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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 김정희가 금석학 집대성한 ‘해동비고’ 발굴

영국신사77 2007. 1. 8. 10:07

추사·금석학 연구 새장 열렸다

秋史 김정희가 금석학 집대성한 ‘해동비고’ 발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서책 고문서연구가 박철상씨가 입수
국내 대표적 비 7개 분석 문무왕비 건립 687年으로 입증
학계 ‘682年說’ 수정될듯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7.01.07 23:37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금석학 연구의 내용과 수준을 총체적으로 입증하는 서책 ‘海東碑攷(해동비고)’가 발굴됐다.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해동비고’의 발굴로 학계와 전문가들은 19세기 조선 금석학과 추사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됐다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비에 대한 고찰’이라는 뜻을 지닌 이 책은 신라 문무왕의 업적을 기록한 문무왕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정림사터 5층 석탑에 새긴 비문(일명 ‘平百濟碑〈평백제비〉’)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 7개의 원문을 적고 이를 분석한, 일종의 ‘논문집’이다.

      이 책에서 추사는 문무왕비를 자신이 ‘재(再)발굴’했음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이 비가 세워진 시기도 서기 687년임을 꼼꼼하게 고증했다. 국내 학계는 문무왕비 건립 연대를 서기 682년으로 추정해 왔는데, 건립 시기는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추사의 금석학(金石學·쇠나 돌에 새긴 글귀를 연구하는 학문) 저작은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비 2기를 분석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만이 전부로 알려져 있었다.
    • ‘해동비고’가 김정희의 저작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책 앞 부분에 적힌‘阮堂謄本(완당등본·왼쪽)’은‘완당의 책을 그대로 베껴 적었다’는 뜻이다. 오른쪽‘正喜案(정희안)’은 이 책의 고증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김정희가 생각하기에…’라는 뜻이다/전기병기자


    • 이 책은 고문서연구가 박철상씨(광주은행 여의도점 차장)가 2년 전 고서점에서 입수했다. 책 앞에 적힌 목차는 ▲‘평백제비’, ▲‘唐劉仁願碑(당유인원비)’, ▲‘경주 문무왕비’, ▲‘晉州 眞鑑禪師碑(진주 진감선사비)’, ▲‘聞慶 智證大師碑(문경 지증대사비)’,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 ▲‘慶州 ▲藏寺碑(경주 무장사비)’ 순서이다. 각 논문은 비문 내용을 옮겨 적은 뒤, 이를 설명하고 고증하는 순서로 기록했다.

      이 서책이 추사의 저작이라는 근거는 각 ‘논문’의 고증 부문에서 ‘김정희가 생각하기에’라는 뜻의 ‘正喜案(정희안)’이라는 문구가 여러 번 적혀 있다는 점이다. 책 앞에 ‘완당의 책을 베꼈다’는 의미의 ‘阮堂謄本(완당등본)’도 적혀 있어, 후대에 추사의 책을 베낀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사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을 종합하면, ‘원본’은 추사가 경주에서 문무왕비를 ‘재발굴’한 1817년 이후~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1840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함께 발굴된 ‘古冊目錄(고책목록·1860년대 추정)’에 ‘해동비고’가 적혀 있기 때문에, 필사본은 1850년대쯤 추사 저작을 직접 보고 베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박철상씨
    • 추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7일 이 책을 살핀 뒤 “한 마디로 대발견”이라고 경탄했다. 그는 “우리나 중국 사서(史書)는 물론, ‘일본서기(日本書紀)’까지 살펴 고증하는 등 당시에 볼 수 있는 모든 책을 보면서 분석·비평을 했다. 추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추사 금석학이 집대성된 글이다. 그가 왜 중국 학자들로부터도 천재소리를 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추사는 생전 그의 책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그의 사후 ‘완당척독’(1867년)과 ‘완당집’(1868년)으로 간행됐지만, ‘해동비고’와 ‘예당…’은 두 책에 실려 있지 않았다. 박씨는 오는 27일 예술의 전당에서 ‘해동비고의 출현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발견 의의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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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비 언제 세워졌는지 ‘역법’ 통해 월까지 추론…

     

                                             추사의 학문적 능력 보여줘

    신형준기자
    입력 : 2007.01.07 23:34

    • 최근 발견된‘해동비고’. 추사의 금석학이 집대성된 책 이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전기병기자
    • '해동비고’ 중 ‘경주 문무왕비’편은 추사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보여준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7일 “정말 사람 미치게 하네. 지금 연구해도 이만한 성과를 내기 어려워…”라며 감탄사만 연발했다.

      문무왕비는 1796년 경 경주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발굴했으며, 이를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가 비의 내용을 대략 서술하고 중국에도 탁본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는 그 뒤 자취를 감췄다가 1961년 경주 동부동의 어느 민가에서 댓돌로 쓰던 것이 재발견됐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비는 1796년 발견 당시에도 아래 위 2편으로 깨져 있었는데, 현재 아래 편만 남고, 윗부분은 없어졌다.

      추사는 ‘해동비고’에서 문무왕비를 자신이 ‘재발굴’했다고 밝혔다. “비는 경주 낭산 남쪽기슭,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에 있는데 비석은 없어졌고 비를 꽂는 빗돌받침만 남아 있다. 1817년 경주에서 고적(古蹟)을 찾다가 어느 밭의 돌을 쌓은 둑을 파헤치니 문무왕비 하단이었다. 이를 가져다가 주변의 빗돌받침에 꽂았더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또 돌 하나가 풀 속에 있었는데 문무왕비의 아래 쪽과 딱 맞아 떨어졌다. 나머지 없어진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1100년만에 발견된 문무왕비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다가, 추사가 다시 찾은 것이다. 학계는 문무왕비가 서기 682년 7월 25일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문무왕 다음 왕’(嗣王·사왕=신문왕)이 세웠으며, 그 날이 ‘二十五日景辰建(이십오일경진건)’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경진날인 25일 세웠다는 뜻이다. 그러나 ‘景辰’이라는 간지(干支)는 없다. 이는 당 고조 이연의 아버지 이름 ‘昞(병)’의 발음을 피하기(피휘·避諱) 위한 것으로, 병진(丙辰)이 옳다.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682년 7월 25일이라는 것.

      그러나 추사는 682년은 제외시킨다. 비문에 ‘天皇大帝(천황대제)’라는 표현이 있는데 ‘천황대제’는 당 고종의 시호(諡號)이므로, 그가 죽은 683년 이후여야 한다. 또한 비문에도 ‘단청 색이 바래고, 책은 닳았다’(丹靑?於麟閣 竹帛毁於芸臺·단청투어인각 죽백훼어운대)라고 적혀 있어, 문무왕이 사망(서기 681년 7월)한 지 여러 해가 됐다는 것. 결국 문무왕비는 당 고종 사망(683년) 이후부터 신문왕 재위(692년 7월까지) 사이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추사는 중국의 각종 사서에 적힌 날짜 간지를 바탕으로 “비 건립일은 687년 8월 25일이거나, 이 해에 윤달이 있었으므로 그 직후인 9월 경”이라고 추정했다.


      한국천문연구원 안영숙 책임연구원은 “서기 687년 1월이 추사 말대로 윤달”이라며 “25일 병진일 중 683년~692년 7월을 만족시키는 날은 687년 8월과 10월뿐”이라고 했다. 최 실장은 “지금처럼 날짜를 환산하는 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참 대단하다”며 “추사가 역법(曆法)에도 밝았다는 당대의 평가를 실증한다”고 말했다.

      김유식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은 7일 “추사의 말처럼, ‘선덕왕릉 아래 신문왕릉 앞’과 비슷한 위치인 사천왕사터에 신라시대 빗돌받침 두 개가 동-서쪽에 각각 있는데, 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왕비 조각의 하단과 동쪽 빗돌받침을 지난 2일 실측한 결과 딱 맞아 떨어졌다”며 “동쪽 빗돌받침이 문무왕비의 빗돌받침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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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상] 추사의 금석학

     

    이선민 논설위원 smlee@chosun.com
    입력 : 2007.01.09 22:37 / 수정 : 2007.01.09 22:57

    • 1817년 4월, 31세의 추사(秋史) 김정희는 경주 외곽 암곡동의 무장사 터를 찾았다. 신라 38대 원성왕의 아버지가 지은 이 절은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만 남았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했다는 무장사비(碑) 역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추사는 ‘혹시나’ 해서 주변을 뒤지다 풀숲에서 비석 조각 두 개를 발견하고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추사가 비문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3세 때 사신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찾으면서였다. 추사는 60일간 연경에 머물면서 당대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으로부터 고증학과 금석학에 대한 소양을 얻는다. 그는 귀국 후 우리나라의 옛 비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도선(道詵) 국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지던 북한산 비봉(碑峰)의 비석이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그였다.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 다녔던(好古有時搜斷碣)” 추사지만, 그의 금석학 관련 글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만년에 제주도와 북청으로 유배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책을 불태웠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편지 모음인 ‘완당척독(阮堂尺牘)’과 문집인 ‘완당집(阮堂集)’을 간행했지만, 금석문과 관련된 것은 실려 있지 않다. 북한산비와 황초령비 등 진흥왕순수비 두 개를 비교 분석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 따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추사가 우리나라 고대의 비석 7개를 연구 분석한 ‘해동비고(海東碑攷)’의 발견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추사 금석학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쾌거다. 이 논문집엔 경주 무장사비를 비롯해서 신라 문무왕비, 당(唐)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세운 평백제비(平百濟碑), 진감·지증·진경대사 등 고승의 비문들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물론 일본 문헌까지 널리 인용하며 비석의 내용을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



      ▶‘해동비고’의 발굴은 눈 밝은 젊은 아마추어 고문서연구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학(家學)으로 한학(漢學)을 공부한 은행원 박철상 씨는 10년 전 한 고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봤지만 너무 비싸 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2년 전 다시 ‘해동비고’를 발견하고는 이를 구입해 내용을 분석해 왔다. 27일 발표 예정인 그의 논문은 상당한 내공을 쌓았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활발해질 추사 금석학 연구에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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