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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콜 총리’의 정상회담

영국신사77 2007. 1. 6. 09:41

                [특파원 칼럼] ‘콜 총리’의 정상회담

 

최보식 베를린특파원 congchi@chosun.com
입력 : 2007.01.04 22:39 / 수정 : 2007.01.04 23:28

    • ▲최보식 베를린특파원
    • 국내 여권 인사들이 교대로 등장해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한다. 새해 벽두에 이러니 올해는 뭔가 돼도 될 성싶다. 야권에서는 “대선용(大選用) 쇼”라고 흥분하지만, 그런 심증은 있으나, 오호(嗚呼) 대국적 입장을 견지하자.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총리도 1987년 9월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당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초 콜 총리는 호네커와 만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정상회담은 그 독재자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는 것처럼 되어, 그 속의 동독 주민들을 더욱 절망에 빠뜨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 괴로움을 이렇게 회고했다. “호네커와 내가 의장대 사열을 하는 모습을 보거나, 총리 관저 앞에서 동독 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날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갔는지를….”

      요즘은 정상회담을 은밀히 사거나 구걸하지만, 당시 그는 독재자와의 회담을 ‘내키지 않으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을 더 확대하고, 동독에서 탄압받는 정치범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서독은 수십억 마르크의 차관을 해줄 때마다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정상회담이 열린 그해만 서독을 방문한 동독인이 500여만명.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었다. 더 이상 “베를린 장벽은 제국주의 침략에서 우리 인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동독 정권의 선전 공세가 주민들에게 먹혀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독재자는 자기 자리에서 결코 물러나려 하지 않겠지만 개혁 바람이 불면 그 자리를 지키기 힘들 것”으로 내다볼 줄 알았다.

      당시 회담 과정에서의 쟁점은 정상 연설을 동서독에 똑같이 생중계하는 것이었다. 동독은 ‘여과 없는’ 생중계는 피하려 했다. 서독은 이것이 안 받아들여지면 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통첩했고, 콜 총리는 직접 동독 주민을 상대로 연설할 수 있었다. “모든 독일 국민들이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독일 통일과 자유를 완성할 책임이 있다는 기본법 전문(前文)에 대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며….” 자유를 위한 동독 주민들의 투쟁은 혼자가 아니며 곁에는 서독 정부가 늘 있다는 걸 알리는 메시지였다.

      현실에서 동독 주민들이 국경을 탈주해, 우리 북한 주민들이 죽음의 경계선을 넘었듯이, 이웃나라의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 있는 서독대사관 담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들 어느 한 사람도 거리로 내몰리지 않았다. 동독 정권이 “주권 문제에 간섭 말고 빨리 내보내라”고 항의했을 때도, 그는 후퇴하지 않았다. “독일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이들의 운명에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물론 그는 ‘호네커 서기장’에게 동조했던 서독 내부의 정치인과 지식인, 대학생들로부터 셀 수 없이 공격받았다.

      1989년 10월 동독이 ‘공산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축제’를 벌이자, 이날을 ‘민족 경악의 날’로 선포한 그는 사태의 ‘본질’을 얘기했다. “공산당 지도부가 횃불 행진과 군사퍼레이드를 펼치는 동안에도, 동독 감옥은 모두 초만원을 이루고 난민사태는 끊일 줄 모른다. 권위주의 체제는 안으로는 억압을 통해, 밖으로는 문을 걸어 잠가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연설 한 달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비록 대선의 해이지만, 우리 대통령이 콜 총리의 마음으로 준비되어 있다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옳다. 과연 누가 의심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