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Opinion銘言

성공 체험의 복수

영국신사77 2007. 1. 6. 10:12
             [노재현시시각각] 성공 체험의 복수 [중앙일보]

2007년 2월 2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 미국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의 글이 실렸다. 기고문은 "30년 전 이길 수 없는 싸움(베트남전)을 했던 미국이 30년 뒤 이라크에서 똑같이 오만한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전지전능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가장 좋은 해독제는 역사"라고 일갈했다. "뒤를 더 많이 돌아볼수록 당신은 더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개개인은 주로 자신의 체험에서 교훈을 얻는다. 성공의 기쁨이든 실패의 쓰라림이든 모두 현재와 앞날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남이 제공하는 간접체험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겪은 체험들이 더 소중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기로에 서 있을수록 자기 속에 육화(肉化)된 직접체험에 기대어 판단을 내리게 된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송나라의 한 농부가 토끼가 나무에 부딪쳐 죽는 것을 본 뒤 농사는 팽개치고 매일 나무그루를 지켰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있다. 자신의 체험에만 의존하다가는 언제든 수주대토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한 개인의 일상이 아니라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개인적 체험에만 의존하다가는 정말 큰 재앙을 자초할 수 있다. 그래서 현명한 공인(公人)은 체험을 넘어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래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실수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슐레진저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성공했던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론을 절대시하는 과오를 범하는 현상을 아널드 토인비는 '휴브리스(hubris, 오만.자기과신 )'라고 불렀다.

버블 붕괴의 늪에서 갓 벗어난 일본에서도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 다시는 실패하지 말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정초에 읽은 두 권의 문고본에도 그런 분위기가 반영됐다. '일본인은 왜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가'(지혜의숲 문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왜 졌을까'(문예춘추). 둘 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왜 패했는지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일본인은 왜…'는 전쟁의 승패를 가른 분수령이 된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이 책 서문의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현자(賢者)는 역사에서 배우고, 우자(愚者)는 체험에서 배운다'.

일본군은 러일전쟁(1904~1905년)의 승리에 도취한 채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이다가 완패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이른바 '성공 체험의 복수'다. 단순히 미국과의 국력차이 탓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백병전, 해군은 거함거포(巨艦巨砲) 위주의 작전으로 이겼다. 뤼순(旅順) 공격 때 수많은 부하를 희생시키고 승리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은 태평양전쟁 즈음에는 거의 신격화돼 누구도 그의 작전을 비판할 수 없었다. 연공서열식 승진을 중시하던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을 코앞에 두고 대규모 인사이동을 단행해 전투력을 반감시켰다. 반면 미군은 전시에 걸맞은 파격적인 발탁인사나 좌천인사 외에는 사람을 바꾸지 않았다. 저자들은 80년대 후반 '재팬 애즈 넘버원(Japan as No.1)' 신화에 도취해 우쭐대다가 버블 붕괴를 맞고, 미국과의 '돈 전쟁'에서 참패하고, 정보기술(IT) 혁명에서 뒤처진 모양새가 태평양전쟁 때의 일본군을 꼭 닮았다고 자아비판한다.

개인적인 성공 체험이 강렬하고 극적일수록 그 체험에 더 매달리게 된다. "386 진보세력은 80년대 틀로 21세기에 대처하다가 실패했다"는 여야 386세대 국회의원들의 고백(본지 1월 3일자 1면)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고졸 인권변호사에서 국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도 '성공 체험의 복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본다. 더 꼴불견인 것은 60년대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노무현 이후 시대의 대안인 양 착각하는 일부 정치인이다. 모든 성공 체험에는 독(毒)이 들어 있다. 슐레진저가 역사를 해독제에 비유한 것은 그래서 탁견이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jaiken@joongang.co..kr]   
2007.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