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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2차에 걸쳐 열렸다.
① 제1차 공의회: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공의회에서는 2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신경’을 기초로 ‘동질(同質)’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케사리아의 에우세비오신경이 채택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니케아 신경’이 공포되었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敍品)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② 제2차 공의회: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남녀 공주 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 ||||||
니케아 지도[콘스탄티노플 남동쪽에 있는 니코메디아 바로 남서쪽에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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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사전
니케아 공의회 [Nicaea, Council of]
787년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교회의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
이 공의회의 주요의제는 726년 황제 레오 3세가 성상숭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을 때 일어난 성상파괴 논쟁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공의회는 성상들에 경의를 표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는 있지만 예배할 만한 가치는 없다고 공포했다. 총대주교 타라시우스가 소집한 이 공의회에는 교황 아드리아누스 1세의 사절들이 참석했고, 교황은 공의회가 결정한 법령들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공의회의 권위는 11세기말에 이르러 프랑스에서 도전을 받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몇몇 교리 구절들이 잘못 번역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로마가 내린 원래의 결정이 받아들여졌고,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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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 [Nicaen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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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공의회는 로마 황제들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끝난 후인 325년 여름에 개최된 것으로, 첫번째 범제국적인 종교회의이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했을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바로 니케아신경이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그 당시 교회의 쟁점이 된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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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공의회 [Council of Constantin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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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제2회 세계공의회: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150명의 동방정교회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했다.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하였다.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하였다.
② 제5회 세계공의회:553년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소집, 동방정교회의 주교(主敎)들만 참가하였다. 이른바 《3장(章)》 문제의 논의를 통해 단성설(單性說)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신학과 정통 신앙과의 조화를 찾고자 로마측에 양보를 강요, 팽팽히 대립함으로써 결국은 교회분열을 가져왔다.
③ 제6회 세계공의회: 680∼681년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배척하고 로마가톨릭 교회와 화해하였다.
④ 제8회 세계공의회: 869∼870년 이콘[聖畵像] 논쟁을 둘러싼 동 ·서 교회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공의회이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는 동 ·서 양교회 분리의 요인을 조성한 포티우스 주교를 파문하였다. 또한 불가리아인에 대한 동로마제국의 권리를 배격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의 귀속을 확인하였다. 일시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회합동을 재현한 공의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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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295~373]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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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젊었을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가까이 하여 그리스적 교양을 쌓았다.
319년 부제(副祭)가 되었는데, 325년에 주교 알렉산더를 따라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異端說)을 매섭게 논파함으로써 명성을 얻음오로써, 이듬해 알렉산더 주교가 죽자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 동로마제국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파는 황제정권과 결탁하여 그를 괴롭혔으므로, 5번이나 교구장직을 박탈당하고, 17년 동안 이나 유배생활을 하였다.
339~346년의 제2차 추방 때는 로마의 율리우스 1세에게로 피신하여, 로마 교회와 아타나시우스설(說)이 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의의는 삼위일체설(三位一體說)과 로고스 그리스도론에 있다.
참조항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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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출생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학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 분열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被造性)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主敎)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에서 또 파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스에게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되었다. | ||||
참조항목 : 그리스도론, 반아리우스설, 아리우스파, 아타나시우스, 니케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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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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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파 [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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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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