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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왕조 페르시아 [Sasanian Persia]

영국신사77 2006. 9. 1. 13:57
                   사산왕조 페르시아 [Sasanian Persia]
요약
아르다시르 1세가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세워 651년에 멸망한 중세 페르시아의 왕조.
본문

명칭은 이 왕조의 선조()이며 배화교(:조로아스터교)의 제주()인 사산(Sāsān)에서 유래한다고 하며, 왕조의 발상지는 옛날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제국)와 같이 파르스 지방이다. 따라서 이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중세적 재흥()을 나타내는 동시에 배화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정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란민족의 전통적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한 시대이기도 하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정치
본문

사산왕조 페르시아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241)는 파르티아 제국 최후의 황제 아르타바누스 5세를 패사()시키고, 그 수도 크테시폰을 그대로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서변(西)의 여러 소국과 도시에 대한 쟁탈과 제패()가 이 왕조의 역사를 통하여 로마 내지 비잔틴제국과의 사이에 수없이 되풀이되었는데, 샤푸르 1세(재위 241∼272)의 전승기념조상()은 유명하다.

바람 2세(재위 277∼293)는 세이스탄을 정복하여 인도에까지 세력을 뻗쳤지만, 그가 죽은 뒤 수십 년간은 카루스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침입을 받아서, 때로는 수도가 위협받기도 하였다. 나르세(재위 293∼303)는 굴욕적 강화조약을 맺고 국가의 소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샤푸르 2세(재위 309∼379) 때는 아라비아인과 투르크족의 침입을 받고, 또 아르메니아 영유권 문제로 비잔틴제국과 싸웠다. 야즈다기르드 1세(재위 399∼420) 때부터는 동북 변경에 투르크계의 에프탈족의 위협이 가중되어, 카바드 1세(재위 488∼531) 때는 통혼()과 조공()을 통해 그 침략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쇠퇴한 왕조를 소생시킨 황제가 호스로 1세(재위 531∼579)이다. 그는 선왕() 이래의 배화교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외적의 침입을 일소시킨 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 왕조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당시의 제국 경계는 서쪽은 안티오키아에서 동쪽은 중앙아시아, 남쪽은 예멘까지 미쳤다.

그러나 왕조 말기가 되자 재차 비잔틴제국과 이민족의 침입에 직면한 데다, 궁정() 내의 세력 갈등이 곁들여 국력이 갑자기 쇠미해지고, 야즈다기르드 3세(재위 632∼651) 때 아라비아군의 침입을 받아 주권을 상실하였다. 그의 아들 페로즈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문화
본문
동물모양의 용기 / 300~400년 사산왕조페르시아. 고대 이란의 전통적인 형태의 술잔으로 라이톤이라고 한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국가체제는 잘 정비되어 모범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카바드 1세 때 착수한 토지대장()의 정비로, 호스로 1세인두세()와 지조()의 조세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이것도 여러 나라에 의해 채택 ·실시되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림()을 폐쇄시킨 뒤, 많은 신()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내조()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왕조에서의 철학()과 과학()의 유행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진흥의 전초가 되어 매개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인도의 문학서() 《판차탄트라》가 번역되고, 다시 아라비아어로 중역()되어 후세의 설화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옛날부터 이란의 민족종교()인 배화교는 이 왕조에서 국교()로 되어 국민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으나, 당시 존재한 다른 많은 종교사상 등의 영향을 원용()하여 자교()의 독자적인 신학()체계를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호스로 1세 때는 아베스타 성전()이 편찬되고, 그 고대어적() 표현으로 아람계() 문자를 모체로 하는 구어()인 팔라비어()의 번역 ·주석() 또는 종교문학이 출현하였다.

다수의 민족을 포함하는 제국인 만큼 국내적으로 여러 종교가 유행하였다.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배화교에서 파생()된 종교로 한때 궁정 내에도 신봉자가 있었으나, 국교인 배화교로부터 배척을 받아 금지되고 마니는 사형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수차에 걸친 종교회의의 결과 이단()으로 지목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페르시아 제국이 그 도피장소로 적합하였지만,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의 대립관계에 의한 정치적 압력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교도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는 그 본산()을 이 나라의 수도 테시폰에 두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이 왕조의 조형적() 문화는 당시 세계 제1급의 것으로, 그 영향은 사방에 파급되었으며 경탄()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과 비잔틴 건축에 미친 양식상의 공헌, 뛰어난 공예()와 그림무늬의 도안() 등은 특기할 만하다. 동방에서는 주로 소그드인()과 투르크인의 교역에 의해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벽걸이 ·보석 ·직포() ·동기() ·화장품 등이 서역(西)의 진품()으로서 중국인의 환영을 받았다. 회화 ·건축 등의 유례()는 적지만, 조각과 공예에는 걸작이 많이 남아 있다.

조각작품의 대표적인 예는 대부분 마애()한 부조()로 《샤푸르 1세의 전승도()》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도()》(둘 다 서남부 이란의 나크시에로스탐)와 타크이부스탄(서부 이란의 케르만샤)의 《호스로 2세의 서임도》 등이 있다. 회화에는 《호스로 2세의 제왕저록수렵도(鹿)》(타크이루스탐)와 같은 《박육부조도()》 외에 비샤푸르궁전터[殿]에서 출토된 모자이크 인물상() 등이 있다. 공예작품은 특히 금은기()를 중심으로 한 금속공예품이 우수하다. 이밖에 유리 ·조석 ·염직면에서도 고도의 수준이었음이 작품과 그밖의 회화 ·조각, 그리고 문헌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동물모양의 용기
800*600, 79kb

452*600, 45kb
사발
800*600, 91kb
타원형 용기
800*600, 81kb
타원형 용기
800*600, 87kb
타원형 용기
800*600, 92kb
물주전자
353*600, 45kb
접시
800*600, 9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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