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경 잉글랜드 요크셔~1384. 12. 31 레스터셔 루터워스.
잉글랜드의 신학자·철학자·교회개혁가.
개요
최초로 영어 성서 완역을 추진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독자적인 정치 교회 이론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세속 재산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1378년 교회의 신앙과 의식에 대해서 체계적인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단 분파인 롤라드파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그의 견해들을 선전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요크셔 노스라이딩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퀸스·머튼·베일리얼 칼리지에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360년 베일리얼 칼리지 교양학부 학생감이 된 뒤 학장에 임명되었으나, 1361년 학장직을 사임하고 그 대학이 주는 최고의 성직록인 필링엄 주교대리가 되었다. 그뒤에 재속(목회) 성직자들과 정규(수도원) 성직자들을 위해 설립한 캔터베리 홀의 학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다소 불확실하다.
1362년 옥스퍼드 대학교는 교황에게 그를 '부양'해줄 것을 청원하여 오스트에 있는 웨스트베리온트림 성당에서 참사회원의 봉급(연금)을 받게 해주었다. 위클리프는 다른 곳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봉급을 계속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런 관행을 비판했다. 1363, 1368년에 그는 링컨 주교로부터 필링엄 교구를 비우고 옥스퍼드로 가서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1368년 교구를 필링엄에서 대학교 근처에 있는 소교구 러저셸로 바꾸었다. 1369년 신학사, 1372년 신학박사가 되었다.
정치활동과 이론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러저셸 대신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았고, 이 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명령으로 성직들에 대한 교황의 각종 세금과 임명권 같은, 잉글랜드와 로마 사이의 중요한 이견들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브뤼헤로 갔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위클리프는 애국자이자 왕의 신복임을 과시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통치에 관한 정치적 논문들인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3권의 책 De dominio divino libri tres〉·〈세속적 주권에 관한 논문 Tractatus de civili dominio〉 등을 써서 그 활동을 보충했다. 그는 이 논문들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주권'(이 단어는 소유와 권위를 가리키는 데 쓰임)을 받아 행사한다고 하면서, 만일 그들이 치명적인 죄를 지은 상태에 있다면 그들의 주권은 오직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설사 의로운 사람들이 주권을 주장할 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만이 주권을 정당하게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죄를 지은 상태에 있으므로 소유를 포기하고 복음의 정신에 따라 가난한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재산의 몰수는 국가, 특히 왕이 집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교하게 고안되고 턱없이 많은 분량으로 기록된 이 정치 교회 이론은, 현실 세계에서 무엇이 실현가능한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론가의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이처럼 순진하고 세상에 대한 지혜가 없는 위클리프는, 랭커스터의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젊은 아들인 유약자(柔弱者) 존(1340~99)의 도구가 되었다. 존도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그 동기는 위클리프처럼 정직한 것이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런던에서 온건하게 교회재산 몰수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존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고위성직자들의 미움을 샀고, 1377년 2월 그들에게서 소환명령을 받았다(→ 교황제). 재판이 열렸으나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중단되었고, 위클리프는 시달림을 받거나 유죄판결을 받지 않고 돌아왔다.
그 해에 그의 인기와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의회와 왕으로부터 왕국의 재산이 로마로 반출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합법적인지의 여부에 대해 문의를 받은 그는 합법적이라고 대답했다. 그해 5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위클리프에 대한 5가지 회칙을 발행하여, 그의 정치 교회 이론의 오류를 단죄하고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 명령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옥스퍼드대학교도 그곳의 저명한 학자를 단죄하기를 거부했다. 위클리프가 마지막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378년 가을이었다. 존의 심복들이 자기들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지방귀족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은신처까지 들어가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위클리프는 왕의 편에 서서 의회에 성소의 특권(Right of Sanctuary)을 없애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이 범죄자들에게 법을 집행하기 위해 성소를 합법적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그 행위를 변호했다.
교회에 대한 비판
위클리프는 루터워스로 돌아와 연구를 위해 은둔한 채, 교회의 신조와 의식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교, 실재론). 그가 신학적으로 과감하게 교회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보이는' 교회(그당시 조직되고 제도화된 교회)보다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교회(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를 믿을 수 있게 해준 강력한 예정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비판한 대상은 화체설(성찬식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었다. 보편개념들이 실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였던 그는, 만일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에서 화체설을 비판했다. 그런 다음 더욱 노골적으로 화체설이 우상숭배이며 비성서적이라고 단죄했다. 그는 화체설을 '빵은 축성을 받은 다음에도 그대로 빵이다'라는 잔류교리로 대체하고, 물체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 실재임재의 이론을 덧붙이려고 시도했다.
한편 그는 교회법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교황·추기경·성직자들에 대해서는 보수가 높은 세속 직업이라고 혹평했고, 수사들과 탁발수사들에 대해서도 14세기 종교논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더 신랄한 용어로 비판했다. 위클리프는 이런 일을 하기에 적절한 사람이었다. 꼼꼼하고 정력적인 정신에다 성격이 급했으며, 독설을 쏟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반대자들의 견해에 대해 유례 없는 혹평을 가했으며, 때로는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클리프가 고결한 인물이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때로 교만하고 실수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성실했다는 인상을 준다. 자기가 바라던 성직을 받지 못해서 실망하기도 했겠지만, 그가 교회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감정상의 분노만 가지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덕적인 진지함과 개혁을 바라는 진정한 마음이 있었다. 그당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조직이 잘못되어 있었고, 이를 비판하는 데 독설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진정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순진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앞뒤를 재지 않고 성찬식에 대한 자기 견해를 글로 발표했으며, 계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옥스퍼드의 몇몇 친구들을 지지하지 않고 유약자 존을 지지했다. 그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성서번역
1380년 8월부터 1381년 여름까지 위클리프는 퀸스 칼리지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성서번역 계획과 성서의 진리를 민중에게 전할 청빈 설교자회 설립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위클리프 성서, 성서 번역). 그러나 그의 정신은 중세 지식체계인 스콜라주의에 너무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계획을 직접 세울 수 없었다. 그의 지시로 2종류의 번역성서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관용어들을 많이 썼다.
그는 왜 성서번역에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까? 교회의 손상된 권위를 대치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게 하려면, 영어 성서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영역 성서는 설교의 효력에 대한 신념과 어우러져 마침내 롤라드파를 형성시켰다. 위클리프가 롤라드파의 형성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롤라드파가 논란이 많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선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위클리프가 마지막으로 루터워스에 돌아간 1381년에는, 노동 계층의 불만이 농민반란으로 터져나왔다. 위클리프의 사회 사상은 지식인들에게만 알려졌기 때문에 이 반란에 중대한 원인이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 반란에 공감을 표시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노동의 대가를 현재보다 더 많이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 반란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인 서드베리의 시몬이 살해당했고, 열정적인 인물인 윌리엄 코트니(1347~96)가 그를 계승하여 위클리프를 공격했다.
1382년 5월 런던 블랙프라이어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가 정죄받았고,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이에 굴복했다. 그뒤 그의 모든 글들이 금서로 공포되었다. 그해에 위클리프는 루터워스에서 최초의 중풍으로 쓰러졌으며, 계속해서 많은 글을 쓰다가 마침내 1384년 12월 중풍이 악화되어 죽었다.
평가
그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반응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위클리프가 수사들과 탁발수사들을 비판하자, 즉각 맹렬한 반박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종교개혁이 다가오면서 수그러들었다.
개신교 전기작가들은 위클리프를 중세의 악한 무리들과 거의 혼자 맞서서 싸운 최초의 종교개혁자로 본다. 이 견해는 지금까지 반향을 불러일으켜왔으나,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이 견해에 대해 위클리프를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의 망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떤 것이 진정한 존 위클리프의 모습인가?"라는 질문은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확실히 대답할 수 없다.
Jo. Stacey 글
엠파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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