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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황제 티베리우스는 왜 인간혐오증에 걸렸을 까요? 그 증상은 젊었을때가 아니라 황제가 된후 늙었을때 즉 40~50이후에 나타난거 같은데. 대충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부인 빕사니아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동생 드루수스의 허망한 죽음...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의 불화..(특히 자기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를 세우기위해 광적으로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증오..그리고 거기에서 소외된 티베리우스..) 등등. |
인간이라기 보다 운명을 혐오했다고 봅니다 |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이건 나중에 황제가 된 이후의 이름이고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살아있는 표본같은 사람이였고, 군사령관(즉 제갈량같은 지휘능력)뿐만 아니라 단순 무력(일기토능력)도 최고급으로 당시 열리던 아테네의 고대올림픽에서 전차경주 1위(당시엔 금메달은 없었고 1위)였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동상을 보면 나름대로 꽤 잘생겼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꽃미남형이 아니라 강철같은 이미지를 자랑하는 미남이긴 하지만... 집안좋죠 능력있죠 잘생겼죠. 로마 최고의 킹카. 맏아들 특유의 딱딱함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정도는 단점이랄 수도 없고. 뭐 첫 부인이던 빕사니아를 끔찍히도 사랑했던걸 보면,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할줄 아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킹카요건이 하나 더 있군요. 군인이라고 무식한것이 아니라 당시의 교양언어인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했고 아테네와 더불어 당시 그리스의 양대 교육기관이던 로도스섬에서 그리스 교양을 즐기며 살 지식도 갖추고 있었죠. 그러다가 몇년 후,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나,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티베리우스 너는 반쪽짜리 황제야라고 해놓습니다. 사실 능력과 실적으로 볼때 아우구스투스가 다른 사람을 황제로 지명했어도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티베리우스는 독보적이였습니다. 아니, 아우구스투스가 사람 키우는 능력은 완전 꽝이라 오직 티베리우스만이 인물이였습니다. 그마나 즉위시 20대 초반이던 조카이자 양아들 게르마니쿠스, 친아들 드루수스를 차근차근 로마의 기둥으로 성장시켜 나갔지만, 모두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이로서 티베리우스는 삶에 소중한 아내, 동생,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운명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정말로 운명을 원망하고 싶었을 겁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또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한테 이런 가혹한 운명이라니. 결국 티베리우스는 소위 티베리우스 문하생이라는 기사계급(현대식으로 얘기하면 중산층에서 약간 상류층)에서 많은 인재들을 발탁해 키우기 시작했죠. 나중에 황제 다음가는 자리인 재무관까지 올라가는 비텔리우스, 아프리카에서 이민족을 잘 막아낸 브라이수스, 네로시절 최고의 장군으로 로마의 양대 전선인 라인강 전선과 파르티아 전선 모두를 철통같이 지켜낸 코르불로, 네로의 초반 7년을 잘 이끌어준 근위대장 부루스, 나중에 황제가 되어 로마를 재건시킨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잘 이끌어준 무키아누스. 정말 특급까진 아니더라도 A급 인재들을 이리도 많이 발탁해서 로마의 기둥으로 만들었죠. 다만 본인은 비텔리우스, 브라이수스 정도에게만 혜택을 입었고, 나머지는 후임 황제들이 이 명신들을 거느리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
blur82nd 2005-03-14 04:50 |
내용추가 폐쇄적인 성격을 제외한다면 이상적인 로마귀족이죠.오만하면서도 영리하고...무턱대고 사람을 믿지 않으면서도 인재등용은 철저하게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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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에 대해 알고 싶어요. 연표상으로 23년에 티베리우스의 하나뿐인 아들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 후, 티베리우스는 27년에 카프리섬에 은거하게 되고 29년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 세야누스라는 장군을 고용해서 조카이자 양자로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게르마니쿠스의 남은 아내와 아들들을 섬에 유배시키거나 황궁의 지하실에 가두잖아요. 여기서 궁금한 것은 (1)티베리우스는 어머니인 리비아 때문에 조카의 처와 자식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가, 리비아의 사후에 그 동안 준비해왔던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일까요?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면서도, 또 게르마니쿠스의 할머니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니면 그냥 그때 그들이 반역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일까요? (2)티베리우스가 조카의 자식들, 즉, 종손들인 네로와 카이사르를 가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지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역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아니면 23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들 드루수스의 죽음이 조카 손자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후계자를 지명해야 하는 과정에서 친손자인 게멜루스를 생각하고 있는데, 나이가 많은 조카 손자들이 나중에 게멜루스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티베리우스는 30년에 조카 손자인 네로가 자살을 한 후 31년에 장군이었던 세야누스를 처형하잖아요. 그런데 31년이라면 티베리우스 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처벌받지 않았던 셋째아들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부른 해잖아요. 세야누스는 10월달에 처형을 당했고 그 후에 세야누스가 예전에 티베리우스의 아들을 독살했었다는 것이 알려졌는데 여기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드루수수를 세야누스가 살해했고, 또 세야누스가 드루수스의 부인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멜루스도 친손자가 아닌 세야누스의 아들일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럼,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칼리굴라가 몇 월에 티베리우스에게 불려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즉, 세야누스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알게 된 후에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잘 모르고 있을 때 부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럼,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부른 이유에 대해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셋 중에 무엇이 가장 비슷한지 궁금합니다. 1.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던 친손자가 진짜 친손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게 한 조카 손자들, 네로와 카이사르의 친동생인 칼리굴라가 차라리 자기와는 가까운 혈육이라고 생각해서 부른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고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죽이기 이전부터 세야누스가 자기 아들을 죽였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리빌라와의 사이로 미루어서 친손자가 진짜 친손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2.아니면 게멜루스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애니까 일단 노년의 황제 에게 필요한 성년의 후계자를 지명하기 위하여 칼리굴라를 부른 것일까요? 그러다가 나중에라도 게멜루스가 성년이 되면 칼리굴라를 배제하고 게멜루 스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칼리굴라를 부른 이후에 세야누스의 예전 행각에 대해 알게 된 것이겠지요. 3.아니면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은 거의 없었지만 일단 그가 19세이고 혹시라도 모반을 꾀할 우려가 있으니까 인질로 옆에 잡아두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칼리굴라를 부르기 전이 아니라, 부른 후 세야누스를 처형하고 난 뒤에 친손자인 게멜루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인가요?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자신에게 순종적으로 행동을 하자 ,의심스러운 손자 를 세우는 것보다는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순종적으로 따랐다고 합니다. 연표에서는 30년, 18살일 때 형 네로가 유배지에서 자살을 하고 19살 때 카프리 섬의 티베리우스에 불려가서 성년식을 하고 21세가 되었을 때 둘째 형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굶어죽고 어머니도 단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상황에서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4).칼리굴라를 양자로 삼은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친밀한 사이였 을까요? 예를 들면 가까이 지내면서 대화를 많이 한다든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아니면 그냥 조용히 내버려두고 공식적인 행사에만 불러낸 것일까요?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언제 칼리굴라를 양자로 삼았는지, 그리고 언제 후계자로 정식으로 지명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를 죽이려다가 불쌍해서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는데 두 사람 사이는 어땠을까요? 사료에 대해 많이 아는 분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 (5).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옆에 두면서도 칼리굴라의 어머니와 형을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세야누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들을 괴롭혔던 간수들이 나중의 처벌이 두려워서 자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카이사르가 유배된 년도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왜 유배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네로와 아그리피나는 섬에 유배를 하였는데 왜 둘째 조카손자인 카이사르는 황궁의 지하실에 감금해 두었던 것인가요?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질문이 모두 5가지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가장 알고 싶은 것은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의 관계입니다. 두번째 질문인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 그리고 네번째 질문인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언제부터 양자로 삼았고 언제부터 후계자로 지명했는지, 그와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을 기다립니다. |
1) 둘다 맞을겁니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저지르려고 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리비아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 티베리우스의 서한이 도착했으니까요.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가 피소에 의해 독살당했고 티베리우스가 사주한거라 믿고 있었죠, 물론 현대에는 말라리아로 죽었다고들 하지만요. 또 다음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티베리우스의 혈통이 될까봐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몰아내려고 자신의 파벌을 형성해 갔지요. 그러다가 리비아가 죽고난 뒤 장례식이 끝나고(리비아가 알면 반대할것이 분명하고 또 리비아가 여태껏 아그리피나도 말리고 있었거든요.)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서 아그리피나가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인다고 하면서 네로의 방탕한 생활을 개탄했지요 물론 속 뜻은 달랐지요. 그러나 명확한말이없어서 원로원도 선뜻 의제에 추가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소식을 민중들이 알고 회의장에 몰려들었지요.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다시 서한을 보내 시위를 금지하고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비난을 해서 결국 재판을 시작한 다음 세야누스는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제출하지요. .....
하지만 저는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려고 해서 라고 믿습니다.그래서 이용가치도 없어진 세야누스는 파멸당하죠.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게맬루스, 둘다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인기가 높고 또 게맬루스는 너무어려서 원로원과 시민들에 의해 칼리굴라가 황제가 됩니다. 3)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세야누스 숙청을 하기전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년식을 치러줬지요. 양자로는 삼지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군요. 4)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랑 어땠을 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은 그냥 조카 손자였을 것 같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사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이려한적은 없습니다. 티베리우스는 그냥 침대에서 편히 죽습니다. 5)서기 33년에 드루수스(아그리피나의 아들)와 아그리피나가 죽습니다. 사유는 모르지만... 네로 카이사르는 언제 죽었는지 아시겠죠? |
티베리우스에 대한 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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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씨의 저서중 하나인 로마인이야기를 읽다가 7권 악명높은 황제들이라는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 때문에 벌써 5번을 전체 다읽고 있는중이죠.... 그 이유가 바로 로마제국 제2대황제 티베리우스 때문입니다 이책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폭군이라고 불릴이유가 없는것 같은데, 다른책에서는 대체로(거의 모두)티베리우스를 폭군이라고 하더군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합쳐서 폭군이라고 하고..... 제가 책에서 몇번이나 책에서 읽어 본바로는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섬에서 쳐박혀 있었어도 로마제국의 일은 다 챙기고 순조롭게 해왔고 특별히 원로원과 갈등도 없던걸로 책에 나왔습니다. 물론 이책 역시 시오노 나나미씨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갔겠지만 시오노 나나미씨 역시 역사서를 참고하고 이 책을 썼는데 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티베리우스 황제가 폭군이라고 불릴 만한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중2밖에 안되서 이해를 못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폭군이라고 불리는지 그이유를 자세히좀 설명좀 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질문 내용 추가 (2004-01-25 13:07 추가) |
저기 죄송한데요.....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왜 폭군으로 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티아항 외곽에 항구도 만들어 로마를 가히 지중해상의 중심지(원래도 그랬지만)로 만들고 칼리굴라가 어영부영 정벌(?)한 브리타니아도 완벽히 정복했는데 단지 약간 띨하단 이유로 그런지...... 짤막하게라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역사는 기록으로서의 역사와
이 불만이라는것이 황제가 원로원과 제대로 협력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통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의 황제는 아시겠지만 중국의 황제와 달라서 단지 시민중의 제 1인자일뿐이고, 로마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법제상으론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입니다. 헌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에서 통치하다보니 로마의 원로원과 협의하여 정책을 입안할만한 여건이 안됬습니다..그러다보니 거의 자기독단으로 제국을 다스리게 되고, 당연히 자기에게 협력을 구할것으로 기대됬던 원로원의원들은 티베리우스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하고 증오를 하게된거죠...(하지만 원로원의원의 질적저하도 문제입니다..티베리우스도 치세초기에는 원로원의원들과 협력할려고 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수준이 떨어져 실망했다는 얘기가 로마인이야기에 나옵니다) |
내용출처 : 로마인이야기 |
티베리우스가 물론 인간혐오증에 걸렸는지 어쨋는지 카프리섬에 은거해서 제국을 통치한건 별개로 치고, 그의 업적보다는 그 이후 뒤를 이은 황제들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년의 공포정치로 원로원과 대립이 엄청났었고 수에토니우스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후대 황제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어낸 사서가 내려오는 와중에 이미지가 변질됐다고 보여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를 평가하는건 주관적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결코 폭군은 아닙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인해서 폭군으로 불리고 온갖 있지도 않은 사실(개시가 왕을 주물렀다든지)로 최근까지 폄하되어온것을 보시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
저도 로마인 이야기 7편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티베리우스가 네로나 칼리굴라와 같이 이름이 오르내릴만한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집권 후기에 카프리섬에서 쳐박혀서 생활을 했고 공포정치로 원로원과 대립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평이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카프리섬에서도 나름대로 원활히 정치를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국민들은 수도를 비우고 외딴섬에 가서 정치를 하는 비상식적인 황제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유사한 원로회 의원들도 공포정치로 탄핵과 숙청을 거듭하는 황제가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을 것이구요. 이렇게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신망을 잃게되어 역사가들도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가 폭군이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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