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국가체제는 잘 정비되어 모범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무굴제국과 이슬람 국가에
의해 계승되었다. 카바드 1세 때 착수한 토지대장(土地臺帳)의 정비로, 호스로 1세는
인두세(人頭稅)와 지조(地租)의 조세제도를 새로
제정하였는데, 이것도 여러 나라에 의해 채택 ·실시되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 학림(學林)을 폐쇄시킨 뒤, 많은 신(新)플라톤파의 그리스 학자가 내조(來朝)하여 호스로 1세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왕조에서의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의 유행은 이슬람 세계의 학문진흥의
전초가 되어 매개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인도의 문학서(文學書) 《판차탄트라》가 번역되고,
다시 아라비아어로 중역(重譯)되어 후세의 설화문학(說話文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옛날부터 이란의 민족종교(民族宗敎)인 배화교는 이 왕조에서
국교(國敎)로 되어 국민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문화적 기반이 되었으나, 당시 존재한 다른 많은
종교사상 등의 영향을 원용(援用)하여 자교(自敎)의 독자적인 신학(神學)체계를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호스로 1세 때는 아베스타 성전(聖典)이 편찬되고, 그 고대어적(古代語的) 표현으로 아람계(系) 문자를 모체로 하는 구어(口語)인 팔라비어(語)의 번역 ·주석(註釋) 또는 종교문학이 출현하였다.
다수의 민족을 포함하는 제국인 만큼 국내적으로 여러 종교가 유행하였다. 페르시아인 마니가
창시한 마니교는 배화교에서 파생(派生)된 종교로 한때 궁정 내에도 신봉자가 있었으나, 국교인 배화교로부터 배척을 받아
금지되고 마니는 사형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수차에 걸친 종교회의의 결과
이단(異端)으로 지목된 그리스도교도에게는 페르시아 제국이 그
도피장소로 적합하였지만,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의
대립관계에 의한 정치적 압력이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교도의 생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景敎]는 그 본산(本山)을 이 나라의 수도 테시폰에 두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중국에까지 교세(敎勢)를 떨쳤다.
이 왕조의 조형적(造形的) 문화는 당시 세계 제1급의 것으로, 그 영향은 사방에 파급되었으며 경탄(驚嘆)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과 비잔틴 건축에 미친
양식상의 공헌, 뛰어난 공예(工藝)와 그림무늬의 도안(圖案) 등은 특기할 만하다. 동방에서는 주로 소그드인(人)과 투르크인의 교역에 의해 실크로드를 경유하여
중국에도 전해졌는데, 벽걸이 ·보석 ·직포(織布) ·동기(銅器) ·화장품 등이
서역(西域)의 진품(珍品)으로서 중국인의 환영을 받았다.
회화 ·건축 등의 유례(遺例)는 적지만, 조각과 공예에는 걸작이 많이 남아 있다.
조각작품의 대표적인 예는 대부분 마애(磨崖)한 부조(浮彫)로 《샤푸르 1세의
전승도(戰勝圖)》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도(敍任圖)》(둘 다 서남부 이란의 나크시에로스탐)와
타크이부스탄(서부 이란의 케르만샤)의 《호스로
2세의 서임도》 등이 있다. 회화에는 《호스로 2세의 제왕저록수렵도(帝王猪鹿狩獵圖)》(타크이루스탐)와 같은 《박육부조도(薄肉浮彫圖)》 외에 비샤푸르궁전터[宮殿址]에서
출토된 모자이크 인물상(像) 등이 있다. 공예작품은 특히 금은기(金銀器)를 중심으로 한 금속공예품이 우수하다. 이밖에 유리 ·조석 ·염직면에서도 고도의
수준이었음이 작품과 그밖의 회화 ·조각, 그리고 문헌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