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헤롯 ( JHrw/vdh", Herod)

영국신사77 2007. 2. 15. 12:45

 

              헤롯 ( JHrw/vdh", Herod):'영웅의 아들'이라는 뜻

     통상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 불리우는 헤롯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로마의 비호하에 유다 왕으로 재위하였다.
     (1)헤롯의 가계와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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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조부 안티패터 I세(Antipater I)는 하스몬가(Hasmonaeans)의 알렉산더 얀나예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2-76 재위)에 의해 이드매의 장군(strate gos)으로 등용된 이드매 사람이다. 그 아들 안티패터 II세(종종 안티파스, Antipas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얀나예우스의 비(妃)이며 후계자였던 살로메 알렉산더(Salome Alexandra)의 만년부터 사후 하스몬가의 집안에 일어난 권력 다툼을틈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BC 78년 얀나예우스가 죽었을 때 왕위는 알렉산더가 계승했으나, 대제사장의 위는 여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맏아들인 히르카누스 II세(Hyrcanus II)가 계승하게 되었다. 아우인 아리스토불로스(Aristobulus)는 이것을 못마땅히 여겨 왕위를 빼앗으려고 꾀하여 BC 69년 알렉산더 여왕의 사후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켜 사두개파(派) 및 외인용병(外人傭兵)의 힘을 빌어 힐카누스 II세에 대항했다. 반란은 성공하여 아리스토불로스는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한손에 넣었다. 그리고 민중들 앞에서 힐카누스와 화해의 의식을 올리고 그에게 대제사장직의 수입의 일부를 준다는 결정을 했다. 힐카누스는 성격이 나약한 인물로서 이와같은 굴욕도 감수했지만, 안티바는 완강히 힐카누스를 내세워 싸우게 하였다. 먼저 힐카누스를 나바티아의 아레타 III세(Aretas III)에게 망명시켜 아레타의 원군을 구하여 아리스토불로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당시 로마폼페이우스(Pom\peius)가 유대의 정치에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교묘히 그의 환심을사서 힐카누스 II세를 복위(復位)시켰다. BC 49년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가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리고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자, 안티파스는 종래의 입장을 재빨리 바꾸어 가이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가이사는 힐카누스 II세의 대제사장과 분봉왕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했으나, 사실상의 권력을 안티파스에게 주어 그를 유대의 세리로삼았다. 안티파스는 유대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이드매 출신이라는 배경은 그 자신 뿐만 아니라 헤롯 왕가에게 항상 붙어 다니는 문제점이었다. 후대의 전설에 의하면, 안티파스는 아스글론의 아폴로 신전을 섬기는 신전 노예 출신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史實)이 아니고 반대파인 유대인들의 악의에 근거를 둔 전설일 것이다. BC 43년 안티파스는 기왕에 위급을 구해준 신하인 야심가 마리크스의 음모에 의해 독살되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힐카노스 II세를 내세워 유대 정치의 안정에 공헌한 공적은 크고, 실질적으로는 지배권을 장악하고 성전에 이미 두 아들 헤롯과 파사엘(Phasael)을 중요한 지위에 두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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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헤롯의 청년 시대:
헤롯은 안티파스 Ⅰ세의 다섯 자녀 중 둘째 아들로서 BC 73년 경 출생했다고 생각된다. 소년 시절부터 투창, 궁술 등 무기(武技)에 뛰어나 힐카누스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고 요세푸스(Josephus)는 전하고 있다. BC 47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임한 지 얼마 안 있다가 일어난 에제키아스(Ezekias)라는 산적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여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 때 유대의 최고 의결 기관인 공의회(公議會)의 정당한 수속을 밟지 않고 에제키아스를 처형했기 때문에 의회에 환문되었다.
     로마의 수리아 총독 섹스투스 가이사(Sextus Caesar)의 간섭도 있고, 힐카누스 II세 자신이 무죄의 판결을 내림으로써 헤롯은 방면되었으나, 권력과 결부되어 있어 고압적인 지배를 강행하는 경향은 그 후에도 헤롯의 정치를 특색 짓는 것이었다. BC 46년 섹스투스 가이사는 헤롯을 로마의 코엘레 시리아(Coele Syria) 지방 총독으로 임용했으나, 섹스투스는 곧 정적 밧수스(Bassus)에게 피살되어 헤롯도 이 싸움에 말려 들었던 것이다.
     BC 44년 율리우스 가이사가 암살되자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가 수리아에 와서 헤롯을 로마의 징세관(徵稅官)으로 임명했다. 헤롯은가장 충실하고 유능한 징세관으로서 솜씨를 나타냈다. 납세를 거부하는 성읍을 불살라버리고 주민을 노예로 파는 것 따위는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카시우스는 헤롯의 솜씨와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수리아 지방 전체의 총독으로 등용하고, 또율리우스 가이사의 잔당을 일소하고 로마의 정권을 장악하면 유대 왕으로 임명한다는약속을 했다.그러나 카시우스가 안토니우스(Antonius)와 옥타비우스(Octavius,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 후의 아구스도 황제, Augustus)의 연합군에 패하자 헤롯은 당장 카시우스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안토니우스에 뇌물을 보내어 아부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반대를 누르고 헤롯을 갈릴리의 분봉왕(tetrach)으로 임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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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0년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들 맛다디아 안티고누스(Mattathias Antigonus)가 팔디아 사람과 결탁하여 힐카노스 II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3년 동안 유대는 내전 상태가 계속되었다. 안티고누스는 팔디아 사람에게 떠받들리어 유대 왕이라 칭하고 세력을 증강시켰다. 헤롯은 갈릴리를 근거지로 하여 싸우는 것이 불리함을 깨닫고 나바티아의 수도 페트라로 도망갔으나, 나바티아인들의 도움을 얻지 못했음으로 애굽을 거쳐 로마로 도망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의뢰했다. 두 사람은 팔디아 사람을 누르기 위해 헤롯을 이용하려고 생각하여 원로원에 천거하여 헤롯에게 "유대 왕, 로마의 벗"이라는 칭호를 주는 한편, 안티고누스를 로마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헤롯은 명목상 유대 왕으로 되었지만 당면한 문제는 안티고누스를 배제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었다.
     BC 39년 말 경에 로마를 떠난 헤롯은 갈릴리를 석권하고 욥바, 마사다를 점령한 후 로마군의 도움을 얻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는 안티노구스군에게 투항을 호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므로 이 싸움은 고통스러운 장기전이 되었다. 마침내 안티고누스는로마의 장군 소시우스(Sossius)의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뇌물을 주어 안티고누스를 처형하는데 성공했다. BC 37년 하스몬가의 유대지배는 끝나고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 왕으로 되었다. 같은 해 헤롯은 하스몬가의 왕녀 히르카누스(Hyrcanus) II세의 손녀 뻘 되는 마리암메(Mariamme)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 의해 그는 우선 하스몬가의 후계자로서의 명목을 쟁취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3)헤롯의 치세:
헤롯의 치세는 대체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제 1기BC 37년부터 약 15년간인데, 헤롯이 반대 세력을 배제하고 로마의 내전에 의한 정세의 변화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면서 왕국의 기초를 확립한 시기이며, 제 2기BC 23년 경부터 13년경까지인데, 헤롯 왕조의 최성기이다. 제 3기는 13-14년으로 헤롯의 만년, 궁정 내의 복잡한 사정과 헤롯 자신의 심신의 쇠약에 따라 음울한 양상을 나타낸 쇠퇴기이다. 헤롯이 왕위에 올랐을 때 최초의 과제는 하스몬가의 영향력을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는것이었다. 안티고누스와 그의 잔당은 이미 소탕되어 있었지만, 히르카누스 II세는 바벨론으로 망명해 있었고, 알렉산더와 그 아들 아리스토볼리스 III세가 아직 남아 있었다. 히르카누스 II세는 이미 70세를 넘은 노인이어서 유대로 귀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헤롯은 왕위를 서로 나눈다고 약속을 하고 히르카누스에게 귀국을 권하고, 사실 그가 귀국한 다음부터는 그를 자기의 아버지라고 불러 경의를 표하고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히르카누스에게 한 단 높은 좌석을 만들었다. 헤롯에게 있어서 노(老) 히르카누스는 벌써 정치적으로는 무해하였고, 오히려 표면적으로 그를 존경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신임을 얻는다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간주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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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아리스토불리스  III세의 문제는 더 미묘한 관계가 있었다. 아리스토불리스는 아직 십대의 젊은이로서 하스몬가의 직계임으로 당연히 대제사장이 될 위치에 있었고, 어머니 알렉산더와 더불어 유대인의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바꾸어 말해 그는 헤롯에게 있어서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먼저 아리스불로스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다른 제사장 가계 출신의 아나넬(Ananel)이라는 인물을 대제사장으로 임용하였다. 알렉산더는 이에 대해 매우 노하여 클레오파트라 Ⅶ세(Cleopatra Ⅶ)에게 호소하여 그녀의 간섭에 의해 아나넬을 면직시키고 아리스토불리스를 대제사장으로 하는데 성공했다. 헤롯은 이 때 이미 이 모녀를 같이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아리스토불리스는 16세의 나이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최초의 제사를 드렸다. 헤롯은 그를 알렉산더와 같이 여리고로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지만, 그 때 정원의 풀에서 아리스토불리스가 익사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헤롯은 크게 슬퍼하는 척하여 크게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것이 헤롯의 음모에 의한 계획적인 익사라고 확신하고, 재차 클레오파트라에게 호소했다. BC 35년 클레오파트라의 요청에 따라 안토니우스는 헤롯을 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라오디게아로 헤롯을 소환했다. 헤롯은 각오하고 아내인 마리암메를 숙부인 요셉에게 맡기고, 만일 자기가 안토니우스에게 처형될 경우에는 마리암메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아직 헤롯의 이용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이 사건으로 그를 문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므로 헤롯을 소환했지만 숙청의 내정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여 결국 심판을 회피하였다. 헤롯은 간신히 위급을 피하여 유대로 돌아왔으나, 그의 부재 중에 마리암메와 숙부 요셉이 불의의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것을 알고 요셉을 처형해 버렸다. 그는 마리암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그녀를 의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질투심과 의심 때문에 마리암메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또 이 사건 후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헤롯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기회 있는 대로 헤롯에게 불리하게 꾀하였다. 헤롯이 먼저 이드매와 가사 총독으로 임명한 코스토바루(Costobarus)라는 인물을 사주하여 이 지방을 헤롯의 지배에서 독립시키려 꾀한 적도 있다. 이 때에도 안토니우스가 결국 헤롯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가사와 욥바의 성읍은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로부터의 선물로서 손에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클레오파트라와의 불화는 결과적으로 헤롯에게 유리한 구실로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불화하게 되어 개전(開戰)하였을 때, 헤롯도 여기에 참가하려 하였으나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종군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는 BC 31년 악티움(Actium)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 황제 아구스도라고 칭했을 때, 헤롯은 클레오파트라의 적의를 강조함으로써 새 지배자의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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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티움 싸움 기간 중 헤롯은 나밧 사람과의 전쟁에 정신이 없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참전할 수 없었는데도 클레오파트라는 배후에서 헤롯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옥타비아누스가 헤롯을 로도로 소환하였을 때, 헤롯은 먼저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던 것을 숨김없이 말하고,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의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해 주고 유대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했다. 또앞서 헤롯이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양(割讓)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해양 지방의 성읍과 기타 영토도 그에게 주었다. 헤롯은 이처럼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지지자로 되어 지위를 확보하고 유대로 돌아오자, 아내 마리암메와 알렉산더를 처형했던 것이다(BC 29). 이 사건에 대해서는 같은 요세푸스의 기술에 차질이 있다. 요세푸스는 한 번은(War I. xxii. 3, 4) 마리암메의 처형을 헤롯이 안토니우스에게 환문되었다가 돌아온 후(BC 35-34)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한 번은(Antiq. xv. vii. 1) BC 29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술은 매우 비슷한데, 아마 `유대 고대사' 편이 옳은 것같다. 헤롯은 마리암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부득이 처형한 후 그는 남은 생애 내내 이 상처로부터 회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구스도 황제(옥타비아누스)의 신임을 얻은 헤롯은 제 2기의 건설과 번영의 시기에로 들어갔다. BC 23년 전후에는 이전의 다윗 왕국과 거의 같은 넓이의 영토를 지배하고, 출신지인 이드매도 영토에 포함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유대 인구는 150만 내지 200만이었다고 추정되는데, 동시에 거의 동수의 유대인이 국외에서 이산민(離散民)으로서 살고 있었다. 헤롯은 공회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빼앗고 순수하게 종교적인 의회로 바꾸어 대제사장도 종교적 기능으로만 한정시켰다. 더구나 종래의 전통이나 관습을 무시하고 정치적인 견지에서 대제사장을 교체한 인원은 8인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대는 19지구로 구분되어 각기 헤롯에게 직속하는 장관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다. 국내 문제에 관하여서는 로마의 제약을 받는 일 없이 자유로왔으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헤롯의 내정은 복잡한 세제(稅制)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었다. 인두세, 토지세, 조세, 가옥세 및 왕관세, 그리고 그외 국내에 반입되는 모든물자에 관세를 부과하고, 도로, 교량, 항만 등의 사용세를 받는 등 재원으로 되는 것은 무엇이든 빠뜨리지 않고 국부(國富)의 축적을 꾀하였다. 헤롯은 이와 같은 뛰어난상재(商才)와 강권적인 독재자의 자질이 결부되어 있었다. 그는 또 로마의 승인하에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군의 중심을 이룬 것은 유대인이기보다는 오히려 헬레니즘적인 스타일의 외인 용병부대였다. 헤롯은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복역 후는 유대영내의 헬레니즘 제도시의 정부 기관에 임용하는 다윗의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 고도한 스파이 제도를 띤 경찰을 창설하여 온갖 반대 세력을 가차없이 압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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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치세의 큰 특색은 가지 가지의 건설 사업이었다. 성채, 저수지 및 수도를 비롯하여 몇몇 도시를 건설하여 거기에 경기장, 극장, 궁전 등을 건설하였다. 가장 뛰어난 도시 건설의 예는 가이사랴 세바스테(사마리아)이다. 가이사랴는 본래 작은 포구(浦口)에 불과했으나, 헤롯은 이것을 일대 항만 도시로 변모시키고, 세바스테도 또한 굉장한 신전, 극장 등을 갖춘 대도시로 개조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적인 그야말로 독재자에게 어울리는 건설 사업에 의하여 많은 노동력이 쓰여 나라의 시설이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따르는 헬레니스틱· 로마식 문화 양식의 수입과 이방신의 예배 권장은 유대인의 증오와 반감을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재건은 유대교에 대한 헤롯의 제스추어였다. 이 성전은 헤롯 치세 중에 완공되지 않았을 정도로 웅장한것이었는데,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소위 `탄식의 벽'의 하부에서 볼 수 있는거대한 돌을 많이 썼다. 요세푸스는 이 성전의 장려(壯麗)함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유대교의 문헌에도(예를 들면 미슈나,Mishnah, hn;v]mi ; 유대인 율법 학자의구전, 해설을 모은 탈무드의 본문을 가리킴) 헤롯의 성전에 언급한 곳이 있으나, 반대파 유대인의 대부분은 이 성전은 헤롯이 속죄를 위해서 지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요컨대 헤롯은 유대의 종교 문화의 전통을 무시하고 헬레니즘 국가로서 로마의세력하에 전재 정치의 틀을 짰으며, 백성들 사이에 뿌리 깊은 반감과 분열을 일으켰던 것이다. 유대인은 그의 이와 같은 정책에 대하여 전형적인 반항의 태도를 보이고, 그를 유대의 왕(제사장)가의 혈통과 무관계한 찬탈자(纂奪者)로 간주했다. 조상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자는 바리새파에 집결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세속 생활에 희망을 잃고 은둔 생활에 들어가는 엣세네파는 주변 지구에 퍼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4)헤롯의 만년:
헤롯의 만년은 비극적이고 암흑의 양상을 나타냈다. 헤롯은 생애에 10명의 처첩을 얻어 도합 15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그 밖에 방계 친족을 계산하면 엄청난 수에 이른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당연히 궁전 내에 비참한 권력 다툼의 원인을만들어 냈던 것이다. 헤롯의 첫 아내는 도리스(Doris)라는 여자인데, 두 사람 사이에는 안디파데라는 사내 아이가 태어났으며, 헤롯이 마리암메(I세)와 결혼한 BC 37년도리스를 멀리하고 안디파데도 축제일에만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내게 허용하는 소위 그늘진 자의 지위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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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암메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기술한 바이다. 그녀는 헤롯이 진심으로 사랑한 단 한 사람의 여성이었으나, 이 결혼이 헤롯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요소였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리암메에게서는 3남 2녀가 태어났다. 세 아들 중 막내는 로마에서 요절했지만, 다른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로스는 BC 23년 로마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보내어져 아시니우스 폴리오(Asinius Pollio)라는 인물에게 맡겨졌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헤롯의 세째 아내는 역시 마리암메라는 이름인데, 알렉산더의 저명한 제사장의 딸이었다. 헤롯은 이 마리암메(II세)와 결혼함과 동시에, 그녀의 아버지를 유대인의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마리암메 II세에게서 난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헤롯이라 불렀다.      네째 아내 말다케(사마리아 출신)와 다섯째 아내인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의 두 사람은 헤롯의 정치적인 후계자로 된 세 아들의 어머니로서 중요하다.즉, 전자에게서는 아켈라오(Archelaus)와 안티파스(Antipas), 후자에게서는 빌립(Philip)이 태어났다.      BC 18(17?)년 헤롯은 스스로 로마로 가서 앞서 유학 보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리스의 두 아들을 데리고 돌아와 왕궁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를 가바도기아 왕 아켈라오의 딸 글라피라(Glaphra)와 결혼시켰다. 또 아리스토불로스의 아내로서는 누이 살로메의 딸 버니게(Bernice)를 주었다. 두 사람은 비명 횡사를 한 아름다운 어머니 마리암메의 피를 이은 미남들이었으며, 로마에서 교육을 받은세련된 젊은이요, 하스몬가의 가문을 이을 귀공자였다. 더구나 당연히 헤롯의 후계자로서 가장 적합한 왕자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품이 높고 자기들의 신분을 과시하여 모친에 대한 백성의 동정에 기대어 숙모 살로메에게 적의를 보였다. 글라피라도 자기의 혈통(바사 왕 다리오와 마게도니아 왕가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을 자랑하고 헤롯의 가문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우인 아리스토불리스는 아내 베르니케에게 애정이 없어 몹시 냉정하게 대했으므로 모친 살로메의 원한을 샀다. 살로메는 이두 사람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들에 대해 중상 모략을 되풀이하며 헤롯의 귀에 들어가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친 마리암메에게 보복을 꾀하고 있다느니, 왕위를 넘본다느니 등등의 정보를 얻어 마침내 이 두 사람을 체크하기 위해 앞서 멀리하고 있던 맏아들 안디파데를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여 그를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안디파데는 오랫동안의 그늘진 생활 탓으로 비뚤어진 성격과 권력욕으로 동생들에게 대항했다.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리스도 부친의 태도가 달라진데 대하여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BC 12년 헤롯은 두 사람을 아구스도 황제에게 호소하여 단죄하려 했으나, 아구스도의 중재로 화해하고 안디파데도 표면적으로는 납득했으므로 우선은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일행이 귀국한 후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되고 마침내 두 왕자는 투옥되었다가 BC 7년 경 처형되었다. 이 때에도 아구스도 황제는 재단(裁斷)을 요청 받았다고 하나 황제는 헤롯에게 재판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을 제거한 안디파데는 자기의 손에 실권을 장악하려고 획책하고 헤롯의 형 베뢰아의 분봉왕 페로라스(Pheroras)를 이용하였다. 곧 이 음모는 살로메에게 탐지된 바 되어 안디파데는 헤롯에게 추궁 받기 전에 로마로 도망갔다. 그의 부재 중에 페로라스가 변사했는데 조사 결과 안디파데가 독약을 보내 죽였다는 혐의가 나타났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독약은 본래 헤롯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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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디파데는 자기의 죄상이 밝혀졌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유대로 돌아왔다가 즉시 체포되어 곧 처형되었다. 이렇게 헤롯은 70이 가까운 노년에 이르러 왕위를 노리는 근친 친자들에게 괴로움을 받으며, 백성의 원성에 싸이고 병고에 시달리는 비통한 나날을 보냈다. 왕위 계승자에 대해서는 처음에 안티파데로부터 헤롯(II세), 안티파스로 차례 차례 지명했으나, 죽기 직전에 다시 생각을 번복하여 아켈라오를 왕위에, 안티파스를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 빌립을 골란, 트라고닛, 바타네아 및 파니아스의 분봉왕으로 한다고 유언했다. BC 4년 유월절 전에 헤롯은 여리고에서 죽었다. 맏아들 안티파데가 반역자로서 처형되고 5일 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를 증오하고 있던 국민들은 물론 근친 중에서도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5)신약성경에 나오는 헤롯과 그 자손:
헤롯 대왕은 신약성경에서는 마태복음 2:1-22과 누가복음 1:5에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헤롯은 권세를 탐하는 자인 만큼 유대 왕이 났다고 하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그는유대의 왕이 났다는 말에 대하여 관심이 컸다. 그리하여 그는 이 문제에 전문 지식이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렀던 것이다. 이 때의 대제사장직을 지낸 사람들은 먼저 마티아(Mattias)요, 후에 요자루(Jozarus)라고 한다. 헤롯은 또 음흉하게도 동방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비밀히 조사를 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거든 자기도 경배하게 보고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박사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으니 소원대로 되지 않았다. 사실 헤롯은 아기를 경배할 의사가 없었고 죽이려고 하였던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동방 박사들에게 지시하셔서 약속을지키지 않토록 하셨다. 헤롯은 베들레헴 외변 지방의 아이들까지(두 살 이하의) 학살하였는데, 이것은 자기의 왕권을 보수하려는 데서 일어난 야욕의 극단이요 야욕의 절정인 것이다. 헤롯의 영아 학살 사건이 진정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런 잔인한 일에 대하여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왜 침묵하였을까?"라고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들이 얼마든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수 있다. 세상 역사에 없는 진실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20:1의 말씀이 그런 것이다. 또 위경(僞經) [모세의 승천]에는 예수의 탄생과는 전혀 무관계하게 헤롯이 많은 [노인과 아이들]을 죽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또 그의 잔인한 성격,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궁정 내의 음모에 대한 철저한 불신 따위를 종합해 보면 전혀 사실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아켈라오에 대해서는 마 2:22, 빌립에 대해서는 눅 3:1, 헤롯 빌립에 대해서는 마 14:3-11; 막 6:17-28, 눅 3:19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헤롯 안디바는 예수 시대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음으로 복음서에 종종 등장한다. 예수는 그를 [저 여우](눅 13:13)라 불렀다. 세례 요한은 그가 형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했기 때문에 투옥되어 헤로디아의 계교에 따라 처형되었다(마 14:1-12; 막 6:14-29; 눅 9:7-9). 기타 누가복음서에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이름이 나온다. 눅 23:7-12에 의하면 안디바는 예수의 심문에 관계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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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가의 인물로서 그 밖에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헤롯가의 계도 B]와 같다. 헤로디아(마 14:3-11; 막 6:17-28; 눅 3:19), 살로메(마 14:6-11; 막 6:22-28 "헤로디아의 딸"로 되어 있다), 헤로디아 아그립바 II세(행 12장), 동 Ⅰ세(행 25:1327, 26장), 베니게(행 25:13-27, 26장), 드루실라(행 24:24) 등은 해당 각 항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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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봉왕(分封王) [영] Tetrarch

     봉건시대에 있어서 일국의 황제나 제황이 영토(땅)를 나누어 그 영내의 백성을 다스리게한 왕. 영주(領主 tetrarch)라고도 한다. 원어는 다음 둘이 분봉왕으로 역되어 있다.


   마태복음 14장 1절   원어강해     (top)↑                                                 엘피스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