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필리포스2세 (Philippos Ⅱ

영국신사77 2006. 9. 4. 16:38
         필리포스2세 (Philippos Ⅱ (영)Philip Ⅱ.

 

                            별칭은 Philip of Macedon. BC 382~336 )

 



  마케도니아의 제18대 왕(BC 359~336 재위).

   국내의 평화를 회복하고 BC 339년에 군사적·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으로써,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초기생애와 왕위 등극

   필리포스는 아민타스 3세의 셋째 아들이었다. 소년시절에 그는 형들인 알렉산드로스 2세와 페르디카스 3세가 각기 몇 년 간 통치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이 붕괴해가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의 형들은 지방 봉건제후들의 불복종과 강력한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의 간섭, 서북쪽 변방의 일리리아인들의 침공 등을 막아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포스 자신은 아테네와 더불어, 당대(BC 370~360)의 주도적 도시국가인 테베에서 얼마간 인질로 지냈다. 테베에서는 그당시까지 그리스 장군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전술가로 꼽히던 에파미논다스가 그리스 최강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었다. 테베에 있던 시기에, 아마도 필리포스는 가장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왔을 때, 형 페르디카스는 그가 벌써 군대의 지휘를 맡을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을 이내 알았다.

BC 359년에 페르디카스가 일리리아인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면서 ,뜻하지 않게 필리포스가 2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일리리아인들은 포위할 준비를 했다. 북방에서는 파이오니아인들이 쳐들어왔고, 외세의 지원을 받는 2명의 인물이 왕군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위기를 맞이하여 필리포스는 현명하게 우선순위를 가려, 위험한 이웃나라들을 돈을 주어 달래는 한편, 조약을 맺어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 양보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시간을, 군사 준비에 이용했다. 나중에 페르시아까지 정복한 그의 군대는 그의 재위기간 내내 발전을 거듭했지만 결정적인 신무기, 즉 '사리사'(그리스인이 보통 쓰는 창보다 반 이상 더 긴 창)와 전술, 훈련의 혁신은 그 첫해에 이룩된 성과인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의 팽창

   BC 358년에 파이오니아를 침공했으며 일리리아인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미 원숙한 전쟁의 기량이 드러났다.

 

  다음 해인 BC 357년 25세 때, 그는 이피로스의 몰로시아인 공주 올림피아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서부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제 그는 동부 변경을 안정시키고, 트라키아로 진출하는 전략적 열쇠인 암피폴리스를 재점령하기 위해, 아테네와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BC 356년에 서부 트라키아의 그레니데스(그가 필리피라고 개칭)를 점령했다. 이곳은 팡가이온 산에서 새로 발견된 금은광을 캐기 위해 새로 생긴 도시였다. 이런 성과에 겁을 먹은 이웃나라들은 그에게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고, 아테네도 거기 참여했으나 동맹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아테네와 10년에 걸쳐 진행된 '암피폴리스 전쟁'은, 막강한 해군력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의 지상 군사력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심지어는 동맹국을 필리포스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지도 못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필리포스는 2차례에 걸쳐 트라키아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고 남부에서는 테살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 그가 그리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10년 동안, 중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를 포키아인들의 점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신성전쟁이 벌어졌고, 필리포스는 테베와 테살리아 도시 국가 동맹의 동맹자 자격으로 여기에 개입했다.

 

   BC 353년 테살리아에서 그는 지상전에서 유일하게 큰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지나친 자신감과 정찰 소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음해에 그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어 그 패배를 만회하고,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그의 남부 진출을 막기 위해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하게 만들었다.

                                테살리아 동맹의 주도

   필리포스는 힘의 사용을 거부하고, 협상에 의해 테르모필라이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6년 동안 기다렸다. 한편 테살리아의 승전 덕분에, 그는 테살리아 동맹의 의장(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BC 352경). 그리스의 동맹 내에서 외국인이 이런 직책을 맡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테살리아는 이후 150년 이상이나 마케도니아의 왕들에게 속박되었다.

   BC 348년에 필리포스는 올린토스를 점령하고 칼키디키를 합병하여, 올린토스인들과 그밖의 칼키디키인들을 노예로 만듦으로써, 여러 나라에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리스인들 자신도 때때로 작은 도시에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일이 있었지만, 올린토스는 큰 도시였다.

   필리포스의 적들은 마케도니아 야만족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과 경멸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고, 그의 편일 경우에도 그가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의 심장부로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의구심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방면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테살리아인과 테베인 등이 자력으로 끝낼 수 없었던 신성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아테네는 이를 방해할 수 없었으며, 필리포스의 다음 트라키아 원정(BC 346)이 주요한 곡물 수입원인 남부 러시아로의 행상로를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사실은, 아테네가 아니라 필리포스가 모든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의 장래 구상은, 그리스와 그밖의 원정에서 아테네를 패배한 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맹자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아테네와의 평화협정이 비준되기(BC 346) 전에도, 아테네의 정치평론가인  이소크라테스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의 주도적인 4대 도시국가를 화해시켜 통일적인 그리스 동맹을 결성시켜, 페르시아 침공전쟁을 벌이자고 권유했다 (→ 색인:이란사).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단계는, 필리포스가 개입하여 신성전쟁을 종결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델포이 인보동맹의 가맹국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테살리아인들과 그 종속국들의 투표에 힘입어 그는 동맹의 평의회를 장악했고, 필요에 따라 동맹을 정치적·외교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몇 해에 걸쳐(BC 346~343), 그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 그리스로 침투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여러 작은 도시의 정치가들 가운데 친구를 만들어두는 한편, 이따금 지원금이나 용병부대를 이용하여 지방의 소소한 분쟁에 개입했다.

   이 정책으로 몇몇의 적을 만들었으며, 아테네의 위대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 같은 인물들이 이 약점을 이용했다. 데모스테네스는 필리포스가 이제 아테네의 성장에 장애물이며, 아테네의 자유와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연설을 통해 아테네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전체 그리스인들에게도 그것을 그들 자신의 위험으로 깨닫게 만들려고 애썼다.

   이 시기에 필리포스는, 어떤 도발이 있더라도 작은 문제에서 아테네와 타협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에는 데모스테네스를 비롯한 마케도니아 반대파 인사들이 타협할 수 없는 상대라고 느끼게 되었다(BC 343~342).

   한편 인접한 일리리아인들에 대한 종주권을 재천명하고,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 뒤, BC 342년에 연이은 트라키아 원정을 몇 차례 벌여 2년 동안 그 대부분을 속주로 합병했으며, 마침내 도나우 강 삼각주의 남쪽 둑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트라키아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의 그리스 동맹국 중 페린토스(나중에 헤라클레아, 지금의 마르마라이렐리시)와 비잔티움의 두 도시가 자신들의 입장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들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2차례의 대규모 포위전은, 필리포스의 포병술과 관련무기의 발달을 보여주었다. 후에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서 그 무기들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BC 340년에 아테네의 선전포고로, 그는 남부 러시아로 이어지는 아테네의 곡물수송로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부당하게 체면을 깎이는 일 없이 2곳의 포위전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아테네는 이제 중부 그리스를 통해 영토침략을 당함으로써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다. 중부 그리스의 요충지는 테베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테베는 여태까지 필리포스의 동맹국이었으나 최근에 들어와 불만과 반발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성동맹에서 그는 테베에 도움을 주었으나, 새롭게 인보동맹에서는 주도권 경쟁자로 나섬으로써 이전의 공로가 모두 상쇄되었다. 그리스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그의 시도는, 테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었다.

                                      카이로네아의 승리

   BC 339년 11월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올 때, 필리포스는 테베인들이 동맹자를 영접하고 아티카로 진격할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테베인들은 오히려 데모스테네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스 동맹은 테베의 가맹으로 공고해졌으며, 필리포스는 당대의 한 웅변가가 거의 과장 없이 표현한 대로 '짧은 하루의 결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이로네아 전투는 유명한 승전으로, 이 전투에서 필리포스의 기병대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지휘관으로서 그의 진정한 재능은, 의도적인 퇴각작전을 사용해, 공격해오는 그리스군의 대열을 흐트러 뜨리고, 기병대가 타격할 지점을 만들어낸 데서 엿볼 수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국가들이 맺은 다양한 평화협정에 의해, 테베는 마케도니아 수비대의 주둔을 인정해야 했고, 민주주의 정부를 친마케도니아 정부로 교체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영토의 침략이나 민주정치에 대한 간섭을 겪지 않았으며,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해군을 양도하는 조치에 의해 무장해제되지 않았다.

   필리포스로서는 그리스 국가 중 유일하게 아테네로부터는, 중립이나 마지못한 동맹이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과거의 모든 경험에 비추어볼 때,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페르시아인들이 에게 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할 때만 승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첫째로 아테네의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다.

   테살리아 바깥의 그리스에서 필리포스는 자신의 인기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을 수가 없었다. 단지 부유층 사람들만이 그의 궁정과 그에게서 받은 후원에 이끌렸으며, 또한 몇몇 도시들(특히 스파르타의 이웃들)이 해묵은 적을 상대할 필요에서 기꺼이 마케도니아에 의지할 뿐이었다. 필리포스는 모든 그리스인을 페르시아 전쟁에 가담시킬 작정이었다.

   8년 전에 이미 이소크라테스가 그렇게 할 것을 권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고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필리포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자신과 서로에 대해 평화를 이룩하고, 해외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를 지원하도록 결속시켜나갔다.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치체제에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의 가정교사를 지낸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았다.

                                              코린트 동맹

   필리포스가 BC 337년에 창설한 이른바 코린트 동맹은, 전반적인 평화(코이네 에이레네)를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해 구상된 조직으로,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와 섬 지방의 모든 국가 대표들이 평화를 지키기로 서약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필리포스를 의장(헤게몬)으로 인정하기로 함으로써 출범했다.

   전반적인 평화는 그리스인들 자신의 정치적인 발명품으로, 지난 50년간 주도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구호로 몇 차례 이용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주도적인 그리스 국가들이 침략자들에 대항해 집단행동을 벌일 수 있는 효과적인 조직체를 창출해낼 만한 힘이나 상호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리포스는 모든 국가들의 대표로 이루어진 평의회(시네드리온)를 구성하고, 평화가 깨지거나 위협받는 경우에 필요한 행동을 숙고하고 결정할 권한을 그 기구에 부여했다. 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것을 집행할 책임은 의장인 필리포스에게 있었다. 국가들은 의장의 요구에 따라 병력이나 선박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으며, 그 할당량은 평의회에서 갖는 투표권에 따라 결정되었다.

   필리포스나 마케도니아는 평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지만, 의장이 마케도니아의 권력을 수중에 쥐고 이 조직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된 사실이었다. 우연하게도 이 조직체의 창립회의가 열린 코린트는, 마케도니아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3군데 그리스 도시 중 하나였으며,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했다.



                                                       말년

   그리스인들 자신이 이전에 해왔던 관행을 바탕으로 조직체를 건설한 것이나,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지나치게 연상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필리포스로서는 분명히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 정치가도, 그리스인도 아니고, 단지 마케도니아인의 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로서는(대부분의 현대사가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 문제의 해결을 평생 업적의 완성으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성과도 아니었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카이로네아 전투는 그리스인들에게 질서를 부여했으며, 그의 구상을 실현하자면 그들이 계속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BC 337년초에 코린트에서 열린 평의회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그의 계획을 듣고, 정식으로 그것을 승인했다. 다음해 초에 마케도니아 군대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필리포스는 이제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로 진출할 것이며 그리스인들이 함께 갈 것이었다.

   이처럼 찬란한 계획은, 어이없이 무산되었다. 섬세하고 유연하고 인내심 있고 꾀많은 외교가이며, 정치와 전쟁에서 시기선택의 천재이던 그가, 무책임하고 무능한 처신으로 자기 삶을 마감했다. 가까이에서 필리포스를 보았던 역사가 테오폼포스는, 그의 악행, 음주벽과 방탕한 생활, 마구잡이 사치에 대해 혹평을 했다.

   이 역사가가 유별나게 깐깐하고 청교도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필리포스의 성품에는 실제로 애매한 구석이 있었으며, 이는 가정생활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정략결혼들'은 대부분 화해할 가치가 있는 군주나 집단에 대한 친선의 상징으로 이루어졌으나, BC 338년 44살 때에 마케도니아 여인 클레오파트라와 치른 마지막 결혼은, 결국 왕비인 올림피아스와의 파국으로 이어졌다. 올림피아스는 왕세자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마케도니아를 떠나버렸다.

   올림피아스가 궁정에서 인기가 없었던데다 클레오파트라의 세력이 강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정치문제'가 후계권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필리포스는 애써 알렉산드로스와 화해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자신이 결코 그런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입게 될 피해의 정도를, 치명적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아시아 진출 준비가 상당히 진척되었을 무렵,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이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올림피아스의 동생)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필리포스는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 파우사니아스는 마케도니아의 젊은 귀족으로, 자신의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필리포스와 젊은 왕비의 삼촌 아틀라오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해명이었을 뿐, 파우사니아스 자신은 현장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거기에 한마디도 보탤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필리포스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된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를 의심했으며, 현대사가들도 대부분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생각을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몇 년 뒤에 발표된 〈정치학〉에서, 그는 이 사건을 예로 들어, 사적인 동기로 살해당한 군주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나 세상 사람들이 그 허위발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솔하고 섣부른 일이었을 것이다.



                                               평가

   위대한 마케도니아인들의 제일 가는 인물은, 그처럼 무가치하게 자기 삶을 마쳤다. 그에 관해 알려진 모든 사실은, 그리스의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자료들은, 그가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험난하고 보잘것없었던 과거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더 감명 깊은 이야기는 그가 자신의 왕국을 통일하고 팽창시키는 사업을 벌여나간 일일 것이다.

   그는 지방제후와 귀족, 호족과 그 가신들을 통제하여 위대한 마케도니아 민족을 이루어냈다. 이는 일찍이 유례 없는 세계 최강의 군대와, 전쟁과 외교에 의한 끊임없는 정복으로 상징된다. 그것을 통해 마케도니아는 20년가량의 기간에,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일리리아나 트라키아 원정이라든가, 테살리아, 에우보이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외교나 무력(또는 양자 모두)에 의해 벌인 간섭활동은, 겉보기에는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벌이는 전략가의 활약상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종종 전쟁보다 외교를, 최대의 성과보다 제한된 목표를, 위험이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선호했으며, 특히 또다른 기회가 항상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카이로네아에서 그가 결정전을 벌이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진정한 그리스 정책이, 일면 데모스테네스 덕분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실상 더 나중에도), 카이로네아 같은 전투를 치르지 않고는, 그리스를 제패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필리포스가 그리스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여, 많은 그리스인 명사들을 자기 궁정에 끌어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친그리스 경향이란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올린토스와 그리스 도시들은 그 점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는 고도한 정책적 이유로 아테네인들과 교제를 하기는 했지만, 평생 동안 아테네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은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무관심의 표현이다. 그의 도읍인 펠라는 오랫동안 위대한 학자들의 집결지이자 은신처였으며, 필리포스 치하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긴밀한 연락이 유지되었다. 테오폼포스가 영접받았고 이소크라테스가 초빙되었으며, 아테네 연극무대의 첫째 가는 배우들도 마케도니아에 모습을 나타냈다.
필리포스의 아버지 아민타스의 주치의를 아버지로 둔 아리스토텔레스는, 3~4년의 중요한 시기에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를 지냈다.

   필리포스는 이런 사람들과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자신이 학식이 있었다든가 지식인이었다는 이야기는 전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웅변은, 데모스테네스와 아이스키네스 같은 전문가들을 포함한 아테네인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천성적으로 쾌활하고 붙임성이 있었으며, 놀기를 즐겼다. 또한 술을 지나치게 많이, 자주 마시는 편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했을 때도, 그는 가슴을 찌르는 진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장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투 지휘관으로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맹장이었으며, 행동에 임해서는 사자같이 용감하게 싸웠다. 말년에는 오래된 흉터 때문에, 실제로 용모가 보기 흉하게 될 정도였다. 천재적인 지휘관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매우 규율있는 장수였으며, 기병대와 보병대를 혼합하는 독창적인 전술 기량을 발휘했다. 수년에 걸쳐 막강한 군대를 만들고 훈련해 왔으면서도, 그 힘을 사용하는 데서는 역설적으로 인색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가 살아서 아시아 침공을 단행했더라도,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을 타도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시아에 마케도니아 제국을 세웠겠지만, 그 성격은 지중해에 국한된 제국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식민지 개척으로 혜택을 입었겠지만, 저급 문화가 고급 문화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리스의 자유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았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그 문제를 깨닫고 있었으며, 자유를 표면에 내건 코린트 동맹은, 그것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다. 그것으로 그리스인을 기만하거나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후대의 마케도니아 왕들로서도, 그 이상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를 만들었으며, 당시의 마케도니아와 그 후대의 왕들은 세계사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알렉산더 대왕 : W. W. 란래, 지동식 역, 삼성미술문화재단 출판부, 1986
Philip of Macedon : George Cawkwell, 1978
Un Fondateur d'Empire:Philippe, roi de Macédoine : Paul Cloche, 1955
Philipp Ⅱ von Makedonien und Griechenland in den Jahren von 346 bis 338 : F. R. Wust, 1938
Filippo il Macedone : A. D. Momigliano, 1934
Philip and Alexander of Macedon : D. G. Hogarth, 1897(reprinted 1971)

                                                                                        G. T. Griffith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필리포스2세의 부인들

   
 

   알렉산더는 기원전 356년 7월 즈음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와 그의 아내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장자도 아니었고, 올림피아스도 필리포스의 첫 부인이 아니었다. 필리포스는 이미 세 번이나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후에 세 번 더 결혼을 하기 때문에 그의 자녀가 정확히 몇 명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 정도다. 그는 마음에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바로 취했고 활동적인 성격 탓에 많은 여자를 만났다.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의 결혼은 사랑으로 맺어진 결합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에서 열린 신비로운 분위기의 종교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 의식은 얌전한 여성들이 참석할 만한 데가 아니었다. 이미 이혼 경험이 있었던 올림피아스는 얌전하다는 평판을 듣는 여성도 아니었고 이후로도 그런 평판을 듣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의 사랑은 식었지만, 처음에 그들을 자신과 같은 영혼을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서로에게 이끌렸던 듯하다. 두사람은 모두 거칠고 육감적이며 인습을 경멸하는 성격이었다. 이들은 왕족이 신들과 유사한 존재로 여겨졌던 시대에 살았지만, 서로에게 느끼는 바를 실행하는 데 중매인이나 심부름꾼 따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에피루스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처럼 순수 마케도니아 귀족의 혈통이 아니므로 알렉산더는 완전 적장자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당연히 분기탱천하여 아탈루스와 현장에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 필립의 노여움을 샀다. 필립은 올림피아스에게서 얻은 딸 클레오파트라를 외삼촌 알렉산더와 결혼시켰다. 바로 이 결혼식에서 필립이 암살당한 것이다. 그러니까 두번의 결혼식이 장례식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셈이다.

 

 

 

3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1. 영화와 역사사이 5

 

◆ 1. 필리포스 2세, "무뢰한인가, 최고의 통치자인가"

     영화 [알렉산더]는 필리포스 2세의 왕비 올림피아스가 징그러운 뱀들을 잔뜩 방안에 풀어놓고 키우면서 알렉산더에게 만지라고 권하는 괴기스런 장면으로 출발한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 독으로 자살했다는 설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 같은데... 물론, 일부 기록에는 올림피아스가 비밀스런 종교의식에 심취해 뱀들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도 있기는 하다. 아마 올림피아스가 정통 마케도니아 출신이 아니라 변방 에페이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당시 사람들의 윤색이 아닐까? 영화에서는 이런 장치들이 흥미를 유발하는 더없이 훌륭한 도구가 되고... 어린 알렉산더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뱀을 만지고, 곧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들어온다. 애꾸눈을 한 필리포스 2세는 술에 만취해 올림피아스를 품으려 하나 올림피아스는 거세게 반항하고... 뭐 가정 교육상 별로 상서롭지 못한 장면들로 영화는 시작된다.

 

     필리포스 2세가 거부하는 아내를 강제로 취하려 했다는 장면도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필리포스 2세는 왕이다. 왕의 명을 왕의 여자들이 거부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조선조 성종때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남편인 성종이 다른 후궁들 처소를 드나들다 모처럼 중궁전을 찾을 때 앙탈을 부렸고, 마침내는 성종의 얼굴, 즉 용안(龍顔)에 손톱으로 생채기를 남기기는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언가들의 불길한 증언을 듣고, 올림피아스를 멀리하던 필리포스 2세가 어쩌다 올림피아스를 만나러 왔을 때 뾰로퉁 해진 올림포스가 합궁을 거부했을 개연성은 있다.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영화만 보면 필리포스 2세는 털복숭이 애꾸눈(실제 이 부분은 맞는다)에 무지막지한 폭도나 술주정뱅이 혹은, 무뢰한 이상의 평가를 얻기 어렵다. 필리포스 2세는 과연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인물인가? 알렉산더 정복활동의 밑거름을 만들어 준 필리포스 2세를 들여다 본다.

 

     필리포스 2세는 B.C 382년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만 해도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민족의 수많은 도시국가 가운데 변방의 하나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청년 시절 3년간 보이오티아 지방의 최강국 테베에서 볼모로 지냈을까. 고국으로 돌아온 필리포스 2세는 뜻밖에 대권을 거머쥐게 된다. 마케도니아 왕이던 형 페르디카스 3세가 B.C 359년 전투에서 숨져 3살짜리 조카 아민타스 4세의 섭정(攝政)이 된 것이다. 물론 그는 섭정에 머물 위인이 아니었다. 곧바로 왕이 된 뒤 국력 신장에 매진하는데...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필리포스 2세는 북쪽 변경의 방비를 위해 기지를 만들고, 4.5m 짜리 긴 창으로 무장한 중무장 보병대를 조직하는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그리고, 운도 좋았다. 그가 집권할 무렵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은 내분에 휩싸여 북쪽 추운 나라의 마케도니아가 힘을 키워 나가는 것에 대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델피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의 신탁소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 각 도시국가들은 인보동맹(隣保同盟)을 맺는다. 델피를 차지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나서 침략자를 물리치며 델피의 독립을 지켜 줬다. 델피는 그리스 민족 최대의 신탁소로 각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요즘으로 치면 영세 중립국 스위스와 비슷한 경우다. 내부의 왕권과 군사력을 확실하게 다진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델피를 보호한다는 명분의 인보동맹 덕분이었다. ⓒ김문환

     B.C 356년 왕의 칭호를 얻은 그는 에페이로스왕의 딸 올림피아스와 정략결혼해 아들 알렉산더를 낳았다. 군사력을 기르며 그리스 전체에 패권을 행사할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필리포스 2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희망은 그리스 민족이 신성시 하는 델피(델포이)로부터 날아 들었다. 먼저 델피에서 기회가 온 배경부터 살펴보자. 델피는 아폴론 신전은 물론 그리스 문명권에서 가장 효험 있다는 아폴론 신탁소가 있는 고장. 그러니, 누구라도 델피를 탐낼 수 밖에 없다. 그러자 주변 국가들이 신성한 델피를 보호하자는 동맹을 맺는데 이를 인보동맹(隣保同盟, Amphiktyonia, 특히 델피 인보동맹)이라고 부른다. 외부에서 델피를 침략하면 인보동맹이 나서 델피를 구해줬다. 동맹회의는 1년에 2번 열렸다. 동맹에 참가하는 각국은 2명의 대표자를 내 신전과 재산 관리, 프티아 경기 등을 주관했다.

 

     델피를 차지하려고 나타난 국가와 델피를 지키려는 인보동맹 사이의 전쟁은 신성전쟁(神聖戰爭, Sacred Wars)이라고 부른다. 델피의 신성전쟁은 3번 일어났다. 그중 1차 신성전쟁은 B.C 600년 발생했다. 로크리스가 델피를 침공했을 때 테살리아인이 델피를 도와 B.C 59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아테네와 시키온등을 끌어들여 델피 인보동맹을 맺은 것이 효시(嚆矢)다. 제2차 신성전쟁은 포키스인들이 델피를 점령하면서 스파르타가 나서 델피를 구원하고, B.C 448년 니키아스 화약으로 델피의 독립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르고... B.C 355년 제3차 신성전쟁이 델피와 포키스 사이에 일어났다. 포키스가 델피를 공격 한 것. 이때는 아테네나 스파르타는 물론 델피 인보동맹의 맹주 테베마저도 모두 힘이 빠진 종이 호랑이 신세로 포키스를 견제하기에 힘이 부쳤다. 이런 약점을 간파한 포키스는 델피를 점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세력을 주변으로 확대했다.

 

     북방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B.C 54년 메토네를 공격하면서 한쪽눈을 잃는등 시련을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마케도니아의 국력과 영향력을 키워 나가던 필리포스 2세는 B.C 346년 강력한 군사력으로 포키스를 패배시켰다. 3차 신성전쟁에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대부분이 참가한 탓에 마케도니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 본토내 국가들 사이에서 패권을 인정받게 됐다. 인보동맹에는 포키스를 빼고 마케도니아가 들어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변방의 무지랭이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역사 전면에 나선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마케도니아는 내친 김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확실하게 길들이기로 하고 아테네-테베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완전무장한 군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 필리포스 2세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코린트 동맹을 결성해 패권을 차지했다. ⓒ김문환

     때는 B.C 338년. 포키스령(領)에 침입한 마케도니아는 테베가 이끄는 보이오티아 연맹과 아테네의 동맹군을 카이로네이아에서 물리쳤다. 아테네-테베 연합군의 병력은 약 3만 5천명. 마케도니아군은 3만 2천명.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까지 참전한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은 대승을 거뒀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마케도니아는 스파르타등 펠레폰네소스 반도 일부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 본토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을 한데 묶어 헬라스(코린트, 코린토스)동맹을 맺었다. 맹주는 마케도니아였고, 필리포스 2세가 주도권을 행사했다. 이제 그리스에는 각 도시국가의 독립이 사라지고 마케도니아의 패권아래 자치권을 인정받는 상황이 됐다.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 도시국가 대부분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깃발아래 뭉치게 만든 위대한 정복자였다. 애꾸눈에 여자만 탐하는 호색한(好色漢)이 아니다. 그가 헬라스 동맹을 맺고 맹주 자리에 오른 명분은 하나다. 그동안 그리스 민족을 괴롭혀 온 페르시아를 응징한다는 것. 페르시아를 혼내주자는 데 반대할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실상은 이오니아 지방에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마케도니아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였지만, 어쨌든 그리스 통일이라는 과업을 달성하고 페르시아 침공이라는 기초를 닦은 그리스 역사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B.C 336년 페르시아 원정을 앞두고 왕실 행사장에서 그만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베르기나 왕궁 유적. 베르기나에는 필리포스 2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비롯해 화려한 부장품을 갖춘 대형 분묘가 발굴돼 펠라 이전에 마케도니아의 수도였던 아이가이라는 심증을 굳혀주고 있다. ⓒ김문환

     필리포스 2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돼 관심을 모았는데...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유적은 과거 마케도니아 판도인 그리스 북부 베르기나라는 도시에서 발굴됐다. 1861년 안티고노스 2세때(B.C 3c 초) 궁전이 발견된 데 이어 1977년에는 지름 약 100m, 높이 12.5m의 원형 묘 2기등의 대형 분묘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하나는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한 황금 유물이 다수 쏟아져 당시 그리스 문명권의 패자로 떠오른 마케도니아 왕실의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오니아식의 기둥을 사용한 신전 양식의 분묘 정면에는 말을 탄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의 사냥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일련의 발굴로 베르기나가 B.C 7-B.C 4c 마케도니아의 중심지 아이가이라는 심증이 굳어지고 있다.

 

     필리포스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세련된 취향으로 궁정을 꾸몄는데,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 유적지에 아직도 남아있는 자갈 모자이크등은 화려했던 궁정장식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궁정으로는 문인이나 학자들도 불러들였다. 왕실과 귀족 자제의 교육은 물론 각종 문예활동을 맡겼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등이 궁정에 학술원을 만들고, 최고의 학자와 문인을 초빙했던 예는 고국 마케도니아 왕실의 전통을 좀더 적극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필리포스 2세는 자신감에 넘친 인물로 문예를 진흥시키면서 부족국가 차원의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문명권의 맹주로 키워 낸 뒤 페르시아 정벌계획을 수립해 아들 알렉산더가 세계 제국을 이룰 수 있도록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필리포스 2세에 의한 마케도니아의 융성과 그리스 문명권의 제패라는 업적이 없었다면, 알렉산더의 대정복 역시 실현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 2. 올림피아스, 필리포스 2세 암살의 배후?

     올림피아스는 자신이 그리스 신화속 아킬레스의 후손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친정 아버지 이름도 네오프톨레모스다. 네오프톨레모스는 누구인가? 아킬레스의 유일한 혈육이다. 물론 올림피아스의 아버지 네오프톨레모스가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니지만, 그녀는 아킬레스 더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제우스의 핏줄을 이은 영예로운 가문 출신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영화에서 올림피아스가 알렉산더에게 "너는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올림피아스 입장에서 볼 때 어색한 게 아니었다.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올림피아스는 비록 정실 왕비로 아들을 낳았지만, 필리포스 2세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필리포스 2세 역시 아내 올림피아스를 멀리하고 다른 여자들만 찾았고...

 

     사실 필리포스 2세는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이 꼭 어울리는 표본이었다. 많은 여성은 물론 때로는 남색까지 두루 섭렵했다. 마케도니아 왕실은 고대의 다른 왕실처럼 왕이 여러 여자를 거느릴 수 있었다. 더구나 비록 큰아들은 아니지만, 총기가 넘치고 혈기방장(血氣方壯)한 알렉산더를 낳은(필리포스 2세는 다른 여인에게서 알렉산더의 이복형을 두었다) 올림피아스가 이민족 출신이니... 마케도니아의 일부 귀족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새장가 들 것을 권했다. 더늦기 전에 순수 마케도니아 혈통의 왕자를 낳아 대를 잇게 하자는 취지였다.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력자 아탈로스는 자신의 조카딸 클레오파트라를 필리포스 2세에게 추천했다. 필리포스 2세야 이를 마다할 일이 있는가? B.C 337년 45살 중년의 필리포스 2세는 20대 초반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피바람을 몰고 올 일인 것을...

 

     먼저 우리 역사를 돌아보자.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면서 하성군을 후계로 이으니 그가 선조다. 선조의 초비(初妃)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죽고, 후궁들은 임해군, 광해군, 신성군... 여러 아들을 생산하는데. 선조의 마음은 늘 뭔가 개운치 않았다. 자신이 중전의 아들이 아니어서 적통 문제로 시달린 것을 생각한 터였다. 마침내 1602년 우리나이 51살의 중늙이가 돼 19살 꽃다운 연안 김씨녀를 계비(繼妃)로 맞아 중전으로 삼았다. 이조좌랑 김제남의 딸로 훗날 인목대비가 된 비운의 여인. 비극이 커지려면 상황이 더 꼬이는 법. 인목대비가 그만 아들 영창대군을 출산했다.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처음 적통의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1608년 아직 6살짜리 어린 영창대군을 두고 선조가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피바람. 영창대군도, 김제남도, 김제남의 아들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폐비됐다.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숨졌다. 극장에서 열린 연회석 도중 한때 자신의 동성애 파트너이자 호위병인 파우사니우스에게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스 극장에는 일반인이 앉는 돌의자와 왕이나 기타 귀빈들이 앉는 팔걸이 달린 돌의자가 구분돼 있다. 사진은 이오니아 지방 그리스 로마 도시 프리네의 극장 귀빈석. ⓒ김문환

     필리포스 2세의 결혼식에 올림피아스는 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겪었을 게 분명하다. 아들 알렉산더 역시 광해군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임신한 클레오파트라가 만약 아들을 낳으면 마케도니아 순수 혈통의 왕자가 아닌가? 반쪽 짜리 알렉산더는? 부자간에 극도의 긴장이 조성되고 마침내 알렉산더와 올림피아스는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일단 마케도니아 혈통의 승리로 보였다. 간신히 유배지에서 돌아온 알렉산더. 아버지를 도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일군 알렉산더의 모습은 마치 광해군이 선조를 도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모습과 닮아 보인다. 그러나, 이대로 세월이 흐르면 올림피아스는 물론 알렉산더도 미래가 없어 보이는게 자명한 일. 그러던 B.C 336년 어느 날. 필리포스 2세의 딸 클레오파트라가 근처 몰로소스의 왕과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이 열린 극장에서 알렉산더는 파우사니우스라는 한때 동성애 파트너요 당시는 호위병이었던 자에게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파우사니우스를 누가 사주했을까? 그가 현장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인들이 사주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페르시아 복수의지를 불살랐다. 그러나, 필리포스 2세의 죽음 뒤에 벌어진 일련의 조치를 보면 올림피아스가 배후라는 설이 나올 법도 하다. 필리포스 2세의 젊은 왕비 클레오파트라와 그가 낳은 자식은 화형을 당했다. 올림피아스의 명령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남자 친척들도 대부분 잔혹한 최후를 맞았다. 알렉산더의 왕위에 걸림돌이 될 모두가 숙청당했다. 그리고, 필리포스 2세 시절 알렉산더의 힘이 커지는 것을 염려해 유배지로 갔던 알렉산더의 측근은 모두 돌아왔다.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더가 원정을 떠난 뒤, 마케도니아에 남아 고국에 있었다. 아들이 세계제국을 일군 뒤에는 바빌론으로 가고 싶어했다. 원대한 세계제국의 대모로 행사하려는 야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아들이 33살 나이로 요절했다. 좌절 속에서도 며느리 록사네가 유복자로 낳은 알렉산더 4세로 제국의 왕위를 이어가려 했다. 그런 욕심에 공동 군주로 오른 알렉산더의 이복형까지 암살하지만, 결국 자신도 카산드로스 장군에게 며느리 록사네, 손자 알렉산더 4세와 함께 암살당하고 말았다. 권력을 놓고 벌어지는 이 처절한 다툼들...

 

◆ 3. 헤게모니

     권력을 위해 죽고 죽이는 다툼들을 생각하면 특히, 필리포스 2세를 얘기하면 현대 정치학의 용어 헤게모니(Hegemony)가 떠오른다. 헤게모니란 무엇인가?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Hegemony is a situation in which one country, organization, or group has more power, control, or importance than others."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한나라나 조직, 집단이 이에 상응하는 다른 나라나 조직, 집단에 비해 더 강한 힘이나 통제력, 중요성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지배권, 주도권, 패권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한쪽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힘을 말한다.

 

     쉽게, 미국이 한국보다 강한 힘을 갖고 미군기지 이전에 많은 돈을 내라고 할 때 한국이 거부하지 못하고 쉬쉬하면서 순순히 응하는 상황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다. 또, 노동조합과 사용자가 구조조정이나 임금인상등의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다 결국, 노동조합이 탄압되고 사용자 계급이 승리하는 경우 사용자 계급이 헤게모니를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 기관이 법률이나 군대, 경찰등을 통해 국민들을 우월적인 힘으로 다스리는 것도 국가의 헤게모니로 정의할 수 있다. 나아가 안토니오 그람시등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듯 사회 제도나 관습, 관념, 사회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이끌어내 사회의 모든 생활영역 속에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도 무의식적인, 또 암묵적인 헤게모니의 한 유형으로 볼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면모를 갖는 헤게모니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필리포스 2세가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테베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뒤 스파르타등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묶어 코린트 동맹(코린토스 동맹, 헬라스 동맹)을 맺었다. 동맹은 공동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특히 외적이 침입했을 때 공동 대응하도록 했다. 그보다 훨씬 앞선 백 50여년전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델로스 동맹보다 참가한 도시국가 수가 훨씬 많다는 점이 첫째요. 둘째는 델로스 동맹이 평등한 국가들의 연합체인 반면에 코린트 동맹은 마케도니아를 맹주로 한다는 다시말해 패권자가 있는 동맹이란 점이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는 위기시 비상대권으로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절대적인 독재를 행사할 수 있는 필리포스 2세를 헤게몬(Hegemon)이라고 불렀다. 헤게모니(Hegemony)의 어원으로 헤게모니를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 4. 희생의식

     영화 [알렉산더]에서는 앞서 트로이 전쟁과정에 살펴본 희생의식 장면이 나온다. 다리우스 3세를 완전히 패퇴시켜 페르시아 제국의 숨통을 끊는 과가멜라 전투에 앞서 알렉산더가 직접 행하는 희생의식 장면. 흰 소를 데려다 놓고, 알렉산더가 보리알을 소머리에 던지더니 칼로 내리찍어 소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소를 죽여 신성한 피로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장면이다. 트로이 전쟁이라는 신화시대부터 알렉산더 전쟁이라는 시기까지 신에게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요즘도 그 전통이 남아 고사를 지낸다. 돼지 잡아서. 물론 푹 삶은 머리만 떼놓고 절하는 것이지만...

 

희생의식 모자이크. 영화에서 알렉산더는 과가멜라 전투를 앞두고 흰소를 잡아 희생의식을 치른다. 보리알을 뿌려준뒤 칼로 급소를 내리찍는 장면. 사진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희생의식을 준비중이다. ⓒ김문환


                                                                김문환 기자 kim34@sbs.co.kr

 

 

 

 

 

 

                             아민타스 3세(2세) [Amyntas Ⅲ(Ⅱ)]

   ?~BC 370/369.

   마케도니아의 왕(BC 393경~370/369 재위).

   절묘한 외교술을 펼쳐, 그의 아들인 필리포스 2세(BC 359~336 재위) 치하에서, 마케도니아가 강대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아민타스는 강력한 전제군주인 아르켈라오스(BC 413경~399 재위)가 죽은 뒤 혼란이 일어났을 때 왕이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민타스는 일리리아(지금의 알바니아)의 침략과 마케도니아 동쪽에 있는 칼키디키 반도의 도시 국가 연합인 칼키디키 동맹의 공격을 물리쳐야만 했다. 칼키디키 동맹의 위협은 스파르타가 개입해 BC 379년 동맹이 해체된 뒤에야 겨우 사라졌다. 아민타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우세한 강대국들, 즉 처음에는 아테네, 다음에는 폭군인 페라이의 이아손(BC 385경~370 재위)이 다스리는 테살리아를 지지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