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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王朝)[셀레우코스1,2,3세, 안티오쿠스1,2,3,4세]

영국신사77 2006. 8. 27. 23:53

셀레우코스 왕조(王朝)[셀레우코스1,2,3세, 안티오쿠스1,2,3,4세]

 

 

 

        셀레우코스 왕국[Seleucid Kingdom,BC 312~64]
 

   가장 강성했을 때는 유럽에서 트라키아(트라케) 지방부터 인도 변경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던 제국(BC 312~64, 248년간 존속).
 

   이 왕국의 창건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이 지역을 분리시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해체되어가는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들이 지리한 권력투쟁을 벌일 때,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했던 일이 있었으므로, 그에 대항하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도왔다.
 
   BC 312년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내준 병력을 사용하여, 가자에서 디미트리오스와 싸워서 이겼다. 곧이어 같은 해에, 얼마 안되는 병력으로 바빌로니아를 장악하고, 이곳에 셀레우코스 왕국을 건설했다.
 
    BC 305년부터 왕국의 힘을 키운 다음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까지,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서쪽에서는 BC 301년 잇수스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BC 281년에는 케르소네소스 트라키아를 병합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불만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BC 261년까지 통치했으며, 안티오코스 2세(BC 246~225), 셀레우코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 대왕(BC 223~187)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 때에는 철저한 행정개혁이 특징이었다. 그는 문관과 무관 사이의 경쟁으로 늘 긴장되어 있는 2중권력체제를 제거하고, 이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체제에서 따온 여러 요소들을 근대화시켰다. 즉 문관과 무관의 권력을 통합한 각지의 지방관(Stratgoi)들이 제국을 다스렸다. 서쪽은 사르디스가, 동쪽은 셀레우키아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아나톨리아와 그 휘하의 그리스 도시들을 지배함으로써, 중동지역 전역에 막대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헬레스폰토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사이를 지나는 전략요충지 타우루스의 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의 상업과 무역도 지배하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시리아 정착지, 그중에서도 특히 안티오크는 왕국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중동의 토착문화보다 그리스 풍습과 관습들이 우세했다. 셀레우코스 왕국의 전역사를 통해 보면, 지배층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마케도니아의 귀족계급 출신들이었고, 도시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그리스 문화의 주도권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기간(BC 175~163)중에 절정에 달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 문화 증진책이 도를 넘어,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에게 바치는 조각상을 세우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행동은 BC 165년에 시작된 마카베인들의 봉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4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마카베인들의 저항으로, 마침내 셀레우코스 왕국의 유대교도들에 대한 지배는 팔레스타인에 독립적인 유대 왕국을 창건함으로써 끝이 났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국은 BC 3세기경이 되면서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BC 190년 처음으로 로마인들에게 패배한 뒤로, 셀레우코스 왕국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에게 해의 그리스 도시들은 이미 셀레우코스의 명에를 벗어던졌으며, 카파도키아와 아탈리드 페르가몬이 독립했고, 다른 지역들도 켈트인들과 폰투스, 비트니아에게 빼앗겼다. 또 BC 3세기 중반경에는 파르티아·박트리아·소그디아나가 독립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코일레 시리아(레바논)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BC 200) 일시적이나마 아르메니아를 점령함으로써, 로마에게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을 어느 정도 확충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4세가 죽고(BC 164) 시리아의 콤마게네와 팔레스타인의 유대 지역을 잃은 후부터, 쇠퇴는 가속화됐다.
 
   BC 141년경에는 유프라테스 강 동편지역 전부를 잃었고, 디미트리오스 2세(BC 141)와 안티오코스 7세(BC 130)의 노력도, 이 왕국의 급속한 해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BC 64년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었을 때는, 이전의 강력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와 실리시아 동부지방에 한정되었으며, 그나마도 보잘것없는 지배력만 가지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1세(Seleucos Ⅰ Nicator)

 
*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358/354 마케도니아 에우로포스~281. 8/9 트라키아 리시마키아 근처.

 

   마케도니아의 장군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BC 323)에 벌어진 내분 속에서 그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고, 다시 시리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한 대제국의 왕이 되었다.

 

                             초기생애와 권력을 잡기까지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이었던 안티오코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알레산드로스 수하의 장교로서 페르시아 제국 정복전에 참전했고, BC 326년에는 히다스페스 강변에서 마케도니아 보병대를 이끌고 인도의 포루스 왕과 싸웠다.

 

   BC 324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동화시키려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수사에서 집단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이때 셀레우코스도 박트리아의 왕 스피타메네스의 딸인 아파마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하지 않은 마케도니아의 귀족은 셀레우코스뿐이었다.

 

   BC 323년에 알레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셀레우코스는 헤타이로이(hetairoi : 동료들) 기병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섭정왕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의 총독(satrap) 프톨레마이오스를 축출하려고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이집트에 가서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가담했다.

 

   BC 321년 제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바빌론의 총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애꾸왕)가 페르디카스의 후원자였던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에 대한 정벌전의 지휘를 맡았다.

 

   BC 317년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를 도왔지만, BC 316년 에우메네스가 처형된 뒤, 안티고노스는 그에게 영지의 수입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도망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갔다.

 

   BC 316~312년에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편의 제공으로 이집트에 머물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와 리시마코스(트라키아의 왕), 카산드로스(마케도니아를 요구한 사람)가 동맹을 맺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동맹전쟁(BC 315~311)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이 되어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군대를 지휘하여, 시리아 남부 가자 전투(BC 312)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디미트리오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로 다시 주의를 돌려, BC 312년 8월에 작은 병력으로 바빌론을 다시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이 사건은 마케도니아 력으로 BC 312년 디오스(Dios) 1일(10. 7), 바빌로니아 력으로는 BC 311년 니산(Nisan) 1일(4. 3)로 기록되어 있다.

 

   안티고노스는 바빌로니아의 동쪽은 장군인 니카노르에게, 서쪽은 아들인 데메트리오스에게 공격하게 했지만, 결국 셀레우코스를 쫓아내지 못했다. BC 311년 안티고노스는 다른 적들과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셀레우코스는 여기서 제외시켰다.

 

                             왕조의 기반 강화

 

   그뒤 몇 년 간 셀레우코스의 치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 기간 동안 ,그는 이미 획득한 지위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BC 305년 다른 '후계자'(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디아도코이'라고도 함)들처럼 그도 '왕'(바실레우스)이라 자칭했다. 그는 이란의 동부지역(위쪽 총독령들)을 지나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찬드라굽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고, 영토를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BC 303 년, 인도에서의 전쟁을 끝낸 것은, 서부지역에서 정세가 변화한 탓도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 부자에 대항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을 때, 셀레우코스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BC 302년 겨울에 소아시아로 되돌아가,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다(BC 301).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연합국들간에 분할되었는데, 셀레우코스는 시리아를 차지했다. 그런데 그 당시 시리아 남부지방인 코일레 시리아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것이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벌인 시리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셀레우코스는 그 지방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왕국의 수도를 티그리스 강 유역의 셀레우키아에서 오론테스 강 유역의 안티오크로 옮겨,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데 그쳤다(BC 301~300).

 

   프톨레마이오스는 리시마코스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딸 아르시노에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을 본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에게 청혼하여, BC 298년 시리아의 로수스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가 실리시아·티레·시돈 등의 영토를 요구하자, 데메트리오스와 맺은 우호관계에도 금이 갔다.

 

   BC 294년 셀레우코스의 궁정에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아파마가 낳은 셀레우코스의 아들 안티오코스가 새어머니 스트라토니케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건강까지 해쳤다. 셀레우코스는 아들에게 스트라토니케를 주고, 그를 군의 총사령관직에 임명하여 위쪽 총독령을 맡기고, 공동섭정의 지위도 주었다.

 

   BC 285년 셀레우코스는 디미트리오스를 사로잡음으로써, 아시아를 정복하려 했던 그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디미트리오스는 아파메아에 억류되었다가 ,BC 283년 그곳에서 죽었다. 이어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가(家)의 불화에 관계하여, 그의 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암살했다.

 

   BC 281년 2월 리시마코스는 코루페디움에서 셀레우코스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왕국을 차지했다.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을 다시 건설한다는 목표의 실현이 바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 쳐들어가기 위해 유럽을 횡단했다.

 

  그러나 BC 281년 8월말 또는 9월초에, 셀레우코스는 이집트 왕위의 '후계자'로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셀레우코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1세는, 셀레우코스의 유골을 셀레우키아에 묻고, 그에 대한 사후 숭배를 하게 했으며, 그를 제우스 니카토르라는 이름으로 공경하도록 명령했다.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강력한 군주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의 치세 동안에 최대의 판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는데 크나큰 관심을 쏟아, 신도시도 많이 건설했다. 또한 학술적인 조사를 장려하여, 파트로클레스가 카스피해를 탐험했고, 메가스테네스가 갠지스 강을 조사했다.

 

   그의 인상적인 얼굴과 당당한 인격을 잘 전해주는 청동흉상이 이탈리아의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현재 나폴리에 보관되어 있다.

 

                                                                                    J. Seibert 글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셀레우코스1세(BC358~BC280) 시리아

 

   알렉산더 대왕의 부장으로 동방정벌에 참가했고, 알렉산더대왕 사후 BC321년 바빌로니아총독에 임명되었다. 한때 에우메네스와의 전투에서 져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곧 옛 영토를 수복하였고, 이어 이란 박트리아 인도 북서부까지 원정하였다.

 

   안티오고스1세를 입수스 전쟁에서 물리친 이후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원정을 준비하던중, 전날의 동맹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한다.

 

    

 

 

           안티오코스 1세 [Antiochos I, BC 324~BC 262?]

 

시리아의 왕(재위 BC 280~BC 262?).

셀레우코스왕조의 초대 왕인 셀레우코스 1세의 아들. 광대한 영토에 많은 도시를 세워 지배의 기초를 다졌다.

 

 BC 292년 이후 공동통치자로서 부왕의 영토 중 동쪽 부분을 다스리다가, BC 281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왕이 되었다. 치세기간에는 많은 곤란에도 불구하고 부왕의 사업을 대부분 유지하였다.

 

   BC 279년 그리스안티고노스 2세와 조약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소아시아에서는 BC 276∼BC 275년 침입자인 야만족 켈트인()을 격파하여 소테르(Sōtēr:)의 칭호를 받으며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에게 빼앗겼고, 또 신흥 세력 페르가몬에우메네스 1세에게도 져서 점차 영토를 잃었다.

 

 

제목 : 안티오코스 1세 왕묘
출처 : © encyber.com
설명 : 터키의 아나톨리아 남부의 소도시 아디야만주 북동쪽. 시리아의 왕(재위 BC 280∼BC 262?).

관련

   항목

: 넴루트다이유적, 시리아의 역사, 안티오코스 1세

 

제목 : 안티오코스 1세 왕묘 사자상
출처 : © encyber.com

 

 

 

                            [터키 여행지]넴루트다이 유적지   
http://blog.naver.com/tiger6107/140009052407
넴루트다이유적지의 머리석상
 

안티트로스 산맥 남동쪽 기슭 넴루트다이(넴루트산)에 있는 거대한 무덤유적으로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콤마게네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재위 BC 69∼BC 34)가 건설하였다. 해발 2,150m의 산 정상에 돌을 잘게 부숴 만든 높이 50m, 지름 150m의 인공산이 있으며, 그 밑에는 곳곳에 바위 덩어리가 흩어져 있다. 1953년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지하널방으로 통하는 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인공산 정상 아래 북·동·서 세 방향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테라스가 있다. 북쪽 테라스에는 길이 80m의 벽이 세워져 있는데, 양쪽 끝에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다. 동쪽 테라스에는 돌로 된 단 위에 높이 약 9m에 이르는 신들의 거대한 석상이 있다. 석상은 5개로서 양손을 무릎에 얹고 의자에 앉아 있는 형상이며, 머리 부분은 아래로 굴러떨어져 있다.

서쪽 테라스에도 안티오코스 1세를 비롯한 여러 신들의석상이 있다. 몸체는 크게 부서지고 발부분만 남아 있으나 굴러떨어진 머리 부분은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석상 뒤쪽에는 4변이 각각 4m에 이르는 석판에 '왕의 점성술사'라는 부조가 새겨져 있다. 1987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안티오코스 2세[Antiochus II Theos]


 

본문


 

   BC 287경~246.

   중동을 지배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261~246 재위).

 
   BC 261년 아버지 안티오코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통치기간 대부분을 아나톨리아의 많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이집트와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마케도니아의 통치자 안티고노스와 의기투합해서 동맹을 맺고, 아버지가 입었던 피해를 복수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항하여 제2차 시리아 전쟁(BC 259~255)을 일으켰다.
 
  안티고노스가 해상에서 이집트 함대를 쳐부수는 동안, 안티오코스 2세는 밀레투스, 에페수스, 페니키아 해변을 비롯하여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다시 찾았다. 안티오코스는 밀레투스를 되찾은 뒤 그 지역의 독재자를 쫓아냈다.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신으로 섬겼다. 뒤에 '테오스'(신)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는 제국 전체에 걸친 숭배의식을 정립시켰다. 이오니아의 다른 도시들에도 자유를 주었으며, 나아가 조상들이 했던 대로 자신의 영토에 도시 건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안티오코스는 BC 253년경 첫번째 왕비인 라오디케와 헤어지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인 베레니케와 정략 결혼했다.
 
   그는 BC 246년 라오디케에게 죽음을 당했고, 두 여왕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가 뒤를 이었으며, 또다른 아들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에 관한 영어로 된 1차 자료에는 에드윈 로버트 베번의 〈셀레우코스 왕가 The House of Seleucus〉(2권, 1902, 재판 1966)가 있다.

 

 

 

 

                                      * 라오디케 [?~?]
          
요약
시리아왕국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
원어명 Laodikē
국적 시리아
활동분야 정치
본문

   안티오코스 2세와 강제적으로 헤어졌고, 그 뒤 안티오코스 2세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4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자 안티오코스 2세는 라오디케와 다시 결혼하고, 라오디케가 낳은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후계자로 지정한다.

이후 라오디케는 자신을 몰아냈던 베레네케 모자와 이집트에서 온 시종들, 그리고 자신의 남편인 안티오코스 2세도 독살한다. 이 소식을 들은 베레니케의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제3차 시리아전쟁(BC 246∼BC 241)을 일으켜 라오디케를 참수하였다.

 

 

 

 

          셀레우코스 2세[― 二世, Seleucos II Callinicus]

본문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25.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의 아들이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4번째 왕(BC 246~225 재위).
 

   안티오코스 2세는 아내 라오디케(셀레우코스의 어머니)를 버리고, 프톨레마이오스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그러나 BC 246년 안티오코스는 다시 베레니케 곁을 떠나 소아시아에서 지내던 라오디케와 셀레우코스에게 갔다. 라오디케는 그를 독살하고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왕으로 세웠다. 그동안 안티오크에 있던 그녀의 도당들이 베레니케를 살해했다.
 
   베레니케의 오빠이며 방금 이집트의 왕위를 계승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셀레우코스 영토를 침공해 동부지역을 병합시켰다. 아울러 그의 함대가 소아시아 해안을 휩쓸었다.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 내륙 지방에 피해 있다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로 돌아간 뒤 시리아 북부와 이란 인근지역을 되찾았다.
 
   셀레우코스는 안키라(BC 235경)에서 라오디케가 지원하는 자신의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에게 패해, 타우루스 산맥 너머 지역을 동생과 반도의 다른 실력자들에게 양도했다. 그중에서도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의 통치 아래 가장 크게 발전했다.
 
   안티오코스 히에락스는 BC 228년 또는 BC 227년경에 트라키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는 1년 뒤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셀레우코스 3세[― 三世, Seleucos III Soter]


 

본문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23.

셀레우코스 왕조의 5번째 왕(BC 225~223 재위, 2년간).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의 장남이다. 사촌 아탈로스 1세에게서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을 되찾는 과업에 착수하여 우선 안드로마코스 장군을 보냈는데 그는 아탈로스에게 참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지만 프리지아에서 암살되었다. 남동생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이 그 뒤를 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 三世, Antiochus III]

본문

별칭은 Antiochus the Great, Antiochus Megas.

BC 242~187 이란 수사 근처.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223~187 재위).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

셀레우코스 2세의 아들로 형 셀레우코스 3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그의 형제 알렉산드로스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켰다. 이듬해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참칭하자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의 충고에 따라 남부 시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벌였던 이집트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몰론으로 기수를 돌렸다. BC 220년 멀리 티그리스 강의 제방에서 몰론을 격파하고 메디아의 북서부지역인 아트로파테네를 정복했다. 그 직후 안티오코스는 헤르미아스를 죽임으로써 전대(前代) 통치의 영향력 대부분을 제거했다. 같은 해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에서 왕을 자처했지만 자기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안티오코스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란사).

이제 안티오코스는 소위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을 벌이는 데 거칠 것이 없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인피에리아,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BC 217년 시리아의 가장 남쪽 도시인 라피아에서 헬레니즘 이집트 왕국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의 군대(7만 5,000명 추정)와 접전을 벌였다. 그의 군대는 6만 8,000명이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집트군의 좌익을 패주시켰지만 그의 군대는 중앙의 방진(方陣:중무장한 보병의 밀집대형)이 이집트의 새로운 방진에 의해 격파당했다. 뒤이은 평화조약에서 안티오코스는 셀레우키아인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는 BC 213년 아카이오스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BC 212~205)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카스피 해의 동남부)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 아라코시아·드란지아나·카르마니아 등 이란의 속주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귀환한 그는 BC 205년 페르시스에 도착했으며, 페르시아 만 동부 해안의 상업국가 게르하의 시민들로부터 은 500탈렌트를 조공으로 받았다. 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은 후 안티오코스는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두 사람은 이집트 밖의 프톨레마이오스 영역을 분할할 것을 꾀했다. 안티오코스는 남부 시리아, 리키아, 실리시아, 키프로스를, 필리포스는 서부 소아시아 지방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차지하기로 했다. 안티오코스는 코일레시리아에 침입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장군 스코파스를 BC 200년에 요르단 강의 발원지 근처인 파니온에서 격파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그러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는 로도스,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에 원정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했다. 안티오코스는 그를 돕지 않았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다(→ 로마사).

만족할 줄 모르는 팽창욕에 휩싸인 안티오코스는 BC 198년에 페르가몬 왕국 일부, BC 197년에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를 점령했다. BC 196년에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일찍이 셀레우코스 1세가 BC 281년에 획득한 바 있었던 트라케에 진출하여 이곳의 종주권을 선언함에 따라 로마와의 지겨운 소모전과 외교전이 뒤따랐다. 로마는 안티오코스에게 여러 번 사절을 파견하여 유럽에서 물러날 것과 소아시아의 모든 자치 공동체들을 자유롭게 놓아둘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상 셀레우코스 제국의 서쪽 영역의 해체를 의미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당연히 거절했다. 로마와의 긴장상태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에서 도망하여 BC 195년 안티오코스에게 왔고 그의 고문이 되었다.

안티오코스는 이전에 자신이 저버렸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필리포스·로도스·페르가몬, 그리고 아카이아 동맹은 로마와 결합했다. 그리스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불만을 가진 아이톨리아 동맹만이 유일하게 안티오코스에게 자신들의 해방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했으며 그를 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안티오코스는 이들에게 의지해 BC 192년 가을 단지 1만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하여 에우보이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중부 그리스에서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BC 191년 2만 명 이상의 로마군이 트라케에서 안티오코스의 지원병력을 차단했고 테르모필레(그리스에 있음) 고개에 있던 그를 포위공격했다. 잔존부대와 함께 그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도망했고 이곳에서 바다를 통해 에페수스로 건너갔다. 그의 함대는 로마·로도스·페르가몬 연합해군에게 완전히 괴멸당했다. 로마군은 BC 190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넜다. 안티오코스는 이제 로마가 이전에 제시했던 조건에 따라 협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에게 먼저 타우루스 산맥 이서 지방에서 철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안티오코스는 시필로스 산 근처의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잡다하게 끌어모은 7만 명의 병력으로 로마와 그 동맹군 3만 명을 맞아 싸웠다. 동부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파메아 평화조약을 맺고 유럽과 타우루스 이서 지방의 소아시아에 위치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했다. 아울러 보상금으로 12년 동안 1만 5,000탈렌트를 지불해야 했고 그의 코끼리와 함대를 양도했으며,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포함한 인질을 바쳤다. 그의 왕국은 이렇게 하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부 이란으로 축소되었다. BC 187년 안티오코스는 크게 부족한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 공물을 강요했던 수사 근처의 한 바알 신전에서 살해되었다.

H. Volkmann 글

 

 

 

 

 

 

 

        셀레우코스 4세[Seleucos IV Philopator,
                            BC 187~175, 12년간 재위]
 

Seleucos는 Seleucus라고도 씀.

BC 217경~BC 175.

셀레우코스 왕조의 7번째 왕(BC 187~175 재위).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아들이다. 셀레우코스 4세가 물려받은 제국은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와 전쟁(BC 190~189)을 하기 전에 지배했던 것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당한 규모여서 시리아(실리시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 그리고 이란 근접지역(메디아와 페르시아)으로 이루어졌다. 로마가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앗아가 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셀레우코스는 지출이 많은 모험을 피하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자 후계자인 디미트리오스가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것도 이같은 현상유지정책과 조심성의 한 가지 이유였다. 셀레우코스가 175년 중신 헬리오도로스에 의해 암살되자 동생인 안티오코스가 왕위에 올랐다.

 

 

 

 

           안티오코스 4세[― 四世, Antiochus IV Epiphanes]


 

본문


 

Antiochos Epimanes('狂人')라고도 함.

(Epiphanes는'신의 顯現'이라는 뜻)

BC 215경~164 이란 타바에.

헬레니즘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BC 175~164 재위).
[개요]

그리스 문화와 제도를 장려한 군주로 가장 유명하다. 유대교를 억압한 결과 마카베오 전쟁을 야기했다(→ 헬레니즘, 이스라엘, 마카베오가).

 

[초기 치적]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의 셋째 아들로, BC 190~189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아버지가 패배하자 BC 189~175년 로마에서 인질생활을 했다. 이때 로마의 제도와 정책을 배우고 그것에 경탄했다. 그의 형제 셀레우코스 4세는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오스와 그를 교환했다. 셀레우코스가 반란자 헬리오도로스에게 살해되자 안티오코스는 그를 내쫓았다. 시리아의 정정(政情)이 불안했던 이 시기에 이집트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은 코일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등 이전에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시리아와 이집트 양측은 모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BC 173년 안티오코스는 로마와 안티오코스 3세가 맺은 아파메아 조약(BC 188)에서 주기로 한 전쟁 배상금 나머지를 모두 갚았다(→ 로마사, 고대 이집트).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먼저 침략함으로써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에 선수를 쳤다. 펠루시움과 카시온 산 사이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정복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을 점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의 조카였으며(안티오코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음), 안티오코스는 로마가 간섭할 아무런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보호자 자격으로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누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게 대항 정부를 세우도록 간청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시리아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펠루시움에 강력한 부대를 배치하여 이집트에 대한 접근에 안전을 기했다.

BC 169(또는 168)년 겨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모든 헬레니즘 왕국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의 형제, 누이와 제휴를 맺고 로마에 새로이 원조를 요청했으므로 안티오코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안티오코스의 함대는 키프로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키프로스의 총독은 그에게 섬을 넘겨주었다. 안티오코스는 BC 168년 이집트에 재차 침입하여 키프로스와 펠루시움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하(下)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기반은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22일 로마군이 피드나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물리치자 안티오코스가 거둔 승리는 빛을 잃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 대사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놀란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지만,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안티오코스가 서 있는 땅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을 벗어나기 전에 명확한 답변을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같은 공개적인 모욕에 당황한 왕은 곧바로 요구에 따르기로 동의했다. 로마의 간섭으로 다시 현상유지가 이루어졌다. 이집트가 지배권을 주장했던 남부 시리아의 영유권이 허용됨으로써 안티오코스는 영토의 상실을 피할 수 있었다.

 

[왕국의 헬레니즘화 노력]

그는 동방인들, 즉 비(非)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여 육성함으로써 경제적·사회적으로 왕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즉위하기 전에도 이미 안티오코스는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건설과 극장 장식에 헌금을 냈다. 그는 오론테스의 안티오크에 에피파니아(그의 이름을 본떴음)라는 구역을 새로 건설하여 시를 확장했다. 이 구역에다 도수관(導水管), 공회당, 시장,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에게 바치는 사원을 세웠다. 그를 아시아의 '소테르'(해방자, 구제자)로 숭배하는 바빌론은 그리스인 식민도시가 되어 자유가 보장되었다. 또다른 에피파니아가 아르메니아에 세워졌다. 엑바타나(페르시아에 있음)도 에피파니아로 불렸고 그리스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여러 도시들은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동전을 주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페르시아 만에 있는 안티오크의 조폐소는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어귀 지역 사이의 해양무역에 기여했다(→ 바빌로니아).

안티오코스의 헬레니즘화 정책이 번성하고 있던 동양의 사원조직, 특히 유대 사원과 갈등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3세 시대 이래 유대인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다. 유대인은 두 파벌, 즉 종교적인 정통 하시드파(독실한 자)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했다. 재정상의 이유 때문에 안티오코스는 개혁파를 지지했고, 상당한 자금을 받은 대가로 대제사장 야손에게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세우고 젊은 층의 교육에 그리스 방식을 도입하도록 허락했다. BC 172년 안티오코스는 더 많은 공납을 받고 야손의 자리에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BC 169년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서 전쟁중일 때 야손은 성채만 빼놓고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경쟁자 메넬라오스의 지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BC 167년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을 강습하여 탈환하고 헬레니즘화를 강화했다. 예루살렘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시리아군이 영구히 주둔하게 되었다.

 

[유다스 마카베오의 반란]

그리스인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안티오크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야훼 숭배와 유대인의 모든 의식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왕의 조상(彫像)을 우상으로 세우며 그 발 밑에 제물을 놓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신성 모독에 대항하여 반(反)그리스 유대인 지도자 유다스 마카베오는 게릴라전으로 하시드파 봉기를 일으켰고 수차에 걸쳐 안티오코스가 진압하라고 보낸 장군들을 무찔렀다. 유다스는 부분적인 사면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의 아크라 지구를 제외한 유대 지역 전부를 장악했다. 마침내 BC 164년 12월 제우스의 제단을 부수고 사원을 다시 정화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확실히 하시드 운동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그 힘이야말로 약 1세기에 걸쳐 독립 유대 국가를 유지하도록 만든 배경이었다. BC 166년에 안티오코스는 안티오크 근처 다프나이에서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세상에 그의 힘을 과시했는데도 이때에 반란이 시작된 것을 보면 유대인의 투쟁정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방진군(方陣軍)과 로마 무기로 무장한 500명의 용병을 포함한 4만 6,000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500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그뒤 안티오코스는 제국의 동쪽을 위협하던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을 벌여 그 지역에서 세수입을 회복했으며, 그에게 등을 돌린 아르메니아의 아르탁시아스에게 종주권 인정을 강요했다. 또한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크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아라비아 해안에 원정대를 보냈다. 그는 BC 164년말 페르시스의 타바에(또는 가바에:지금의 에스파한으로 추정됨)에서 병으로 죽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엘람(지금의 이란에 있음)에서 나나이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벌로 죽었다고 믿었다.

H. Volkmann 글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 
http://blog.naver.com/weddingkgm/140019789667
윤요셉 [ E-mail ]
  안티오쿠스4세 박해에 대하여..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특히 헬레니즘세계는 당시 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통치하기 훨씬 이전부터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가운데는 철저한 헬라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부자들과 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그 사회적인 지위 덕택으로 왕궁을 드나들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더욱이 이 기간에는 토비아스와 오니아스 사이에 심한 경쟁이 있어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 특히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대제사장 오니아스 2세는 "돈을 아주 사랑하는 자"로서 프톨레미 2세에게 매년 내는 20달란트 세금내기를 거부하였다. 더욱이 토비아스의 아들 요셉은 전국의 세리로서 자청하고 나섰다. 요셉과 그의 가문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가문은 나라에서 최고의 직책들을 맡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대제 때에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은 프톨레미에서 셀류커스에게로 이양되었고, 이에 따라 요셉과 그의 추종자들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이 새 왕조에 그들의 충절을 맹세하였다. 예루살렘에는 돈을 주고 권좌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토비아스가의 시몬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셀류커스 4세 때에 총리대신을 충동질하여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죄를 뒤집어 씌워 몰아내고 성전의 성금을 가로채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소동이 일어났으며 오니아스 3세는 셀류커스 궁정으로 달려가 이 소요를 평정해 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다. 이 두집안의 반목은 형 셀류커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안티오쿠스 4세때 그절정에 달하였다.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 특히 친 시리아파 귀족들은 아티오쿠스가 등극하자 그들의 목적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친 이집트파인 합법적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그들에게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니아스 3세가 잠깐 딴 나라에 간 사이에 안티오쿠스 정부의 찬동을 얻고 왕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동생인 예수, 즉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 물론 아티오쿠스는 그의 임명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루살렘을 헬라적인 양식에 따라 재정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경기장이 세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풍의 의목을 입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 특히 핫시딤이나 경건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몹시 분노했으며 헬라주의의 영향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새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대제사장의 임명은 하나님의 소관으로서, 이방 왕이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일한 위로는 그래도 대제사장 야손이 정통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때에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토비아드가문의 도움과, 상대방보다 더 많은 뇌물을 왕에게 바치고, 야손을 몰아내고 그대신 대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넬라우스의 추종자들은 공대적으로 그리스의 생활방식을 고취하며 정통파에 대항했다. 이 두 파의 적대 감정은 더욱더 심화되어 드디어 헬라파와 정통파 사이의 싸움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중에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야손은 예루살렘으로 달려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잇따라 일어나는 싸움들은 "유대인 대 시리아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대인 대 유대인"의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일어섰고 모든 헬라화 정책에 항거하였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원정에서 돌아와, 그가 이미 공포한 대로 헬라 문화와 종교를 통하여 그의 왕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정책을 계속 밀고나가며 팔레스타인도 이 정책대로 다스리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심은 로마의 권세가 날로 커져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그의 왕국을 통합시키겠다는 필요에서 더욱더 굳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는 자신의 심복 메넬라우스를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그의 왕권을 모독한 행위로 간주하고 철저히 복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메넬라우스를 복직시켰다. 그리고 군인들을 풀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토록 했다. 그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기명들을 훔쳐냈다.(제1마키비서 1:20-28) 비록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주의자들의 후원을 얻고 있기는 하였지만, 그의 헬라화 정책은 대부분의 유대민중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드디어 그는 유대교를 소탕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바빌론 포로 때부터 유대교 신앙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온 유대교의 제도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유대교의 희생제사를 금지하고 할례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게다가 토라(즉 율법서)찍고 불살랐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리를 먹도록 했으며, 전국 각처에 건립되어 있는 우상제단에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러한 그의 악랄한 행동은 성전 뜰에 제우스 제단을 건립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는데 거기에 안티오쿠스 자신의 모습을 담은 신상도 세웠다 이 제단이 바로 다니엘서에 있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있은 후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제 2마카비서 6-7장에 있는 "엘르아살과 7형제의 순교 이야기"가 바로 이 당시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신앙을 망살시키려는 정부 기관원들을 피하여 도시과 마을들을 떠났다.

 

 



발췌..
신구약 중간시대(출판사: 컨콜디아사, 임태수 옮김)

 

 

 

 

 

 

2]셀레우코스왕조 (BC358-BC163)


이 왕조는 귀족 안티오코스가 세운 왕국이라 안티오코스(혹은 안티고노스)왕조라고 한다.
셀레우코스1세 (BC358-280)는 시리아제국의 셀레우코스왕조를 건설한 왕이다.
마케도니아의 귀족 안티오코스의 아들로 바빌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에우메네스와 싸워 패하여 이집트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회복하여 영토를 이란과 마케도니아와그리고 인도북서부까지 다스리고 찬드라굽타와도 관계를 맺었다.
BC312년부터 왕조를 열고 왕호를 사용하였다.
안티오코스1세(BC280-262)는 광대한 영토에 자기 이름의 도시를 많은 건설하여 지배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 때에 만든 도시 중에 *시리아 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이 성경에 등장한다.
또 시리아의 수도겸 맹주로 있었던 *다마스쿠스(다메섹)도 설명하려고 한다.
지중해연안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빼앗아 돌레마이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 들린 곳이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에게 패하여 영토를 잃었다.
안티오코스2세(BC261-247)는 부왕이 잃은 땅을 회복하였다.
첫 번째 부인이 라오디케(라오디게아)로 왕비의 이름으로 건설한도시가 7교회의 하나이다.
*밀레토스(밀레도)에서 신으로 불리었다.
안티오코스3세(BC247-187)는 알렉산더처럼 되려고, 그를 흉내내어 그가 간 길을 따라 인도까지 침공하였다.
지중해로 진출하려다가 동진 해오는 로마와 충돌하여 제1차와 제2차 마케도니아전쟁을 하였다.
BC191년 로마에 대패하여 소아시아를 분할하여 주었다.
제1차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 싸운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전쟁에패하여 이곳으로 도망 왔으나 로마가 신변을 요구하자 한니발은 자살하였다.
안티오코스4세(BC215-163)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현존하는 신)이라고도 자칭 하였다.
로마서 볼모로14년간 있다가 부왕의 죽음으로 즉위하여 헬레니즘문화의 제국을 건설하려고 유대교를 박해하다가 마카베오(마카비)가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전쟁에 패하여 하스몬왕조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BC163년에 동방원정에서 죽고 왕조는 쇠퇴하였다.

*시리아 안디옥 [
페르가몬지도
]
이 도시는 헬라네즘의 문화가 혼합된 동방의 여왕도시라고 불리고 당대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도시이다. 스데반 박해 시에 이곳으로 피해온 신자들이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것이 첫 이방교회이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나바를 권유사로 보내고, 처음으로 이 교회에서 크리스천(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구제사업도 창시하였다(행11:20-30).
7집사 중에 바나바와 사울을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니 이것이 선교사업의 시초이다.(행13:1-4)
이 발걸음이 실루기아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실루기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바울기둥이고 다른하나는 바나바의 기둥이라한다.
전세계와 우리에게까지 전파된 것은 이 교회의 지대한 공로와 덕분이다.
예루살렘의 가뭄에도 돕고, 다수의 교역자를 배출한 사람 중에 요한의 제자 이그나시우스 교부는 AD110년에 순교하였다. 사도행전 15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이다.
율법을 복음에 어떻게 적용 할 것인가를 사도들이 의논하여 안디옥교회에 답한 것인데, 율법 중에 3가지만 포함하기로 정하였다.
1, 제사음식을 먹지 말자.
2, 목 졸라 주인고기와 피를 먹지 말자.(홍수이전에는 전 민족이 안 먹었다. 창9:4)
3, 음란한 행동을 삼가 하자.
사견인데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복음에 왜 율법이 다시 들어와 베드로의 말처럼
'사도들도 메지 못할 멍에(율법)'를 강조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율법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복음을 외면하였다면 과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가?
한 번쯤 생각해 볼일이다.
AD1870년경에 선교사들이 다시 전도하여 성도가 늘어나고 현재는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셀레우코스 1세의 동전 >

*다마스쿠스(다메섹) [위치지도(사라센)]
시리아 고원(700m)에 있는 이 도시는 BC2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시로 현재도 수도이다. 도시의 중심에 바라다강이 흘러 도시는 동서로 나뉘어 지고, 남쪽에는 구 시가지로 옛 성채, 대 사원, 시장이 있고 유대교인의 거주지이다.
남쪽의 교외 땅은 회교인의 거주지이다.
북쪽은 근래에 발전하여 고급상점, 관청, 호텔, 병원이 있다.
서쪽은 시리아대학이 있다. 바라다강이 주는 농산물이 풍부하고, 견직물, 융단, 가죽세공, 화학, 유리, 시멘트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고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의 통로로 교통과 상품교역이 성행하였고, 순례지로도 유명하며 회교의 4대 성지이다. 기독인은 6만쯤 되나 정치, 경제, 문화에 유력한 집단이다.
BC10세기에는 아랍인의 수도로 있다가 아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BC723년)과 함께 망한 후에 쇠퇴하다가 BC66년에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다시 번영하였다.
AD635년에 회교가 침입하여 회교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AD1076년에 셀죽투르크가 점령하였고, 그 후 십자군의 원정을 여러 번 물리쳤다.
13세기경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30만 시민이 학살되고 철저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AD1516년에 오스만제국이 다시 건설하였고, 1차 대전 후에 프랑스식민지로 있다가
AD1946년에 독립하였다. 도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었다. 


 *다마스쿠스(다메섹) [위치지도(사라센)]
시리아 고원(700m)에 있는 이 도시는 BC2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시로 현재도 수도이다. 도시의 중심에 바라다강이 흘러 도시는 동서로 나뉘어 지고, 남쪽에는 구 시가지로 옛 성채, 대 사원, 시장이 있고 유대교인의 거주지이다.
남쪽의 교외 땅은 회교인의 거주지이다.
북쪽은 근래에 발전하여 고급상점, 관청, 호텔, 병원이 있다.
서쪽은 시리아대학이 있다. 바라다강이 주는 농산물이 풍부하고, 견직물, 융단, 가죽세공, 화학, 유리, 시멘트 등의 근대공업도 성하다고 한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의 통로로 교통과 상품교역이 성행하였고, 순례지로도 유명하며 회교의 4대 성지이다. 기독인은 6만쯤 되나 정치, 경제, 문화에 유력한 집단이다.
BC10세기에는 아랍인의 수도로 있다가 아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BC723년)과 함께 망한 후에 쇠퇴하다가 BC66년에 로마의 속국이 되면서 다시 번영하였다.
AD635년에 회교가 침입하여 회교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AD1076년에 셀죽투르크가 점령하였고, 그 후 십자군의 원정을 여러 번 물리쳤다.
13세기경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30만 시민이 학살되고 철저히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
AD1516년에 오스만제국이 다시 건설하였고, 1차 대전 후에 프랑스식민지로 있다가
AD1946년에 독립하였다. 도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었다.

*다메섹 (행9:11)
아브라함이 조카롯을 구하러 이 성의 좌편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가 롯을 구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 성의 사람이다.(창14:15-16, 15: 2)
다윗과 솔로몬이 이 성을 점령하였다.(삼하8:5-6, 왕상11:24-25)
이사야는 '이 성이 무너진다'라고 하였고, 예레미아는 '이 성이 불탈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아모스는 '벌을 내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사17:1, 렘49:27, 암1:3)
그 후에 위의 예언은 기록된데로 마케도니아, 로마, 회교, 몽고, 프랑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네로가 기독교인 박해 때에 이곳에 있는 1만 신자를 학살하였다고 한다.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하여 이 도시로 가다가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 부름을 받고 직가라는 거리에 사는 유다 집에서 거하였다.
이 성에는 신자가 많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황의 교구처가 되었다.
현재는 영국인의 선교로 신자가 6만쯤 된다고 한다.

*밀레토스 (밀레도)
BC6세기경에 그리스계통의 이오니아인의 식민도시로 에베소 다음가는 큰 도시이다.
이 도시서 출발한 자연철학을 밀레토스 학파라고 한다.
그들은 사물의 근원을 신화가 아닌 자연의 무한한 것이나, 물, 공기 등이 물질의 근본이라는 주장하는 학파로 처음으로 신에서 자연을 향한 눈을 돌린 것이 큰 변화된 사상이다.

*밀레도 [
페르가몬지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 들려 에베소 장로들을 오라고하여 권면하였다.(행20:17-35) 드르비모가 병으로 이곳에 남았다.(딤후4:20)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출옥하여 다시 이곳에 왔었다고 한다.

<다마스쿠스( 다메섹 ) 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