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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아그리파 2세[Herod Agrippa II]

영국신사77 2007. 2. 15. 13:28
               헤로데 아그리파 2세[Herod Agrippa II]

 

                                                                            

  27~93경.

  남부 레바논 칼키스의 왕, 남부 시리아의 바타나이아와 트라코니티스의 분봉왕(分封王).

 

  66~70년 유대인 반란 때 반란군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였다. 로마 황실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다.

  44년 아버지 아그리파 1세가 죽었을 때 1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를 왕국에서 속국의 상태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유대인들의 번영에 관심을 기울여 유대인들에게 온건령(edict of moderation)을 내리도록 도왔다.

  48년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업무에 관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50년에 칼키스의 왕이 되었으며, 53년 이 땅을 필리푸스 총독이 이전에 소유하던 땅과 바꾸었다.

  54년 로마의 새로운 황제 네로는 갈릴리 해 근처의 영토를 아그리파가 지배하던 왕국에 합병시켜주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 2세도 로마와 매우 열성적인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2~60년 여러 명의 대제사장을 임명해 반대파들의 증오를 사기도 했다. 그리스화된 사람들과 분쟁을 겪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권익을 옹호했지만 유대에서는 어떠한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에 테러 집단인 열심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사도 바울이 체포되자 그곳의 지방 행정관은 아그리파에게 바울의 처리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며, 아그리파는 바울의 무죄를 입증했다.

  66년 지방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카이사리아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하자, 예루살렘에서 열심당원들이 봉기했다. 아그리파가 플로루스를 지지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열심당원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왕국 내에서도 점차 위협이 고조되었다.

  66년 여름 그가 예루살렘으로 파견한 군대가 패배했고 반란군들은 로마군을 섬멸했다.

  67년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가 도착하자 아그리파는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다. 70년 아그리파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도와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점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그리파의 영토는 티투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으며, 아그리파는 93년까지 생존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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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케(Bernice):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
                [“이기다,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유래]

헤롯 아그리파 1세가 아내 키프로스를 통해 얻은 딸. 그는 기원 28년경에 태어났으며, 드루실라의 자매이고 헤롯 아그리파 2세의 누이였다.
베르니케와 그의 오라비 아그리파는 기원 58년에 카이사레아에 있는 총독 페스투스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 두 사람은 페스투스의 초대로 “아주 뽐내는 태도로 와서 사령관들과 그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함께 공청실에 들어갔다.” 그때 수감 중이던 사도 바울이 불려 들어와서, 허락을 받고 이 모든 고관들 앞에서 강력하고 웅변적인 변명을 하였다. ―사도행전 25:13, 23; 26:1~30.
 
베르니케는 매우 어린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리시마코스의 아들인 마르쿠스와 결혼하였다. 그는 마르쿠스가 죽은 뒤에 자기 삼촌인 칼키스의 왕 헤롯과 결혼하였다. 베르니케는 칼키스의 왕 헤롯을 통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헤롯은 기원 48년에 죽었다.
그 다음에 베르니케는 자기 오라비와 함께 지냈는데, 그들이 근친상간을 범하고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대교로 개종하기로 한 길리기아의 왕 폴레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는 오래지 않아 폴레모를 버리고, 다시 자기 오라비와 동거하였다. 베르니케와 아그리파가 카이사레아를 방문한 것은 이 기간의 일이었다.
주후 65년에 베르니케는 예루살렘에서 유혈 분쟁을 일으키던 플로루스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 후에 베르니케와 오라비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심지어 그 황제의 아들 티투스는 베르니케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내로 삼으려고 로마로 데려갔다. 하지만 로마 국민이 유대인 황비를 맞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티투스는 그 관계를 청산하였다.
 

 

                                                                                                             출처:아름다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