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의 역사
1. 데살로니가의 위치와 도시적인
특징 데살로니가는 에게해의 북서쪽에 가까운 테르마이코스 만에 위치한 중요한 국제 항구 도시로서,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춘 항구였다. 사도 바울 당시 데살로니아는 로마령이었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이 도시는 매우
중요한 항구 도시였으며, 많은 이교도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아가야와,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고린도, 그리고 에베소와 함께 큰
항구로 각광받고 있었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로마로부터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을 거쳐 동방으로 가는 에그나티안
도로에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주변의 중요한 도시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바울
당시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 중에 하나였으며, 행정상으로나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로 인해 이 도시는 바울 선교 활동을 위한
훌륭한 본거지가 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추방당한 후에(행 16:11-40)
에그나티안 도로를 따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유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다. 이 여행은 대략 160km에 달하는 긴 여행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
도시의 인구는 어림잡아 20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의 대부분은 헬라인들이었으며, 상당수의 로마인과 동방인과 유대인도 살고
있었다(유대인은 약 2만 명이었다). 고대에 상업이 번창한 곳에는 대부분 유대 상인들이 있었다.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유대인 회당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바울이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다(행 17:4). 데살로니가에는 수많은 헬라의 종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도덕적으로 매우 문란한 일들을 했다. 이로 인해 환멸을 느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대교에 매료되어 회당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2. 데살로니가의 역사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데살로니가는 B. C.
315년에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이었던 카산더에 의해 세워졌다. 카산더는 후에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자매였던 아내(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이곳을 "데살로니가"로 부르게 하였다. 이 신설 도시에 식민된 자들은 카산더에 의해 파괴된 지역 내의 약 26개 성의 거민들이었다. 그 성읍들
중에는 데살로니가로부터 동남방 11.2km 가량 떨어진 곳의 데르마도 들어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데살로니가의 이전 명칭이
데르마였다는 스트라보의 대충적인 진술을 분명히 설명해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네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스트리온강에서 악시우스강까지 이르는 제2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주전 148년에 마게도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데살로니가는 주의 수도가 되었고 주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주전 42년에 데살로니가는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를 도운 일로 인해 "자유 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통치했으며, 로마 총독이 부임해 있기는
했지만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는 다른 헬라 도시들처럼 몇 명의 관원들과, 원로원, 그리고 민회 등을 통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곳은 세계 1차 대전 중에 연합군이 주둔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나치가 이 곳에 있는 6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 또는 추방하기도 했다. 현재 데살로니가는 약 30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살로니카(Salonica) 또는
데살로니키(Thessaoniki)라고 부르고 있다.
3. 현존 건물 데살로니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북쪽과 동쪽 성벽은 현재도 남아있다. 현존하는 성벽은 비잔틴시대의 것이지만 적어도 일부는 보다 고대에 축조된 것이다. 비아
에그티나(Via Egnatia)는 데살로니가를 동남에서 서북쪽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이 길은 나중에 바르다르강(막시우스강)의 명칭을 따서
바르다르가도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다시 고대 명칭을 되찾았다. 비아 에그나티아에는 두 개의 로마식 아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그 도시의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1879년 파괴당할 때까지 바르다르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주후 297년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친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갈레리우스 개선문이다. 후자의 북쪽에 있는 둥근 로마식 건물은 아마 그와
동시대에 건축된 것 같은데 후에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로 바뀌었다. 광장은 아마 비아 에그나티아의 북쪽, 즉 이 도시 한복판에 있었을 것이다.
경기장은 동남쪽 성벽 가까이에 있었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있는 바르다르문에서 채취한 비문과 데살로니가에서 발견된
수개의 다른 비문에는 폴리타르크(Politarch: 도시의 최고 행정관)로 불리는 관리들이 언급되고 있다. 바르다문에 새겨진 글의 연대는
아마 주전 30에서 주후 143년 사이일 것이다. 다른 비문중의 하나는 아우구스투스 치세시의 것이다. 멀리 떨어진 촌락에서 데살로니가로 운반된
또 다른 비문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비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17:6에서는 폴리타르크 라는 칭호가 데살로니가
성의 통치권자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는데 이 비문 발견 이전에는 그 단어를 달리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최근 고고학적
연구 데살로니가에서는 고고학적 조사로 로마시대의 공중집회소가 나타났는데, 그 집회소에는 적어도 가로 100m, 세로
64m 이상 되는 넓은 광장이 딸려 있고 바닥은 포장이 되어 있었다. 집회소 동쪽 끝에는 2중으로 된 주랑이 있으며 그 주랑에는 고린도식의
원들이 있고 기하학적으로 도안된 모자이크 바닥은 잘 보존되어 있다. 집회소의 남쪽 경계에도 한 주랑이 있는데, 그 주랑은 많은 방들을 숨기고
있는 지하복도가 떠받치고 있으며 그 방들에는 기독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집회소 건물의 연대는 1세기나 2 세기 초쯤 된다. 그 후 3세기 말경
집회소 동쪽 주랑 가까이에는 로마식 극장이 세워졌다. 여섯 줄이 좌석이 현재도 반월형을 그리며 남아 있고, 그 좌석들 아래에는 궁형 천장의
휴게실들이 있으며 이 휴게실 가까이 가려면 거대한 출입구를 거쳐 극장으로부터 내려가야 한다. 동편으로 더 가면 주후
298-311년간 로마제국을 분할 통치한 갈레리우스 황제의 궁전터가 말끔히 청소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열주랑이 도열한 대형 정원과 그에 인접한
8각 건물이 나타난다. 각 면마다 후진이 달린 이 팔각건물은 얼마 안 가서 교회가 되었고 거기에는 세례용 부속실이
있다. 또 그 도시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와 중심부에 있는 여러 가지 건물자리에서 다른 여러 가지 물건이 발견되었다.
구약과 히브리 문구를 희랍어로 번역함과 더불어 최근에 연구된 비문은 데살로니가에 사마리아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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