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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비극

영국신사77 2007. 1. 18. 23:56

                                              소현세자의 비극 

 

 

                                                                   출처 블로그 > 하늘지기의 解腸記!!
                                                                   원본 http://blog.naver.com/hanlzgi/40033188849

 

 

                            1.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

 

  인조 15년(1637) 정월 30일, 조선 국왕 이종이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한 후, 소현세자는 그대로 청 진영에 들어갔다가 2월 5일 돌아왔다. 돌아온 지 3일 후인 2월 8일 예친왕 도르곤에게 인도되어, 회군하는 청군을 따라 북행하게 되었다. 일행은 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남이웅(南以雄) 이하 관원 180명이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것은 4월 10일이었고, 인조 23년(1645) 2월 영구 귀국하기까지 거의 8년을 심양에 머물렀다. 그는 약 1개월씩 2번(1640. 3~4, 1643. 1~2)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를 인질로서 생활했다.    

 

  세자는 심양에 도착해서는 한때 조선사신 접대관인 동관(東館)에 거주하다가, 5월 7일 준공된 심양관소로 옮겼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출입의 제한은 받았으나, 그 이외 큰 불편은 없었다. 세자는 청과 조선간의 현안을 중재해 갔으나, 양측으로부터 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초기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청 태종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청은 친선도모를 위해, 각종 제사, 몽고부족들의 조공, 명나라 장군의 투항으로 인한 회합에 세자와 봉림대군을 반드시 참석시키고, 또한 매월 5일․15일․20일의 왕이나 장군의 황제에 대한 조회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시켰다. 이러한 의례적인 행사에는, 청 조정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기회였으므로, 세자를 청이 매우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예친왕 도르곤을 비롯한 청의 왕족은, 세자를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등 인간적인 친숙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였다.

 

  청과 조선 사이의 현안은, 주로 명 공격을 위한 조선의 원병, 식량지원, 그리고 여진족으로 조선인과 결혼하여 조선에 거주하는 자들의 송환문제였다(인구가 적은 청은 인구 확보에 애를 썼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세자는 자신이 조선의 국정에 간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회피하였다. 세자와 비교적 친숙하였던 영친왕 아지거는, “황제가 무슨 일을 분부할 때마다 세자는 무릇 임의로 혼자 결정할 수 없고 다만 본국에 전보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나, 이후 만약 황제의 명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뜻을 알고 좋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세자의 독자적 결정이 어려웠던 이유는, 부왕과의 관계였다. 이종은 청 조정과 친숙한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청이 요구할까 두려워했다. 세자의 미지근한 태도는 부왕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자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세자가 주로 접촉하였던 인물은 영친왕(英親王) 아지거(阿濟格 ; 누르하치의 12子),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 ; 누르하치의 2子),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 누르하치의 14子),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 ; 누르하치의 15子)와 용골대였다. 특히 당시 누구보다 실권자였고 청 태종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은 도르곤과의 친교로, 세자의 심양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세자의 권한이 늘고 또 청에 우호적으로 되어가자, 이종의 경계는 심해졌다. 세자는 청이 중국을 차지할만한 자격이 있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자는 명을 정벌하는 원정에 2번 참여하였다. 1회는 1641년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금주와 송산 정벌에 출정한 것이었고, 1644년에는 예친왕 도르곤이 지휘하는 명 정벌군을 따라 5월 2일 북경에 입성하였다. 세자는 20여 일만에 심양으로 귀환했다가, 9월에 다시 북경에 가서 약 70일 동안 머물렀다(1644. 9. 19~ 11. 26).

 

 

                               2. 아담 샬과의 만남 

    

  도르곤은 북경에서 세자와 서양인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서양의 과학 기술을 높이 평가하던 도르곤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배려한 조치였다(도르곤은 조선의 공주를 요구하여, 종실여자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에 걸쳐 포교와 천문역산(天文曆算)을 위해 활동한 예수회 신부. 중국 이름은 탕약망(湯若望)이다. 신성로마제국 쾰른의 명문 출신으로, 1611년 예수회 수도사가 되었다. 1622년 북경에 와서, 월식을 3차례 예보한 것이 적중하여 유명해졌다. 1645년 순치제 때 섭정이었던 도르곤은 아담 샬(Adam Schall)을 천문대장인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에 임명하였다. 청의 신임을 얻은 그는, 1650년 북경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인 천주당(天主堂, 南堂)을 세웠다.

1664년 강희제가 아직 친정하기 전 보정대신(輔政大臣) 오보이(鰲拜)가 전단하던 시절에 양광선(楊光先)이 서양역법(西洋曆法)을 반박하고, 신부들이 장차 바다를 건너 정복해 올 유럽의 밀정이라고 상소한 때문에, 아담 샬은 한때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태황태후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혼천의해시계․망원경 등 과학기계와 지도․성도(星圖) 등을 제작했고, 명나라 말기에는 대포도 많이 주조하였다. 한문으로 저술한 저서가 다수 전한다.     

 

  뛰어난 과학자이며 선교사인 아담 샬은, 친절을 다하여 서양역법을 도입하려는 세자를 도왔으며, 자신이 고심하여 한문으로 번역한『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여지구(輿地久 ; 지구본)를 주었고 天主像까지 선사하였다. 세자는 아담 샬의 후의에 감사의 서한을 보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어제 천만 뜻밖에 보내주신 귀중한 구세주 천주님의 성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서양의 문서들을 선물로 받자옵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귀하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곧 그중 몇 권의 책을 급히 읽어보니, 그 속에서 정신수양과 덕성 함양에 적합한 도리가 탁월하고 명쾌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학문에 대한 광명이 결핍되어 오늘날까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천주님 성화와 그 존엄한 모습은 앙모하는 자에게 심오한 인상과 감회를 자아내는데, 이를 벽에 걸어 모시고 우러러 뵈오니 보는 이의 마음이 평온해질 뿐 아니라 실로 속세의 때와 먼지를 청정케 합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양의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 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마는, 우리나라는 아직 천주 숭배의 진리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그 존엄성을 모독할까 염려되어 이를 두려워하는 걱정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런 까닭에 귀하가 동의하신다면, 이 천주상만은 돌려드리는 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자의 서양문물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편지이다. 세자는 귀국길에 서양인 선교사 한 사람을 동반하겠다고 말해, 아담 샬을 놀라게 하였다. 귀국하기 전, 세자와 도르곤은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3, 귀국과 의문의 죽음

 

  세자는 병자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가운데 1만 3천명을 인솔하여 귀국길에 올라, 인조 23년(1645) 2월 18일 서울에 도달했다. 수많은 서양문물도 가지고 왔다. 1643년 청 태종 사망 후 순치제의 섭정이 되어 사실상 황제 역할을 하고 있는 도르곤과 친숙한 세자의 귀국으로, 이종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도르곤이 양위하라는 지시를 내릴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종은 귀국한 세자에게 신하들이 진하(進賀)하는 것마저 막았다.  

 

  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오한과 발열 증세를 보이던 세자는, 발병한지 3일 만에 창경궁에서 젊은 나이로 급서했다. 4월 26일이었다. 그렇게 중하지도 않던 병세가 하루아침에 급변한 것은 처방이 잘못된 탓이며, 매일 침을 놓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에게 책임이 있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이종이 아끼는 후궁인 소용(昭容 : 왕의 후궁의 하나로 정 3품이다) 조(趙)씨의 추천으로 특채된 자였다. 조씨는 세자빈 강씨와 사이가 나빴다.

 

  국왕이나 세자가 사망할 경우 시의(侍醫)들은 일단 책임을 지고 처벌받는 것이 상례인데, 이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일 만에 입관시켰다. 또한 입관할 때 입회하는 인원도 관례를 어기고 제한하였다. 즉 대소렴(大小殮) 때에는 빈궁․당상관 등이 입회해야 하는데도 이를 불허하고 인척 4~5인에게 소렴을 맡겼다.

 

  소현세자는 과연 학질로 급서했는가.『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세자의 시신은 盡黑으로 변해 있었으며 7穴에서 출혈하고 있어 마치 독약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이 증언은 소렴에 참여하였던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처가 한 것이다. 그녀는 바로 소현세자의 모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로, 세자에게는 이모가 된다.  시신이 검게 변하고 출혈은 독약을 먹고 죽은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침을 잘못 놓아서 생기지는 않는다.

 

  소현세자는 이종에게도, 소용 조씨에게도 용납대상이 못되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쌓인 이종과, 청을 인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세자의 태도는 상극이었으며, 이종은 양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이종에 대한 인물평은 권모를 잘 쓰고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세자빈과 사이가 나쁜 소용 조씨는, 세자가 즉위할 경우 그 운명은 명약관화한 것이었다.  

 

 

                                4. 소현세자 유족의 비극

   

  세자의 사망 후에도 이종의 잔학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장지와 장례일 문제도 세자빈 강씨의 희망은 일축되었고, 세손을 왕위계승자로 정위하자는 상소도 각하되었다. 그러던 중 5월에는 봉림대군도 귀국하였다.

 

  이종은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상경(常經)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결심하고 윤 6월 2일 중신회의를 열었다. 영의정 김류와 낙흥부원군 김자점이 이종을 지지하였으나, 좌의정 홍서봉, 우찬성 이덕형, 이조판서 이경석, 병조판서 구인후, 공조판서 이시백, 대사간 여이징(呂爾徵), 부제학 이목 등 대부분의 중신들은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종통실서(宗統失序)’ 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종의 강변과 억지를 꺾지는 못했다. 세손이 왕위계승 자격을 잃음으로써, 소현세자 유족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세자는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 등 3남과 3녀를 남겨두었다. 유족을 겨냥한 음모가 일어났다. 

 

  얼마 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일어나 두 명의 궁녀가 투옥되고 잔인하게 고문치사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소현세자의 장남인 이석철의 보모 최 상궁이었다. 저주란 당시에 있어 하나의 유행이었다. 저주 사건에 연좌되어 처벌받고 사형당하는 왕족․궁녀․고관은 조선왕조 역대에 끊임없이 있었다. 저주란 귀신에 빌어 상대방에 재앙을 주려는 것으로 鳥獸․시체의 뼈․꼭둑각시 등을 마당․방고래․베개 속 등에 묻어두고 상대가 염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궁중에는 특히 저주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1차 저주 사건은 혐의를 받은 궁녀 2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허위자백을 거부하여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종의 마수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소현세자빈의 형제 강문성(姜文星) 등을 사람됨이 외람(猥濫)하니 후환을 막는다는 이유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제 2의 저주 사건이 일어나 소현세자빈의 궁녀 두 명이 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인조 24년(1646) 정월에는 왕의 수라에 독을 넣은 사건이 발생하고 소현세자빈이 용의자가 되었다. 엄중 감시를 받고 지내는 그가 이런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소현세자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고, 그를 시중드는 나인 5명이 고문받았다. 이번에도 허위자백을 거부하고 모두 고문치사하였다. 이종의 뜻이 며느리 사형에 있음을 감지한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통렬하게 그 불가를 외쳤다.

 

  왕은 소현세자빈 구호를 논의하는 신하를 모두 같은 무리로 몰아쳤고, 3월 15일에는 끝내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소현세자빈의 형제인 강문성(姜文星)과 강문명(姜文明)도 장살(杖殺)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빈이 죽은 후 2차례의 저주 사건이 재심되었고, 이번에는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하는 자가 나왔다. 소현세자빈의 친정 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야 했던 이석철은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나이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사관은 이종의 처사를 개탄하는 글을 『인조실록』에 남겼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캄캄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이듬해 9월 석철은 사망했다. 당시 지각있는 이들은 이종이 석철을 반드시 죽일 것으로 예상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용골대가 석철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조선에 온 청의 사신들도 돌아갈 때 소현세자의 묘에 들러 참배하여, 이종은 손자인 석철을 경계하였다. 소현세자의 2남 이석린도 석달 후 형을 따라 세상을 버렸다. 이종은 두 왕자를 시종하던 나인 옥진에게 친손자 죽음의 책임을 돌려 고문하여 죽였다.     

 

  1649년 이종이 죽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니, 그가 효종이다. 효종 5년 황해감사 김홍욱(金弘郁)이 감연히 상소를 올려, 소현세자빈의 신원(伸寃)과 소현세자 3남의 석방을 직언하였다. 그러나 진상이 밝혀지면, 왕은 재위명분을 잃게 되고 정통성은 소현세자의 3남에게 돌아간다. 왕은 김홍욱을 친국하였는데, 김홍욱은 고문을 받으며 간관들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언론을 막는 효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왜 말하지 않는가? 왜 말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비간(比干 ; 은나라의 충신)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두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

 

  김홍욱은 3일 만에 장살(杖殺)되었다.

  소현세자빈의 누명이 풀리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숙종 44년(1718)에 이르러서야 소현세자빈은 복권되었고, 김홍욱에게도 정경(正卿)이 증직되었다.

 

  소현세자가 즉위하지 못함으로써, 한국사는 아까운 기회를 잃었다. 그의 세계관주자학의 명분론을 넘어섰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는 뜻을 가졌으나, 냉혹한 권력의 속성에 희생되었다. 모든 외침과 같이 청의 침공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낙후된 조선의 실상을 깨닫고, 더 넓은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의 지배층은 더 어리석은 길을 택했다. 이점은 제한적이나마, 서양과의 꾸준한 교류로 서구 문물을 소화할 능력을 길렀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