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한나라의 역적이자 간신으로 비판받는가 하면,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지혜가 남다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조는 그처럼 엇갈리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조조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다양한 면모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문학가로서의 조조
조조는 당대 최고 수준의 문학가였다. 그는 특히 악부시라 불리는 시문학 장르에서 뛰어났고, 한 구절이 다섯 글자로 되어 있는 오언시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정사 삼국지에는 조조가 밖으로는 무공을 크게 이루고 안으로는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조가 활동한 시기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연호를 딴 건안 시대(196-220)이다. 이에 따라 조조와 그 아들 조비, 조식 삼부자가 건안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고 평가한다. 건안 문학의 특징은 문장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며, 전란의 비참함을 노래하거나, 사람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때로는 흥겨운 감정을 담기도 한다. 인간적인 고뇌와 정감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조조의 '단가행'의 일부를 보면 이렇다. '술을 마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인생살이 얼마나 되는가? 아침이슬과 같을 것이다. 지난날 많은 고통이 있었구나.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 잊을 길이 없구나. 어떻게 근심을 풀 수 있을까? 오직 술뿐이네.'
둔전제를 처음 시행한 조조
조조는 문학, 사상, 조조는 중국 역사상 둔전제라는 제도를 처음 시행한 인물로 이름이 높다. 후한 말기에는 오랜 전란으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이 유랑하는 등 농업이 피폐해졌다. 조조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일정 규모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농기구, 씨앗, 식량 등을 국가가 빌려주어 안정적으로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둔전관을 파견하여 농사를 지도, 감시하고 수확한 농작물의 50% 이상을 국가에 바치도록 했다.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의 특징은 이른바 병농일치에 있다. 황폐해진 농토를 군인들로 하여금 개발, 경작하게 하여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면서 유사시에서는 전장에 나가 싸우게 했던 것이다.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 아래에서는 농민이 곧 군인이자 군인이 곧 농민이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둔전제는 호족들이 대규모의 토지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했다.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군사비를 조달하면서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삼국 가운데 가장 강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만능 재주꾼 조조
정사 삼국지의 주석 부분에 따르면 조조는 '낮에는 군사전략을 궁리하고 밤에는 유교 경서를 읽으며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또한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시를 읊조리고 새로운 시가 나오면 음악에 맞추어 노래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조조가 대단한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조는 궁전 건물을 짓거나 기계 설비를 만들 때 직접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모두 훌륭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서예와 장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의 위서 무제기편을 보면, 조조가 손자병법 관련 문헌을 널리 수집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13편으로 엮은 것은 물론, 그것을 해설하는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한다. 조조가 정리, 해설한 손자병법을 위무주 손자병법, 즉 위나라의 무제인 조조의 손자병법이라 일컫는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손자병법도 바로 위무주 손자병법이다. 조조가 문학, 사상, 음악, 건축, 기계 제작, 병법 연구에 두루 능통했던 만능 재주꾼임을 알 수 있다.
조조의 인품
조조의 인품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주석을 단 배송지는 <조만전>이라는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인품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으며, 대화할 때는 늘 농담하는 투였고, 기분이 좋으면 크게 웃었으며, 머리를 요리 접시에 처박아 두건에 음식이 묻어 지저분해지곤 했다'고 한다. 단, <조만전>은 오나라 사람이 쓴 책이기 때문에 조조를 일부러 깎아 내리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조조의 이러한 경박함과 솔직함은 유교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좋지 않은 인품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거짓으로 위엄 있는 척 꾸미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성격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조조의 인품에 대한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실리를 추구한 조조와 법가 사상
도덕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고, 덕이 아니라 무력으로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옛 선비들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조조를 나쁜 인물로 보았다. 더구나 헌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조조는 한나라의 역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런 평가는 도덕 원칙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유학자들은 그런 조조를 결코 곱게 볼 수 없다. 실제로 조조는 210년에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하는 포고문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능력만 뛰어나면 좋다'고 했다. 조조의 이러한 태도는 공허한 명분보다는 구체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합리주의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유교가 아닌 법가 사상, 즉 정치에서 도덕을 제외시키는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에 따르면 조조는 '전국 시대의 법가 사상을 따랐다.'
조조의 출신 성분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한나라 건국 공신 조참의 후예이며, 환관이었던 할아버지 조등은 환관 최고의 관직을 지냈고, 그 양자인 조숭이 바로 조조의 아버지이다. 본래 하후씨 집안 사람이라는 설도 있는 조숭은 그 출신을 잘 알 수 없으나, 미천한 집안 사람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또한 조조가 조참의 후예라고는 하지만, 아버지 조숭이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직접적인 후예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버지 조숭은 태위 벼슬을 지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양아버지인 환관 조등이 거액의 뇌물로 벼슬자리를 사서 양아들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다른 성의 양자를 들이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다. 집안 혈통의 순수성을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환관은 아무리 그 벼슬이 높다해도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이었다. 조조는 환관 조등이 맞아들인 다른 성의 양자 조숭의 아들이다. 4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인 원소와 무척 대조적이다. 그런 원소가 조조와의 싸움에 앞서 진림에게 쓰도록 한 격문을 보면, 역시 조조 집안과 조조의 출신 성분을 꼬집어 비난하고 있다.
조조는 한나라의 역적인가?
조조는 동탁, 이각, 곽사 등의 위협 속에 허수아비 신세가 된 헌제를 구해냈다. 이를 두고 조조는 자신이 위태로운 한나라 황실을 구해낸 한나라의 충신이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조조는 동탁과 마찬가지로 헌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이름뿐인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사실상 한나라의 지배자가 된 조조지만 끝까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다. 220년 낙양에서 6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도, 조조는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신하로써 일생을 마쳤다.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조조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조조가 자신을 한나라의 충성스런 신하라고 생각했을까? 조조의 마음이야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알기 힘들지만, 조조는 4백년 가까이 이어 온 한나라 황실의 정통성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황제가 아니어도 사실상 황제나 마찬가지의 권력을 누렸다. 그런 조조로서는 한나라 황실을 수호하는 충신이라는 명분도 취하고 권력이라는 실리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비범한 인재 - 조조(曹操) |
<<삼국지>>에서 악역을 맡은 인물은 조조입니다. 등장인물을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분류하는 것은 결국 소설세계가 만든 일이지, 실제의 인물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겠지요. 진수는 조조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비범한 인물'이란 심상치 않은 인물, 혹은 규격화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100퍼센트 칭찬의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조조가 아직 무명시절이었을 때, 당시 인물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하는 허소라는 명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조는 이 허소에게 자신에 대한 인물평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허소는 "좋은 시절에는 좋은 신하가 될 것이고, 난세에는 간웅(姦雄)이 될 상이외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는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인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한서>><허소전>에 약간 나와 있지요. 즉 "조조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울 때는 간적(姦賊)이 되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간웅이 될 인물이다"로 기록되어 있어 미묘한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흔히 평범한 인물을 평하여 '독도 안되고 약도 안된다'라고 하는데, 조조의 경우는 독도 되고 약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조는 한 번 보고서도 이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위나라 왕이 되었을 때 흉노로부터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키가 작고 자기의 용모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다운 신하를 골라 대역으로 세우고 자기는 호위하는 사람으로 분장하여 칼을 들고 옥좌의 뒤에 물러나 있었습니다. 접견이 끝나고 사신이 물러가자 조조는 정보계의 부하를 시켜 사신에게 묻게 하였습니다. "위왕의 인산은 어떠했습니까?" 사신이 대답하였습니다. "위왕의 위세는 가히 늠름하고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옥좌 뒤에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가히 영웅의 형상이었으므로 좀 이상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흉노에 그러한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것이 두려워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세설신어>>) 이런 일화를 보더라도 조조는 영웅적 요소와 간웅적 요소 둘 다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불리우게 된 연유입니다.
속임수의 귀재
현대의 경영자도 빈주먹으로 출발한 창업자는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박력을 띕니다. 조조도 그런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난세였던 한 왕조 말기에 한 환관의 집에서 태어난 조조는 별 자본도 없이 군웅할거의 국면에 끼여들게 되었습니다. 거의 무(無)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었지요. 그런 그가 군웅간의 쟁패전에서 승리하여 순식간에 이름을 떨치면서 지금의 황하유역 근처에 해당하는 지역에 확고한 기반을 쌓아 위왕조의 기초를 닦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권모술수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수도 "계획을 짠 다음에 권모술수를 써서 천하의 대세를 인도해 나갔다"라고 평했던 것입니다. 권모나 술수는 거의 같은 뜻으로, 전쟁에 임하여 임기응변적인 전술을 펴는 것으로부터 정치전략에까지 능수능란했다고 풀이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권모술수라는 것은 깨끗하고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나쁘고 무자비한 요소가 늘 따라다니는 말입니다. 특히 조조의 경우에는 거의 속임수에 가깝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 두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언젠가 조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작전을 하던 중에 군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군량이 없으면 작전 행동을 중지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조조는 몰래 군량계의 장교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됫박을 작게 한다면 어쩌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라고 장교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 하고 조조는 명하였습니다. 군량을 되던 됫박은 곧 작은 되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불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대장이 우리들을 속이고 있다는군....." 하는 소문이 돌게 되었지요. 그렇게 되니 조조는 또 군량계의 장교를 불렀습니다. "병사들의 노기를 진정시키려면 할 수 없이 자네가 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도저히 다른 해결책이 없는걸....." 하고 말하고 목을 베어 진중에다 걸어놓고는 다음과 같이 둘러댔습니다. "이 자는 작은 됫박을 써서 군량을 훔친 죄목으로 엄벌에 처했노라." 그러나 곧 병사의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일화입니다. 그렇지만 억울하게 죽은 군량계 장교는 조조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야기는 뒷맛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요.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조는 만년에 위왕조의 승상에 올라 한왕조의 실권을 한 손에 잡을 수 있었습니다. 천자인 헌제는 그런 조조에게 목덜미를 잡힌 꼴이 되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헌제를 모시던 신하들 가운데는 조조의 전횡을 미워하는 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밤 모의를 한 끝에 병사들을 시켜 조조의 집에 불을 지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어이없이 진압되고 말았고 관계자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노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궁중의 고관들을 모조리 잡아놓고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습니다. "사건이 나던 날 밤 불을 끄려고 달려온 자는 좌측에 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우측에 서도록 하라." 그러자 가련하게도 고관들은 불을 끄러 달려왔다고 하면 화를 당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는 전원이 좌측에 서게 되었습니다. "불 끄는 것을 도운 자들이야말로 진짜 역적이다." 조조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비상한 사람'다운 수법이라고 아니 할 수 없지요. 조조는 이러한 술수를 사용하여 난세에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 륵
조조가 수행했던 전쟁방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정사<<삼국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하고 작전을 이행할 때는 대개는 손자의 병법에 의지하여, 부대별로 기를 만들어, 적을 속임으로써 승리하였는데, 그 전술적인 변화는 마치 신과 같았다. .... 따라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겼는데, 군인에게 이처럼 행운이 따르는 승리는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용병은 손오의 병법에 의지했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시행한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전쟁을 잘 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운의 승리'란 우연히 이긴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 기사를 자세히 보면 약간은 지나치게 칭찬한 감이 있지 않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언제나 승리하는 장군은 아니었고, 몇번인가는 쓰디쓴 패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조의 훌륭함은 그럼 패전의 체험을 잘 살려 두번 다시 같은식으로 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조조가 난세에 크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조는 진두지휘형의 장군이었는데, 그 지휘방법은 변화무쌍하여 호기를 잡기만 하면 단숨에 이를 이용하여 공격하였고, 형세가 불리하다고 느끼면 결코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조조의 판단은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중의 영유권을 두고 유비와 싸울때, 조조가 대군을 준비하여 한중으로 쳐들어가자 유비도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수비를 굳게하니 쉽게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 유명한 조조도 할 수 없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지요. 이럴때 보통 장군이라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시간만 끄는 소모전으로 말려들어갈 테지만 조조는 이럴때 단념도 빠르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부하 한 사람이 지시를 받으로 막사로 들어오자, 마침 밥상을 받고 있던 조조가 닭갈비(鷄肋)를 집어들고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닭갈비라, 닭갈비라." 이 말을 들은 부관 양수는 퇴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수에게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계륵이란 버리면 아까우나 먹어도 별로 먹을 것이 없다는 말로, 이는 여기 한중을 두고 한 말이다. 왕은 이미 돌아가려는 뜻을 굳힌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조조는 한중을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군대를 무사리 귀환시킬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계륵'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것이며, 이는 바로 조조의 지휘솜씨를 비유하는 말로 형세가 불리하면 그 만큼 빨리 포기하는 조조의 결단력을 대변해주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의 결단력은 바로 패전의 체험에서 배웠던 자세이며, 과연 조조다운 결단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출처 : 삼국지닷컴 (천상_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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