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순치제 (順治帝

영국신사77 2007. 1. 17. 22:04

 

 

                   순치제 [順治帝, Shunchih ti]

 
 
  (병)Shunzhi di (웨)Shunchih ti.

  1638. 3. 15 만주~1661. 2. 5 베이징.

  청조의 제3대 황제(1643~61 재위).

 

  청이 중국을 지배하기 시작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청의 제1대 황제가 된다. 이름은 복림(福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만주지역에 있던 후금(後金)의 통치자 홍타이지[皇太極 : 1592~1643]의 9번째 아들인 순치제는 그가 6세이던 1643년에 왕위를 계승했고, 숙부인 도르곤(Dorgon : 1612~50)이 섭정을 했다. 다음해 도르곤이 지휘하는 만주족 군대가 명(1368~1644)의 수도인 베이징을 점령했고, 어린 순치제는 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1650년 도르곤이 죽을 때까지는 도르곤이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다.

 

  순치제는 독일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폰 벨과 친밀하여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자주 샬 폰 벨에게 조언을 청했으며, 또한 베이징에 로마 고딕 양식의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1657년 이후 그는 점차 불교의 선종(禪宗)으로 관심을 돌려 환관과 승려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업적은 청 조정에 한족관리의 숫자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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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치제 (順治帝 ; 1638~1661)

  청(淸)나라의 제3대 황제(재위 1643∼1661)로서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휘는 복림(福臨)이다. 그리고 시호는 장황제(章皇帝)이며 태종(太宗)의 제9자이다. 연호를 순치로 정하였으므로, 순치제라 한다.

 

  태종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자, 제왕회의(諸王會議)에서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는 겨우 6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최대 실력자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누르하치의 제14자]과 정친왕(鄭親王) 지르하란[濟爾哈朗: 누르하치의 동생인 슈르가치의 제6자]이 보정왕(輔政王)이 되었다.

 

  1644년 북경에 입성하여 중국 지배의 막을 열었는데, 이는 거의 도르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653년 도르곤이 사망하자 친정을 폈는데, 도르곤의 정적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도르곤을 추벌(追罰)하였다. 그와 동시에 제왕(諸王)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억제를 꾀하였다.

 

  1659년 영명왕(永明王)을 윈난[雲南]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明)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다만 한인공신(漢人功臣) 오삼계(吳三桂) 등 이른바 3번(三藩) 세력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의 해결은 다음 강희제(康熙帝)의 대(代)로 넘어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정치체제를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하였으며, 명나라 말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인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하여 변발과 같은 만주풍습의 강압적인 도입도 있었지만, 다른 모든 조치들이 전반적으로 새 왕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독일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폰 벨(; 1591.5.1~1666.8.15)과 친밀하여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자주 흠천감(欽天監:천문대장)으로 있었던 샬 폰 벨에게 조언을 청했으며, 또한 베이징에 로마 고딕 양식의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했다.

 

  1657년 이후 그는 점차 불교의 선종(禪宗)으로 관심을 돌려 환관과 승려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주요업적은 청 조정에 한족관리의 숫자를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제3대 순치제(順治帝)

 
출처 블로그 > 熊 穴
원본 http://blog.naver.com/anpius/30001535233

 

 

묘호 및 시호 : 세조(世祖) 장황제(章皇帝)
이름 : 愛新覺羅 福臨
생몰년대 1638~1661(재위기간 : 1643~1661)
능묘 : 하북성 준화현 청동릉 내 효릉(孝陵)

 


세조 순치제 푸린은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와 황태후 보르지지트(博爾濟吉特)씨의 아홉 번째 아들로서, 태종이 죽자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너무 어려, 그의 모후 효장문황후와 삼촌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이 순치를 대신해 한동안 섭정(攝政:수렴청정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됨)을 하였다.

 

순치년간에 만주족은 만리장성과 산하이관을 넘어 중국본토로 진출하였으며(1644년), 명나라를 대체하여 향후 약 270년간 중국 봉건시대 최후의 역사를 장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사에 따르면, 순치는 1661년에 천화병(天花病:천연두)으로 24세의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한편 전설에 의하면 사실은 순치가 그 때 사망한 것이 아니라 속세를 버리고 한 절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이유로서 그가 사랑하던 동악비(董鄂妃)가 비명에 죽자 이에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만승지위(萬乘之位)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홀연히 떠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그 치세때 중국을 침략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된 것을 가슴아파하여, 이를 참회하고자 불가(佛家)에 귀의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한문에 능통하고 기타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이 젊은 만주족 황제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인정도 제법 많았던 것 같다.

 


홀연히 떠난 사람의 시신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기에, 순치의 황릉인 효릉(孝陵)에는 그가 자금성을 떠날 적에 남겨두었던 부채와 신발만을 묻었다는 속설이 있다.

 

그 속설 덕분에 20세기 초반 무식한 군벌들이 역대 청나라황제들의 황릉을 무참하게 도굴했을 당시에, 오직 효릉만이 "돈 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그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는 그 진실여부를 떠나서 오늘날까지 '검소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순치황제(順治皇帝) 이야기

 

 

                                                                                집필자 : illbetj20  (2004-11-17 14:21)

                          청나라의 3대 황제 세조장황제(世祖章皇帝)

                          연호는 순치(順治)

 

 청나라의 2대황제인 태종이 1643년 급서하자 후계자로 6살난 아들이 즉위하니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이다.

 

 1644년 청나라가 중국의 주인이 되자 순치제는 북경에 입성하여 자금성에서 또한번 즉위식을 올렸다.

 

 청나라 황제의 즉위선언문은 만주어, 한어(漢語), 몽골어의 세가지 언어로 되어있는데 이는 곧 청황제는 세민족을 아우르는 대황제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삼전도비' 역시 이 세언어로 되어있다)

 

 그런데 만주왕조인 청나라에서의  한인(漢人)과 몽골인의 대우는 사뭇 달랐다. 청조정은 몽골인에게는 왕작(王爵)을 주고 친형제처럼 대우하면서도, 한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원래 만주와 몽골은 서로 동문동종(同文同種)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몽골문화를 무시하고는 만주문화의 일면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일찍히 태조 누르하치가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몽골의 문자를 빌려 만주의 말을 표기하게 한 사례만 봐도 두 민족의 관계를 짐작할 만하다.

 

 청나라 황실은 몽골의 왕가를 매우 높게 대우하였는데, 태종이나 순치제의 섭정왕이었던 예친왕(睿親王)도 몽골왕가에서 아내를 맞았으며, 순치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순치제는 다른 만주족들과는 사상이 다른 황제였다. 7살에 자금성의 주인이 된 순치제는, 어려서부터 중국의 문화를 매우 사랑하는 황제였으며 철저하게 중국적인 교양을 쌓으며 자랐다.

그의 거실에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고전에서부터 소설등속에 이르기까지 고루갖춘 수십개의 책장이 가득차 있었고 장원출신의 서원문(徐元文), 오승사(吳承思) 등 젊은 학자들을 내정의 황제거실까지 불러들여서 정치, 문학, 미술, 문단 등에 대한 담소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또한 불교를 좋아하여 불교경전 읽기를 좋아하고 덕망높은 스님을 초대에서 불도를 묻곤 했다.

 

 허울뿐인 황제로서 모든 실권은 숙부인 예친왕이 쥐고 있는 가운데, 순치제는 이러한 중국적인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엇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선황제 태종의 황후인 순치제의 어머니(몽골인이다)가 예친왕과 결혼을 한 것이다. 즉 형수와 시동생이, 그것도 황태후와 섭정왕이 재혼을 한 것인데, 이는 몽골이나 만주에서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중국사상에 물든 순치제로서는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조정의 한인관료들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철이 든 순치제는, 그러한 문화에 심한 반발심을 느꼈다고 한다.

 

  예친왕이 죽자 순치제는 자신의 몽골출신 황후를 트집을 잡아 폐하였는데, 새황후를 또 몽골왕가에서 데려오자 예의를 모르는 여자라며 냉대하며 반몽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또한 순치제는 황제의 성생활(性生活)에 관한 까다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황제가 황후와 잠자리를 가질때에는 별문제가 없는데 후궁과 관계할 때는 황제의 저녁수라가 끝날무렵 환관이 은쟁반에 수십여장의 녹두패를 담아서 황제에게 올린다.

패 하나하나에 황제가 총애하는 후궁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황제는 그 중에서 마음이 쏠리는 이름이 적인 패를 뒤집어 놓는다.

이경우에 황제와 후궁이 관계를 갖는 시간은 엄격이 정해져 있는데 시간이 되면 환관은 후궁을 되돌려 보내고 황제에게 수태(受胎)의 여부를 물어보아 허락하면 장부에 오늘의 날짜를 기록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후궁의 아랫배를 마사지하여 정액을 쏟아낸다.

  그리고  황제의 후궁의 거처에 친히 납실 때는 황후에게 미리 전갈이 가는데 황후가 이를 허락한다는 문서를 해당후궁에게 보내지 않으면 황제가 납시더라도 후궁은 황제를 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순치제가 만든 조법(祖法)이다.  

  

  순치제는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야사(野史)가 전해온다.

순치제의 후궁중에 동귀비(董貴妃)가 있었는데 그녀는 만주귀족가문 출신이라고 되어있으나 한인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런데 황제는 동귀비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녀가 곁에 없으면 밥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동귀비가 덧없이 죽어버리자 황제는 죽은 동귀비를 황후에 봉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옥좌를 내팽개치고 출가하여 산서성의 명찰 오대산(五臺山)에 죽치고 들어박혀 버렸다.

아무리 조정대신들이 돌아오기를 간청해도 들은척을 안하자, 대신들과 황실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야사로만 전해져 내려올 뿐,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튼 순치제의 죽음과 함께 그의 유언이 발표되었는데, 한인을 너무 우대하고 만주인을 무시한 점, 문관을 중시하고 무관을 홀대한점 등을 반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살에 제위에 올라 24살에 죽은 젊은 황제에게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만한 실정이 있었을까?

그 유언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만주출신 무관들의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인 태조나 아버지인 태종, 숙부인 예친왕에 비해 너무나도 중국적인 황제였던 순지체는 비록 유언으로 지나친 중국화를 뉘우쳤지만, 순치제와 그 뒤를 이은 강희제의 대에 이르러, 만주의 정복왕조 청나라는 몽골에서 중국으로 크게 기울게 된다.

  

 

 

                                                         내용출처 : [기타] 도서출판 교육도서 [잠자는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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