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7.01.0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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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징비록(懲毖錄)’에 명나라 일각에서 조선을 왜적의 앞잡이로 의심한다고 썼을 정도였다. 6·25 때 북한군이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과 견줄 만한 속도였다. 임란 때의 도원수 신립(申砬)이나 6·25 때의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이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는 질문에 “아무 걱정 없다”고 큰소리친 것까지 빼닮았다.
임란 때 조선군이 힘 한번 못 쓰고 무너진 데는 지배층의 무능 외에 병무제도의 결함이 큰 몫을 했다. 조선은 원래 16세부터 60세까지의 정남(丁男)은 모두 병역의무가 있는 개병제(皆兵制) 국가였다. 한 명이 정병(正兵)으로서 군복무를 하면 두 명은 봉족(奉足)으로서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평화시대가 지속되자 각 관아에서는 군복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았다. 이를 방군수포(放軍收布)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군역 대신 포(布), 즉 돈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불법이었지만 각 관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하면서 관례가 됐다. 그러자 국가에서 이를 입법화한 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다. 병역의무가 군포 납부로 대체된 것이다.
문제는 양반 사대부가 그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군역(軍役)은 상민들만의 천역(賤役)이 됐다. 로마의 지배층이 17세만 되면 의무적으로 입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양반들도 군포를 내자는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등장했지만 “어찌 상놈들처럼 천역에 종사하겠는가”라는 반대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이런 군대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병역을 천역처럼 여기는 발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회 안전의 적신호다. 젊은 청춘의 희생으로 안전이 유지되는 징병제 국가에서 병역은 성역(聖役)이어야 한다. 병역기간 단축보다 시급한 것이 전역 후 일자리가 많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20대 90%가 백수라는 ‘이구백 사회’에 몇 달 일찍 복귀시키는 것이 그리 시급한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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