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2. 트라야누스 [Traianus]

영국신사77 2007. 1. 23. 00:16

   트라야누스 [Trajanus, Marcus Ulpius, 53.9.15~117.8.8]

 

 

                                                 요약
  로마 황제(재위 98∼117).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다. 다키아, 나바타이왕국, 아시리아 등을 속주로 만들었고 로마제국 최대의 판도를 과시하였다.

  로마 황제(재위 98∼117). 바이티카 이탈리카 출생. 오현제() 중 제2대 황제이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특히 군인으로서 명망이 높아 군대의 신망을 얻었으며, 네르바제()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계승하였다. 원로원과의 협조 자세를 유지하고, 빈민 자녀의 부양정책, 이탈리아의 도시 ·농촌 회복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로마제국 판도의 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도나우강을 건너 다키아를 정복하여 속주로 하였으며, 또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의 경계까지 진출하여 요소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다시 동방으로는 나바타이왕국을 병합하여 속주 아라비아로 하였으며,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파르티아군을 몰아내고 아시리아까지도 속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파르티아의 반격, 이집트 ·유대의 반란을 당하여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포기하였다.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귀환 도중 병사하였다. 로마제국 최대의 판도를 과시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이미지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둥
398*600, 41kb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둥
800*576, 213kb
트라야누스 황제의 분수대
800*531, 159kb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
763*600, 132kb
트라야누스 황제의 키오스크
800*533, 68kb
                                                                                                   네이버 백과사전

 

 

 

 

 트라야누스
 [Traianus Optimus Augustus, Caesar Divi Nervae Filius Nerva]
 
Caesar Nerva Trajanus Germanicus라고도 함(AD 97~98). 본명은 Marcus Ulpius Trajanus.

AD 53. 9. 15(?) 바이티카 이탈리카~117. 8. 8/9 실리시아 셀리누스.

로마 황제(98~117, 19년간).

 

                                                    개요

  외부 이탈리아 출신으로는 최초의 황제이다. 로마 제국의 경계선을 동쪽으로 특히 다키아·아라비아·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영토를 넓히려고 애썼으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사회복지를 확대했다.

 

                                            출신과 초기생애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는 스페인 남부에 있는 로마 속주 바이티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로마인이거나 적어도 이탈리아인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이후에 토착민들과 통혼을 했을 수도 있다. 그의 가문은 아마도 바이티카에서 부유한 세도가였던 것 같지만 로마 제국의 공직에서 활동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가 처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속주 총독이 되었으며 67~68년에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70년에 당시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콘술(집정관직)을 맡겼으며, 몇 년 후에는 그를 원로원 계급 가운데 가장 신분이 높은 귀족 명부에 올렸다. 마지막에 그는 시리아와 아시아의 총독을 지냈다.

 

  트라야누스의 초기 생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이 미래의 황제는 아버지와 함께 로마 또는 여러 곳의 군사령부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단 지휘참모로 10년간 복무했다. 이 자격으로 그는 아마도 75년경에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시리아에 머물렀다. 이어서 그는 프라이토르(법무관)를 맡아 전통적인 행정관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 자격으로 89년에 스페인에서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상(上)게르마니아 총독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대를 라인 강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트라야누스는 하(下)게르마니아 총독이 이미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그곳에 도착한 것 같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총애했던 것이 분명하다. 도미티아누스는 91년에 트라야누스가 2명의 콘술(집정관) 중 한 사람으로 복무하도록 허락했다. 콘술직은 제정 때도 여전히 가장 위신이 높은 직책이었다.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가 궁궐 내의 음모로 암살당했을 때 음모자들은 연로하고 무해한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했으며 원로원은 이를 환영했다. 그가 선택된 것은 도미티아누스의 전제정치에 대한 반발을 나타내는 것이며,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특징이었던 황제와 원로원의 협력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근위대는 새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 그를 제위에 앉힌 네로 암살자들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또한 변방 사령관들 가운데서도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서 97년 10월에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입양했다. 그는 당시 상게르마니아 총독을 맡고 있었으며, 군사령관들과 원로운 양측에서 모두 환영할 만한 인물이었다. 98년 1월 1일 트라야누스는 2번째 콘술직을 맡아 네르바의 동배(同輩)로 직무를 시작했다. 그 직후 1월 27(또는 28)일에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군대와 원로원 양측에 의해 황제로 받아들여졌다. 제위에 오르기 전에 트라야누스는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결혼했고, 이들은 평생 사이가 좋았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사촌인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했으며 플로티나는 그를 총애했다.

 

                                                       내정

  트라야누스는 네르바를 신격화하고 그의 이름을 자신의 황제 칭호 중에 집어넣었다. 외면적인 '합헌성'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는 실상 네르바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통치자였다.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권력을 넘겨받기 위해 즉각 로마로 돌아오는 대신, 그는 거의 1년 가까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지역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다키아(지금의 트란실바니아와 루마니아) 원정 준비나 아니면 군사규율의 회복과 방위태세의 강화를 점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네르바를 옹립한 음모자들을 처형하게 만든 근위대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로마에 보냈다. 그는 새 황제의 등극 때 관례적으로 지급해오던 상여금을 병사들에게 절반만 주었으나, 전반적으로는 군에 대해 엄격하고도 공정하게 대우했다.

 

  99년 로마에 돌아온 그는 원로원에 대해 존중과 호의를 가지고 행동했다. 그는 로마 서민층에 관대했으며, 상당한 액수의 상여금을 그들에게 분배하고 국가로부터 곡식을 무상으로 배급받는 빈민층 시민의 숫자를 늘렸다. 이탈리아와 속주들에 대해 그는 도시들이 황제의 등극 때 관례적으로 보내던 황금 공물을 면제해 주었다. 그는 또한 세금을 경감했으며 네르바의 공적으로 꼽히는 혁신적 조치를 추진한 장본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주 행정을 위해 트라야누스는 유능하고 정직한 관리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정적인 곤란을 겪는 속주들에 특별 임무를 띤 총독을 파견했다. 최소한 2명 이상을 파견했으며, 그중 하나는 소(小)플리니우스로 소아시아 북부해안의 속주인 비티니아폰투스로 파견되었다. 플리니우스가 총독직을 맡은 2년 동안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은 그의 서한집 제10권에 보존되어 있다. 이들은 로마 속주행정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한 편지에서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급격히 확산되는 그리스도교 종파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고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일반적인 종교관행에 따르기를 거부해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기는 하지만 플리니우스가 보기에는 아무런 해가 없는 집단이었다. 사려분별의 모범으로 꼽히는 답장에서 트라야누스는 그리스도교도들을 괴롭히거나 그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말고 명백히 반항을 저지르는 사람들만 처벌하도록 권고했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로마 정부는 아직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박해정책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장려했다. 도로·교량·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새로 지은 수로가 북방에서 물을 끌어왔다. 화려한 공중목욕탕 건물이 에스퀼린스 언덕에 들어섰으며 건축가인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웅장한 공회장(公會場)을 새로 설계했다. 거기에는 주랑(柱廊) 현관이 딸린 광장이 있었고 그 중앙에 황제의 거대한 기마상이 놓였다(→ 트라야누스 기념주). 양옆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과 퀴리날리누스 언덕을 깎아서 두 군데에 벽돌로 여러 층 높이의 반원형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들은 상점가와 창고로 쓰였다.

 

                                                   군사원정

  트라야누스의 행정상 업적은 감명 깊은 것이기는 하지만 알리멘타를 제외하고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는 주로 아우구스투스 때 확립되어 그 후계자들이 전반적으로 계승해온 로마 국경을 고수정책을 통해 폐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르마니쿠스라는 호칭에도 불구하고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변경에서 보낸 1년간 그는 별다른 정복 위업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01년에 그는 다키아 침공을 재개했다. 다키아는 그곳의 용맹한 왕 데케발루스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할 수 없이 포기한 곳이었다. 2차례의 원정(101~102, 105~106)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지금의 바르헬리)를 점령했고 데케발루스는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했다. 트라야누스는 도나우 강 북쪽의 카르파티아 산맥에 새로 다키아 속주를 창설했다. 이 속주가 생겨나면서 로마 정착민들을 위한 토지가 마련되고 풍부한 금광과 소금광을 채굴할 길이 열렸으며,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서 이동해오는 유목민들을 흡수할 방어지대가 구축되었다.

 

  트라야누스의 2번째 대규모 군사원정은 동방에 있는 로마의 오랜 적대세력인 파르티아인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파르티아). 105(또는 106)년에 원정준비를 위해 그의 휘하 장군 한 사람이 유대의 동쪽과 남쪽에 면해 있는 아라비아의 나바테아 왕국을 합병했다. 뒤이어 110년경에 파르티아인들은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의 왕을 폐위시켰으며 그 직후인 113(또는 114)년에 트라야누스는 그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벌였다. 이듬해에 그는 상(上)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또는 그 다음해에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기 위해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는 페르시아 만에 당도한 뒤, 자신이 너무 늙어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정벌 위업을 재연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여 울었다고 한다.

 

                                               죽음과 후계자

  115년말에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크를 폐허로 만든 지진의 와중에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116년에 새로 정복한 영토들과 동방 속주 몇 군데의 유대인 부락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트라야누스는 의욕상실에다 건강까지 악화되어 안티오크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는 64세로 소아시아 남해안에 면한 셀리누스(지금의 셀린디)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로마로 운반되어 국장을 치르고 그의 기둥 기단에 매장되었다. 그의 죽음이 공표되기 직전에, 트라야누스가 총애하는 조카딸의 남편인 하드리아누스가 그의 아들로 입양되어 후계자가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평가

  트라야누스는 자기 능력에 자신을 갖고 군사적 영예를 갈망하기는 했지만,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로마인들은 트라야누스의 업적과 건축사업에 매료되어, 그의 재위기간을 초기 제국의 절정기로 간주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역사가 플로루스는 1세기 동안 노소했던 로마 제국이 트라야누스에 의해 다시 젊어졌다고 생각했다. 4세기에 또다른 역사가 유트로피우스는 원로원이 황제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아우구스투스보다 더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보다 더 훌륭하다"(felicior Augusto, melior Traiano)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테가 언급한 중세의 전설에는 한 불쌍한 과부에게 트라야누스가 보인 정의감과 동정심이 교황 대(大)그레고리우스(600경)의 마음을 움직여 그로 하여금 트라야누스가 천국에 들도록 기도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의 루마니아인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이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 정착시킨 로마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의 사가들은 통치자로서나 정복자로서나 트라야누스를 보는 시각이 여러 모로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원로원의 협조 아래 통치하기를 바랐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다른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합헌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는 독재자였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다키아 원정이 도미티아누스의 패배를 설욕하고 로마 제국의 수입원을 새로 늘렸으며 도나우 강 변경지방을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성과가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준비된 것이며 그의 파르티아 원정은 군사적 영예에 대한 과대망상적 욕구 때문에 로마 제국의 자원을 지나치게 낭비시킨 처사라고 본다.

 

  다키아의 황금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위중에 로마 제국의 재정상태와 전반적인 경제상황은 파산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북방과 동방의 변경에서 그가 벌인 군사행동은 영속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북방에서는 다음 세기 내내 이민족의 압력이 끊임없이 고조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동방에서 합병한 영토를 포기했지만, 후대의 황제들은 뚜렷한 성과가 없이 파르티아 정복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므로 그의 재위기간은 내부의 안정과 외부의 위업이 절정에 달한 빛나는 한낮이라고도 볼 수 있고, 3세기의 불안한 한밤중을 예고하는 찬란한 황혼기라고도 볼 수 있다.

 

M. Hammond 글


브리태니커 백과 > 인물 > 왕·귀족 > 황제 > 로마
브리태니커 백과 > 사회과학 > 정치 > 정치 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