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년 만에 이 곳에 글을 씁니다. '너 아직 이거 쓰냐' 하실 분들도 많을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보니 마지막 <소통을 위하여>가 2005년 3월16일 45회 '신호등, 눈보라, 밀리언달러 베이비'였네요. 그동안 블로그는 간간이 썼지만 나름대로 애착이 많은 이 칼럼에는 스스로 엄격하게 스타일과 내용에 대한 통제선을 그어놓고 선 밖의 글들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선에 숨 쉴 틈을 좀 줄까 합니다. 얼마나 자주 업로드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순 없지만 형식과 내용 면에서 훨씬 자유로와질 겁니다. 또 기자블로그와 동거도 시작해볼까 합니다. 당분간 불편한 동거겠지만 자리를 잡아보겠습니다. 자, 그럼 <소통을 위하여: 시즌2>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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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월28일(일) 방송되는 SBS스페셜 <걷기의 기적> 제작 차 프랑스에 가서 6개국에서 출판된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68)씨를 만났습니다. 4년여에 걸친 실크로드 도보여행의 경험을 쓴 이 책으로 올리비에 씨는 지난 2004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고 지금은 걷기를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를 위해 쇠이유 협회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지난 1월8일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
파리 시내에는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 말다를 되풀이했다. 약 열흘 동안의 긴 크리스마스 휴가를 끝내는 월요일, 파리 외곽 순환도로는 르노, 시트로엥, 폭스바겐 같은 출근 차량들로 꽉 막혔다. 할 수 없이 시내로 진입했다. 아침 8시가 다 돼가는 시각에도 에펠탑은 어두컴컴한 공간 저편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파리 시내를 가로지른 6인승 혼다 RV는 북서쪽으로 2시간 쯤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린 끝에 노르망디 지역에 들어섰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이미지만 떠오르는 이방인에게 뜻밖에 너무 평화로운 시골이었다.
올리비에 씨는 8살된 애견 오글라(아일랜드 여자 이름)와 함께 취재진을 맞았다. 푹한 날씨에 백 년 가까이 된 목조 주택집에서 곰팡내라도 풍길 법했지만 그 대신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졌다. 8년 전 퇴직 언론인인 올리비에 씨는 실크로드 1만2천km를 오로지 두 다리로 답파했다. 그 앞으로도 뒤로도 실크로드를 걸어서 건넜다는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책 <나는 걷는다> 는 프랑스,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어로 출판됐고 지난 2004년에는 한국어로도 소개됐다. 올리비에 씨는 그해 방한해 서울에서 기자회견도 했다.
35년간의 기자 생활, 해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저술가로서 경력에 자못 긴장한 채 그와 대면했지만, 올리비에 씨의 소탈한 모습에, 벽난로를 켜자는 제안을 사양할 정도로 분위기는 따스해졌다. 집안은 책과 그림, 세계 각국의 기념품 따위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올리비에 씨는 옅은 갈색 코듀로이 바지와 붉은 체크 셔츠, 고동색 보팅 슈즈를 코디해 프랑스 남자의 감각이 노년에도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0여년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40년 전 구입한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두 명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은 파리에 살고 있고, 또 한 명은 서울에서 프리랜서 기자를 한다고 했다. 취재진에게 그는 찐한 에스프레소를 손수 끓여 내놨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1시에 라디오 듣고 8시에 저녁?? 글을 씁니다. 3월에 비행 청소년에 관한 책을 출판할 예정입니다.
올리비에 씨는 은퇴한 첫 해 파리에서 스페인 꼼포스텔라까지 도보 여행을 한 뒤 지난 2000년 쇠이유 협회를 설립했다. 쇠이유(seuil)는 프랑스어로 집의 문이다. 그가 만든 쇠이유 협회는 비행 청소년들을 교도소에 가둬놓을 것이 아니라 걷기를 통해 교화하자는 주장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5년 전부터 한 해에 열 두명 씩의 프랑스 비행 청소년들이 열흘 걷고 하루 쉬는 식으로 1700km를 약 석달에 걸쳐 걷는다.
걷게 되면 일단 청소년들은 그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나와야 합니다. 정신과에서 말하는 단절이라는 과정이죠. 두 번째로 걷는 동안 음악, 오락, 인터넷, 전화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소년들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죠. 그들의 삶에서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죠. 이러한 과정이 이들에게 큰 변화를 일으켜서 그들은 담당하던 판사나 심지어 부모들도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이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가히 기적적이지요.(중략)걷기 전에 그들이 양아치였다면 걷기를 마치고 돌아올 땐 영웅이 되죠.
올리비에 씨는 방송을 위한 촬영이 그리 낯설지는 않은 듯 했다. 일상 생활을 좀 보여달라는 주문에 능숙한 솜씨로 생선 요리를 오븐에 넣고 데웠다. 칠순을 코 앞에 둔 노인답게 나중에 불 끄는 것을 잊어버려 인터뷰 도중 뭔가 타는 냄새의 진원지를 찾느라 분주해지긴 했지만. 그가 처음 실크로드를 걷게 된 건 역사를 좋아해서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위대한 발명품들이 서양에 전해졌습니다. 나침반, 화약, 종교,페스트, 향수... 실크로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매혹적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렇게 위대한 역사를 가진 길을 걷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는 걸으면서 역사적 사실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걷는다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죠. 어느 마을에 도착하면 그들의 집에 초대받기도 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고...걷노라면 타인들이 나를 받아들입니다. 만약에 내가 차를 타고 갔더라면 저는 그냥 이방인일 뿐이었겠죠. 배낭을 짊어지고 짐을 끌고 걷고 있던 저는 그들과 같이 걷고 있던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죠. 어쩌면 이런 것들이 역사보다도 더 저를 끌어당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늙는다는 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가끔은 노련함, 관용, 지혜 같은 미덕을 안겨주기도 한다. 솔직함(부정적으로 보자면 염치없음)도 그 중 한 덕목인데 가끔 노인들(또는 곧 노인이 될 사람들)이 공개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소리내어 방귀를 뀌?히 말로 표현이 안 되는데 이건 염치없다고 하기보단 솔직하다고 보고 싶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에게 나는 물었다. 그렇게 오래 걸은 뒤에 무엇을 얻고 싶었고, 걷고 난 뒤에 무엇을 얻으셨나요?
제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첫째로 은퇴 후에 지겨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할 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요. 결국 꼼뽀스텔라에서 돌아오면서 협회를 만들기로 했죠. 그 후에 제가 만든 협회를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제 책이 많이 팔려서 그 돈으로 협회의 일부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어요.
(중략)저에게 은퇴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은퇴라는 것은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어 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가장자리로 밀어내진 느낌이죠. 또한 더 이상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는 모두가 유용한 존재이며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어에서 간다(go)는 행하다(act)'와 같은 의미입니다. 저는 죽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죠. 저는 행동하고,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로 남고 싶었습니다.
올리비에 씨는 기자에게 실크로드 도보여행 당시 신었던 신발 다섯 켤레를 보여줬다. 모두 바깥 쪽 뒤축이 한참 닳아 있었다. 출판사에서 박물관에 보관될 거라고 했다는 말도 전했다.
누군가가 실크로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서 건넌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죠. 누구도 그렇게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재미있었어
등산화 말고도 그의 집에서 기자의 눈길을 끄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첫 째는 애견 오글라로 올리비에씨가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산책 중에도 그 자리에 머무르라면 주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머물렀다. 기자가 놀라워하자 그는 자신이 훈련시켰다며 몹시 흡족해했다. 또 하나는 화이트 맥북(컬러 맥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과 6mm 비디오카메라. 그 나이에도 촬영 장비를 다루고 맥북으로 글을 썼다. 이런 걸 볼 때면 안티 에이징은 약을 먹고, 좋은 화장품 발라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산책.
걷는다는 것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죠. 인간이 본래 자동차를 타려고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면 육체와 정신이 균형을 잡는 느낌을 받습니다. 걸으면 생각을 깊이 하게 됩니다. 걷는 다는 것은 영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취재팀의 혼다 RV 라디에이터 그릴에 새겨진 'H'를 보고 올리비에씨는 혼다가 아닌 훈다이를 얘기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현대를 가리키는 건 분명해보였다. 아마도 한국 취재팀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지 싶었다. 요즘 시끌시끌한 현대차 파업에 대해 그가 알 리도 없었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