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사랑]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1.10 22:42
- 한국인에게 새벽은 남다른 시각이다. 꼭 100년 전인 1907년 1월 6일부터 10일간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사경회는 길선주(吉善宙) 장로의 회개를 계기로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했다. 한국인 최초의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그는 젊은 시절 선교(仙敎)에 심취해 여러 해 동안 입산수도하며 새벽 기도깨나 했던 인물이다. 선교사 데이비스는 ‘선교사’(The Missionary·1910년)에서 ‘평양에서는 길 목사와 장로 한 사람이 교회당에 와서 새벽 기도를 드리곤 했다’며 한국인 특유의 새벽 기도를 기독교와 접맥시킨 인물로 길선주를 지목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평양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 창전(創前)교회에서 열린 각 교파 합동기도회에서 선교사 하디(Hardie·한국명 하리영·河鯉泳)의 회개가 씨앗을 뿌렸다고 보고 있다. 자신의 선교가 효과가 없었던 이유가 한국인에 대한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과 자만심에 있었다는 회개였다. 김영희(金永羲)는 ‘좌옹 윤치호 선생약전’(佐翁尹致昊先生略傳·1934년)에서 선교사들의 우월 의식을 ‘양대인(洋大人)’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선교사들의 ‘양대인 의식’은 가난하지만 자부심이 강한 한국 민족에게 반발을 샀는데, 하디가 이를 회개하면서 선교사들 사이에 회개의 물결이 일었다. 1907년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형제들을 질시했으며 방위량(Blair) 선교사를 미워했다”고 자복하자 다른 교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고백했고, 회개 대열이 줄을 이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축첩(蓄妾), 조혼(早婚), 음주, 흡연’ 등을 금하는 기독교 사회윤리관 정립으로 발전했다. 곽안전(郭安全)은 ‘한국교회사’에서 이를 계기로 그간 여러 손실을 입혔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는 운동이 일어났다고 적는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한국 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현재 개신교계에서 이는 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 움직임도 그간 교회가 물적·양적 팽창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거울삼아 한국 사회의 도덕성 향상에 기여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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