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알렉산드로스 대왕 (2)

영국신사77 2006. 9. 4. 15:24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전투 전경--폼페이 [파우노의 집] 여름철용 야외식당인 엑세드라의 바닥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공격을 주도하는 알렉산더와 그리스군의 용감한 모습. 이와달리 겁먹은 다리우스와 페르시아군의 도망가려는 듯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됐다.

    바지를 입은 페르시아 병사의 독특한 복장도 잘 나타냈다.   

                                                                   나폴리 박물관. SBS ⓒ김문환

 

   위의 작품은 헬레니즘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몇 가지 결점을 찾아냈다. 일부 인물이나 말에서 신체구조의 비례가 맞지 않는 점. 따라서 어색하게 표현됐다는 것이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한 곳에서 작품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전문 생산공장에서 만들어 둔 판넬을 실제 모자이크를 설치하는 장소로 옮겨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주장. 둘째, 독일학자가 내세운 것으로 색다르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지중해 동부 어딘가에 설치했던 작품인데,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강탈해 폼페이에 다시 설치하면서 생긴 결과라는 지적이다. 최근엔 후자가 더 설득력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렉산더의 일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알렉산더의 고국은 마케도니아. B.C 359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왕이 됐을 때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오랜 내전으로 피폐(疲弊)해져 있었다. 필리포스 2세는 고분고분하지 않던 귀족들을 길들이고, 각 지역 호족들의 준동을 잠재운 뒤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국가로 탈바꿈 시켰다. 이후 힘빠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마침내 B.C 338년 그리스의 모든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헬라스 동맹을 결성해 맹주가 됐다. 그리스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단일 지도체제다. 모든 도시국가의 위에 군림하는 패자(覇者) 마케도니아가 등장한 것이다. 필리포스 2세는 이어 마케도니아를 주축으로 도시국가들을 참여시킨 페르시아 정벌 연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에는 나서지 못했다. B.C 336년 암살되면서 아들 알렉산더에게 왕위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와 페르시아군--알렉산더가 맹렬히 페르시아 군을 몰아치는 장면을 그렸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20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B.C 323년 33살로 죽을 때까지 13년간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죽음 뒤 잠시 혼란해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평정한 뒤 B.C 334년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길에 올랐다. 알렉산더는 B.C 333년 오늘날 터키 남부지방인 이수스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대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오리엔트를 차례로 점령할 수 있었다. 이어 찬란한 문명의 보고 이집트를 차지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 즉, 메소포타미아 내부로 들어갔다. B.C 330년 오늘날 이라크 북부의 과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에게 대승을 거두고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제 발길 닿는 대로 알렉산더의 세상이었다. 문명의 고도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카스피해까지 간 뒤, 북동진해 서역(西域)이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했다. 인도정벌을 위해 남하했지만, 결국 인더스강에서 원정의 발길을 돌린다. 알렉산더는 가는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 무려 70개의 도시(알렉산드리아)를 만들었다. 그가 다닌 궤적은 당시까지 전쟁사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 영토의 확장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는 헬레니즘시대를 열었으니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바도 크다. 우리의 자랑스런 세계 문화 유산, 석굴암 불상(佛像)도 사실은 그가 남긴 간다라 미술의 후예다.

 

   신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위업. 스스로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진 알렉산더는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정복했을 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통지를 보낸 바 있다.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한 뒤로는 이집트의 시와 오아시스 아몬 신전에서 마침내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에 무심했던 그는 29살이던 B.C 327년 초 추운 겨울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할 때 전투를 조기에 마무리 짓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평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공주와 정략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희대의 영웅 알렉산더와 만난 박트리아 공주의 이름은 록사네다. 그러나, 로맨스도 잠시. 친구 헤파이스티온이 B.C 324년 10월 죽으면서 알렉산더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알렉산더--투구도 쓰지 않은 채 공격에 몰두하는 알렉산더를 의연하게 그렸다. 알렉산더의 갑옷 한가운데 메두사의얼굴이 그려져 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인뒤 그녀의 목을 아테나 여신에게 바쳤고, 아테나는 목을 자신의 방패에 박았다. 적군 누구라도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겁을 먹으라는 취지였다. 그리스인들의 이런 전통을 나타내주는한 단면이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헤파이스티온은 인도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수사에서 알렉산더가 주도한 페르시아 왕녀들과의 성대한 합동 결혼식을 치른 지 8달 만에 죽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뒤로 하고... 메드 지방(이란 고원지대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의 국경지방) 엑바탄(에크바타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알렉산더는 크게 상심했다.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폭음을 일삼았다. 그러면서도 예정됐던 아라비아 침공 준비는 그대로 진행시켰다. 아라비아 원정이라!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뒤, 리비아를 지나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도 평정한다는 야심찬 원정 계획. 몇 년이 걸릴지 모를 대역사. 아라비아로 출정 예정일은 B.C 323년 6월 20일-23일 사이에 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출정을 20여일 앞둔 6월 3일 저녁 향연 석상에서 과음하던 알렉산더가 쓰러졌다. 그리고, 열흘만인 6월 13일 숨을 거뒀다.

 

   알렉산더는 죽기 전 자신이 신으로 축복받은 이집트 서부의 사막 시와 오아시스를 매장지로 택하고 유언한 것으로 보이지만, 묘소는 과연 어디였을까? 수구초심(首丘初心)이면 마케도니아인데...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혼란을 가져왔지만, 장례절차는 차분히 진행됐다. 우선 이집트의 전문가를 불러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다. 미이라를 운구할 장엄한 석관도 준비했다. 제작기간만 무려 2년이 걸렸으니... 석관을 운송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노새와 낙타가 동원돼야 했다. 장지는? 고국 마케도니아로 향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집트 총독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시리아에서 영구마차를 강탈해 이집트로 가져갔다. 전혀 엉뚱한 이유로 알렉산더의 시신은 그가 소망했던 나라로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찾을 길 없다.

 

 



                                                                                 김문환 기자  kim34@sbs.co.kr 

 

 


출처 : sj의 감성 업그레이드
                기하학을 공부한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더 대왕은 유명한 정치가 였다. 모든 면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백성으로 부터 경애와 신망의 대상이였다. 그러나 이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학문에 뜻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렉산더 대왕은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서 메네쿰스(Menaechums)를 스승으로 모시고 기하학을 공부하였을 때 일이다. 정치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 잠시 짬을 내어 기하학을 공부하는 지라 공부하기도 힘들고 이해가 어려웠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은 "내가 그래도 왕인데 이 권위로 좀더 쉽게 그리고 빨리 배울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스승인 메네쿰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메네쿰스는 잠시도 지체없이 이렇게 말하였다. "대왕님, 대왕님의 나라에는 임금님의 전용도로나 임금님 사유도로가 있어서 누구보다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으나 기하학은 모든사람에게 오직 한 길뿐입니다." 이 말은 배움의 길은 오직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렸다는 말이다.

 

 

                                                   옳은 것의 차이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에 왔을 때 어떤 유태인이 대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우리가 가진 금과 은이 갖고 싶지 않으신지요?]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금과 같은 보화는 많이 가지고 있어, 그런건 조금도 탐나지 않소. 다만 당신들 유태인들의 전통과 당신들의 정의는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하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두 명의 사나이가 어떤 일을 상담하기 위하여 랍비를 찾아갔다.

내용인즉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넝마더미를 샀는데, 그 넝마 속에서 많은 금화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는 넝마를 판 사람에게, [나는 넝마를 산 것이지 금화까지 산것은 아니요. 그러니 이 금화는 마땅히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넝마를 판 사람은 그것을 산 사람에게, [나는 당신에게 넝마더미 전부를 판 것이니,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모두 당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랍비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판정을 내렸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딸과 아들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서로 결혼시킨 후, 그 금화를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은 사리일 것이오.]
그리고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어보았다. [대왕님, 당신의 나라에서는 이런 경우 어떤 판결을 내리십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아주 간단하게 답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죽이고 금화는 내가 갖소.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정의요.]


 

 

                        약점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

 

   세계적인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신체적인 약점이 있었다.오른쪽 뺨에 깊고 흉측한 흉터가 있었던 것이다.전쟁터에서 승리의 훈장으로 달고 온 것이었지만보기가 무척 흉했다.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초상화를 남기겠다며최고의 실력을 지닌 한 화가를 왕실로 불러들였다.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의 입장에서는그 흉측한 상처를커다란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이 영 꺼림찍했다.고민하던 화가에게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화가는 그 묘안에 따라 알렉산더에게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어 손을 턱에 받치고앉으라고 부탁했다.이로서 뺨에 있는 상처가 턱을 받친 손에 가려져보이지 않게 되었다. 화가는 무사히 그림을 그렸고,알렉산더 대왕도 그 그림을 보고 크게 만족해 했다.화가의 지혜가 놀랍지 않은가? 약점을 덮어 주고전체적인 조화를 꾀함으로써 멋진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우리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볼 때이런 자세를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                                       생각을 바꾸면 마음이 행복하다' 중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

 

   알렉산드 대왕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왕실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름난 명의들이 수없이 왔다 갔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둥대는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알렉산드 대왕은 오히려 침착했다.
그는 얼굴에서 병색이 짙었지만 타고난 강인한 정신력으로
조금씩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듯 했다.
신하들이 자리에 누워 휴식을 치할 것을 권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사람이란 죽으면 잠을 자게 되는 법, 살아 눈 뜨고 있는 이 순간 어찌 잠잘 수 있겠는가.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가장 충실히게 보내리라."
그러던 알렉산더 대왕도 병이 점점 더 깊어지자 자리에 앉아 았을 힘조차 없게 되었다.
왕실에서는 이미 병색이 짙은 그를 포기한 상태라
' 그의 마지막 유언이 무엇일까? ' 하고 궁금해 했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면서도 알렉산더 대왕은 좀처럼 유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알렉산드 대왕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어 뛰엄뛰엄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죽거든 묻을 때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수 있도록 하시오."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초조하게 그의 유언을 기다리던 신하들은 놀랐다.
부와 권력을 한손에 쥐었던 왕의 유언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뿐이오."

 

 

 

 

 

                                  알렉산더 대왕의 지혜   
출처카페 : 맞춤형 교재 제작 및 학급 .. / 에듀툴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열배나 되는 적과 싸우게 되었다.

싸움터로 가던 도중 대왕은

작은 사원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자 장수들과 병사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왕은 손에 동전 하나를 들고 말했다.

"자, 이제 기도를 마쳤다.

이 기도는 틀림없이 영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동전을 던져 영험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

이 동전을 공중에 던져 앞이 나오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고,

뒤가 나오면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대왕은 비장한 표정으로 동전을 하늘 높이 던졌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동전을 주시하였다.

군사들이 떨어진 동전을 보니

동전은 앞면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앞면이다! 우리가 이긴다!"

기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단번에 올라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한 장교가 말했다.

"운명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저희가 열 배나 되는 적을 이겼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다.


"그럴까? 그 동전은 양쪽 다 앞면이었는걸!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대왕, 징기즈칸 중

 

                                 제일 많은 땅을 정복한 사람은?

psi0803 (2005-07-24)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 넓이는 1백15만㎢

징기즈칸이 정복한 땅 넓이는 약 1천250만㎢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프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등을 합하더라도 징기즈칸의 발끝에도 못미칩니다.

게다가 이건 징기즈칸때에만 정복한 땅의 넓입니다.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바투를 앞세워 금나라와 러시아를 정벌했습니다. 문케와 그의 동생 훌라구는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훌라구의 형인 쿠빌라이 칸은 티벳 지역의 토번과 운남의 대리국을 병합시킵니다. 게다가 남송마저 함락시켜 중국전체를 함락합니다.

                                                                         내용출처 : 검색10%도서30%지식60%
                                                          cjfdn6349 (2005-07-24 20:47 작성)

징키스칸 입니다.

 

나폴레옹은 땅 정복보다는 내부와 싸웠다고 볼 수 있겟고

 

알렉산더 대왕도 여러땅을 정복했지만..

 

아깝게 젊은 나이에 숨지셨구요

 

징키스칸은 아시아를 정복하고 유럽까지 진출했답니다..

 

음.. 대한민국의 70~100배 정도 진출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몽골 제국과 알렉산더 제국의 비교     
 
출처 : 세계사의 진실

 

 

                          알렉산더 대왕의 사인은 ‘말라리아’
                                                                               [헤럴드 생생뉴스 2005-08-08 10:56]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음모로 살해된 것이 아니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영국의 일간 인디펜던트지는 알렉산더 전문가인 영국 사학자 앤드루 척이 기원전 323년 여름, 바빌론에서 갑자기 32세의 나이로 요절한 알렉산더를 죽게 만든 것은 음모와 갈등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모기 한마리였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내놓았다고 8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죽기 2주일 전 바빌론 교외의 늪지대를 순찰하던 중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에 물렸으며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말라리아의 발병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척은 수행원이 기록한 알렉산더 대왕 일지 일부가 나중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작품이라고 하는 주장은 일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알렉산더가 데리고 다니던 측량사인 에리트라에의 디오그네투스가 일지를 작성한 장본인으로 말라리아 증세 등 알렉산더의 최후의 날들을 상세히 묘사했다고 말했다.

이 일지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홍수 방비를 살펴보기 위해 바빌론 외곽의 늪지를 배를 타고 둘러 본 것으로 되어있으며 이 시기와 그의 사망 날짜 사이는 말라리아의 잠복기인 9~14일과 일치한다.

척은 당시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올린투스의 에피푸스가 이 일지에 대한 논평기록을 남겨놓은 것도 일지가 후대에 날조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일부 영화나 그의 전기에서 독살된 것으로 묘사되는 등 그의 사인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돼 왔다.

 

 

 

                                                                  김대우 기자(dewkim@heraldm.com)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왕비     

왕의 첫 아내는 바르시네, 그 후에 얻은 아내는 록사나와 스타티라입니다.

   
왕이 사망할 당시에 록사나는 임신중이었습니다.

    스타티라는 록사나의 심복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올림피아스(Olympias ;BC 375경~316)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열정적이고 전제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편과 아들이 죽은 뒤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피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인 그녀의 본명은 미르탈레였으나 후에 필리포스가 BC 356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올림피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필리포스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올림피아스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것은 BC 337년 그가 마케도니아 명문 태생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올림피아스는 이피로스로 물러나 있다가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젖먹이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원정을 간 처음 몇 년 동안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거듭 싸웠고, 마침내 BC 331년경 다시 이피로스로 물러났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자(알렉산드로스는 BC 323년에 죽었음) 그를 계승한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에게 그녀의 어린 손자 알렉산드로스 4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BC 317년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정신박약자 필리포스 3세(아리다이오스)를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세우자 폴리페르콘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올림피아스는 카산드로스의 형제와 100여 명의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그의 아내도 처형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올림피아스가 있던 피드나를 봉쇄하고 BC 316년 봄 올림피아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카산드로스의 병사들은 이를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살해당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록사네(Roxane or Roxana ;?~BC 310경)
                                                            트라키아 암피폴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내.

   박트리아족의 추장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아시아 원정중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혀, BC 327년 그와 결혼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뒤, 그의 둘째 부인인 스타테이라(바르시네)를 죽였으며,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낳았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그녀의 아들을 백치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와 공동 왕으로 받아들였다.

   BC 319년 에페이로스에서 시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연합했으나, BC 316년 마케도니아에서 카산드로스(뒤에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함)에게 붙잡혔다.

   카산드로스는 그녀를 암피폴리스에 투옥했다가, 뒤에 그녀의 아들과 함께 처형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