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孝宗) |
휘(諱)는 호(淏)이며 자는 정연(靜淵)이다. 그리고 호는 죽오(竹梧)이며 시호는 명의(明義)이다. 인조(仁祖)의 둘째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과 같이 지내면서 형을 적극 보호하였다. 즉,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하여 동행을 막았으며,그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하여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그대로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다가 그해 4월 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이 해 인조 말년부터 세력을 떨치던 공서파(功西派)의 낙당(洛黨) 김자점(金自點)을 파직시키고 청서파(淸西派)를 등용했으며, 오랫동안의 볼모생활 중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그 설욕에 뜻을 두어 김상헌(金尙憲) ·송시열(宋時烈) 등을 중용(重用),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효종은 오랫동안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뜻과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하이관, 금주위 송산보(錦州衛松山堡)까지 나아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개원위(開元衛)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 원한을 품은 데다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한때 유배 중이던 김자점의 밀고로 기밀이 누설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이를 잘 무마하고 계속 북벌을 위한 군비의 확충을 기하여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 결과 즉위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소극적인 군비를 펼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이 죽자,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651년(효종 2) 12월 이른바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청나라에 있던 역관배들도 실세(失勢)함으로써, 이듬해부터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원두표(元斗杓) 등의 무장을 종용하여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본격화하였다.
즉,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600여명의 군액을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하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束伍軍)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하는 동시에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전념하도록 하였다. 서울 외곽의 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하여 원두표를 강화도, 이후원(李厚源)을 안흥, 이시방(李時昉)을 남한산성, 홍명하(洪命夏)를 자연도(紫燕島-경기도 부천시)로 보내어 성지(城池)를 수보하고 군량을 저장하여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선하는 등 군비의 확충을 적극화하였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등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수보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기 위하여 염초(焰硝)생산에 극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단히 직접 관무재(觀武才) 등에 참가하여 군사훈련 강화에 노력하였다.
1655년 8월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로 하여금 강습권과(講習勸課)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정월에는 금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로 바꾸어 행동에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 어린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나, 재정이 이에 따르지 못하여 때로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효종의 군비확충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이미 확고하여져 북벌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다만, 군비확충의 성과는 두 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만 나타났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한편, 김육(金堉)의 주장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세조 때의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을 간행하게 하고 이에 따라 수세(收稅)의 환산표를 단일화하여 국민의 부담을 덜었다. 그리고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행전(行錢) 의 유통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문화면에 있어서도 1653년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하여, 태음력의 옛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하였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간행하였으며, 공주목사 신속이 엮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하여 농업생산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1656년에는 전후에 흐트러진 윤리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쓴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조실록》을 다시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 간행하였다.그리고 1657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등이 간행되었다. 1659년 5월 4일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장사하였으나 뒤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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