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위의 작품은 헬레니즘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몇 가지 결점을 찾아냈다. 일부 인물이나 말에서 신체구조의 비례가 맞지 않는 점. 따라서 어색하게 표현됐다는 것이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한 곳에서 작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문 생산공장에서 만들어 둔 판넬을 실제 모자이크를 설치하는 장소로 옮겨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주장. 둘째, 독일학자가 내세운 것으로 색다르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지중해 동부 어딘가에 설치했던 작품인데,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강탈해 폼페이에 다시 설치하면서 생긴 결과라는 지적이다. 최근엔 후자가 더 설득력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렉산더의 일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알렉산더의 고국은 마케도니아. B.C 359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왕이 됐을 때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疲弊)해져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귀족들을 길들이고, 각 지역 호족들의 준동을 잠재운 뒤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이후 힘빠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마침내 B.C 338년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헬라스 동맹을 결성해 맹주가 됐다. 그리스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일 지도체제다. 모든 도시국가의 위에 군림하는 패자(覇者) 마케도니아가 등장한 것이다. 필리포스 2세는 이어 마케도니아를 주축으로 도시국가들을 참여시킨 페르시아 정벌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에는 나서지 못했다. B.C 336년 암살되면서 아들 알렉산더에게 왕위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20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B.C 323년 33살로 죽을 때까지 13년간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죽음 뒤 잠시 혼란해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한 뒤 B.C 334년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길에 올랐다. 알렉산더는 B.C 333년 오늘날 터키 남부지방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오리엔트를 차례로 점령할 수 있었다. 이어 찬란한 문명의 보고 이집트를 차지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 즉, 메소포타미아 내부로 들어갔다. B.C 330년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과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에게 대승을 거두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제 발길 닿는 대로 알렉산더의 세상이었다. 문명의 고도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카스피해까지 간 뒤, 북동진해 서역(西域)이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인도정벌을 위해 남하했지만, 결국 인더스강에서 원정의 발길을 돌린다. 알렉산더는 가는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무려 70개의 도시(알렉산드리아)를 만들었다. 그가 다닌 궤적은 당시까지 전쟁사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는 헬레니즘시대를 열었으니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바도 크다. 우리의 자랑스런 세계 문화 유산, 석굴암 불상(佛像)도 사실은 그가 남긴 간다라 미술의 후예다.
신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위업. 스스로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진 알렉산더는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했을 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통지를 보낸 바 있다.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한 뒤로는 이집트의 시와 오아시스 아몬 신전에서 마침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에 무심했던 그는 29살이던 B.C 327년 초 추운 겨울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할 때 전투를 조기에 마무리 짓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평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공주와 정략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희대의 영웅 알렉산더와 만난 박트리아 공주의 이름은 록사네다. 그러나, 로맨스도 잠시. 친구 헤파이스티온이 B.C 324년 10월 죽으면서 알렉산더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헤파이스티온은 인도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수사에서 알렉산더가 주도한 페르시아 왕녀들과의 성대한 합동 결혼식을 치른 지 8달 만에 죽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뒤로 하고... 메드 지방(이란 고원지대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의 국경지방) 엑바탄(에크바타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알렉산더는 크게 상심했다.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폭음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예정됐던 아라비아 침공 준비는 그대로 진행시켰다. 아라비아 원정이라!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뒤, 리비아를 지나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도 평정한다는 야심찬 원정 계획.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대역사. 아라비아로 출정 예정일은 B.C 323년 6월 20일-23일 사이에 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출정을 20여일 앞둔 6월 3일 저녁 향연 석상에서 과음하던 알렉산더가 쓰러졌다. 그리고, 열흘만인 6월 13일 숨을 거뒀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자신이 신으로 축복받은 이집트 서부의 사막 시와 오아시스를 매장지로 택하고 유언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소는 과연 어디였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면 마케도니아인데...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혼란을 가져왔지만, 장례절차는 차분히 진행됐다. 우선 이집트의 전문가를 불러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다. 미이라를 운구할 장엄한 석관도 준비했다. 제작기간만 무려 2년이 걸렸으니... 석관을 운송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노새와 낙타가 동원돼야 했다. 장지는? 고국 마케도니아로 향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집트 총독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시리아에서 영구마차를 강탈해 이집트로 가져갔다. 전혀 엉뚱한 이유로 알렉산더의 시신은 그가 소망했던 나라로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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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j의 감성 업그레이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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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알렉산더 대왕, 징기즈칸 중
제일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은? |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 넓이는 1백15만㎢ 징기즈칸이 정복한 땅 넓이는 약 1천250만㎢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프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등을 합하더라도 징기즈칸의 발끝에도 못미칩니다. 게다가 이건 징기즈칸때에만 정복한 땅의 넓입니다.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바투를 앞세워 금나라와 러시아를 정벌했습니다. 문케와 그의 동생 훌라구는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훌라구의 형인 쿠빌라이 칸은 티벳 지역의 토번과 운남의 대리국을 병합시킵니다. 게다가 남송마저 함락시켜 중국전체를 함락합니다. |
내용출처 : 검색10%도서30%지식60% |
징키스칸 입니다.
나폴레옹은 땅 정복보다는 내부와 싸웠다고 볼 수 있겟고
알렉산더 대왕도 여러땅을 정복했지만..
아깝게 젊은 나이에 숨지셨구요
징키스칸은 아시아를 정복하고 유럽까지 진출했답니다..
음.. 대한민국의 70~100배 정도 진출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몽골 제국과 알렉산더 제국의 비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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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계사의 진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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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일간 인디펜던트지는 알렉산더 전문가인 영국 사학자 앤드루 척이 기원전 323년
여름, 바빌론에서 갑자기 32세의 나이로 요절한 알렉산더를 죽게 만든 것은 음모와 갈등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모기 한마리였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내놓았다고 8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죽기 2주일 전 바빌론 교외의 늪지대를 순찰하던 중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에 물렸으며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말라리아의 발병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척은 수행원이 기록한 알렉산더 대왕 일지 일부가
나중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작품이라고 하는 주장은 일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알렉산더가 데리고 다니던 측량사인 에리트라에의 디오그네투스가 일지를 작성한 장본인으로
말라리아 증세 등 알렉산더의 최후의 날들을 상세히 묘사했다고 말했다.
이 일지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홍수 방비를 살펴보기 위해 바빌론 외곽의 늪지를 배를 타고
둘러 본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 시기와 그의 사망 날짜 사이는 말라리아의 잠복기인 9~14일과 일치한다.
척은 당시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올린투스의 에피푸스가 이 일지에 대한 논평기록을 남겨놓은
것도 일지가 후대에 날조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일부 영화나 그의 전기에서 독살된 것으로 묘사되는 등 그의 사인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돼 왔다.
김대우 기자(dewkim@heraldm.com)
알렉산더 대왕의 사인은 ‘말라리아’
[헤럴드 생생뉴스 2005-08-08 10:56]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음모로 살해된 것이 아니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왕의 첫 아내는 바르시네, 그 후에 얻은
아내는 록사나와 스타티라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비
왕이
사망할 당시에 록사나는 임신중이었습니다.
스타티라는 록사나의 심복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열정적이고 전제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편과 아들이 죽은 뒤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피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인 그녀의 본명은 미르탈레였으나 후에 필리포스가 BC 356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올림피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필리포스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올림피아스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것은 BC 337년 그가 마케도니아 명문 태생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올림피아스는 이피로스로 물러나 있다가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젖먹이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원정을 간 처음 몇 년 동안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거듭 싸웠고, 마침내 BC 331년경 다시 이피로스로 물러났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자(알렉산드로스는 BC 323년에 죽었음) 그를 계승한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에게 그녀의 어린 손자 알렉산드로스 4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BC 317년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정신박약자 필리포스 3세(아리다이오스)를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세우자 폴리페르콘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올림피아스는 카산드로스의 형제와 100여 명의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그의 아내도 처형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올림피아스가 있던 피드나를 봉쇄하고 BC 316년 봄 올림피아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카산드로스의 병사들은 이를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살해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내.
박트리아족의 추장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아시아 원정중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혀, BC 327년 그와 결혼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뒤, 그의 둘째 부인인 스타테이라(바르시네)를 죽였으며,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낳았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그녀의 아들을 백치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와 공동 왕으로 받아들였다.
BC 319년 에페이로스에서 시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연합했으나, BC 316년 마케도니아에서 카산드로스(뒤에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함)에게 붙잡혔다.
카산드로스는 그녀를 암피폴리스에 투옥했다가, 뒤에 그녀의 아들과 함께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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