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티베리우스 [Tiberius]

영국신사77 2007. 2. 17. 22:55

     티베리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BC 42~AD 37]

 

 

 

요약
로마제국 제2대 황제(재위 AD 14∼37, 23년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아우구스투스 황제비()인 리비아의 전남편의 아들.

  BC 20년경부터 제국의 동방·북방의 변경에서 싸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정복사업을 도왔다.

  BC 6년 로도스섬에 물러나 있다가 AD 2년 로마로 돌아가, AD 4년에는 제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며, 공화정치의 전통을 존중하여 제국통치는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궁정은 음모가 난무했는데, 그 양상은 타키투스의 사서()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AD 26년 로마를 떠나 카프리섬에 은둔하면서 공포정치를 자행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티베리우스 [Tiberius]
 
  정식 이름은 Tiberius Caesar Augustus,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본명은 Tiberius Claudius Nero.

BC 42. 11. 16~AD 37. 3. 16 나폴리 근처 카프레아이(카프리).

제2대 로마의 황제(AD 14~37 재위).

 

                                 개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그가 이룩한 제국의 제도와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청소년기와 즉위과정

  아들과 이름이 똑같은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고위 제사장이며 행정관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함대 지휘관을 지냈다. 그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남편과 사촌이었으며 티베리우스를 낳았을 때 1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아버지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카이사르의 조카손자이며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결별하여 뒤이은 권력투쟁에서 그를 패배시키자,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그 가족은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시칠리아로 달아났다가 나중에 그리스로 갔으나 티베리우스가 3세였을 무렵에 사면령이 내려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BC 39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황제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 둘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리비아의 미모에 이끌려, 아우구스투스는 역시 임신중이던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압력을 넣어 리비아를 포기하도록 만든 뒤 그녀와 결혼했다.

  어린 티베리우스는 아버지한테 남았으며, 몇 개월 뒤 동생인 드루수스가 태어나자 동생도 아버지에게로 보내졌다. 아버지가 죽을 당시 티베리우스는 9세였기 때문에,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리비아와 황제에게로 가서 함께 살았다.

  그는 미남이 아니었다. 그의 코는 로마인에게 전형적인 뚜렷한 매부리코였다. 그는 행동거지가 서툴렀으나 부지런했다.

  티베리우스가 15세가 된 BC 27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의 전초기지를 시찰하러 가면서 티베리우스와 그의 사촌인 마르켈루스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전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변경을 다스리는 법과 요새를 튼튼하게 꾸리는 법, 수비대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법 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돌아와서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에게 자기 딸 율리아를 아내로 주었다.

  뒤이어 티베리우스도 결혼했다. 제정시대 로마에서 연애결혼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연애결혼을 했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이며 부관인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딸이었다. 그는 부인과 동생 드루수스를 사랑했으나 그외에도 중요한 일에 매달렸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최초로 군대의 지휘를 맡아 수십 년 전 파르티아에서 잃어버렸던 일부 로마 군단의 기지를 되찾음으로써 갈채를 받았다. 그 보상으로 그는 또다른 실전 지휘권을 요구하여 아드리아 해안의 판노니아 속주를 평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행복한 시절은 점차 종말로 다가갔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원정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동생한테서 640㎞ 떨어진 지금의 밀라노 남쪽 포 강변의 티키눔에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 그는 드루수스가 죽기 직전에 도착했다.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시체를 로마로 호송해오면서 줄곧 행렬의 선두에서 걸어왔다.

  그는 또한 사랑하는 아내인 빕사니아도 포기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가 미망인이 되자, 황제는 그녀를 아그리파(빕사니아의 아버지이며 티베리우스의 장인)와 결혼시켰다.

  BC 12년에 아그리파도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그녀의 3번째 남편으로 택했다. 티베리우스는 황제의 명에 따라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결혼했다. 티베리우스의 새 아내 율리아는 방탕하다는 평판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와 결혼했을 때 그는 30세였고 그녀는 27세로 5명의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었다. 율리아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나 황제가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비난하면 티베리우스가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었다.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떠나 전투지휘를 자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한번은 전투 중간에 로마에 왔다가 친구집에서 우연히 빕사니아를 만났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한 원로원 의원과 재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슬픔에 사로잡혀 울면서 그녀를 뒤쫓아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소문을 듣고 그에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많은 영예를 내려주었지만 그것들이 율리아의 행동을 보상해주지는 못했다.

  BC 7년에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 직후에 율리아를 로마에 남겨놓고 자진해서 로도스 섬으로 유배생활을 떠났다.

  결국에 리비아는 율리아의 숱한 간통의 증거를 잡아서 아우구스투스에게 고했고, 그는 대단히 진노했다. 그의 법률에 따르면 그녀는 반드시 처형되어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신에 아우구스투스는 판다테리아라는 작은 섬으로 그녀를 평생 동안 유배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티베리우스를 불러오지 않았다.

  당시 황제가 후계자로 점찍은 듯한 3명의 젊은이가 있었는데, 모두 율리아의 아들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미움을 사서 어머니와 함께 유배지로 쫓겨났다. 다른 2명인 루키우스와 가이우스는 황제의 지위를 계승할 후보자들이 분명했다. 그러나 BC 2년에 루키우스가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죽자 황제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티베리우스를 다시 로마로 불렀다.

  AD 4년에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영예를 다시 누렸는데, 그해에 가이우스가 리키아에서 전투중에 살해당했다.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제2인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로 입양시켰다. 티베리우스는 남은 사람 중에서 가장 반대할 점이 적은 후계자 감이었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최고의 지위에 서게 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책략을 써서 거의 1개월 가까이 원로원이 자신을 황제로 지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9월 17일에 그는 원수직을 계승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황제 재위

  티베리우스의 재위 초기는 지혜롭고 절제된 통치의 모범으로 보이지만 힘과 무력의 과시도 있었는데,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을 제외하면 티베리우스의 법률과 정책은 참을성 있고 거시적인 것들이었다.

  그는 새롭게 커다란 정복사업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유 없이 군대를 이동시키거나 속주 총독을 교체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재정낭비를 중단시켜 그가 죽을 무렵에는, 물려받은 재산의 20배를 남겨놓았고 로마의 권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시켜 놓았다.

  그는 해군을 강화했고 검투사 경기를 벌이는 관습을 없앴다. 그러나 이따금 전쟁이나 야만적 폭압이 벌어지기도 했다. 티베리우스의 군단은 한 속주의 반란을 상당히 잔인하게 벌이면서 진압했다. 유대인 4명이 한 여인의 재물을 훔치려고 모의했다는 구실로 유대인 전체를 로마 밖으로 추방했다.

  티베리우스의 재위 초기에 벌어진 일 중 가장 해롭고 타당성이 없는 현상은 고발 풍습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델라토르).

  23년에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가 죽었다. 그는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으로 티베리우스는 슬픔에 잠겼다. 그후 그는 제국의 사업에 대해 더욱 관심이 줄어들었고 근위대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세야누스에게 실권을 위임했다. 오래지 않아 티베리우스는 단지 명목상의 황제가 되었다.

  27년에 67세의 나이로 티베리우스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방문했다. 중도에 그는 카프리 섬에 들러 멈추었다. 그의 의도는 잠시 머물려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후 그는 로마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보낸 10여 년의 생애로부터 괴물 티베리우스의 전설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결코 미남이 아니었던 티베리우스는 갈수록 용모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추해졌던 듯하다. 이무렵 그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현실세계와 접촉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세야누스를 강력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31년에 그는 5번째로 자신이 로마 콘술(집정관)에 선출되게 만들고 공동집정관으로 세야누스를 택했다. 그는 세야누스가 자기 아들의 미망인인 리빌라와 결혼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이제 세야누스는 권력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에게 바치는 황금상이 건립되고 그의 출생일은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두려워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후임으로 근위대 사령관이 된 마크로의 도움을 얻어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고발하고 그의 처형을 요구하는 편지를 몰래 원로원에 보냈다. 원로원은 충격을 받고 당황했지만 순응했다. 그것은 아마도 티베리우스의 비난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었거나 근위대의 막강한 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명백히 티베리우스는 이제 그의 생애의 남은 6년간 지속된 고발과 고문과 처형 행각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공포정치의 와중에서 그의 델라토레스와 고문기술자들은, 그의 아들 드루수스가 리빌라와 세야누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증거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로마의 많은 중요 인사들이 거짓이든 아니든 연루되었고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카프리 섬의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로마 제국에 대해 티베리우스의 남은 관심사는 자기가 가고난 뒤 누가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실질적인 권리를 갖는 살아 있는 후계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가운데 가장 무해한 후계자를 골랐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고 그가 군대의 귀염둥이였을 때 로마 군단이 그에게 붙인 칼리굴라, 또는 꼬마장화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그의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했다. 37년 봄에 티베리우스는 한 제전의 경기에 참여하여 투창을 던져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어깨를 삐는 부상을 입고 운반되었으나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후계자인 칼리굴라를 부르러 사람이 파견되었고 근위대는 새 황제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전세계에 제위계승의 소식이 전해진 와중에 티베리우스는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나 앉아서 먹을 것을 요구했다. 로마의 명망가들은 혼란에 빠졌으나 오직 근위대 사령관인 마크로만이 제정신이었다. 다음날 그는 티베리우스를 담요로 질식시켜 죽였다.

 

F. Pohl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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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황제 티베리우스

 

  

출처 블로그 > 인터네피아
원본 http://blog.naver.com/killidmg/120012948700

 

               

 

 

   로마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기원전 14년∼기원후 37년). 살아 있을 때는 혹평을 받았으나 죽어서는 ‘가장 훌륭한 황제 중 한 명’(19세기 독일 역사가 크리스티안 몸젠·노벨 문학상 수상자)으로 칭송받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제국을 두 번째로 물려받은 그의 출발은 미약했으나 결과는 창대했다.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능력 위주 인사와 흑자 재정으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20년 통치기간 중 마지막 10년을 카프리 섬 별장에 틀어박히는 은둔의 정치를 폈다는 것. 그는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들을 잔인하게 처형했고, 긴축재정을 단행하는 바람에 민중에게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는 정치인들의 무능력함을 드러내놓고 무시해, 원로원의 원성을 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도 그의 시대였다.

 

   마침내 37년 3월 16일 77세의 나이로 그가 죽자, 시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정도라고 한다.


   지도자가 섬에 은둔해서도 통치가 가능했을 정도로 로마가 이미 사회간접자본이 정비된 나라였다 하더라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조건의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통치자가 인기를 무시하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인기 좋은 통치자가 역사에 반드시 선(善)은 아니라는 사실이 티베리우스가 역사에 던지는 교훈이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평가해줄까. (사람들이 나를) 평가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전(神殿)이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중)

 

   원로원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티베리우스에게 “황제를 위한 신전을 짓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내심 ‘주제도 모르고 까분다’고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최고 권력자쯤 되면 이미 많은 특전을 누리고 있지만, 한 가지만은 죽을 때까지 계속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기는 일이다. 명성을 경멸하는 자는 덕(비르투스)을 경멸하는 자가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자 노릇하기는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다. 더구나 2000여 년 전의 지도자를 지금과 곧바로 비교한다는 것도 무리다. 그러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평가를 통치의 우선에 두었던 티베리우스 같은 지도자와 시대가 가끔은 그립다.

 

 

 

 

                                현제 티베리우스
                                                                    primblade ( 2004-06-05  )

  티베리우스는 동시대 로마인이 보기에는 매우 인기없는 황제였다. 하지만 그의 치적을 보면 현제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비록 귀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통치능력이 결여된 원로원을 경멸하며
카프리 섬에 틀어박히긴 했지만, 각 속주 및 본국을 아주 훌륭하게 통치해냈다.

  만약 티베리우스가 없었으면 도나우 강 전선이 완비되지 못했을 것이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도나우 강 총사령관으로, 그의 동생 드루수스가 죽은 뒤에는 라인 강 전선을 이끌면서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물론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의 계보를 잇는 '천재형 무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그리파 정도의 군사적 재능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 사후에 티베리우스에게 군사력을 일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문으로만 떠도는 게르마니쿠스 암살설에 연루되어 있는데, 게르마니쿠스 암살설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를 시기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의 의지대로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시기할 이유는 없었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는 게르마니쿠스가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현제적'인 면모를 살펴보려면, 그의 속주 통치 방식을 봐도 알 수 있다. 속주민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본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긴축재정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본국민들의 줄기찬 비난에도

100분의 1세(매상세)는 폐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카프리 섬에 틀어박히면서도 로마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의 신속한 대처는 실로 놀랍기까지 하다.

  이 정도만 보아도 티베리우스가 현제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닐까?

                                                내용출처 : 로마인 이야기 7[악명 높은 황제들]

 

 

 

                        티베리우스에 대한 의문..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는 왜 인간혐오증에 걸렸을 까요?

그 증상은 젊었을때가 아니라 황제가 된후 늙었을때 즉 40~50이후에 나타난거 같은데.

대충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부인 빕사니아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동생 드루수스의 허망한 죽음...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의 불화..(특히 자기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를 세우기위해 광적으로 집착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증오..그리고 거기에서 소외된 티베리우스..)
등등.


인간이라기 보다 운명을 혐오했다고 봅니다
                                                                                   chum71 (2004-04-29 16:40)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이건 나중에 황제가 된 이후의 이름이고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로마 역사상 최고로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맏이로 태어난 고귀한 귀족 그 자체였죠. 가문만 좋았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군사적 능력에서도 동생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함께 당대 1,2위를 다툴 능력이였고, 그나마 동생이 30대에 일찍 죽는 바람에 70대 중반까지 산 티베리우스는 그 오랜기간동안 로마 최고의 장군이였죠.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살아있는 표본같은 사람이였고, 군사령관(즉 제갈량같은 지휘능력)뿐만 아니라 단순 무력(일기토능력)도 최고급으로 당시 열리던 아테네의 고대올림픽에서 전차경주 1위(당시엔 금메달은 없었고 1위)였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동상을 보면 나름대로 꽤 잘생겼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꽃미남형이 아니라 강철같은 이미지를 자랑하는 미남이긴 하지만... 

   집안좋죠 능력있죠 잘생겼죠. 로마 최고의 킹카. 맏아들 특유의 딱딱함은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정도는 단점이랄 수도 없고.

  뭐 첫 부인이던 빕사니아를 끔찍히도 사랑했던걸 보면, 한 여자를 평생 사랑할줄 아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킹카요건이 하나 더 있군요. 군인이라고 무식한것이 아니라 당시의 교양언어인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했고 아테네와 더불어 당시 그리스의 양대 교육기관이던 로도스섬에서 그리스 교양을 즐기며 살 지식도 갖추고 있었죠.

  하여간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였는데, 일단 양아버지뻘인 아우구스투스가 훼방을 놓기 시작합니다. 티베리우스가 사랑하던 빕사니아와 강제로 이혼을 하고, 아우구스투스의 친딸인 율리아와 결혼하죠. 그런데 이 율리아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거의 창녀나 다를바 없는 저질 여자였거든요. 물론 아버지한테 반항 성격이 컸지만. 하여간 행복한 결혼생활이 행복한 인생의 절반일텐데 그게 깨져버리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그다음 운명의 장난은 누구보다도 좋아했고 또 능력이 있던 친동생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가 낙마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 셋 중 둘을 잃어버립니다.

  한동안 로도스섬으로 은퇴해 있던 티베리우스는, 결국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저버리지 못하고 일선 사령관으로 다시 복귀합니다.

  그러다가 몇년 후, 아우구스투스는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나,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티베리우스 너는 반쪽짜리 황제야라고 해놓습니다.   사실 능력과 실적으로 볼때 아우구스투스가 다른 사람을 황제로 지명했어도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티베리우스는 독보적이였습니다. 아니, 아우구스투스가 사람 키우는 능력은 완전 꽝이라 오직 티베리우스만이 인물이였습니다.

  여기서부터 티베리우스는 삼국지의 제갈공명같은 인생이 시작됩니다. 촉나라는 도대체 인재가 없어서 제갈공명은 장 50대 이상은 직접 처리했는데 인물 키우는 능력은 꽝이던 전임자 아우구스투스 덕분에 티베리우스가 똑같은 지경에 처합니다.

  그마나 즉위시 20대 초반이던 조카이자 양아들 게르마니쿠스, 친아들 드루수스를 차근차근 로마의 기둥으로 성장시켜 나갔지만, 모두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이로서 티베리우스는 삶에 소중한 아내, 동생,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운명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정말로 운명을 원망하고 싶었을 겁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또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한테 이런 가혹한 운명이라니.

  무었보다 이 귀족정신의 표상같은 사람은 권력을 의무라 생각했지, 권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별볼일없는 녀석들이나 권력과 사회적 지위때문에 사람들이 우러러보면 스스로 자아도취하지만, 태어날때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은 그 자체가 너무도 당연한것일 뿐이고 남들이 우러러본다고 기분이 좋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놈의 의무를 동생과, 또 아들들과 나눠가지고 싶어했는데 모조리 물거품.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두 며느리 중 하나는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남편을 독살했다고 믿고 있으면서 온갓 악담을 해댔고(현대의 연구로 볼때 증세상 말라리아로 판단되어집니다. 독살이면 증세가 왔다가 갔다가 하지 않죠. 말라리아가 딱 그렇지) 또 한 며느리는 실제 바람피운 정부와 공모해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을 독살했죠. 결국 티베리우스는 두 며느리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또 처합니다. 덤으로 양손자 둘도 처단했고.

  그나마 제국통치의 짐을 덜어줄 원로원들은 하나같이 무능한 사람들만 득실거렸죠.

  결국 티베리우스는 소위 티베리우스 문하생이라는 기사계급(현대식으로 얘기하면 중산층에서 약간 상류층)에서 많은 인재들을 발탁해 키우기 시작했죠. 나중에 황제 다음가는 자리인 재무관까지 올라가는 비텔리우스, 아프리카에서 이민족을 잘 막아낸 브라이수스, 네로시절 최고의 장군으로 로마의 양대 전선인 라인강 전선과 파르티아 전선 모두를 철통같이 지켜낸 코르불로, 네로의 초반 7년을 잘 이끌어준 근위대장 부루스, 나중에 황제가 되어 로마를 재건시킨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잘 이끌어준 무키아누스. 정말 특급까진 아니더라도 A급 인재들을 이리도 많이 발탁해서 로마의 기둥으로 만들었죠. 다만 본인은 비텔리우스, 브라이수스 정도에게만 혜택을 입었고, 나머지는 후임 황제들이 이 명신들을 거느리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볼때 정말 가혹한 운명과 싸워온 티베리우스. 자신이 아끼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다 사라지니 자폐증에 안빠지는게 이상합니다. 미쳐서 날뛰는게 오히려 정상일텐데 무능한 원로원에겐 화풀이는 좀 했지만 제국 통치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고, 인물 성장면에서 보나, 파르티아 같은 외국의 침략을 방어하는 면에서 보나, 수많은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한것에서 보나 베스트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blur82nd
2005-03-14 04:50
내용추가  폐쇄적인 성격을 제외한다면 이상적인 로마귀족이죠.오만하면서도 영리하고...무턱대고 사람을 믿지 않으면서도 인재등용은 철저하게 하는...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에 대해 알고 싶어요.

연표상으로 23년에 티베리우스의 하나뿐인 아들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 후, 티베리우스는 27년에 카프리섬에 은거하게 되고

29년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

세야누스라는 장군을 고용해서 조카이자 양자로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게르마니쿠스의 남은 아내와 아들들을 섬에 유배시키거나

황궁의 지하실에 가두잖아요. 여기서 궁금한 것은

(1)티베리우스는 어머니인 리비아 때문에 조카의 처와 자식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가, 리비아의 사후에 그 동안 준비해왔던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일까요?
리비아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면서도, 또 게르마니쿠스의
할머니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니면 그냥 그때 그들이 반역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일까요?

(2)티베리우스가 조카의 자식들, 즉, 종손들인 네로와 카이사르를
가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지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역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아니면 23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들 드루수스의 죽음이
조카 손자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후계자를 지명해야 하는 과정에서 친손자인 게멜루스를
생각하고 있는데, 나이가 많은 조카 손자들이 나중에 게멜루스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티베리우스는 30년에 조카 손자인 네로가 자살을 한 후 31년에

장군이었던 세야누스를 처형하잖아요. 그런데 31년이라면 티베리우스

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처벌받지 않았던 셋째아들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부른 해잖아요. 세야누스는 10월달에

처형을 당했고 그 후에 세야누스가 예전에 티베리우스의 아들을

독살했었다는 것이 알려졌는데 여기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드루수수를 세야누스가 살해했고,
또 세야누스가 드루수스의 부인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멜루스도
친손자가 아닌 세야누스의 아들일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럼,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칼리굴라가 몇 월에 티베리우스에게 불려갔는지
알고 싶습니다. 즉, 세야누스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알게 된 후에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잘 모르고 있을 때
부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럼,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부른 이유에 대해 좀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셋 중에 무엇이 가장 비슷한지 궁금합니다.

1.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던 친손자가 진짜 친손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게 한 조카 손자들, 네로와 카이사르의 친동생인
칼리굴라가 차라리 자기와는 가까운 혈육이라고 생각해서 부른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고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죽이기 이전부터 세야누스가
자기 아들을 죽였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리빌라와의 사이로
미루어서 친손자가 진짜 친손자가 아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2.아니면 게멜루스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애니까 일단 노년의 황제
에게 필요한 성년의 후계자를 지명하기 위하여 칼리굴라를 부른 것일까요?
그러다가 나중에라도 게멜루스가 성년이 되면 칼리굴라를 배제하고 게멜루
스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칼리굴라를 부른
이후에 세야누스의 예전 행각에 대해 알게 된 것이겠지요.

3.아니면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은 거의 없었지만 일단 그가
19세이고 혹시라도 모반을 꾀할 우려가 있으니까 인질로 옆에 잡아두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칼리굴라를 부르기 전이 아니라, 부른 후 세야누스를 처형하고 난 뒤에 친손자인 게멜루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것인가요?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자신에게 순종적으로 행동을 하자 ,의심스러운 손자
를 세우는 것보다는 칼리굴라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순종적으로 따랐다고 합니다.
연표에서는 30년, 18살일 때 형 네로가 유배지에서 자살을 하고
19살 때 카프리 섬의 티베리우스에 불려가서 성년식을 하고 21세가
되었을 때 둘째 형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굶어죽고 어머니도
단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상황에서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4).칼리굴라를 양자로 삼은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친밀한 사이였
을까요? 예를 들면 가까이 지내면서 대화를 많이 한다든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아니면 그냥 조용히 내버려두고
공식적인 행사에만 불러낸 것일까요?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언제 칼리굴라를 양자로 삼았는지, 그리고
언제 후계자로 정식으로 지명했는지가 궁금합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를 죽이려다가 불쌍해서 죽이지 못했다고 했다
는데 두 사람 사이는 어땠을까요? 사료에 대해 많이 아는 분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세요.

(5).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옆에 두면서도 칼리굴라의 어머니와 형을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세야누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들을 괴롭혔던
간수들이 나중의 처벌이 두려워서 자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카이사르가 유배된 년도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왜 유배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네로와 아그리피나는 섬에 유배를 하였는데 왜 둘째
조카손자인 카이사르는 황궁의 지하실에 감금해 두었던 것인가요?
그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질문이 모두 5가지인데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가장 알고 싶은 것은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의 관계입니다.
두번째 질문인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 그리고 네번째
질문인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언제부터 양자로 삼았고 언제부터
후계자로 지명했는지, 그와 어떻게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을 기다립니다.
                                                                                   qchoi2 (2004-07-03 )

  1) 둘다 맞을겁니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저지르려고 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리비아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 티베리우스의 서한이 도착했으니까요.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가 피소에 의해 독살당했고 티베리우스가 사주한거라 믿고 있었죠, 물론 현대에는 말라리아로 죽었다고들 하지만요. 또 다음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 아닌 티베리우스의 혈통이 될까봐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몰아내려고 자신의 파벌을 형성해 갔지요. 그러다가 리비아가 죽고난 뒤 장례식이 끝나고(리비아가 알면 반대할것이 분명하고 또 리비아가 여태껏 아그리피나도 말리고 있었거든요.)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서한을 보내서 아그리피나가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인다고 하면서 네로의 방탕한 생활을 개탄했지요 물론 속 뜻은 달랐지요. 그러나 명확한말이없어서 원로원도 선뜻 의제에 추가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소식을 민중들이 알고 회의장에 몰려들었지요.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다시 서한을 보내 시위를 금지하고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비난을 해서 결국 재판을 시작한 다음 세야누스는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제출하지요. .....


  2)네로와 카이사르가 아니라 네로카이사르가 아닌지요.... 유배간 사람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 밖에 없습니다. 아그리피나는 판다타리아 섬(벤토테네)에, 네로 카이사르는 폰티아이섬(폰차)에 유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해 둘째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세야누스에 의해 팔라티노언덕 황궁의 지하실에 유폐되었지요. 또 네로 카이사르도 님 말씀대로 얼마뒤에 죽는데,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죽었다는 소리도 있고 절망해서 자살했다는 소리, 둘이 있습니다.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에게 죽은 이유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1. 아그리피나를 몰락시킨것에 자신은 관여한 것처럼 보이지않으려고
2. 세야누스가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하지만 저는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려고 해서 라고 믿습니다.그래서 이용가치도 없어진 세야누스는 파멸당하죠.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가 세야누스에게 죽었다는 소리는 처음인데...다르게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세야누스는 리비아와 결혼해서 후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허가해달라고 티베리우스에게 편지까지 보냈지요. 게멜루스는 세야누스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게맬루스, 둘다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인기가 높고 또 게맬루스는 너무어려서 원로원과 시민들에 의해 칼리굴라가 황제가 됩니다.

  3)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를 세야누스 숙청을 하기전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년식을 치러줬지요. 양자로는 삼지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잘 모르겠군요.

  4)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랑 어땠을 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친하지도, 안 친하지도 않은 그냥 조카 손자였을 것 같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사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이려한적은 없습니다. 티베리우스는 그냥 침대에서 편히 죽습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양자로 지목하고 후계자로 정식지명한 적은 없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제위계승권을 균등히 남기지만, 원로원이 칼리굴라로 다 처리하죠. 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이루어집니다.

  5)서기 33년에 드루수스(아그리피나의 아들)와 아그리피나가 죽습니다. 사유는 모르지만... 네로 카이사르는 언제 죽었는지 아시겠죠?

 

 

 

                                   티베리우스에 대한 의문
ilovebsb630   
시오노 나나미 씨의 저서중 하나인 로마인이야기를 읽다가

7권 악명높은 황제들이라는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 때문에 벌써 5번을 전체 다읽고 있는중이죠....

  그 이유가 바로 로마제국 제2대황제 티베리우스 때문입니다

이책을 보면 티베리우스 황제가 폭군이라고 불릴이유가

없는것 같은데, 다른책에서는 대체로(거의 모두)티베리우스를 폭군이라고

하더군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합쳐서 폭군이라고 하고.....

제가 책에서 몇번이나 책에서 읽어 본바로는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프리섬에서 쳐박혀 있었어도 로마제국의 일은 다 챙기고

순조롭게 해왔고 특별히 원로원과 갈등도 없던걸로 책에 나왔습니다. 물론

이책 역시 시오노 나나미씨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갔겠지만

시오노 나나미씨 역시 역사서를 참고하고 이 책을 썼는데

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티베리우스 황제가 폭군이라고 불릴 만한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중2밖에 안되서 이해를 못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폭군이라고 불리는지 그이유를 자세히좀 설명좀 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질문 내용 추가 (2004-01-25 13:07 추가)
저기 죄송한데요.....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왜 폭군으로 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스티아항 외곽에 항구도 만들어 로마를 가히 지중해상의 중심지(원래도 그랬지만)로 만들고 칼리굴라가 어영부영 정벌(?)한 브리타니아도 완벽히 정복했는데 단지 약간 띨하단 이유로 그런지...... 짤막하게라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ecwind22 (2004-01-28 00:43)

역사는 기록으로서의 역사와

사실로서의 역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책으로서 접하고있는 역사는 물론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나있는겁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한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화정주의자들의 불만이 적지않아 있었죠..대표적인 곳이 원로원이죠..

그러나 선대 아우구스투스는 워낙 능란한 인물이었기에... 심정적으로 공화주의자인 원로원의원들의 불만을 전혀 사지않았죠.. 하지만 그 다음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훌륭한 행정가이자 군인으로서 뛰어난 황제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능란한 인간은 아닙니다..

  확실히 티베리우스가 정치적인 인간이었다면, 설령 인간혐오증에 걸렸어도 카프리섬에 쳐박히자 않고 로마에서 시민들에게 당당히 드러내놓고 원로원과 함께 정치를 했을겁니다.. 하여튼.. 이 정치적으로 능란한 인간이 아닌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의원들의 불만을 산 것이 원인이 됬습니다..

 

  이 불만이라는것이 황제가 원로원과 제대로 협력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통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의 황제는 아시겠지만 중국의 황제와 달라서 단지 시민중의 제 1인자일뿐이고, 로마의 주권자는 어디까지나 법제상으론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입니다.

  헌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섬에서 통치하다보니 로마의 원로원과 협의하여 정책을 입안할만한 여건이 안됬습니다..그러다보니 거의 자기독단으로 제국을 다스리게 되고, 당연히 자기에게 협력을 구할것으로 기대됬던 원로원의원들은 티베리우스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하고 증오를 하게된거죠...(하지만 원로원의원의 질적저하도 문제입니다..티베리우스도 치세초기에는 원로원의원들과 협력할려고 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수준이 떨어져 실망했다는 얘기가 로마인이야기에 나옵니다)

  어쩄든 티베리우스는 이렇게 원로원의 불만을 사게됬습니다. 그런데 원로원은 어찌됬건 로마엘리트의 집합소입니다..그러다보니 역사가들은 거의 죄다 원로원의원들이죠..(후대의 수에토니우스,타키투스등도..) 그래서 티베리우스에게 증오심을 품은 이 원로원의원 역사가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티베리우스를 폭군으로 몬 것입니다...


  말년에 약간의 공포정치,그리고 카프리섬에서의 은둔..이것이 아주 좋은소재가 됬죠..예를 들어 티베리우스는 호색한이라서 어린소녀들과 같이 목욕을하고 나중에는 그 소녀들을 벼랑에 밀쳐서 죽인다,또는 티베리우스는 어린소년들과 남색(동성애)를 한다등등.

  길게 얘기했네요..요점은 원로원과의 협의를 구하지않고 거의 독단으로 카프리섬에 쳐박혀 통치를 한 티베리우스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역사가들이 티베리우스를 나쁘게 평했다 입니다....

  그리고.클라디우스는 잘 모르겠네요..그러나 클라디우스는 폭군이라는 이미지는 별로 가지고있지않습니다..우유부단하고 무능한 황제. 이런 이미지는 갖고있지만..

  아마도 클라디우스가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고 외모또한 괴상하게 생기고 더군다나 몸도 약하고 아내에게 휘둘렸기 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져서 그런것 같습니다

                                                                      내용출처 : 로마인이야기
                                                                            nagoomo (2004-01-24 12:45)
티베리우스가 물론 인간혐오증에 걸렸는지 어쨋는지 카프리섬에
은거해서 제국을 통치한건 별개로 치고, 그의 업적보다는 그 이후
뒤를 이은 황제들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년의 공포정치로 원로원과 대립이 엄청났었고 수에토니우스같은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후대 황제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어낸
사서가 내려오는 와중에 이미지가 변질됐다고 보여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를 평가하는건 주관적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결코 폭군은 아닙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인해서 폭군으로
불리고 온갖 있지도 않은 사실(개시가 왕을 주물렀다든지)로 최근까지
폄하되어온것을 보시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kreuter (2004-01-24 15:04 작성)
저도 로마인 이야기 7편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티베리우스가 네로나 칼리굴라와 같이 이름이 오르내릴만한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집권 후기에 카프리섬에서 쳐박혀서 생활을 했고
공포정치로 원로원과 대립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평이 그리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카프리섬에서도 나름대로 원활히 정치를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국민들은 수도를 비우고 외딴섬에 가서 정치를 하는
비상식적인 황제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유사한 원로회 의원들도 공포정치로
탄핵과 숙청을 거듭하는 황제가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을 것이구요.
이렇게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신망을 잃게되어 역사가들도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가 폭군이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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