라드파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포괄했으나, 여기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2가지 교리가 있다. 그것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롤라드파는 성서를 영어로 옮기는 일을 했는데, 헤러퍼드의 니콜라스가 번역했고, 뒤에 위클리프의 비서인 존 퍼비가 수정했다.
엠파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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