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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아시아와 동 아시아 사람들을 위한 성서 번역6-85 | 성경의사본학 2006.08.01 06:39

영국신사77 2007. 3. 1. 15:54
서 아시아와 동 아시아 사람들을 위한 성서 번역6-85 | 성경의사본학
2006.08.01 06:39

서 아시아와 동 아시아 사람들을 위한 성서 번역 -동남 아시아에 초점을 맞추어

다우드 소실로*

들어가는 말

누구나 맘에 드는 번역 성경은 없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맘에 들어 하는 성경을 내놓는다는 것은 단지 꿈이 아닐까? 여러 해 전 유진 나이다와 찰스 테이버는 이런 말을 했다. “정역(正譯)은 있는가?”하는 해묵은 질문은 “누구에게 정역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으로 답변해야 한다고.1) 따라서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동남 아시아와 동 아시아의 성서번역을 말하려 할 때 우선 생각해야 할 점은 다양한 독자들이 어떤 번역을 좋아할까 하는 점이다. 그래야만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교권에 속해 있는 동 아시아의 한 나라를 예로 들어 보자. 윌리암 스몰리는 말하기를, 붉은 가사를 입은 태국 방콕의 불교 승려는 누구든 요한 3장 16절을 아래와 같이 태국어로 옮겨놓으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것이라고 했다.

거룩하신 주님은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어찌할 줄 몰라 신성한 외아들을 내어놓으셨다. 누구든 거룩하신 분을 순진하게 믿기만 하면 죽지 않게 하시려는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의 수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2)

스몰리는 이어서 말하기를 태국의 정통 불교관에 따르면 감각 그리고 사랑 같은 감정 때문에 욕망이 생겨나고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곧 고통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은 감정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주님”은 사랑과 같은 감정을 뛰어넘어 계신 분이다.3) 더구나 “순진하다”는 말이 태국어에서는 “믿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4) 고통이 많은 사람이든 적은 사람이든 누구나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고 태국인들은 믿는다. 고통의 수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깨닫는” 길이다. 그래야 고통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국 불자들은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5)

사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윤회의 가르침을 더욱 확실히 믿게 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예수가 심한 피부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을 고치시고 사제에게 보이라고 한 이야기(마 8.1-4, 막 1.40-45, 눅 5.12-16)는 때로 예수께서 그 사람을 고치지 못하여 (불교) 사제에게 그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닌가하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서 아시아, 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와 읽은 경전의 영향으로 나름대로 전이해를 갖고 성서를 접한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브라힘)의 믿음을 시험하신 이야기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여전히 이슬람교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6) 성경(창 22.1-14)에는 사라의 아들 이삭을 아브라함이 바치지 않았던가!

서 아시아, 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 동 아시아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를 이 짧은 글에서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범위를 좁혀 동남 아시아 사람들, 그 가운데에서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성서번역은 어떤가 살펴보려 한다. 연관이 있는 경우에 다른 지역의 이야기도 곁들일 것이다.

성서공회는 번역의 요구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성서공회는 성서를 번역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곧 성서번역이 성서공회의 주요 임무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번역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의 뜻을 충실하게 옮겨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2000년도에 남아프리카 미들랜드에서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친목을 다지려고 여러 성서공회 대표들이 모였는데, 여기서 성서공회의 정신과 정체성을 밝히는 선언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번역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또 효율적으로 반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하는 일이 성서공회의 임무라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정신과 정체성을 따라 각 회원 성서공회는 교회를 섬긴다. 곧 성경을 번역하고 출판하고 반포한다. 각 나라 사람들이 쓰는 표준말 또는 지방어으로 된 성경을 내놓아 그 성경으로 예배를 드리고 영성을 고양하고 목회하고 또 선교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번역성경은 그 필요성에 따라 다섯 종류의 번역로 나눌 수 있다.7) 

Eugene A. Nida and Jan de Waard. From one Language to Another: Functional Equivalence in Bible Translating. Nashville: Thomas Nelson, 1986, 40-41.

다섯 종류의 성서번역은 다음과 같다.

(1) 행간 성서로, 원문의 순서를 따라 낱말대 낱말을 일일이 문자적으로 옮긴 성서를 말한다(때로 문자적 번역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원어를 배운 적이 없어 원문의 형태, 어순, 문학적 기법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좋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곤란하다. 새국제역(NIV) 히브리어 영어 행간 구약, 개정표준역 그리스어 영어 행간 신약이 그 예이다. 말은 영어이지만 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또는 그리스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 문자적 번역 또는 형식적 일치 번역으로, 번역문이 말이 잘 되지 않더라도 원문의 형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살려 옮긴 번역을 말한다. 신학교 주석과 해석 시간에 적합한 번역이다. 제임스왕역(KJV, 1611년), 영어개정역(RV, 1881년), 미국표준역(ASV, 1901년), 스미드-굳스피드역(Smith and Goodspeed, 1923년), 모팻역(Moffatt, 1924년), 개정표준역(RSV, 1952년), 예루살렘성서(JB, 1966년), 새미국성경(NAB, 1970년), 새미국표준역(NASV, 1976년, 1978년), 새국제역(NIV, 1978년), 새제임스왕역(NKJV, 1979년), 타낰(Tanakh, 1985년), 새예루살렘성서(NJB, 1985년), 새개정표준역(NRSV, 1989년), 루터역(Luther, 1959년), 프랑스어새개정역(NVSR, 1978년), 프랑스어예루살렘성경(BJ, 1955년, 1974년), 프랑스어에큐메니칼성경(TOB, 1975년) 등이 그 예이다.

(3) 내용의 동등성 번역으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옮긴 번역을 말한다. 원문의 형식을 파괴하고 내용과 기능을 보존하려고 노력한 번역이다. 곧 언어를 깊이 연구하여 번역에 반영한다. 다시 말해 원문의 요소를 분해하여 번역문 언어의 문맥에 맞게 재구성하고 속뜻을 밖으로 드러내는 번역이다. 특별히 전달이론과 사회기호론을 따라 이 번역원칙이 발전되어 왔다. 이런 류의 번역은 신학적으로 훈련을 받은 이들이나 일반인 모두 이러한 번역을 읽고 공부하기에 적절하다. 이러한 번역으로는 복음성경(TEV, 1966년, 1976년), 새영어성경(NEB, 1961년, 1970년), 개정영어성경(REB, 1989년), 현대영어역(CEV, 1997년), 독일어복음성경(GNB, 1982년), 현대프랑스어역(BFC, 1982년)이 있다.

(4) 번안으로 “자유”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코드를 각 장르에 맞게 바꾸어 내놓은 번역을 말한다. 음악, 시, 드라마, 영화, 비디오, 텔레비전에 알맞게 바꾸어 내놓은 번역을 가리킨다. 번안의 두 번째 종류로는 번역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번역으로 길게 풀어 옮긴 번역이 이런 종류에 들어간다. 생활성경(LB, 1971년)의 목적은 “성서의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현대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가능한 한 정확하게 쉽게 늘여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자, 곧 번안자는 개인적인 견해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 때로는 신학적인 편견까지도 삽입되는 경우가 있으며, 어려운 구절을 만나는 경우에는 억지로 다른 구절과 조화를 시키려고 고쳐서 읽기도 한다.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학문적인 성서연구에는 적합하지 않다. 번역어의 뜻이 정확한가하는 점이 미심쩍기 때문이다. 개정역인 새생활성경(NLT)은 훨씬 나은 번역이다.

(5) 문화적 재해석은 원문의 내용을 특정한 문화에 적합하게 바꾼 것을 말한다. 문화적 재해석은 특정한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원문의 문화와 역사 배경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클레어렌스 조단 솜조각 복음서(Clarence Jordan’s Cotton Patch Version of the Gospels)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 번역으로, 원문의 문화를 미국 남부의 문화로 바꾸어 옮긴 번역이다. 빌라도는 죠지아주의 주지사로, 안나와 가야바는 남침례교회의 공동회장으로 대치하여 옮겼다. 또 예수는 죠지아주 개일스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죠지아주 아틀란타 대중이 심문하지도 않고 예수를 죽였다고 말한다. 로저 파멘티어(Roger Parmentier)의 프랑스어 아모스역도 이와 비슷하게 정치적 상황을 현대로 바꾼 번역이다. 북 술라웨시 인도네시아인들은 요한 15.1-8을 옮기면서 “나는 참 정향(clove)이고 육두구(nutmeg)이고 코프라(copra)이다”로 읽는다. 캡틴스 로저스는 시편 23편을 제임스왕역을 따라 이렇게 옮긴다.

“씨멘역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선장이세요. 나는 떠내려 가지 않지요. 환히 비추시어 어두컴컴한 바다를 건너게 하시지요. 깊은 운하를 건널 때도 키를 잡고 계시네요. 어렵지 않게 항해하게 하시는군요. 님의 이름 덕분에 내가 거룩한 별을 따라가게 하시는군요. 그래요, 천둥이 치고 폭풍이 이는 인생을 항해할지라도 나는 무서워 떨지 않아요. 주님이 내 곁에 계신 때문이죠. 사랑해 주시고 돌봐 주시니 난 쉴 수 있어요. 영원이라는 고향에 이르게 하시는군요. 파도에 기름을 바르시어 내 배는 순조로이 나아가지요. 햇빛과 별빛의 호의를 받으며 이렇게 항해 하네요. 하나님은 나의 항구시라, 그곳에서 영원토록 쉴 것이예요.”

그렇긴 해도 각 성서공회는 기본적으로 한 번역을 내놓는다. 때로는 두 번역을 내놓는데 대체적으로 내용의 동등성 원칙을 따른 번역과 형식적 일치 원칙을 따른 번역이다. 어떤 경우에는 특별한 목적으로 행간성서를 내기도 한다. 또한 주석성경, 성서연구 자료, 학문용 성서, 핸드북, 2개국어 성경, 어린이성경, 점자성경, 오디오성경, 비디오성경을 출판하기도 한다.

어떤 지침으로 많은 이가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내놓는가?

케넷 토마스는 비그리스도교권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이 필요하다고 성서공회에 말한 적이 있다.8)

1. 다른 신앙인들을 존중해야 한다. 모두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2. 다른 신앙인들도 우리처럼 자신들의 신앙을 잘 보존하고 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다른 신앙의 상징, 관습, 체계를 존중해야 한다. 공격적이어서는 안되며 이 때문에 대화가 막혀서도 안 된다.

4. 우리에게 성경이 있듯이 다른 신앙인들도 경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아브라함 전통을 따르는 신앙인들과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신학적 배경이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6. 다른 신앙인들도 우리처럼 자신의 신앙을 전해야 하며 서로 잘 지내야 한다.

7.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른 신앙인들을 존중해야 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의 성경은?

아시아에서 번역성경이 나오기 오래 전, 알버트 코넬리즈 루일이라는 무역상인이 네덜란드어성경에서 마태복음을 말레시아어로 번역한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 성경을 역사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네덜란드 배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상륙하기 6년 전인 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인 루일이 이미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다. 루일은 말레이시아어를 배워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612년에 번역을 끝냈다. 제임스왕역이 나온 이듬해의 일이다. 루일역은 1629년에 네덜란드에서 나왔다. 말레시아어 본문과 네덜란드어 본문을 나란히 배열해 놓은 2개국어 대조성서로, 제목은 IANG TESTAMENTUM BAHARU: EUANGELIUM ULKADUS BERSURATNJA KAPADA MATTHEUM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공공도서관과 영국박물관에 있다.

영국성서공회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629년에 인쇄된 첫 말레시아어 복음서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맨 처음 비유럽언어로 번역된 복음서 단편이기 때문이다.”9)

루일은 얀 반 하젤과 유스투스 호이어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사복음서 번역을 끝냈다. 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번역은 1651년에 인쇄되었다. 일년 뒤 반 하젤과 호이어니우스는 시편 말레이시아어역을 번역하여 펴냈다.

그 다음으로는 다니엘 브루웨리우스 목사의 번역이 중요하다. 그의 창세기역은 1662년에 그리고 신약전서는 1668년에 출판되었다. 이 번역에는 포루투갈어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 흠이다. 곧 “성령”은 스삐리또 쌍또(Spirito Sancto)로 “십자가”는 크루스(crus)로 옮겼으며 다른 포루투칼어 음역이 많이 들어 있다.

멜키오르 라이즈데커라는 네덜란드 의사는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말레시아어 성경전서를 펴냈다. 피터 반 더 보름, 죠지 웬들리, 엥엘버투스 코르넬리우스 니나버, 아놀두스 브란츠로 구성된 검토위원회의 도움으로 나온 번역이다. 라이즈데커는 사실 1675년에 동 자바의 군목으로 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1678년에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의 말레시아 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는 1691년에 성경전서를 고급 말레이시아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말레이시아어 문헌의 주종을 이루는 문체였다. 성서 원문에서 옮기는 일을 했다. 1731년 신약전서를 펴내고 1733년에는 최초의 말레이시아어 성경전서를 암스테르담에서 펴냈다. 로마자로 인쇄한 성경으로 제목은 ELKITAB, IJA ITU SEGALA SURAT PERDJANDJIAN LAMA DAN BAHARUW이다. 25년 뒤인 1758년에 말레이시아어 성경을 자위(아랍어) 글자로 펴냈다. 다섯 권으로 편집한 성경이다.

아래의 목록은 말레이시아어 라이즈데커역을 개정한 성경 목록이다. 인도네시아에서 개정한 것도 있고, 말레이시아에서 개정한 것(별표를 달음)도 있다.

윌리암 로빈슨(마태 1815년, 요한)

*로버트 허칭스 - 맥기니스(신약 1817년 세람포어, 구약 1812년) 풀라우 피낭에서

*클라우디우스 톰센, 런던선교회(LMS) 소속 + 문쉬 압둘라(마태 1821년)

*톰센 - 로버트 번즈 + 문쉬 압둘라(사복음서 + 사도행전 1832년)

요하네스 엠데, 렌팅, 왈터 헨리 미드허스트(신약 1835년, 시편) 수라바야에서

헤르만(마태 1850년) 민하사에서

비어하우스(마가 1856년)

나다니엘 와드(창세기 1856년) 파당에서

로스코트(신약) 암본에서

*벤자민 키스베리, 런던선교회(LMS) 소속 + 문쉬 압둘라가 신약전서 개정판을 싱가포르에서 1852년(로마자 판)과 1856년(자위/아랍어글자 판)에 펴냄.

힐리브랜더스 코넬리우스 클린커트라는 네덜란드의 메노파 선교사는 피터 잰츠 목사와 함께 자바 중부의 제파라로 갔다. 잰츠 목사는 자바어 성서번역자였다. 클린커트는 라이즈데커역보다 더 쉬운 말로 성경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네시아인 아내가 자바어와 쉬운 말레이시아어 만을 말할 줄 알기 때문이다. 1861년에 사복음서를 펴내고 신약전서는 1863년에 펴냈다. 이 “저자거리 말레이시아어” 번역은 아주 인기가 좋아 1949년까지도 인쇄되어 나왔다.

말레이시아어 성경은 영국성서공회가 싱가포르에 정식 직원을 둔 1880년에 가서야 비로소 체계적으로 반포되기 시작했다. 1890년에 싱가포르 성공회의 호세 주교가 키스베리 신약 개정판이 읽기 어렵다고 영국성서공회에 불평하였다. 그는 곧바로 마태복음 번역을 준비하였으며, 주로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 윌리암 쉘라베어가 작업했다. 쉘라베어역은 최초의 말레이시아어 성경전서이다.

다음은 쉘라베어역을 포함한 말레이시아어 성경과 그 개정판 목록이다.

*호세 성공회 주교(마태)

*윌리암 쉘라베어, 호세, 고메즈(마태, 1897년)

*쉘라베어, 로이링, 호세 + 요호르의 다툭 달람(신약 1910년, 아랍어글자 구약 1912년, 로마자 구약 1927-1929년) 말라카와 싱가포르에서

*쉘라베어 + 츄친용 + 술라이만(바바 말레이시아어 신약 1913년)

네덜란드성서공회, 영국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1929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말레이시아어 번역을 함께 내기로 하였다. 이 새변역으로 이전에 나온 라이즈데커역(1733년), 클린커트역(1879년), 쉘라베어역(1912년)을 대치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베르너 아우구스트 보데라는 독일인 선교사가 신약 번역작업을 맡았다. 그는 그때 미나하사의 토모혼에서 신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암본의 케일루후, 페락의 마쇼호르, 압둘 가닌, 쉘라베어, 헨드릭 크래머의 도움을 받아 번역작업을 했다.

1954년 2월 9일에 생긴 인도네시아성서공회(렘바가 알키타브 인도네시아)는 독립국 인도네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른바 테르제마한 라마(옛 번역)를 펴냈다. 클린커트역 구약(1879년)과 보데역 신약(1938년)을 모아놓은 것이다. (1958년판 서문을 읽어보면 1952년부터 번역위원회가 현대어번역을 내놓으려고 작업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판은 구약과 신약을 한권으로 읽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편집한 것이다.

한편 인도네시아 가톨릭교회의 보우마 신부는 새로운 인도네시아어역 신약을 내놓았다. 1964년 플로레스의 아놀두스에서 나왔으며, 개정판은 1968년에 나왔다. 클레투스 그로에넨 신부는 1968년까지 구약 번역작업을 하다가 인도네시아성서공회와 함께 작업하기로 하고 앞서 해오던 작업을 그만 두었다.

인도네시아어 새번역은 1952년에 네덜란드성서공회가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는 인도네시아성서공회가 이 작업을 물려받았다. 번역위원회는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북 수마트라, 자바, 미나하사, 티모르와 같은 인도네시아 각 지역 출신의 전문가로 구성되었다. 네덜란드인 스웰렌그레벨 박사가 1952년부터 1959년까지 번역진 책임을 맡았다. 그 뒤로 인도네시아인 아비네노 박사가 1962년부터 작업이 끝날 때까지 책임을 맡아 일했다. 번역진은 그리진스, 나이포스포스, 바르트 박사, 소에카르소, 소에다르모 박사, 시마눙칼리트, 워에우엥안, 쿠이페르 박사, 리엠 키엠 양 박사, 시보로에토로프, 드 쿠이페르 박사, 코페르, 리킨-비즈레벨드로 구성되었다. 신약은 1971년에 나왔으며 성경전서는 1974년 인도네시아성서공회가 펴냈다. 제2경전이 포함된 판도 있다. 이 역본을 “새번역”(테르제마한 바루)이라고 부른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초교파용 번역본 성서이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몇 교회에서도 이 성경을 쓴다.

1997년 10월 인도네시아성서공회는 신약 개정판 작업에 착수했다. “신약 - 새번역 제2판”(페르잔지안 바루 테르제마한 바루 에디시 케-2)라고 부르는 번역본이다. 성서 그리스어와 인도네시아어 전문가인 성서학자들이 그 번역진으로 작업하고 있다. 다음의 사항에 유의하여 작업하고 있는 중이다.

ㄱ) 인도네시아어의 변천

모든 말이 바뀌고 있는 것처럼 인도네시아어도 바뀐다. 어떤 낱말은 시대에 뒤처지고 또 어떤 낱말은 새로 생긴다. 또 어떤 말은 뜻이 바뀐다. 시대와 쓰임새가 바뀜에 따라 어떤 말은 어색하게 들리기도 한다. 따라서 새로운 말이 생긴다. 지금 쓰고 있는 말로 번역을 하지 않으면 독자들에게는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음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낱말들이다.

마 24.17 페랑기난(“지붕”)

마 13.33 수카트(“양”)

눅 13.21 카미르(“누룩을 넣은”)

딤전 1.10 펨브리트(“동성연애의”)

ㄴ) 성서학의 발전

현대 번역자들은 전보다 더 질이 좋은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으로 번역 작업을 한다. 더 오래된 사본이 발견되고 또 사전과 주석류가 점점 늘어나 보다 좋은 환경에서 번역일을 잘 할 수 있다. 문헌학자들은 지금껏 현존하는 것보다 더 오래된 사본들을 연구하여 결과를 내놓으므로 이 연구에 바탕을 두고 또한 번역작업을 할 수 있다.

ㄷ) 언어학과 번역학의 발전

19세기 초반 선교사운동이 벌어지면서 수많은 선교사들은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은 번역이론과 원어민이 더 강조되는 시대이다. 발전된 언어학과 정보이론으로 번역자의 임무가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어 신약 개정판을 마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에 있는 성서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자바 서부에 있는 키파융에 모여 어떻게 이 개정판을 마무리할 것인가 토론하였다.10)

196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 번역은 형식적 일치를 따른 번역이다. 가능한 한 원문의 형식을 살리려는 번역을 말한다. 예배를 드릴 때 또는 전도할 때 쓰려고 펴낸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목적도 있다. 그런데 이즈음 유진 나이다 박사가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11) 내용의 동등성 이론이라고 하는 것인데, 성서 원문의 형식보다는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옮겨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 새로운 이론에 입각하여 말레이시아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새로운 번역을 내놓았다.

말레이시아어현대역 초판(1987년)을 내놓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말레이시아성서공회에 이 번역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말레이시아어 위원회와 모임을 가졌다. 다음은 이 모임에서 함께 논의한 사항이다(말레이시아현대어역을 따름).

(1) 철자가 잘못되거나 오타인 곳. 멩기쿠트(“따르다”)라는 말이 멩기카트(“묶다”)라는 말로 인쇄됨(단 3.12). 알라가 알란으로 인쇄됨(사 40.9).

(2) 영어복음성경(GNB)을 너무 가깝게 따른 곳. 때로 문장을 그대로 옮기기도 했다. 마가 1.7의 아쿠 티닥 라약 바칸 메눈둑 안 멤부카 타리 카수트니야(“나는 엎드려 그의 신발끈을 풀만한 가치도 없어요”)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3) 말레이시아어보다는 인도네시아 어풍을 따른 곳. 세시아파(“누구든지”)가 아닌 바랑사아파(막 3.29) 그리고 물라(“시작하다”)가 아닌 물라이(막 1.21)가 그 예이다.

(4) 오역의 경우로, 출 20.8에서 사바트(“안식일”)가 사브투(“토요일”)로 되어 있는 경우이다. 더 심한 경우는 삼상 24.4로 멤부앙 아이르 베사르(“안심하다”)로 옮겨야 할 것을 베레하트(“쉬다”)로 옮긴 경우이다.12)

알라라는 말을 써야 할까 말아야 할까?

윌리암 쉘라베어 때 이후로 어떤 이름과 용어를 써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싱가포르에 머물러 있던 쉘라베어는 우선 십계명, 산상설교, 팔복, 시편 몇 편을 말레이시아말로 옮겼다.13) 

쉘라베어역은 고전 말레이시아어 문체로 옮긴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쉘라베어는 성경 이야기를 시아리르 시로 옮기기도 했다. 그는 코란을 말레이시아어로 옮기려고도 했지만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쉘라베어의 말레이시아어와 영어 저작 목록은 Robert Hunt, “The Legacy of William Shellabear.”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 26 no. 1 (January 2002) 31쪽에 모두 실려있다.

쉘라베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레이시아어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1890년 군대에서 제대하고 감리교회 선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성서공회는 1899년 말레이시아어 신약의 번역자로 그를 임명하였다. 신약번역은 1904년에 마쳐 1910년에 인쇄하였다. 그는 또 클린커트 구약의 개정작업을 1909년에 마치고 자위(아랍어) 글자로 1912년에 그 개정본을 펴냈다. 1927-1929년에는 로마자로 그 개정본을 인쇄하였다. 두 종류로 내놓았는데 하나는 말레이시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영어철자로 인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인도 동부에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네덜란드어 철자로 인쇄한 것이다.

쉘라베어는 말레이시아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 기획을 이끌어 나갔다. 아내와 함께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자그마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세운 이 말레이시아 교회는 그의 번역성경이 점점 빛을 바랜 것처럼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14)

쉘라베어역의 독특한 점은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Isa)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사 알마시(Isa al-Masih)로 표기한 점이다. 이전 역본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나온 말레이시아어 역본들은 예수스(Yesus)라고 표기한다. 쉘라베어는 이사와 이사 마시라는 표현이 원문과 독자들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곧 이사는 히브리식 이름 예호슈아(“여호수아”)를 아랍어로 표기한 것이며, 알 마시는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를 아랍어로 표기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자바 서부의 어느 그리스도교 단체는 인도네시아성서공회에게 아랍식 이름과 용어로 표기한 역본을 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대다수가 이슬람교인인 이 지역에서 선교하려고 그렇게 요청한 것이다. 장고 끝에 인도네시아성서공회는 쉘라베어역을 개정하기로 하였다. 이 역본이 아랍식 이름과 용어를 빌어 나온 역본이기 때문이다.15)

ㄱ) 본문과 주석

쉘라베어역 신약에는 주기도문의 글로리아 부분(마 6.13)을 옮기지 않았다. 원문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삽입으로 흔히 간주하는 행 8.37도 옮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구절이라고 하는 부분(요일 5.7-8)도 이 역본에는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긴 끝맺음(막 16.9-20)은 괄호에 넣지도 않고 그대로 옮겼다. 짧은 끝맺음으로 끝나는 사본들도 있지만 그렇게 한 것이다. 요한 7.53-8.11도 마찬가지로 다 들어가 있다. 오래된 그리스어 사본 가운데에는 빠져 있는 사본들이 있지만 말이다.

잘못 주석하여 옮긴 부분도 눈에 띈다. 사무엘상 24.2에 나오는 마카 마수클라 시아울 케 사나 헨닥 티두르(“그때 사울은 그리로[곧, 동굴로] 가서 잠을 잤다”)가 이런 경우이다. 번역자는 쉰다는 뜻을 나타내는 에두른 표현 “그의 발을 덮다”를 잘못 이해한 듯하다.

본문에 들어있지 않거나 다른 뜻을 나타내는 변경 부분도 눈에 띈다. 마태 2.5의 달람 네게리 바이트 라힘 디 토나 야후디아(“유다땅 베들레헴 주에”)와 마태 4.24의 디 베누아 시암(“시리아 대륙에”)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ㄴ) 언어의 쓰임

1. 옛말 - 쉘라베어역에는 당시로는 맞지만 지금은 뜻이 달라진 낱말, 표현, 문장구조가 들어있다. 그 예를 들어보자.

그리엑 “그리스인”(행 11.20) - 요즘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리스인을 유나니라고 부른다.

시암 “시리아”(마 4.24) - 지금은 시리아라고 부른다.

비니 “아내”(고전 7.4) - 대화체로 점잖치 않은 표현이다. 이스트리라고 한다.

타시크 “호수”(요 6.1) - 말레이시아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다나우라고 한다.

알라맛 “징표”(사 7.14, 요 3.2) - 오늘날은 주소라는 뜻으로 쓴다. 탄다가 징표라는 뜻이다.

시당 알라 “하나님의 무리”(행 20.28) - 지금은 법 용어로 회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신실한 이들이란 뜻으로는 제마 알라가 있다.

알람 바르자크 “끝없는 구렁”(롬 10.7) - 지금은 알람 쿠부르라는 말을 쓴다.

쉘라베어역의 어떤 표현은 바꾸어야 한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문장 구조를 그대로 따른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매우 옛스런 말로 들리거나 어색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카레나 키타 케자디안니아 주가 “우리 또한 사건이기 때문이다”(행 17.28ㄴ)

마카 페라후 이투 푼 수다 페누 아이르 루앙니아 “그때 배는 그 공간이 물로 가득찼다”(눅 8.23)

세텔라 페탕라 하리, 카레나 이툴라 하리 켈렝카판, 야이투 말람 하리 페르헨티안 “하루가 완성된저녁이 된 뒤, 곧 저녁이 끝난 뒤”(막 15.42)

이닐라 수랏 케투루난 이사 알 마시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의 편지이다”(마 1.1)

이브라힘 베라낙칸 이솩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마 1.2)

하이 페렘푸안, 아파카 양 케나 멩에나 디 아타라쿠 뎅안 디카우? “여인이여, 나와 그대는 무슨 관계인가?”(요 2.4)

이야기에서 “...을 말하자면, ...에 대하여, ...에 관하여”라는 뜻의 아다푼이 이야기 서두에 나오는데(창 3.1 이하) 지금은 매우 낡은 표현이다. 창세기 3장에는 모두 24절이 들어 있는데 거의 매 절이 “그 때”란 뜻의 마카(19번)나 랄루(4번)로 시작한다. 수려한 인도네시아말로 읽히기 위해서는 이 부분 역시 바꾸어야 한다.

옛 철자도 요즘 철자로 바꾸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소르가 “하늘”(막 8.11) > 수르가

코르반 “제물”(눅 2.24) > 쿠르반

로훌쿠두스 “성령”(눅 4.1) > 루 알라

바하루 “새로운”(요 2.10, 행 17.21) > 바루

이렇게 개정작업을 할 때는 옛 말과 철자, 낱말, 문장구조 등을 오늘날의 쓰임에 따라 고쳐야 할 것이다.

2. 아랍어 빌림말 - 특정한 독자층을 겨냥하여 내놓을 경우에는 빌려온 아랍어를 될 수 있는 대로 오늘날의 쓰임에 맞게 살려야 한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아라시 “보좌”(묵 5.11)

마자브 “당, 분파”(행 15.5)

인시아 알라 “하나님의 뜻”(행 18.21, 고전 4.19)

바니(이스라일) “(이스라엘)의 자녀”(요 12.13)


그렇지만 빌림말이나 용어가 다른 뜻을 가리킬 때에는 오늘날의 쓰임에 맞게 고쳐야 한다. 예를 들어 카아바라는 낱말은 성전을 뜻한다(눅 24.53, 행 21.28, 묵 11.19). 그렇지만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카아바는 메카의 마스지드딜하람에 있는 사각형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카아바가 나오는 곳마다 주님의 집이란 뜻의 바이트 투한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개정자는 물론 무조건 바꾸어서는 안된다. 우선 원문의 히브리어가 헤이칼인지 미크다쉬인지 또는 드비르인지 그리고 그리스어가 히에론인지 나오스인지 등을 살펴보고 고쳐야 할 것이다.

어떤 아랍어 빌림말은 쉘라베어역에는 나오지 않지만 라에데커역(1733년)이나 클린커트역(1879년) 또는 보데역(1938년)과 같은 말레이시아어 역본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개정작업을 할 때 이 역본들에 들어있는 빌림말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페르카타안 알라 “하나님의 말씀”(요 1.1) > 칼람 알라 “하나님의 말씀”

라완 알 마시 “구세주의 대적자”(요일 4.2, 요이 7) > 시 다잘 “적그리스도” 또는 “심판 날이 되기 전 땅으로 내려올 악마”

알 마시 양 두스타 “속이는 구세주”(마 24.24, 막 13.22) > 알 마시 팔수 “거짓 구세주”16) 

그러나 인도네시아성서공회는 셀라베어역개정판 신약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아랍어 빌림말을 쓰자는 개정작업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란 뜻의 무리드, 펭이쿳 대신 하와리로 하자는 의견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토심”이란 뜻의 마울리드 이사 알마시 대신 칼라히란 예수스 크리스투스로 하자는 의견을 말한다(나탈 참조).

3. 에두른 표현 - 쉘라베어역은 번역의 성격에 따라 원문의 에두른 표현을 그대로 살린 경우가 많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간접적인 표현을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문을 읽을 때 이상한 경우가 많다. 다음이 이러한 예이다.

마카 디케날 올레 이투 아칸 이스테리니아 하와 이투 마카 멜안둥라 이아 랄루 멤페라낙칸 아칸 카빌 “그때 그의 아내 하와가 그 남자에게 알려졌다. 그는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창 4.1)

마찬가지로 창세기 4.17, 25에도 에두른 표현이 그대로 나온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별 무리 없이 들리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 곧 “한 몸을 이룬다”는 뜻의 베르세투부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은 생식기와 죽음를 가리키는 에두른 말이다. 직역을 하다보니 어색하게 들리고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점을 흐리게 까지 한다.

부불라 탕안무 디 바와 파하쿠 “너의 손을 내 넓적다리 아래에 두어라”(창 24.2)

투한 아칸 멘쿠쿠르 ... 로마 이 카키 “주님이 ... 다리와 발의 좋은 털을 밀 것이다”(사 7.20)

마카 아비아 푼 베라둘라 디 데판 세갈라 네네크 모양니아 “그때 아비아는 선조들 앞으로 잠자러 갔다”(대하 14.1)

성경의 에두른 표현을 직역할 때 어색하게 들리기 때문에 아무리 번역원칙이 그렇다 하더라도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뜻을 살리는 수밖에 없다.

ㄷ) 이름

1. 사람 이름 - 어떤 독자들이 읽을 것인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아랍어식 이름은 될 수 있는 대로 살려야 한다. 예는 다음과 같다.

아시 알 마시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예수”(마 1.1, 1.18, 행 10.36 이하)

시아울 “사울”(행 9.1 이하)

야히아 “요한”(마 3.1 이하)

마리암 “마리아”(눅 1.27 이하)

유수프 “요셉”(마 1.19 이하)

지부라일 “가브리엘”(눅 1.26 이하)

이브라힘 “아브라함”(마 1.1 이하)

다우드 “다윗”(마 1.6 이하)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예수스 대신 이사를 써야 한다는 문제로 오랫동안 격론을 벌였다. 쉘라베어역 이후에 나온 역본은 말레이시아어역이든 인도네시아어역이든 모두 예수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현대 아랍어역도 이 말을 사용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교회지도자들은 예수스라는 말이 이사란 말보다 더 넓은 뜻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방에서 쓰고 있는 몇 역본은 여전히 이사란 말을 쓴다. 쉘라베어역이 이사라는 말을 채용하고 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인도네시아성서공회는 쉘라베어역 개정판에서 이사란 말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2. 하나님의 이름 - 쉘라베어역에는 하나님 이름 네 글자를 알라로 쓴다. 하나님의 이름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름이다. 이슬람 신조에 라 일라하 일라 알라라는 표현이 있는데 인도네시아어로 티아다 투한 셀라인 알라로 옮긴다. “하나님 밖에는 다른 주님이 없습니다”는 뜻이다(더 정확하게는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랍어로 “주님”이란 말은 라브이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쉘라베어역의 알라는 다른 인도네시아어 역본과 다르다. 이 점은 문자적인 번역이나 쉬운 말 번역이나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이 알라쿠(“나의 하나님”), 알라무(“너의 하나님”), 알라 카미(“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아랍어를 좀 알고 있는 이슬람교인은 무척 싫어한다. 아랍어 알라는 “그 하나님”이란 뜻의 알 일라를 줄인 말로(히브리어 하 엘로하, 그리스어 오 테오스 참조), 알라쿠라고 말할 수 없다. 영어로 “나의 그 하나님”(*my the God)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엘로힘은 일반적으로 여러 뜻을 지니고 있지만 아랍어 알라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하나님 이름 네 글자(요드 헤이 바브 헤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어보다 아랍어가 편한 이들은 “나의 하나님”이나 “너희 하나님” 또는 “우리 하나님” 아니면 “블레셋인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편치 않다. 알라 이브라힘, 아솩 단 야쿱(“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알라 투한쿠(“하나님 나의 주님”)라고는 하지만 투한 알라쿠(“주 나의 하나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도네시아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표현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또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교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개정본을 낼 때에는 이러한 표현은 삼가야 한다. 거부감 때문이다. 곧 사회언어학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옮기는 작업은 원문에 충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을 고려해야 한다.

오랜 격논 끝에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 이름 네 글자는 칠십인역의 번역 전통에 따라 보존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이는 인도네시아어역을 널리 사용하는 인도네시아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여러 이름을 신앙고백에 따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유격 대명사가 붙거나 속격으로 쓰일 때는 바꾸기로 했다.17)

쉘라베어역 개정판 신약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옮기기로 했다(부록 3을 보라).

사브다 이사 카파다니아, “페린타 양 테루타마 이알라, ‘뎅아를라 하이 오랑 이스라일, 알라, 투한 키타, 아달라 투한 양 마하 에사.’”

이사가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 오직 한뿐인 주님이시다’이다.”(마 12.28)

하나님의 다른 호칭은 다음와 같이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야훼 > 투한 “주님”

아도나이 > 투한 “주님”

야훼 쯔바오트 > 투한 양 마하 투아사 “전능하신 주님”

엘르욘 > 알라 양 마하 팅기 “가장 높으신 하나님”

이렇게 특정한 독자들을 위하여 특정한 번역본을 준비하고 있다.

알라를 쓰지 않는 번역

번역이 때때로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신학을 대변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은 불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레이시아 성서연합이 인도네시아어역 테르제마한 바루(“새번역”)를 인용한다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말레이시아의 출판법을 잘 알고서도 이런 일을 한 것이다. 저작권자인 인도네시아성서공회의 동의없이 알라(“하나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투한(“주님”)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말레이시아 출판사는 영국 라이온 출판사의 말레이시아판으로 알키타브 카낙-카낙: 키사 테라궁 디 두니아 데체리타칸 세물라 운툭 카낙-카낙(2000년)을 펴낸 적이 있다. 이 번역에서도 알라란 말을 빼고 야훼와 엘로힘을 똑같이 옮긴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몇 몇 주와 주정부가 알라란 말을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사용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말레이시아교회 지도자들이 1985년에는 말레이시아성서공회의 후원으로 쿠알라 룸푸르에서 그리고 1989년에는 말레이시아교회연맹의 후원으로 교회지도자 쿠칭 자문회의를 열었다. 두 모임에서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알라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성서공회는 말레이시아교회를 섬기는 입장으로 말레이시아어 성경과 제2경전(알키타브 베리타 바이크, BSM 1996년)을 출판하면서 이 결정을 따라야만 한다.18)

사실 아랍어 빌림말 알라는 히브리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이름인 엘, 엘로힘, 엘로하의 인접어이다. 아랍계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부터 알라에게 기도해 왔으며, 아랍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신학자들 역시 알라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알라를 사용한 전통은 무슬림보다도 이르다. 알라는 또한 옛 아랍어 성경 뿐만 아니라현대 아랍어 성경(현대아랍어역)에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이렇게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있는 이집트, 레바논, 이라크,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부르나이처럼 다른 언어와 함께 아랍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알라로 불러왔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도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인쇄된 마태복음(루일역, 1629년)과 말레이시아어 첫 성경전서(라이데커역, 1733년)에서 그리고 두 번째 말레이시아어 성경전서(클린커트역, 1879년)에서, 또 지금도 알라를 계속 사용해오고 있다.19)

어떤 이들은 중국어로도 하나님과 성령과 예언자들의 이름을 각각 달리하여 가톨릭교회는 한 번역을 사용하고 개신교회는 두 번역을 각각 사용하는 것처럼 말레이시아어로도 알라판과 투한판을 따로 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말레이시아에서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법은 없다. 중국어 역본들은 공동체마다 하나님을 달리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투한만 사용하는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가 창조주 하나님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가리킬 때 알라를 사용한다.

말레이시아와는 달리 인도네시아에서 알라는 모든 존재 위에 뛰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말레이시아에서 이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여태껏 없었다는 점을 말해야 하겠다. 카무스 베사르 바하사 인도네시아라는 인도네시아어 사전에도 알라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알라 - 나마 투한 달람 바하사 아랍, 펜킵타 알람 세메스타 양 마하셈푸르나, 투한 양 마하 에사 양 디셈바 올레 오랑 양 베리맘. “아랍어로 주님의 이름. 우주의 창조자로 가장 완전한 이. 주님으로 신앙인들이 예배하는 유일한 이.”20) 

몽골성서공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논의한 것도 참조하라. 부르한(“부르”는 “부르헤센”이란 뜻으로 모든 것 곧 삼라만상을 망라한 이란 뜻이고, “한”은 왕 또는 지배자란 뜻)으로 옮겨야 할까 아니면 오르클롱인 에젠(“우주의 주인”)으로 옮겨야 할 것인가 논의가 있었다. 성서번역자(The Bible Translator) 43집 4호(1992년 10월)에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특히 “How to Translate the Name - UBS Statement.” The Bible Translator Vol. 43, No. 4(Oct. 1992):403-406을 보라.

2년전 인도네시아에서는 키타브 수키 - 토라트 안 인질(자카르타, 베트 예수아 하마시아, 출판일 미표기) 3000부가 나온 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어 직역성경인 테제마한 바루(“새번역”)를 저작권자인 인도네시아성서공회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여기저기 고쳐서 낸 것이다(부록 4를 보라). 성경에 유대인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 했던 데이빗 스턴의 유대인성경전서를 따라 이렇게 한 것이다. 스턴은 개종한 뒤에 이 번역을 내놓았다.21) 

데이빗 스턴(David H. Stern)은 유대신약(The Jewish New Testament, 1989)과 유대성경전서(The Complete Jewish Bible, Jerusalem and Clarksville, MD: Jewish New Testament Publications, 1998)을 펴냈다. 이 두 역본은 형식적 일치와 내용의 동등성 원칙을 섞어 옮긴 것으로 북아메리카의 메시아 유대인들이라는 특정한 그룹을 겨냥하여 낸 역본들이다. 그 목적은 성서의 유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토라와 같은 주요 낱말들이나 솰롬 알레이켐(“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 20.19)과 같은 표현을 그대로 음역하는 것이다. 또한 이삭도 이츠학(Itz-chak)으로, 예수를 예슈아(Ye-shu-a)로 음역하기도 한다. 구약에 나오거나 구약을 인용한 신약 곳곳에서 하느님 이름 네 글자는 아도나이(ADONAI)로 표기하였다. 엘로힘은 따로 나올 때 “하나님”(God)으로 옮기고, 아도나이 야훼처럼 같이 쓰일 때는 아도나이 야훼(Adonai YHWH)로, 만군의 주님은 아도니아 츠바오트(ADONAI-Tzva’ot)로, 엘르욘이나 하엘르욘은 “가장 놓으신 분”(the Most High)으로 옮겼다. 요한삼서 7절에서는 그 이름을 하쉠(HaShem)으로 음역한 반면, 구약에서는 그 이름으로 번역하였다. Philip E. Goble. The Orthodox Jewish Brit Chadasha(New York: AFI International Publishers, 1996, 1997)을 참조하라. 이 신약번역(브리트 하다솨)은 이스라엘 국제예술가들(Artists for Israel International)이 저작권을 갖고 있는 역본으로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바꾸었다. 예수를 예호슈아(Yehoshua)로, 메시아를 마쉬아흐(Mashiach)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낱말을 많이 음역하여 집어넣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히브리어를 모르면 읽기 어렵다. 이와 비슷하게 로마자로 인쇄한 인도네시아어역도 아랍어 음역이 많이 들어있어서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마가 12.29를 예로 들어보자. “레베, 멜레크 하모쉬아흐가 대답하신다, 쇠마 이스로엘, 엘로헤이누 아노노이 에하드가 하리소나이다.”

키타브 수키 - 토라트 안 인질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작업을 한 듯하다. 그래서 예수는 예수아(“여호수아”)로, 예수그리스도는 예수아 하마사아로, 하나님 이름 네 글자는 야훼로,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로힘이 아닌 엘로임으로 음역하거나 옮겼다. 재미있는 점은 신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테오스)을 엘로임으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신구약 모두 엘로임으로 되어 있다. 이 출판사가 역본 뒤에 끼어넣은 작은 광고물에는 알라는 아랍사람들이 섬기는 이방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알라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말이 적혀 있다. 이 출판사 사람들 역시 대다수 인구가 무슬림인 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인도네시아 종교부가 이러한 해적판을 못마땅해 하는 선언서를 냈다는 점이다.

키타브 수키 - 토라트 단 인질에 들어있는 번역의 예를 들어보자.

뎅아를라, 하이 오랑 이스라엘: 야훼 이투 엘로임 키다. 야훼 이투 에사!

“들으라, 이스라엘 나라여: 야훼는 우리의 엘로임이다. 야훼는 한분이시다!”(신 6.4)

자와브 예수아: “후쿰 양 테루타마 이알라: 뎅아를라, 하이 오랑 이스라엘, 야훼 엘로임 키타, 야훼 이투 에사.”

여호수아가 대답한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렇다. ‘들으라, 이스라엘 나라야! 야훼는 우리의 엘로임이다. 야훼는 한분이시다.’”(막 12.28)

예수아 하마시아, 아낙 다위드, 아낙 아브라함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마 1.1)

... 디 부붕안 베트 엘로임

“... 베트 엘로임의 꼭대기에”(마 4.5)

로 엘로임 “엘로임의 영”(고전 12.3)

예수아 아달라 투한 “여호수아는 주님이시다”(고전 12.3)

거룩한 복음 - 연구용(The Holy Gospel: Study Edition)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성서공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겨냥하여 역본을 내놓기도 하지만, 연구용 성서도 내놓는다. 주로 내용의 동등성 이론을 따라 옮긴 영어 복음성경(TEV 또는 GNB)의 설명을 따라서 작업해왔다.

연구용 성서를 내놓는 이유는 다양하다. 많은 경우 연구용 성서가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하여 내놓는 것이긴 하지만 성경을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싶거나 믿지 않는 이들을 겨냥하기도 한다. 연구용 성경은 성경 각 책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나 주를 붙여서 내놓는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번역 실무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서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 사람들을 겨냥하여 작업해 왔다. 그 결과 2001년 “연구용 거룩한 복음”을 냈다. 들어가는 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연구용 신약은 메시야이신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제자들에 대해 알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드린다. 신약은 대부분 2천년 전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 당시 문화와 상황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을 곁들였다.”22)

이 연구용은 영어판(부록 1)과 우르두판(부록 2)이 있다. 인도네시아판과 다른 언어판도 준비하고 있다.

이 연구용에는 신약 개론 뿐만 아니라 각 책의 역사, 언어, 번역, 주요 주제, 강조점을 실었다. 더 자세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각 단락 요약

2. 특정한 낱말과 표현 설명

3. 문화적 관습 설명

4. 역사적 배경

5. 종교적 배경 및 관습

6. 관주(토라, 시편, 예언서 인용구)23)

또한 이 연구용의 특징은 용어록을 붙인 것이다. 계속 나오는 낱말이나 표현은 별표(*)를 달아 책 뒤 용어록에 설명이 붙어있다고 알려준다. 성서지도와 함께 성경 사본 사진도 여럿 들어있다.

세계성서공회 와사이(WASAI)지역 고문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24) 경험이 많은 그리스도인 전문가가 우루드어로 이 연구용 성서를 번역하고 있다. 이 판의 기본 원칙은 교인들과 비교인들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때로 설명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거부감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검토작업 전에 원고의 철자와 문법적 잘못을 먼저 찾아냈다. 13명의 검토자들이 이 수정원고를 가지고 함께 작업했다. 검토인들 가운데에는 두명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다. 한분은 우르두 문학과 주임교수이고 다른 한 분은 성인교육 책임 교구 회의의 일원이다. 남성들은 목회자 두 분, 구약학 교수 한 분, 성서번역을 하면서 언어학 강사를 하는 한 분, 극동방송국 아시아지역 훈련간사 한 분, 파키스탄 구세군 은퇴사관 한 분, 미션계 고등학교 은퇴 교장 한 분, 복음전도자 한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두 분은 개종을 한 분들이다. 검토작업의 주 임무는 정확한 우르두 낱말을 잘 사용하였는지 살피는 일이다. 어떤 주는 늘어나기도 했다(“사마리아사람”이라는 용어 항목에는 우르두말로는 구할 수 없는 역사 자료를 포함시켜야만 했다). 또 어떤 주에는 우르두 성경의 용어가 분명치 않은 경우 설명을 덧붙여야만 했다(“의로운”과 “하나님과 친교”와 같은 경우). 그리고 영어 복음성경(TEV)에는 호산나 같은 말이 없으나 우르두어 성경은 그리스어 본문을 따라 그 말이 들어있기 때문에 설명을 붙여야만 했다. 이러한 주는 대부분 일반 독자용으로 붙인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교회에서는 언제고 이러한 것을 비판하고 반대하려고만 하는 것이 문제이다. 검토를 하면서 연구할 자료가 없는 일반 교인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다는 사살을 알게 되었다. 이 판은 우르두어로 나온 첫 연구용 신약이다.25) 

파키스탄성서공회가 “그리스어 우르두어 행간 신약성경” 작업을 막 시작했다. 이 공회가 기획한 아주 중요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세 종류의 독자를 겨냥하고 하는 작업이다. 우선 성경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신약 번역의 대본인 그리스어 본문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학생들도 성서 그리스어를 이 책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르두어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 책과 함께 문자적 번역으로 된 우르두 성경을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용하는 우르두어로 옮긴 번역문이 행간성서에 함께 실리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판 연구용 성경 역시 우르두판과 같은 원칙 및 과정으로 작업한 것이다. 올해 하반기에 나올 예정이다.

인질 샤리프(아흐드 자디드)라고 부르는 이 연구용 신약이 있다. 하지만 토라(타우라트)와 예언서(안비야) 그리고 시편(자부르)과 잠언(암살)이 들어있는 연구용 구약(아흐드 아티크)은 아직 없다.

동아시아와 남 아시아 인들을 겨냥한 연구용 성서도 아직 없다. 성서공회가 이러한 작업을 기획하고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가는 말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공회의 임무는 잘 읽히는 성서를 될 수 있는 한 널리 또 효과적으로 반포하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임무를 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계획을 세우는가?

이런 일을 잘 해나가려면 성서학과 언어학, 인류학, 번역학 분야에서 잘 훈련받은 번역자 뿐만 아니라 번역 실무진도 더 필요하다. 이들은 뜻이 통하는 번역을 내놓는 일에 깊이 헌신해야 한다. 또한 성서학의 최근 성과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뿐더러 모국어에도 능통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 독자가 어떤 역본을 원하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