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성서번역자를 위한 고대역본들
다카미추 무라오카*
성서는 세계문학에서 독특한 책이다. 그 메시지와 문학적 특성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번역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맨 처음 번역은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른바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유대인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이다. 몇 세기 뒤에 몇몇 번역이 뒤따라 나오는데 아람어의 유대인 방언(타르굼)과 아람어의 다른 방언인 시리아어(페쉬타) 그리고 라틴어(제롬의 불가타)와 같은 고대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물론 이들 번역은 모두 성서 원문에서 직접 번역된 것이다.
특정한 공동체에게 메시지를 전할 목적으로 성서를 번역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곧 교육이나 선교를 목적으로 번역을 한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알고 있는 엘리트가 아닌 공동체 일반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길 때 이런 목표는 잘 달성된다. 아리스테아스 편지라는 기원전 2세기의 유명한 문헌을 읽어보면 이러한 관심을 잘 알 수 있다. 곧 유대인 공동체가 프톨레미 2세 왕을 설득하여 당시 문화적으로 상류층이었던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알아볼 수 있고 말할 줄 아는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갖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이론을 따르자면 칠십인역은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히브리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타르굼도 아람어가 일상어가 되어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팔레스틴이나 시리아의 유대인들을 위해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기도 작용한 듯하다. 사해 문헌에 유대인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단편과 욥기 아람어역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쿰란 공동체의 서고에서 나온 히브리어와 아람어 문헌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공동체 일원이 아람어 뿐만 아니라 문헌에만 사용하던 고전 히브리어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며 일상어로는 아람어 뿐만 아니라 미슈나 히브리어와 가까운 히브리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욥기의 아람어역이 필요했을까? 성서에 한 번만 나오는 하팍스 레고메나가 평균 이상으로 많이 나오고, 잘 모르는 히브리어 낱말이나 구가 많이 나오는 욥기를 전부 아람어로 옮긴 동기는 도대체 무엇일까? 쿰란 제11동굴 욥 타르굼(11QtgJob)의 아람어를 그들은 쉽게 읽었을까? 또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욥기가 유대인 회당
* 전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 구약학 교수.
예배에서는 한번도 예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경이나 예언서 일부 또는 소예언서가 정규적으로 회당 예배에서 읽혀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정경에 들어오지 않은 예례미야 편지의 단편(7Q2)이 포함되어 있는 칠십인역 단편은 어떠한가? 결국 아인 페슈카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셈이다. 성서번역이란 문헌 형태로 성서를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방식이다. 어떤 이는 번역이란 줄인 주석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서는 예전용이나 선교용으로 번역된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번역성서를 읽을 때 원어를 몰라서 읽는 것만은 아니다. 글을 쓰거나 주석을 쓰기 위해서도 읽기 때문이다. 번역은 주석이 아니다. 주석가와는 다르게 번역자는 홀로 끊임없이 앉아서는, 잉크를 많이 쓰지도 않는다. 잉크가 병에 들어 있든 프린터 속에 들어 있든 말이다. 모리스가 한 말처럼 번역은 줄인 주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어나 일어처럼 한 언어 안에서도 번역성서는 많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부자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니다.
옛 역본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대인 성서의 첫 그리스어역은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다양한 단계를 거쳐 일부를 개정하거나 모두 개정을 해야만 했다. 카이게 개정본, 루시아 개정본, 아퀼라, 심마쿠스, 테오도시온, 오리겐 헥사플라 개정본, 베투스 라티나를 대본으로 한 제롬의 불가타, 팔레스틴 타르굼이 대본인 타르굼 옹켈로스, 시리아-헥사플라가 저본인 페쉬타 등이 그 예이다. 성서의 아람어 단편이나 그리스어역 단편이 한 지방의 작품인가 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문제이나 여기서는 제쳐두기로 하자. 베낀 것이든 외부에서 들여온 것이든 또는 공동체 일원이 사온 것이든 소유하고 있던 것이든, 쿰란 문헌에 이들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 일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으며 아마도 이들 문헌을 읽고 공부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대 성서번역자들이 이들 고대역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성서 번역자가 성서의 처음 학생이고 아주 훌륭한 학생이었다는 점이다. 성서 번역자는 일반 상업문서 그리고 냉장고나 텔레비전 사용 설명서를 옮기는 역자와는 다르며 달라야 한다. 또한 부르셀에 있는 유럽공동체(EU) 본부에서 각 회원국가의 말로 되어 있는 여러 문헌을 번역하는 수많은 번역사와도 다른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돈을 받고 일을 한다. 둘째로 그들이 옮기고자 하는 언어는 자신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모국어이다. 따라서 옮기고자 하는 문헌이 무슨 내용인지 파악만 되면 그 언어의 쓰임이나 의미가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별 문제가 될 수 없다. 셋째, 문헌을 번역하면서 그 내용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에 빠질 필요가 없다. 성서번역자는 옛 문헌을 다루기 때문에 두 번째 사항이 특별히 중요하다. 곧 언어 발전 단계에서 생성 단계에 속해 있는 이들 옛 문헌은 2천년 동안 연구해 왔는데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고 또 음성학, 형태론, 문장론, 의미론, 문체론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어렵다.
성서번역자들은 현대 주석서 뿐만 아니라 성서언어 문법과 사전을 참조하는 만큼 초기 성서주석의 소중한 보고인 옛 역본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이들 성서해석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부분이나 단편만이 아니라 전체가 죽 이어진 역본들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옛 역본들의 세밀한 부분을 꼼꼼히 연구한 결과는 비블리아 헤브라이카의 비평장치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곧 이들 비평장치에는 마소라 본문의 한 낱말이나 구 또는 어순의 문제를 세부적으로 밝힌 본문비평 결과가 잘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세밀한 본문비평 장치는 또한 마소라 본문과 그 저본이 일치하거나 다를 것으로 추정되는 역본들, 그렇기 때문에 고쳐서 읽기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 역본들을 참조한 것이다.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슈투트가르텐시아나 네슬의 그리스어 신약 최신판으로 작업하는 오늘날의 성서번역자들은 이런 각도에서 옛 역본들을 대할 수 있다. 곧 가장 오래된 성서본문을 찾아내고자 하는 본문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작업을 한다.
역자들이 이러한 본문비평 작업에 낯설다면 성서 본문비평 전문가들이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살펴보면 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본문비평 관점이라는 것은 옛 역본들을 달리 읽기의 중요한 자원 또는 출처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접근 방식이다. 칠십인역 번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오경 본문은 키텔 판과 슈투트가르텐시아 판 히브리어 성서가 담고 있는 레닌그라드 코덱스보다도 1300년이나 앞선다.
마소라본문보다는 칠십인역에 더 가까운 단편들이 사해 두루마리에서 발견되면서부터 구약 본문비평에서는 칠십인역의 가치가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칠십인역 역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본문이나 사본, 곧 칠십인역의 저본이 우리에게 전해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저본은 칠십인역 본문을 꼼꼼하고 세심하게 분석하여 히브리어로 거꾸로 재구성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쉽지는 않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학자들에게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여러 요인 때문이다.
(1)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히브리성서 본문과 달리 읽기를 보이는 사본이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소라 본문의 메시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된 뒤에도 예레미야서나 사무엘기 같은 책 말고는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와 비교하여 칠십인역의 본문전승 역사와 이독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칠십인역 괴팅엔 비평본의 어떤 책을 펼쳐보아도 비평장치가 그 절반을 넘지 않는 쪽이 하나도 없다. 각 쪽 상단에 재구성하여 실은 원 칠십인역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 이는 단순히 수많은 사본에서 발견되는 이독이 많다는 점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부들의 칠십인역 주석서에서 발견되는 독법 또는 그 이후에 나온 여러 역본을 거꾸로 추정하여 재구성한 독법도 포함한다. 이렇게 한 “칠십인역”에 대해 말을 한다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히 하나의 칠십인역을 이야기할 수 없다.
유대인 성서의 그리스어역이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양한 번역본이 떠돌아다녔다고 주장하는 폴 칼레의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원 칠십인역이 나온 뒤 몇 세기 동안 여러 개정본이나 교정본이 떠돌아다녔다. 어떤 것은 그리스어 표현을 더 낫게 해보려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여러 히브리어 성서본문에 기초한 것도 있었다. 바로 이들이 히브리성서 본문비평학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개정본 또는 교정본이다. 고대 세계에서 히브리성서 본문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진전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2) 번역의 다른 접근. 칠십인역 속에 들어 있는 각 책을, 서로 비교해보든지 또는 히브리성서와 비교해 볼 때, 번역자마다 원문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와 이사야서를 보자. 적어도 두 사람이 각각 번역한 것이 분명하다. 우선 칠십인역 이사야를 히브리어로 다시 번역한다면 그러한 히브리어 본문이 정말 있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욥기와 잠언의 경우이다. 또는 다니엘서를 예로 들 수도 있다. 다니엘은 옛 그리스어 개정본과 테오도시온 개정본이라는 확연히 구분되는 두 전통으로 전해 내려왔다. 각 그리스어 본문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다시 번역했을 때 서로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다니엘서가 애초부터 서로 다른 두 본문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칠십인역 그리스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른 두 형태의 본문을 마련하신 섭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성서의 욥기 본문비평 학자의 경우는 그 작업이 매우 벅찰 것이다.
제롬이 옮긴 불가타역의 경우 그가 어떻게 번역작업을 했으며, 어떤 동기와 원칙으로 작업을 했는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옛 역본의 경우 그 과정을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서고나 또는 번역위원회 회의자료가 잘 보관되어 있는 각국 성서공회의 서고 같은 것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옛 역본들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정보를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성서 본문비평가는 역본들이 어떤 동기나 과정을 거쳐 나왔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또 얼마만큼 유통되었는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원칠십인역, 원아퀼라역 등을 복원하기 위하여 때로 뒤섞여 있는 여러 본문의 정보를 세심하게 곱씹고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퀼라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독법은 잘못 분류된 것일 수 있다. 전승과정에서 생기는 오류 때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퀼라역이 히브리어 불변화사 에트를 그리스어 문법에 거슬러 대격을 지배하는 전치사 쉰(syn)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다고 어느 정도는 확신할 수 있을 때, 본문비평가는 쉽게 그리스어 사본을 평가하고 그 저본일 것으로 생각되는 히브리어 원문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퀼라역의 그리스어 본문에 나오는 히브리어 저본에는 마소라본문처럼 그 불변화사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스어 문법에 좀 거스른다 해도 같은 히브리어 낱말을 같은 그리스어로 일정하게 옮긴다는 원칙을 아퀼라는 적용한 듯하다. 히브리어 에트(תא)가 같은 소리 다른 말로 직접목적어를 나타내는 말로 또는 “...와 함께”라는 전치사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런 류의 접근은 그 본문이 얼마만큼 많이 돌아다녔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여러 사본에 근거하여 특정한 역본의 저본을 찾아낼 수도 있고, 역자의 작업방식을 찾아낼 필요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번역기법을 찾아내는 일은 다 방면에 두루 걸친다. 우선 번역문의 어떤 말이 원문의 어떤 말을 번역한 것인가 따져보는 일이다. 산소라는 뜻을 지닌 영어(oxygen)와 독일어(Sauerstoff)같은 일대일 대응어는 정상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이 점은 해취-레드페드의 칠십인역 콘코던스를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여러 히브리어 낱말을 한 그리스어 낱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이 콘코던스에 들어 있는 역순 부록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마소라본문에 283번 나오는 히브리어 명사 브리트 (תירב)가 그리스어 디아테케로 275번 번역되어 나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귀중한 정보이다. 원문의 한 어휘가 번역문에서 여러 어휘로 번역된다는 것은 원문의 그 어휘가 여러 뜻으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헤마(המח)가 두 어휘소가 아닌 한 낱말이라면 분노를 뜻하는 일련의 그리스어로, 또는 독이나 독액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원어에는 비슷한 말이 많지만 번역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 어려움은 더 클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주로 사전의 의미론에서 다룰 문제이다.
옛 역본 역자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문법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히브리어 문법학자 뿐만 아니라 성서 번역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문법 영역이 있다. 카이게 개정본의 사무엘기와 열왕기의 그리스어 역자 또는 개정자는 때로 히브리어 대명사 아노키를 에고 에이미라고 하여 그리스어 동사와 함께 번역한다. 삼하 12:7이 그 경우이다(아노키 므샥흐티카 - 에고 에이미 엑흐리싸 쎄). 이 경우 개정자의 저본이 마소라 본문과 일치하기 때문에 본문비평학적으로 중요하며, 히브리어 본문을 따를 것인가 하는 점을 따져야 하기 때문에 성서 번역자에게도 중요하다. 이 히브리어 대명사는 강조하거나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 원문의 언어와 번역문의 언어에 들어 있는 어려움과 모호한 점.
옛 언어의 특징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모호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잘 보존되어 오랫동안 연구 대상이 되어온 그리스어 문헌이나 라틴어 문헌까지도 그렇다. 아주 드문 형태나 낱말 또는 문법 형태를 다룰 때 특별히 어려움은 더하다. 이러한 어려움을 잠정적으로 해결할 때 옛 역본들은 자료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스어나 라틴어 같은 번역문의 언어도 물론 그 자체에 어려움이 있고 모호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고대어로 기록되어 있는 단편 문헌 속의 깨어져 알 수 없는 그 공백을 메우려고 하는 노력과 비슷하다. 모압어 메솨 새김글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유수한 셈어 학자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이 있다. 연구하고 있는 단편을 해독했을 때 말을 삼가거나 한 말을 후회한다는 표현이 있다.
지금껏 이야기한 것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옛 역본들은 옛 성서번역의 보고이기 때문에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는 성서학, 특히 구약학이 새롭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성서학의 이러한 새로운 연구 경향은 프랑스어로 강아래란 뜻의 아발이라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분야의 개척자 빠리의 하를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이에 비해 옛 역본의 전통적인 접근은 윗언덕이란 뜻의 아몽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출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이들 프랑스 학자 그룹은 칠십인역의 프랑스어 번역에 진지하게 주를 붙여 지금까지 12권을 펴냈다. 국제 칠십인역학 및 인접학문 조직은 철학이 현저히 달라도 칠십인역의 새로운 영어번역이란 뜻의 네츠(NETS) 기획을 추진하고 있다. 2000년에 그 첫 작품을 내놓았다. 이탈리아어 번역이 있긴 하나 다 된 것은 아니다. 작년에 일본에서는 칠십인역 창세기를 하타가 주를 달아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독일어 번역도 지금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덧붙여 타르굼의 영어번역은 지금 읽어볼 수 있다(맥나마라, 에딘버러 1987-). 타르굼 네오피티의 디에즈 마쵸 스페인어역(마드리드-바르셀로나, 1968-76)도 있다. 타르굼 네오피티와 위 요나단 오경의 불어역(빠리, 1978-81)도 있다. 라이덴 대학교 페쉬타 연구소는 페쉬타에 주를 붙여 영어역을 펴내고 있다. 이러한 옛 번역 연구는 아주 중요하며 미래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것이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칠십인역 사전 작업도 이러한 연구와 같은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칠십인역 사전 기획은 현존하는 그리스어 본문을 연구하여야만 집적될 수 있는 분야이고 철저한 연구를 할 때 아주 필요하다.
(번역: 이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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