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칼리굴라 [Caligula]

영국신사77 2007. 2. 17. 22:37

               칼리굴라 [Caligula, 12.8.31~41.1.24]

 

요약
고대 로마의 제3대 황제(재위 37∼41).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책으로 원로원 ·군대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키고 잔혹한 독재정치를 강행하여 암살되었다.

  정식 이름은 Gaius Caesar Germanicus. 본명은 Gaius Caesar. 칼리굴라는 그가 어렸을 때 신었던 군화식으로 만든 유아용 구두의 명칭에서 딴 별명이다.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대()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위 초에는 민심수습책으로 원로원 ·군대 ·민중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점차 자신이 인간세계에 나온 신()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낭비와 증여로 재정을 파탄시켰다. 게다가 잔혹한 독재 정치를 강행하고, 광포한 행동을 자행하여, 근위병의 한 장교에 의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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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굴라 [Caligula]
 
본명은 Gaius Caesar. 정식 이름은 Gaius Caesar Germanicus.

AD 12. 8. 31 라티움 안티움~41. 1. 24 로마.

로마의 황제(37~41 재위).

 

  원로원이 임명하던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 총독)의 휘하에 있던 마지막 레기온(군단)을 황제가 임명하는 레가투스(속주 부총독)의 관할 아래 두게 했으며, 이로 인해 황제의 군통수권 독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의 치세에 관해 심한 편견을 갖고 있으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아버지 휘하의 군인들에게서 칼리굴라('작은 장화'라는 뜻)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AD 19년 아버지가, 33년에 어머니인 대(大) 아그리피나 마저 죽었으며, 31년과 23년에 형들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티베리우스가 교사한 것이라고 여겼다. 칼리굴라와 나머지 세 여동생은 살아남았으며 그는 아버지의 잘 알려진 이름을 따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즉위 이후 7개월 동안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는 반역재판을 다시 열어 몹시 잔인한 판결을 내렸으며 전제정치를 지향하는 난폭한 행동과 변덕스러운 기질을 드러냈다. 38년에는 자신이 즉위할 때 도움을 주었던 황실 근위대장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처형했으며, 티베리우스의 손자로 자신에게 제위를 빼앗겼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도 없애버렸다. 그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내세웠으며, 누이들에게 과도한 애정을 쏟아 특히 아끼던 누이 드루실라가 죽었을 때(38)는 그녀를 디바 드루실라라고 신격화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여자를 신격화한 일이었다. 몇몇 학자들은 칼리굴라가 왕족 남매간의 결혼이 자주 이루어졌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처럼 헬레니즘식 군주정을 세우려 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또다른 역사가들은 칼리굴라가 병을 앓고 난 이후 미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 중 의심스러운 것이 많은데 특히 그가 자신의 말(馬)에 콘술(집정관)직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간질 증세로 괴로워한 듯하다.

  칼리굴라는 39년 10월 뜻밖에 라인 강 상류지방에 나타나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고 드루실라의 전남편 M.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라인 강 상류 주둔군 지휘관 그나이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카스를 처형했다.

  즉위 뒤 곧 칼리굴라는 전 황제 티베리우스가 국고에 비축해둔 막대한 돈을 낭비했으며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로마의 유명인사들의 재물을 강탈하다시피 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40년초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군해 철저히 약탈하고 갈리아 북부 해안으로 진출해 브리튼 침략의 첫발을 내딛는 듯했으나 군인들에게 조개껍질을 모으라는 이상한 명령을 내림으로써 정복한 해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칼리굴라는 자신의 신성을 더욱더 강조하기 위해 40년 여름 자신의 조상을 예루살렘의 성전에 세우도록 명령했으나 헤로데 아그리파의 설득에 감동하여 명령을 철회했다.

 

  이제 로마 군중은 미친 폭군이 싫증났고 그에 대항하는 몇몇 음모가 꾸며지기 시작했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온 지 4개월 뒤인 41년 1월 칼리굴라는 팔라티누스 경기가 열리는 도중,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칼리굴라의 아내와 딸 역시 살해당했으며, 제위는 그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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