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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Dorgon:다이곤]

영국신사77 2007. 1. 17. 16:50
      도르곤 [(다이곤), Dorgon, 1612~1650, 38세]

 

  청나라 초기의 황족. 베이징에 천도하였으며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태조에게 사랑받고, 태종 밑에서 중용되어 예친왕()으로 봉해졌다.

 

  태종이 죽고 순치제()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친왕()과 함께 보정왕()으로서 섭정하였으나, 드디어는 정친왕을 누르고 실력자가 되어 정국()을 담당하였다.

 

  1644년 32세 때에는, 명장() 오삼계()를 선도()로 하여 베이징[]에 천도하였으며, 이어 중국 전토를 무력으로 평정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인관료()와의 타협 아래 청의 중국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황부섭정왕()으로 봉해졌으며, 죽은 뒤에는 의황제성종()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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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곤 [Dorgon]

 

 

  1612. 11. 17 만주~1650. 12. 31 카라호툰.

  중국(淸)나라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주족의 황족.

호는 성종(成宗), 시호는 황제(皇帝). 청조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를 보정(輔政)했던 최초의 섭정이었다.

 

  도르곤은 청나라를 세운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16명의 아들 가운데 14번째 아들이다. 누르하치는 1616년 자신을 중국의 황제로 선포했으나,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지 못하고 1626년에 죽었다. 그의 후계자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아바하이, 8번째 아들] 치하에서 도르곤은 황자(皇子)의 칭호인 호소이 베일레를 수여받았다. 그는 1628년에 시작된 차하르 몽골족과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황자들 가운데 최고의 지위인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졌다.

 

  1638~39년 명(明) 정복을 위한 홍타이지의 출정기간에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허베이 성[河北省]과 산둥 성[山東省]의 40개 도시들을 점령한 팔기군(八旗軍)의 두 부대 중 한쪽을 지휘했다. 쑹산[嵩山]과 진저우[錦州]를 점령하는 데도 참여하여, 몽골족의 세력을 넓히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643년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도르곤은 이를 거절했다.

 

  1644년 4월 32세 때,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도르곤은 한족 고문관의 충고에 따라, 원정군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이전에 그의 가장 큰 적이었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吳三桂)는, 이자성에게 나라를 세우게 하기보다는 도르곤과 힘을 합치는 쪽을 택했고, 이 연합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패배시켰다.

 

  1644년 6월 도르곤이 베이징으로 입성했을 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이미 목을 매달아 죽은 뒤였다. 이자성의 패잔병들을 몰아낸 후, 도르곤은 신중하게 저명한 한족 전문가들의 협조를 받아가면서, 정치적·행정적인 여러 제도들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많은 한족 관습들을 받아들여,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도르곤은 명조의 매우 발달한 통치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한족 관료들을 재등용하고, 관리 선발을 위한 시험으로 이미 그 효용성이 증명된 과거제도를 통해 새로운 관리들을 등용했다.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였던 아담 샬 폰 벨이 수학자로서, 흠천감(欽天監:국립천문기상대)의 감정(監正)과 대포제조 고문으로서 그를 도왔다. 토지몰수와 변발과 같은 만주풍습의 강압적인 도입도 있었지만, 다른 모든 조치들이 전반적으로 새 왕조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다.

 

  1650년 12월 31일, 만리장성 근처에 있는 카라호툰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은 뒤에 의황제 성종(義皇帝成宗)으로 추존되었다.

 

  도르곤이 갑자기 죽자, 제국 내에는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났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그가 지휘하던 백기단(白旗團:팔기군의 일부) 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후 정치권의 내부 변화로, 이전에 도르곤의 정적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순치제는 1651년 3월 도르곤을 제위 찬탈의 뜻을 품었던 반역자로 선언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1733년 건륭제(乾隆帝) 때에, 비로소 새 제국 수립에 기여한 도르곤의 공로가 추인되어, 방치되었던 그의 무덤이 다시 복원되고, 마침내 완전하게 복권되었다.

 

 

 

M. Gimm 글 | 趙允卿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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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해관을 넘은 도르곤(多爾袞)

 

 

                                                                      집필자 : shyisna  (2004-11-08 18:27)

  근래에 흔히 보는 화려한 청(淸)나라의 의상들이 활보하는 중국 근대 사극을 보다보면, 참 중국이 저런 1/10도 안되는 이민족(異民族)에게 300여년 통치 당하는 거 보면 오늘날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우습다. 변발(辮髮)한다고 머리까지 슥 밀어버리고 긴 호복(胡服)을 입으면서 연기하는 중국 한족(漢族)의 배우들은, 저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 1612~1678.10.2)를 씹어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산하이관(山海關)은 요동총병(遼東總兵)이 진주하면서, 만주에서 수도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는 매우 중요한 요지 중의 요지였다. 이곳을 지키는 자는 그만큼 나라의 신뢰가 깊고 높은 지위를 가진 가문출신에서 나왔다. 오삼계도 진저우(錦州)총병관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 덕에 출세해서 이
산해관을 지키는 중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만주는 만주족(滿洲族)이 흥궐하여 처음에 후금(金)을 세우더니 이제는 청(淸)이라 이름을 고치고, 산해관 위쪽의 영토는 모조리 점령해 버린 상태였다. 이에
전전긍긍하던 명나라는 이 산해관을 보루로써 열심히 지키며 팽팽한 대치상태를 만든다.

  명나라가 약간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호전적인 황제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가 죽어, 그의 어린 아들인 세조 순치제(世祖 順治帝)가 즉위한 터라, 어린아이가 금방 넘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더구나 어린 황제의 섭정(攝政)이 두명이라 서로 권력싸움에 몰두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발흥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건국자는
누르하치[奴兒哈赤(노아합적), 1559~1626.9.30]로서 성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애신각라)], 시호는 처음에 무황제(武皇帝)였는데, 나중에 중원을 장악한 후 고쳐서 고황제(高皇帝)로 묘호는 태조(太祖)로 한, 만주족의 신과도 같은 존재다. 누르하치는 전쟁 중에 부상으로 전사 하다시피 했고, 그의 8자인 태종(太宗 文皇帝 1592~1643)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는 대단히 용맹한 인물이었다. 후방에서 골치를 아프게하는 조선을 먼저 쓸어버리고 항복을 받아낸 후, 이제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덜커덕 죽게 되자 결국 어린 아들을 두고 고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역할을 해 줄 섭정(攝政)을 지명하게 된다.

  고대 주나라의 무왕이 요절하자 그의 어린아들 성왕을 보좌한 것은 주공과 소공이라는 숙부들이었는데, 그들은 사심 없이 성왕을 도와 천년사직을 보존한 고대 중국의 성인들이라 불린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근친이, 사심 없이 어린 황제를 돕는다는 건 그다지 중국 역사에 거의 전무했다. 다들 자신의 욕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섭정 중 한명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 Dorgon, 1612~1650]은 태종이 신임할 만한 동생 중 하나였다. 그는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었고, 청나라 건국에 공을 세워 예친왕에 책봉되었는데, 아무리 황제의 형제라도 파격적으로 친왕(親王)이 된 것은 이레적이었다.

  누르하치는 자식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16명의 어머니가 다른 아들들이 있었고, 후계자 태종은 8남 이었다. 만주족은 한족처럼 무조건 장남이 승계 받는 풍습보다는 능력 있는 자가 선출되는 관례가 있어, 친척들이 모여 훌륭한 이를 추천하여 그 부하가 되는 것이 만주족을 강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주족은 황제의 형제라고 해서 무조건 작위를 주는 한족과는 달리, 철저히 능력본위였다. 그 예를 누르하치 자식에서 보면,
장자 저영(禇英)은 죄를 지어 바로 사사 당했고, 차자 대선(代善)은 예친왕(睿親王), 3남 아배(阿拜)와 4남 탕고대(湯古代) 그리고 6남 탑배(塔拜), 십자 파포해(巴布海)는 별다른 공이 없다고 진국장군(鎭國將軍), 5자 망고이태(莽古爾泰)와 7자 아파태(阿巴泰) 그리고 10자 덕격류(德格類)는 패륵(貝勒), 9자 파포태(巴布泰)는 진국공(鎭國公), 12자 아제격(阿濟格)은 영친왕(英親王), 13자 뢰모포(賴慕布)는 봉은장군(奉恩將軍) 밖에 주지 않았고, 15자 다택(多澤)은 예친왕(豫親王), 16 자 비탕과(費湯果)는 역모로 귀양 가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즉, 공이 있는 자는 차남과 12남, 14남, 15남 만이 친왕의 대우를 받았을 뿐, 나머지는 일반 신하와 마찬가지였다는 셈이다.

  과거 진(晉)나라 무제 사마염(武帝 司馬炎)은 황제가 되자, 팔촌까지 제후왕에 봉함으로써 나중엔 그 사마씨 자손들 모두가 제후왕(諸侯王)이 되자, 서로 황제가 되겠다고 싸우다 “팔왕(八王)의 난”까지 벌려 천하를 잃어버린 어이없는 한족의 예와는 달리, 만주족은 그런 분야에선 질적으로 달랐다.

 

  태종도 황제가 되면서 형제들 중에 가장 능력 있는 14자인 예친왕을 어린 아들의 섭정으로 지명한 걸 보면, 이 만주족의 황제들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다.

  친왕(親王)이란 황제의 아들들이나 손자에게 주는 직위로 황제 다음의 최고 작위였고, 만주족의 독특한 작위인 패륵(貝勒)은 만주족 전통인 왕자들의 경칭으로, 일종의 작위였지만 보통 친왕 아랫 직위를 뜻했다.

  1643년 태종이 51세로 죽으면서, 11명의 아들들 가운데 어머니의 신분이 가장 높은 9 번째 아들 복림(福臨)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이가 세조 순치제인데, 즉위하면서 태종의 유언으로 다른 사촌형제인 정친왕(鄭親王)과 함께 보정왕(輔政王)으로서 섭정하는데, 이것은 고대 주공과 소공의 예를 본 따 실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친동생인 예친왕이 점점 실력을 키워 나갔고, 나중엔 혼자 실력자가 된다. 섭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오삼계가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죽이려고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돕는다는 명목으로 산해관을 넘는 대작전을 실행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명나라의 의종(毅宗)은 이자성의 반란에 스스로 자결해버리고
자금성은 이자성의 손에 들어갔는데, 이 이자성의 부하들이 공을 나누면서 오삼계의 애첩까지 손에 넣으면서 오삼계는 분노하게 된다.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는 이 분노를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해 복수극을 펼치고자 베이징으로 진격하는데, 이 한 개인의 여자에 대한 욕심으로 청나라는 천해의 요새 산해관을 아무런 댓가 없이 넘어서게 되고, 드디어 운명적인 중원의 정복을 이루게 된다.

  예친왕은 고대의 주공처럼 사심없이 일을 처리하는데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고, 강력한 만주의 8기(八騎)를 앞세워 주인 없는 천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의 공로는 청나라를 중흥시킨 것보다 더 컸다.

  그 공로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게 되지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7년간의 섭정시간을 마무리 하지만, 이 짧은 7년이 청나라가 중국을 300여 년간 통치하는 기반이 된다.

  예친왕이 죽자 마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은 마구 그를 음해하고 공을 내리 깎아 버리는데, 예친왕을 모함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귀가 얇은 세조는 당장 모든 관직을 빼앗아 버리고 종실(宗室)의 이름에서 빼버리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데, 예친왕은 자녀 없이 죽어 후손이 없었다.

  이렇게 죽자마자 그가 청나라에 바친 공로는 사라져 버리지만, 나중에 성군(聖君)으로 이름 높던 손자뻘인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는 다이곤이 이용한 오삼계의 난을 평정한 후, 청나라의 건국에 공이 가장 큰 사람은 다이곤이라 칭송하였고, 성조의 손자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가 비로소 왕작을 회복시켜 주고, 시호를 충(忠)이라 하고 태묘(太廟)에 배향하면서 성종의황제(成宗義皇帝)라고 추존(追尊)해 준다.


 

  그리고 복권후 30여년이 지나서 은전을 베푸는데, 예친왕이 자식 없이 죽었기에 형인 다댁(多澤)의 5자 다이박(多爾博)을 양자(養子)로 삼아 ,그 자손들이 예친왕의 봉작을 세습하도록 조치해 주는데, 그 첫 사례로 다이박의 차남 소이발(蘇爾發)이 세습 예친왕이 되었다.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데는 이 예친왕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당시 황제인 순치제는 너무 어려 집정할 상태가 못 되었고, 다른 한족 황실의 예와는 달리, 예친왕은 숙부로서 사심 없이 황제를 도와, 베이징을 점령하여 도읍을 옮겨, 훗날의 대청제국을 이루어놓은 실질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청나라의 주공(周公)이 아닐까?

  원래 인간의 일반적 감성으로는, 황제의 지친(至親)이 권력을 지니면 간단히 그 권력으로 스스로가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 예외가 고대 주나라의 주공으로,
공자가 칭송하여 성인이라 우러러 보았고, 뒷날 역사서에서 주공의 예를 찾아 비교되는 사람은 역사에서 대단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도 초기 이런 예친왕 도르곤처럼 고대 주공과 같은 인물이 나와, 결국 중국 역사상 초강대국인 대청제국을 이루어 주었고, 이 나라를 통치한 만주족 출신의 황제들은 다른 수 백명의 한족 출신황제보다도 더 뛰어난 위대성을 보여주었다고, 한족출신인 중국인들조차도 솔직히 평가내리곤 한단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중국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도 역사를 참조하여 작품을 쓰는데, '만주족 출신 황제가 자신과 같은 한족 출신의 황제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에 대해 항상 느끼고 있다’라고 인터뷰한 글을 보면서, 중국 무협소설만 읽을게 아니라, 만주족의 천하경영에 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효장(孝庄)은 도르곤(多爾袞, 뚜얼군)에게 개가하였는지?

 

 

                                                             출처 블로그 > 하늘지기의 解腸記!!
                                                             원본 http://blog.naver.com/hanlzgi/40033188849

 

  효장은 몽고족인 보얼지지터씨로서 청태종의 비(妃)이고, 순치제의 모친이며, 강희제의 조모가 된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황제위에 오른 순치제와 강희제를 도와, 청나라의 중원진출초기에 나라의 틀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세운다.

 

  청나라때 권력을 움켜줬던 태후로는 청초의 효장과 청말의 자희(서태후)를 꼽는데, 효장은 자희와는 달리, 직접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수렴첨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관련하여 해결되지 않는 하나의 의문은, 그녀가 청태종의 동생이자 순치제가 어릴 때 섭정왕을 지낸 도르곤에게 재가(소위 太后下嫁)하였느냐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효장이 도르곤에게 재가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몇가지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황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정치적인 혼인이 필요했다. 청태종이 죽을 때 효장은 32세였고, 6세에 불과한 아들 복림(순치제)이 등극하였다. 하나는 30여세의 과부이고, 하나는 6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당시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던 사람은 예친왕 도르곤이었다. 그는 병사를 장악하고 있었고, 심지어 황제의 옥새까지도 도르곤의 예왕부로 가져가서 사용하고 있었다. 어린 황제는 언제든지 폐위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효장이 순치제의 황제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청태종의 동생인 도르곤에게 시집갔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둘째,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은 만주족의 관습이었다. 옛날 만주족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서모를 취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형제지간, 숙질지간에 처첩을 서로 취하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하에서 생각한다면, 젊어서 과부가 된 효장이 젊고 뛰어난 도르곤과 결합한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셋째, 도르곤의 "황부(皇父)"라는 호칭. 태후하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근거중에 하나는 순치황제때 도르곤은 공개적으로 황제의 부친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도르곤의 칭호는 기록상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에서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으로, 다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으로 변화했다. 황제의 모친이 시집오지 않고서는, 도르곤이 황제의 부친을 자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도르곤의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이, 바로 태후와 도르곤의 혼인을 숨기다가 공개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넷째, 황제유지에 나와 있는 글에서 나타나는 사실. 순치17년(1660년) 12월 24일 유모 이씨가 병으로 죽자 순치는 예부에 유지를 내리는데, 그 안에 이런 말이 있다. "예친왕의 섭정때, 황태후와 짐은 궁을 나누어 거주했다. 매번 몇달이 되어서야 겨우 한번 얼굴을 보았다."는 문구가 있다. 어릴 때 순치제는 모친인 효장과 다른 궁에 살수밖에 없었고, 몇달에 한번 얼굴을 보았으며, 효장도 마음대로 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르곤을 뺀다면, 그 이유를 생각하기 힘들 것같다.

 

다섯째, 풍수장에 관한 사실. 청나라의 장례제도에 따르면, 황후와 비빈은 모두 황제와 합장하였다. 그런데, 효장은 심양에 묻혀있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존화에 있는 청동릉에서도 풍수장(담장) 바깥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이유를 그녀가 도르곤에게 개가하였기 때문에, 청태종과 합장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강희제 때 죽었는데, 그녀는 청태종과 합장하지 말고, 청동릉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강희제는 선례가 없어 이를 처리하지 않고, 효장의 시신을 38년간 동릉의 잠안전에 모셔두게 된다. 결국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가 처리하는데, 풍수장의 바깥에 그녀를 묻고 만다. 청동릉에 잠든 5명의 황제, 14명의 황후, 136명의 비빈은 모두 풍수장(담장) 안에 묻혀 있는데, 효장황태후만 유일하게 풍수장의 바깥에 묻혀 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여섯째, 어떤 사람은 "태후하가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1946년 10월 유문흥이 쓴 <<청초황부섭정왕도르곤기거주발>>에 보면, 선통원년(1909년), 그의 부친인 유계서는 내각시독학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명을 받아 내각창고의 기록을 정리하다가 "순치때의 태후하가황부섭정왕조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곱째, 장황언의 시. 남명정권의 관리를 지낸 장황언이 건이궁사(建夷宮詞) 10수를 지었는데, 그 중의 두 수에 태후의 결혼에 관련된 내용을 쓰고 있다.

 

 

 

 

 

 

                            효장문(孝庄文) 태후


  순치 황제가 건릉하기 시작한 北京 근교 淸 東陵은, 그 자신과 그의 아들 강희, 손자 건륭의 황릉이 있다. 청말의 함풍황제와 그의 두 부인 동태후와 서태후,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의 능도 청 동릉에 있다. 모두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가 안치되어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 여걸 황후, 황태후가 많은데, 淸朝의 경우 효장문 태후와 서태후 두 사람이 여걸 황태후로 손꼽힌다.

 

  효장문 태후의 능은 청 동릉에 있는 昭西陵이다. 그의 남편은 청의 2대 황제 황타이지(皇太極)이므로, 원칙대로라면 그의 남편 황타이지 陵(심양에 있는 北陵으로 정식 명칭은 昭陵)에 같이 합장되어야 한다. 昭西陵은 昭陵의 서쪽 즉 심양에서 서쪽 分陵의 의미가 있다.

 

  청초의 효장문 태후는 청말의 서태후와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센스와 용기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淸의 초기 기운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황타이지의 총애를 받은 몽고귀족 출신인 효장문 태후에게는, 복림(福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타이지가 오래 살았다면, 총비의 아들 복림이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고, 황위를 이어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황타이지가 이러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죽는다.

 

  황타이지가 죽자, 황타이지의 큰아들 호격과 황타이지의 동생 다얼콘 사이에 황위 쟁탈이 시작된다. 두 세력이 우열을 가릴수 없어, 국가가 분단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때 효장문 태후가 정치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아들 복림을 황위를 계승토록하는 절충안을 낸다.

 

  복림이라는 대안에 양 세력이 설득되어, 결굴 6살의 어린아이 복림이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 이 어린 황제가 순치 황제이다.

 

  숙부와 형님의 양보로 어부지리를 얻은 복림이 황제가 되었지만, 숙부 다얼콘은 야심가였다. 효장문 태후는 아들 복림의 황위를 다시 뺏을지도 모르는 다얼콘과 결혼, 그를 섭정왕이 되게 하여 아들을 지킨다.

 

 


父奪子位


  섭정왕 다얼콘은 오삼계의 항복을 받아 北京으로 진격(1644.4), 北京을 청의 수도로 정한다.(1644.10)  北京으로 들어온 다얼콘의 본심이 들어난다. 복림을 없애고, 자신 스스로가 황제가 되고자 한 것이다.

 

  효장문 태후는 다얼콘의 야심을 꺾기 위해, 복림이 이미 다얼콘의 아들이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아들의 황위를 아버지가 빼앗았다(父奪子位)는 오명보다는, 황제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순리라면서 복림의 황위를 끝까지 지켜줄 것을 호소한다.

 

  그후 섭정왕 다얼콘이 사냥터에서 사고로 죽게 된다. 당시 14세의 순치황제는 어머니 효장문 태후의 도움으로 재빠르게 친정체제로 전환, 황실의 기반을 구축한다.

 

  효장문 태후는 자신이 죽어 묻힐 盛京(심양)의 昭陵을 생각했다.

이미 시동생 다얼콘과 결혼하여 몸을 더럽힌 자신이, 옛날 남편 皇太極 옆에 묻힐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아꼈던 아들(순치) 옆에 묻히고자, 심양의 陵보다 淸 동릉을 택하였다.

 

  그후 효장문 태후는 아들(순치)을 도와, 明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데 힘쓴다. 아들 순치황제가 일찍 죽자, 8살 손자(강희)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생모가 없는 손자 강희의 교육도 맡는다.

 

  강희 황제가 청조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된 것도, 할머니 효장문 태후의 숨은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장문 태후가 청 東陵에 들어간 것은, 아들 순치보다 27년이나 지나서였다.

 

 

                                                                                                  by코리아닷컴 이룸(e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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