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프톨레마이어스 王朝

영국신사77 2006. 8. 27. 23:40

                  프톨레마이오스 王朝

                               [Ptolemaeos dynasty]

요약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를 지배한 마케도니아인의 왕조(BC 305∼BC 30).
본문
알렉산더 대왕 / 동상의 몸과 가면은 파라오 스타일의 조각이나, 얼굴은 그리스 자연주의 기법으로 조각된 석상.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워 약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디아도코이(Diadochoi)의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하여 창건되고, 왕가는 마케도니아 귀족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하여 발전의 기틀이 잡힌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3세 시대에 확대 발전하여, 최대의 판도로써 번영을 구가()하였고, 수도 알렉산드리아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뒤 내분·내란, 외정()의 실패 등에 따라 점차로 쇠퇴하였으며, 특히 BC 2세기 초 로마와 접촉하고부터 차차 로마의 동방진출의 제물이 되어, 결국 BC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프톨레마이오스 15세(케사리온:클레오파트라카이사르의 아들)의 죽음으로써 왕국은 멸망하였다.

 

   국왕은 관료제도와 용병제도를 기반으로 엄중한 통제경제를 실시하였고, 절대군주로 군림하여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번영은 눈부실 정도로 훌륭하였으며, 오래도록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 마케도니아의 정복
  •    BC 332년 가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억압 통치를 기꺼이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해방자로 환영을 받았고, 결국 한번도 싸우지 않고 이 나라를 차지했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까지 가서, 그리스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아몬 신탁소를 방문했다. 이 신탁소는 알렉산드로스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가졌더라면, 파라오의 전통 속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
  •    9년후인 BC 323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제국은 여러 장군들의 분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집트 행정수반인 사트라프의 지위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18년 되던 해인 BC 30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대한 비문은, 페르시아인들한테서 땅을 빼앗은 그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에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 왕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후계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인 뒤에 나타난, 여러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이집트는 가장 부유해서, 그후 300년 동안 거의 내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꾸준히, 그리스화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와 관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 시의 성장과 그 중요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왕조가 가진 마케도니아-그리스적 성격은 적극적으로 보존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나일 삼각주 북서쪽에 있는 라코티스라는 작은 이집트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될 때까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는, 초기의 160년 동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 재위) 때의 문헌적·금석학적·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이 왕국의 행정과 경제가 철저한 개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농업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되었고 광범위한 관개 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많이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46~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페르시아인들이 가져간 이집트 신들의 신상을 도로 빼앗아와 인기를 얻었다. 에우에르게테스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22~205)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를 나약하고 타락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로파토르의 죽음과 젊은 프톨레마이우스 5세 에피파네스(BC 205~180 재위)의 즉위를 둘러싼 사건은 궁정의 음모 때문에 진상을 알기 어렵다.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동안, 남부에서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국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왕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타났다. 그후에도 수십 년 동안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BC 196년경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해외에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BC 196년에 소집된 종교회의는 이집트 신전에 대해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BC 168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을 이집트 총독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이집트에 대해, 보다 강력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BC 168년 여름 로마의 특사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나일 삼각주의 펠루시움 근처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사령부에 도착해,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안티오코스에게 명령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라이나스는 지팡이로 왕의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원 밖으로 나오기 전에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티오코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고, 7월말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떠났다.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피스콘)의 경쟁은,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이 키레네로 감으로써 해결되었다. 피스콘은 BC 145년 필로메토르가 죽을 때까지 키레네에 남아 있었다.
     
       피스콘은 BC 116년까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킨 BC 131~130년은 제외) 및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해외 영토가 거의 없고,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 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왕이 잇달아 바뀌는 불안정한 시대가 계속된 뒤, BC 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지배했다. 죽기 전 해인 BC 52년에 아울레테스는 딸 클레오파트라 7세 및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47 죽음)와 왕위를 공유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한 여왕으로, 로마와 손을 잡고 영향력을 키움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8년에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을 때,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 당한 것을 알고, 이집트에 머물면서 BC 47년에 여왕과 함께 나일 강을 유람하며 관광을 즐겼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이라고 이름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후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뒤따라 로마로 갔지만, BC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클레오파트라는 얼마 동안 로마 장군들의 파벌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년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BC 36~30년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장군과 동양 여왕의 유명한 연애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BC 34년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것은 죽은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책략임이 분명했다.
     
       가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과시용으로 자녀들에게 동쪽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로마 대중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밤마다 소란스럽고 퇴폐적인 연회를 베풀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선전은 무력 충돌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BC 31년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결과는 판가름났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함대가 퇴각했고, 안토니우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0년 8월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 도시에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유해를 만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유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런 상태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속주를 다스린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로마의 수도를 그리스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 로마 제국은 완전히 쇠퇴하고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의 막을 올렸다.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새 도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누려온 전통적 지위를 무너뜨렸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7세기 중엽에 이슬람 군대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로써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막을 내렸다.
     
     
     
     

                                                                                                              R.W. Baker/D.H. 글

     

    • 개요
    •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
      • 왕조 이전 시대
      • 초기 왕조시대(BC 2925경~2575경)
    • 고왕국시대와 제1중간기
      • 고왕국 시대(BC 2575경~2130경)
      • 제1중간기(BC 2130경~1938)
    • 중왕국시대와 제2중간기
      • 중왕국시대(BC 1938~1600경)
      • 제2중간기(BC 1630~1540경)
    • 신왕국시대
      • 제18왕조(BC 1539~1292경)
      • 람세스 왕조(제19·20왕조)
    • 제3중간기와 후기 왕조시대
      • 제3중간기(BC 1075~656)
      • 후기 왕조시대(BC 664~332)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 마케도니아의 정복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05~30)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eos Ⅰ Soter)
                                                             * (Soter는 그리스어로 '구원자'라는 뜻)

     

        BC 367/366(또는 BC 364) 마케도니아~283/282 이집트[84세].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왕.

       마케도니아 장군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 있다가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어(BC 323~28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판도 안에서 세워진 어떤 왕조보다 오랫동안 지속했으며, BC 30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마인에게 굴복했다.

     

                                      초기생애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에오르다이아 지역 출신의 귀족인 라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그가 나타날 때까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케도니아의 아르가이 왕조와 친척 관계에 있던 아르시노에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동(侍童)으로 있으면서 교육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알렉산드로스와 친해졌다.

     

        BC 337년 그는 황태자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BC 336년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곧 왕의 근위대에 들어갔다.

     

       BC 336~335년에 벌어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원정에 참여했던 그는, BC 330년 가을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경호원으로 임명되었고, 이 자리에 있을 때인 BC 329년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자객을 사로잡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원지대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박트리아(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었음)에서 인더스 강으로 진격하던 중에(BC 327~325)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워 히다스페스 강(지금의 인도 젤룸 강)을 지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같은 그의 군사적 업적에 대해 여러 번 표창을 내렸으며,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에서 페르시아인 아르타카마와의 성대한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인과 이란인들을 서로 섞으려 한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행사였다.

     

                                   이집트 총독 시절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신중하고 믿음직한 군대 사령관으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뛰어난 외교술과 전략적 능력을 지닌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 점은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그의 왕위를 놓고 벌어진 오랜 기간에 걸친 분쟁에서 입증되었다.

     

       장군들이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음을 애초부터 확신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바빌론에서 열린 회합을 통해 거대한 제국의 여러 속주(satrapy)들을 장군들끼리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집트의 사트라프(총독)로서 인접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고, 나일 강 유역이 갖는 지리적 고립이라는 이점을 잘 살려, 이곳을 헬레니즘 문화권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국내의 행정을 정비하는 여러 조처들을 취하고 키레나이카(리비아의 최동부 지역)와 키프로스를 비롯해 시리아 및 소아시아의 해안선 지역도 획득했다. 그의 생각은 이를 통해 군사적 안전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우호 정책을 취해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유지했으며, 이집트 원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BC 322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내부의 분란을 이용해 키레나이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아프리카 식민 도시를 획득했다.

     

        BC 322~321년 그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과 연합해 옛 제국의 아시아 지역 통치자 페르디카스와 싸웠다. 그결과 계승자들의 연합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페르디카스는 전쟁중 암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적 역량은 이 전쟁에서 시험을 받았다. 시리아 북부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제국의 여러 속주에 대한 분배가 다시 이루어져, 유럽 지역을 관장하는 장군인 안티파트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레네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더 나아가 그는 안티파트로스의 셋째 딸인 에우리디케와 혼인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BC 3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의 손녀 베레니케 1세와 다시 결혼했다.

     

       카산드로스는 그에 앞서 BC 319년 아버지가 죽자 ,그가 사전에 지명해놓은 계승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한 그는 BC 305년 자신을 마케도니아의 왕이라 불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15~311년 '제국의 계승자들'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키프로스를 얻었다. 이 전쟁중 그는 가자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BC 312)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집트인 부대가 이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BC 310년 전쟁이 다시 일어났고 BC 306년 키프로스를 다시 잃었다. 키레네도 한동안 상실했으며 BC 308년 손에 넣었던 코린트를 비롯해 인접한 시키온과 메가라에 있는 중요한 그리스 도시들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BC 306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근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했고, 이 해전의 승자인 안티고노스 1세는 아들인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의 도움을 받아 BC 306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에 대한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뒤, 그를 추종하고 있던 나머지 총독들도 BC 305~304년 제각기 왕이라 칭했다.

     

                                    이집트의 왕 시절

     

       자신을 왕이라 칭한 프톨레마이오스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계속되는 안티고노스와의 전쟁 문제였다. 이제 전쟁의 초점은 로도스 섬에 집중되어 있었다.

     

       BC 304년 그는 로도스 섬의 주민들을 지원해 안티고노스에 대항했으며, 이때 '구원자'(Soter)라는 성스러운 칭호를 얻었고, 그뒤부터 그를 부를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해체는, BC 301년 소아시아의 입소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눈앞에 다가왔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는 제국의 다른 계승자들에게 패배를 당했고, 이는 이들이 자기들의 왕국에 경계를 확고히 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같은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간에, 시리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특히 대상(隊商) 무역로의 종착지 역할을 했던 시리아 남부의 항구들이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타협을 통해 일시적이나마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코엘레시리아(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팜필리아와 리키아, 소아시아 남부의 피시디아 일부까지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308~306년 군사적 패배를 당해 타격을 입었고, 따라서 재위 말기 15년간은 전쟁보다 동맹과 정략 결혼으로 자신의 제국을 보전하고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BC 300년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의 리시마코스와 동맹을 체결하고, BC 299(또는 298)년 그에게 자신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를 주어 결혼하게 했다.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의붓딸인 테옥세나를 시라쿠스(시칠리아 남동부)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에게 시집보냈으며, BC 296년경에는 디미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자기 딸인 프톨레마이스와 그를 약혼시켰다.

     

       디미트리오스의 매부로 이집트 궁정에 인질로 와 있던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에게는, 의붓딸인 안티고네를 주었다. BC 298년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키레네를 복속시키고, BC 294년경에는 키프로스를 비롯해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인 티루스와 시돈을 손아귀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벌어진 제국의 계승자들간의 전쟁(BC 288~286)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리시마코스·피로스와 함께 디미트리오스에 대항했다. 이집트 함대는 아테네를 마케도니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 1세가 BC 315년 결성해 에게 해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 섬들을 포괄했던 군도 동맹(League of Islanders)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가 그뒤 수십 년 간 지중해에서 전력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군도 동맹 덕분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현실적인 정치적 여건에 따라  동맹과 연합 관계를 바꾸어 감으로써,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국제 정세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외교정책을 고수하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해외 영토를 직접 통치하거나 정치적 주도권을 쥐는 방법으로 이집트의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정을 정비하고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BC 290년 그는 아내인 베레니케 1세를 이집트의 여왕으로 세웠으며, BC 285년에는 베레니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BC 308) 둘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공동 섭정이자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이같은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 때의 형식을 따른 왕위 계승 규정 덕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BC 283년에서 BC 28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죽었을 때, 권력 승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왕들은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데 몰두해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없으므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어떤 식으로 착취했는지 자세한 내용을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중에 이집트인들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가 건설한 유일한 도시는 상(上)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마이스였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군사 지휘관들을 이집트 내 각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 곁에 배치한 듯하며,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법적·재정적 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재정 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 이집트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폐제도를 도입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집트인들에게는 유화정책을 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4,000명이라는 보잘 것 없는 수에 불과한 자신의 군대에, 병사들을 충원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멤피스에서 이집트와 그리스의 종교를 융합시키는 사라피스 의식을 정례화했으며, 페르시아인들에게 파괴당한 파라오의 신전들을 복구했고, 고대 이집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편, 이집트의 귀족과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자와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의 장소인 무제이온(Mouseion:박물관)을 세웠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건립했다. 그는 예술과 학문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글을 쓰는 작가였다.

     

        죽기 전 몇 년 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대한 신빙성있는 내용의 역사책을 썼다.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후세에 이 책을 대량으로 인용해 글을 쓴 역사가인 아리아노스를 통해 상당 부분의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생전에 몇 차례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신격에 이른 사람으로 찬양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모든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프톨레마이오스1세 (BC367~BC283, 84세) 이집트

      

       역시 알렉산더대왕밑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대왕이 죽은후 이집트로 건너가 기반을 잡고, 후에는 키레네를 병합하였으며, BC305년부터 왕이라 칭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외교적수단이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팔레스티나(유대지역)과 키프로스, 에게해의 여러도시와 소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매우 강성했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1세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암살됨으로써, 그의 세력은 줄어든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후에 알렉산더대왕을 신격화하기도 한다.

     

       그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7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15세(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 때 막을내리며, 그의 왕국은 마케도니아나 시리아와 달리, 친로마 정책 덕분에 수명을 연장하게된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Ptolemaeos II Philadelphus]
     
     

     

    (Philadelphos는 그리스어로 '형제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BC 308 코스~BC 246.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번째 왕(BC 285~246 재위).
    [개요]

    교묘한 외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켰으며, 알렉산드리아를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생애]

       처음에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지만, BC 283~282년 단독 통치자가 된 뒤 가족들 가운데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 권력 투쟁으로 그의 첫 아내 아르시노에 1세도 추방되었다. 아르시노에 1세는 트라키아의 왕인 리시마코스의 딸이었다.
     
       그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와 재혼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알렉산드리아 궁정 시인들은 이 결혼을 축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려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및 에게 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를 확대하는 한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에서도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집트가 인도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반영한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새로운 전쟁(BC 274~270)은 경쟁 왕국들의 기본 입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왕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8 ?~261)은, 에게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및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연합 세력과 맞서 싸운 제2차 시리아 전쟁(BC 260경~253)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군사작전의 실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 수완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는 우선 안티고노스를 부추겨 강화조약(BC 255)을 맺은 다음, 딸 베레니케를 자신의 적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내는 방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국과 이집트의 전쟁을 끝냈다.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안티오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인 라오디케를 쫓아내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당분간 셀레우코스 왕조의 적개심에서 해방되고 이집트 경제가 제공하는 재물의 뒷받침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그리스에 전념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다시 맞서 싸우라고 그리스를 부추겼다.
     

       마케도니아군이 그리스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에게 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거듭 발휘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그는 또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를 키레네 왕 마가스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상황을 더욱 개선했다. 그때까지 마가스는 상당히 골치아픈 이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경쟁자들을 그의 외국 영토가 이루고 있는 넓은 완충지대 너머에 묶어둠으로써 이집트에 되도록 유리한 정세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그는 여기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심한 타격의 예봉은 모두 동맹국들에 돌리고 자신이 입은 군사적 상처는 외교수단으로 치료했다. 아내이며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은 특히 외교 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했지만, 당시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것만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영향력]

       국내 문제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기록한 업적도 매우 인상적이다. 파라오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농업과 공예가 고도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감독과 그리스 행정관들의 도움으로 이 체계는 일종의 계획 경제로 발전했다. 나일 강 유역의 농민 대중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이집트에서는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의 농촌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세금원을 개척하는 명수가 되었다. 수도인 알렉산드리아는 주요한 상업 및 수출 중심지 구실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종교만이 아니라 그리스 종교에도 강렬한 관심을 보여 지방의 성소들을 순방했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신전을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히고 왕조가 종교적으로 숭배받기를 갈망한 그는, 부모만이 아니라 자신과 왕비도 '테오이 아델포이'(형제 신들)로서 신성한 명예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그는 그리스인 통치자 숭배를 장려하는 가장 열렬한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이것은 다시 로마 시대 황제 숭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에 알렉산드리아는 예술과 과학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시인과 학자들에게 너그러운 후원자로 명성을 얻었다. 칼리마코스테오크리토스를 비롯한 많은 궁정 시인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도서관을 확대하고 박물관에 자금을 공급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 박물관은 군주제에 좀더 강력히 반대하는 아테네 학파들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평형추로 세워진 연구 기관이었다(→ 교육사). 이곳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철학과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수학과 자연과학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는 헬레니즘 문명의 절정기와 일치했다. 그 시대의 활력과 매력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생생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리스의 지도력이 낳은 결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평화 애호자는 아니었지만, 호전적인 군인 왕도 아니었다. 신중하고 계몽된 통치자인 그는, 외교적 능력에서 자신의 강점을 발견했고 광범위한 호기심에서 만족을 찾아냈다.

     

    • 생애
    • 영향력

     

     

     

     

     

     

             프톨레마이오스 3세
                         [Ptolemaeos III Euergetes]
     
     

    (Euergetes는 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

    ?~?

    BC 264~221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이집트와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하는 한편 셀레우코스 왕조와 제3차 시리아 전쟁을 벌여 성과를 거두었다. BC 245년 전까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는 오랜 약혼 기간을 끝내고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딸인 베레니케 2세와 결혼함으로써 BC 258년 이래로 분리되어 있던 이집트의 키레나이카를 다시 통합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의 왕비로 갔다가 안티오코스가 죽은 뒤 살해당한 누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지체없이 코엘레시리아에 침입했다. 그 지역 도시들의 반란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해군은 셀레우코스 2세의 군대를 쫓아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까지 밀고들어갔다. 그 와중에 소아시아 반도 해안가에 있는 일부 섬들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BC 245년경 제지를 받았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육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쳐들어가 바빌론 근처에 위치한 티그리스 강가의 셀레우키아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자료들을 보면 국내에서 소요가 일어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고 나와 있다. 이와 함께 기근과 나일 강의 수위 저하,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로도스와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에 반대해 동맹을 맺은 것도 또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소아시아와 에게 해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아카이아 동맹이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흑해지역에서 2개의 동맹국을 확보함에 따라 더 한층 열기를 더해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242~241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물러났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2곳 모두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오론테스 강 유역과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와 트라키아를 가까스로 지켰으며 킬리키아까지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안에서는 아버지가 개발해놓은 알파이윰(오아시스와 비슷한 카이로 남서쪽의 저지대)에 대한 식민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또한 달력을 고쳐 BC 311년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원년으로 삼았다(→ 역법). 이집트 사제들의 회의에서 만들어 내놓은 일종의 선언문인 '카노푸스 칙령'은 4년마다 1일을 더하기로 하고 1년의 일수를 365일과 1/4일로 승인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새 달력은 일반인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쓰이지 않았다. 사제들이 남긴 글이나 고대 문헌들을 보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 약탈당한 성상(聖像)들을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시 복구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는 거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전이 있는 상(上)이집트의 에드푸에 건설 작업을 벌였고 여러 신전에 기부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와 마케도니아를 계속 괴롭히고 있던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피했으나 지진으로 황폐해진 로도스 섬에 대해서는 원조를 보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려는 스파르타 왕의 계획에 대해서는 BC 222년에 피난처를 제공한 적은 있었으나 지원금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소아시아에서는 그곳에 있는 한 왕국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며 많은 분란을 선동했던 인물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에서 망명지를 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곧바로 그를 억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책은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이집트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한 뒤 국내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집트를 남겨놓고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통치 시대에 대해서는 W. W. 탄의 〈헬레니즘 문명 Hellenistic Civilisation〉(3권, 1952), A. 부셰 르클레르의 〈라기데스가의 역사 Histoire des Lagides〉(1903) 제1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Ptolemaeos IV Philopator]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BC 238경~205.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221~205 재위).

    신하들에게 좌우되어 통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해왔던 시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이집트인들의 반란도 일어나 국내의 안정이 흔들렸다.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는 술에 취해 사는 방탕한 난봉꾼이며, 소시비우스로 대표되는 악명 높은 신하들에게 완전히 조종을 받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들의 부추김을 받아 그는 자신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숙부와 형제까지 살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에 있던 뛰어난 장군이 변절하는 사건이 있은 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경계선에 있는 이집트의 코엘레시리아는 시리아의 통치자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BC 219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일부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자 소시비우스를 비롯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신하들은 시리아와의 협상을 늦추며 그 사이에 이집트군을 재정비하고 철저히 훈련하는 전략을 취했다. 시리아의 위협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이집트 원주민들을 보병과 기병으로 징집해 고대 그리스의 방진(phalanx) 전술에 따라 이들을 훈련했다. BC 218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안티오코스는 다시 진격을 시도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전진 방어선이 무너졌다. BC 217년 봄 새로 구성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팔레스타인 남부의 라피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와 만났으나 방진 대형을 이룬 이집트 원주민 군대의 도움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전투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소시비우스의 조언에 따라 강화를 맺었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대는 코엘레시리아에서 물러났다. 라피아 전투를 끝낸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여동생인 아르시노에와 혼인해 BC 210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을 깨달은 이집트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BC 205년에는 반란이 상(上)이집트까지 확산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들은 게릴라전을 펼쳤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남쪽에 있는 이웃 왕국들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에게 해에도 몇몇 섬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갖고 있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시리아에 대해서도 소시비우스가 이 지역의 분쟁에 이집트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끼어들지 않았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대외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외교적인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방탕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총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BC 205년 11월경 죽었다. 그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이 죽음을 비밀로 하다가 약 1년 뒤 왕비인 아르시노에를 살해하고 어린 왕위 계승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eos V Epiphanes]

     

     

    (Epiphanes는 그리스어로 '뛰어난'이라는 뜻)

    BC 210경~180.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 왕.

    왕위에 있는 BC 205년부터 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의 해외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 밑에서 일하던 부패한 신하 소시비우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뒤 5세밖에 안 된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소시비우스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BC 2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시비우스 일파가 어린 왕의 즉위와 그 부모의 죽음을 선포한 뒤 뛰어난 관리들을 모두 이집트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이집트의 국력이 취약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시아와 에게 해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소시비우스가 BC 202년 은퇴하자 그의 일파의 일원인 아가토클레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가토클레스의 등장에 불만을 품은 펠루시움(이집트의 동쪽 변경도시)의 총독 틀레폴레모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해 들어왔고, 그의 지지자들은 군중들을 선동해 아가토클레스를 물러나게 하고 다른 궁정 관리를 그 자리에 앉혔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운동장에서 그의 부모를 죽인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을 외치며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군중 앞에서 한 궁정 신하의 암시에 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군중들은 아가토클레스와 그의 가족들을 색출해내 이들을 학살했다. 권좌를 차지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랐던 틀레폴레모스도 얼마 안 가 제거되었다.

    이집트에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침공해 들어가는 큰 모험을 감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역공격을 위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BC 201년 안티오코스 3세가 다시 쳐들어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무찌르며 소아시아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를 점령했다. 로마의 외교적 개입으로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평화조약의 규정에 따라, BC 194(또는 193)년 안티오코스 3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혼인했다.
     

       이집트에서는 선왕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때부터 일어났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BC 197년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삼각주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며 항복해온 반란군에 대해서도 이들을 극도로 잔인하게 다루었다. 상(上)이집트에서는 BC 187(또는 186)년까지 계속해서 분란이 있었고, 그는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후견인과 고문들의 간섭을 받았다. 그는 더이상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테베 총독의 권한을 상이집트 전역까지 포괄하도록 확대했다. BC 196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칙령을 내려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넣었고, '로제타석'으로 알려진 이 비석은 1799년에 발견되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또는 그림문자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집트 원주민들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 칙령에는 부채와 과세를 면제해주고, 죄수를 풀어주었으며 또한 항복한 반란자들을 용서하고, 사원에 대한 기부금을 늘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꾸준히 그리스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통치 말기에 그는 수완 좋은 환관 하나를 그리스인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했는데,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BC 180년 5월경 갑자기 죽었다. 그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남겼고 왕비가 이들의 섭정이 되었다.

     

     

     

     
     
     
     
               * 클레오파트라 1세[Cleopatra I Syra]
     

    ?~BC 176.

    이집트의 왕비.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왕비로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의 섭정을 했다.
     
       시리아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대왕)의 딸로 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의 전쟁 및 국경분쟁을 종식시킨 리시마케이아 평화조약에 따라, BC 193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이집트가 되찾으려고 오랫동안 애썼던 코엘레시리아 지방의 징세권(영유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임)을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죽은(BC 180) 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어린 아들의 섭정을 하면서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시리아와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로마와도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균형 있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집트를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Ptolemaeos VI Philometor,
                                 BC 180~145, 35년간 집권]
     

     

    (Philometor는 그리스어로 '어머니를 사랑하는'이라는 뜻)

    ?~?

    BC 180경~145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이집트를 점령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형제와 공동통치하는 모험을 벌여 다시 이집트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 사이의 아들로, 어머니와 공동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였으나, 시리아 편을 들지 않고 계속해서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함께 이집트를 잘 다스렸으나, BC 176년 어머니가 죽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2명의 야심만만한 궁정 관리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BC 173년경 그는 자신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혼인했고, 고문들의 의견에 따라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BC 170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통치에 합류했고, 코엘레시리아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의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는 BC 170년 이집트를 침공했고, 다시 BC 168년에도 쳐들어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맹국인 로마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BC 164년 10월경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쫓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로 도망쳐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따라 이집트를 분할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레나이카를,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했다.
     

       키레나이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2번이나 로마를 방문해 키프로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결국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능란한 외교술로 로마의 결정을 늦추게 하고, BC 154년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차지하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키레나이카를 다시 돌려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는 한편, 원조 명목으로 곡물까지 주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대(大)카토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훌륭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것은 그뒤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음모의 일환이었으나, 이집트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BC 155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키프로스를 차지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증오심을 일부러 자극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데르 발라스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BC 153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그를 지원할 채비를 서두르는 한편 ,그에게 자기 딸까지 주어 혼인하도록 했다.
     
       BC 148년경 그는 다시 한번 시리아로 진군했고, 그때 또다른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데르 발라스의 암살 기도를 물리친 그는, 발라스의 아내가 된 자기 딸을 새로운 왕위 요구자에게 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새로운 왕위 요구자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안티옥의 시민들과 시리아군은 이집트의 왕에게 시리아의 통치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이를 거절했으나, 얼마 안가 알렉산데르 발라스가 전투에서 패한 뒤, 살해당한 그 자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져 머리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해 며칠 뒤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7세[Ptolemaeos VII Neos Philopator]
     

     

       ?~BC 144.

       아케메네스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아들로 BC 145년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미성년으로 즉위했으므로, 어머니의 보호 아래 어머니와 공동통치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숙부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했다.
     
       당시의 이집트 고대 자료를 보면 왕위계승에 있어서 프톨레마이오스 7세의 입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는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적어도 1명 이상 있어서, 재위 초기에 부자가 공동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여러 자료로 보아 프톨레마이오스가 BC 147년에 공동 통치자가 된 것 같다.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2세의 지지를 받아 BC 145년 7월에서 8월말 사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부왕의 군대들은 시리아에 분산되어 있었고, 이때문에 이들 모자는 제한된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반대파들이 젊은 왕의 숙부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왕위 찬탈을 권유하자,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퇴위당했다.
     
       이듬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고,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처형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Ptolemaeos VIII Euergetes II]
     
     

       피스콘[Physcon;그리스어로 '배불뚝이'라는 뜻] 또는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그리스어로 '은인'이라는 뜻] 2세라고도 함.

       ?~BC 116.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던 중 분할 통치를 했고, 로마에 추종하면서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개입을 부추겼다.
     
        BC 170~164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통치를 했으나, 그 이듬해에는 혼자 이집트를 다스렸다.
     
        BC 163~145년에는 키레나이카(지금의 리비아에 있음)의 왕으로 있었으며, BC 131~129년 잠시 추방당했던 때를 제외하고, BC 145년부터 BC 116년 죽을 때까지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아들 프틀레마이오스 7세와 공동통치를 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미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끊임없이 다툼을 벌여 내란이 일어났고, 이는 이집트의 경제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는 통치 말기인 BC 118년 왕국을 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BC 117년경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탐험대가 홍해와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달하는 최초의 대양 항해를 완수했다. 이것은 이집트가 향료 무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Ptolemaeos IX Soter II]
     
     

       별칭은 Lathyros

       (그리스어로 '병아리콩'이라는 뜻).

       ?~BC 80.

        BC 2~1세기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로 태어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및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여러 차례 번갈아가며 짝을 이루어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스렸다.
     
      BC 88년 단독으로 통치를 하게 된 뒤부터는, 동방과의 무역을 발전시키며 로마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는 이해할 수 없는 조처를 취함에 따라, 그의 왕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이 모후는 둘째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를 더 좋아했으나, 국민들의 감정에 못 이겨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제휴해 왕위를 유지했다.
     
      그녀는 BC 115년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그의 여동생이며 왕비로서 강한 의지의 소유자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이혼하도록 강요하고, 대신 좀더 온순한 성격 그의 막내 여동생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재혼하도록 했다. 이듬해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가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나간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어머니와 함께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 간에 잠재해 있던 적대감은 BC 110년 10월 어머니가 그를 이집트에서 쫓아내고 둘째 아들을 키프로스에서 불러들이면서 마침내 폭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BC 109년초 이집트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3월 어머니는 또다시 그를 쫓아냈다.

    BC 108년 5월 어머니와 화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3번째로 이집트에서 도망쳐 키프로스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BC 107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위를 요구하는 한 계승권자를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 북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이에 맞서 유대인의 왕과 동맹을 맺고 전력을 다해 또다른 셀레우코스 왕위 요구자를 지원했다. 오래 계속된 전쟁 끝에 어머니가 죽자(BC 101)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키프로스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인들로부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2번째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항해 도중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혼자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왕비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딸로서 죽은 동생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3세를 불러들여 그녀와 함께 왕위를 유지했다. 그가 BC 88년 이집트로 돌아오기 직전에 상(上)이집트의 테베에서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으나, 3년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테베는 항복했고 그 보복으로 약탈을 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흑해에 면해 있던 폰투스 왕국과의 전쟁에 지원을 해달라는 로마의 요구를 거부했다. BC 88년 로마가 아테네를 약탈한 뒤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이 도시의 복구를 도왔고, 이런 이유로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들이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BC 80년에 죽었고 딸이 그 뒤를 이었다.

     

     

     

     

     

     

                    베레니케 3세[Berenice III]
     
     

       ?~BC 80.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딸로, 이집트 왕족 중에서 가장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격렬한 내란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이거나 또는 클레오파트라 4세의 딸이며, BC 101년 이전 숙부인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첫번째 결혼을 했다. BC 101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미망인이며 태후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죽자 ,정식 여왕이 되었다.
     
       BC 87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클레오파트라 3세를 암살했다고 여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이집트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한 후 이집트로 돌아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도굴해 자신의 용병에게 임금을 지불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를 다시 추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베레니케와 함께 소아시아의 리키아로 피신했다. 리키아에서 남편이 살해된 후 베레니케는 이집트로 돌아왔다.
     
       귀국 후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했으며, BC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죽자,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데르는 로마의 딕타토르(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돌아와 베레니케 여왕과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베레니케나 알렉산드리아 시민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베레니케가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녀를 살해하려 했으나 도리어 분노한 알렉산드리아인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식 통치는 막을 내렸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Ptolemaeos X Aleksandros I]
     
     

       ?~BC 88.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BC 107~88 재위).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의 주도 아래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더불어 이집트를 번갈아 통치했으며, BC 105년경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벌어진 내란에 개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아들인 그는,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반대로 인해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는 데 실패했다. 그뒤 BC 114년 키프로스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BC 110년 클레오파트라 3세와 공동통치하던 그의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어머니의 책략으로 이집트에서 쫓겨나자, 프롤레마이오스 10세는 키프로스에서 돌아와 형의 뒤를 이어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를 공동통치하게 되었다.
     
       BC 109년초 가족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뒤 형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다시 돌아와 왕위를 차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키프로스 섬의 왕이 되어 그곳으로 떠났다. 이후 형과 어머니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재차 벌어졌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BC 107년 이집트로 돌아와 다시 어머니와 공동통치했다. 그러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가 공식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사실상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형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어머니에 반대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국에서 벌어진 내란에 휘말렸다.
     
       BC 101년 어머니가 죽자 전쟁은 끝났고, 그는 형과 화해하는 한편 형의 딸인 베레니케 3세와 혼인했다.
     

       그는 이집트인의 권리를 확대했으나, 이들은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며 계속 압력을 가했다. BC 88년 상(上)이집트의 테베 지역에서 자신들의 왕조를 세우려는 이집트인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쫓아냈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용병들을 모아 이듬해 돌아왔으나, 군대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제전(葬祭殿)을 파헤치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분노를 사 또다시 쫓겨났다.
     
       그뒤 소아시아의 리키아 해안지방에 대한 습격을 꾀하다가 피살당했다. 그와 같이 떠났던 베레니케 3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왕비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1세[Ptolemaeos XI Aleksandros II]
     

       BC 115경~80.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적통왕(嫡統王).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왕비였던 베레니케 3세와 혼인한 뒤, 그녀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다. 뒤에  베레니케 3세 왕비를 살해하고 왕권을 독점했으나,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피살당했다.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이다. 이집트를 공동통치하고 있던 할머니 클레오파트라 3세와 아버지가 셀레우코스 왕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안전을 위해 상당한 양의 재물과 함께 에게 해에 있는 코스 섬으로 보내졌다.
     
       아버지가 죽던 BC 88년경, 아나톨리아 북부에 있던 폰투스 왕국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는, 로마의 장군을 물리치고 코스 섬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점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를 포로로 생포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잘 대접받고 교육까지 받았으나, BC 84년 미트라다테스가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는 틈을 이용해, 로마의 독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로 도망쳤다. 로마로 호송된 그는, BC 81년 큰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죽을 때까지, 정치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질로 로마에 머물렀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죽은 뒤, 왕비 베레니케 3세가 단독으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자, 술라는 독단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귀국시켜 그녀와 혼인하게 했다.
     
       베레니케와 공동통치한 지 약 19일 뒤, 자신이 단독으로 통치할 것을 계속 주장하던 왕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
     
       베로니케 3세 왕비를 매우 존경하던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그 보복으로 그를 죽였고,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적통은 끝났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Ptolemaeos XII Auletes]

     

    정식 이름은 Ptolemaeos ⅩⅡ Theos Philopater Philadelphus Neos Dionysos Auletes.

    (Auletes는 그리스어로 '플루트 연주자'라는 뜻)

       BC 112경~51.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적법하지 못한 왕위 계승자라는 위치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로마에 의지해 왕위를 지켜야 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이집트는 완전히 로마 공화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 2명이 갑작스레 변사를 당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은 BC 80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불러들여 왕위에 앉혔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집트의 여왕으로 그의 할머니였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안전을 위해 BC 103년 후일의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소아시아 반도에 면한 에게 해의 코스 섬으로 보냈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로, 그보다 앞서 왕위에 올랐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도 함께 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해 로마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폰투스 왕국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BC 88년 붙잡혔으나, BC 80년 시리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의 역사가이며 정치가인 키케로에 따르면, 이때 그는 자신의 형제가 키프로스의 왕이 된 사이, 시리아를 떠나 이집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집트로 돌아온 직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여동생으로 보이는 클레오파트라 5세와 결혼해, BC 76년 이집트의 의식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로마의 민주파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죽을 때, 이집트를 로마에 넘기도록 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는 의심스러운 사실을 들고 나와, BC 65년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키케로를 비롯한 로마의 귀족들은 이같은 이집트 병합에 반대했고, 로마의 지지가 필요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보내 집정관인 폼페이우스 장군을 지원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데다가, 로마에서의 위치도 여전히 불안했던 그는, BC 59년 당시 로마 집정관의 일원으로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6,000탈렌트의 뇌물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왕위를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로마는 이듬해 키프로스를 빼앗았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키프로스의 왕은 자살을 했다.
     

       키프로스를 상실한 데 대해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자신의 왕비와 맏딸인 베레니케 4세를 섭정으로 이집트에 남겨놓고, BC 58년 로마로 떠났다.
     
      그는 로마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별장에 기거하면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뇌물을 사용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이 보낸 대표단을 암살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그때 왕비가 죽자, 시민들은 베레니케 4세를 이집트의 단독 통치자로 세웠다. 원로원이 답변을 미루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계속해서 뇌물을 나누어주었고, 따라서 그는 로마의 사채업자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다.
     
       BC 57년말,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지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적극적인 지원은 피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자, 그는 로마를 떠나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인 에페소스로 갔다.
     
       BC 55년 프톨레마이오스는, 폼페이우스의 부관이며 시리아 속주총독인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1만 탈렌트를 주기로 약속하고, 로마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킨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의 반대세력을 이끈 맏딸 베로니케 4세을 처형했다.
     
       죽기 바로 전인 BC 51년, 그는 둘째 딸이었으나 이제는 맏딸이 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맏아들을 공동 섭정으로 선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Ptolemaeos XIII Theos Philopator]
     

    (Theos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신'이라는 뜻)

    BC 63~47 알렉산드리아 근처.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자신과는 남매간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 말기에 이집트군을 이끌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에 대항하다 죽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죽은 뒤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다.
     
      BC 49년 아버지의 옛동맹 세력들을 계속 유지할 생각으로, 로마의 장군이자 삼두정의 일원이었던 폼페이우스에게 함선과 군대를 지원했다. 뒤이어 테오도투스와 내시인 포티누스, 그리고 아킬라스 장군이 이끄는 궁정의 일파가, 프톨레마이오스와 의지가 강한 그의 누이 사이에 경쟁 의식을 부채질하면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와 함께 BC 48년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에서 쫓아냈으나, 그녀는 재빨리 아랍인들로 군대를 조직해 이집트의 북동쪽에 있는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포위했다.
     
      반대 세력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 테살리아의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폼페이우스가,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펠루시움에 나타났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신임을 얻고자 한 궁정 일파의 지시에 의해 그는 살해당했다.
     
      얼마 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왕궁을 접수했으며, 싸움을 벌이고 있던 파당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자신의 중재안에 따르도록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킬라스 장군을 군대와 함께 남겨놓고, 포티누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막사로 갔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 사이 클레오파트라는 양탄자에 몸을 말고 몰래 왕궁으로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족들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된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서로 화해하도록 했다.

     
      그러나 포티누스 일파는 로마와 이집트인 협력자들에 대해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켰다. 아킬라스가 군대를 끌고와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하자 ,프톨레마이오스의 막내 여동생인 아르시노에는 이집트 원주민 군대로 몸을 피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포티누스를 처형하도록 설득하는 사이에, 아킬라스는 아르시노에와 다툰 뒤 피살당했고, 이로써 궁정의 파벌은 사실상 무너졌다.
     
      카이사르는 아르시노에와 그녀의 스승이 이끄는 원주민 군대의 강한 압력을 받아, 프톨레마이오스 대신 아르시노에를 이집트의 왕위에 앉히는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즉시 이집트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으나 ,카이사르는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인 페르가몬에서 온 증원군의 도움을 받아, 책략을 써서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승리하도록 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때 죽었는데, 도망치려다 익사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PtolemaeosⅩⅣ

                                      Theos Philopator Ⅱ]

     

    (Theos Philopator는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신'이라는 뜻).

    BC 59경∼BC 44. 7.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

     

      BC 47~44년 유명한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동 통치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BC 44년 그를 암살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자신의 형제인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벌어진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죽자, 카이사르에 의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공동 즉위했다.

     

      BC 46년 클레오파트라 7세가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로 갔을 때, 그도 동행했다. 로마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고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귀국한 뒤, 아마 그녀의 지시로 이 젊은 왕은 살해되었을 것 같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그녀의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프톨레마이오스 15세[Ptolemaeos XV Caesar]
     
     

       정식 이름은 Ptolemaeos Philopator Philometor Caesar. 별칭은 Caesarion.

       BC 47. 6~30. 17세에 피살됨. 

       율리우스 카이사르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 태어난 이집트의 왕(재위 BC 44~30, 14년간  집권).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와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BC 30년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살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일부 고전 작가들이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아버지가 카이사르라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BC 46년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오자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했다.
     
       카이사르가 BC 44년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갔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친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도록 교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은 왕위 계승으로는 자신이 첫번째의 서열에 있었으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를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삼두정의 일원으로 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정을 통하기 시작한 뒤인 BC 34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 '왕 중의 왕'이라 칭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가리켜 '왕 중의 여왕'이라 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BC 31년 삼두정의 다른 일원인 옥타비아누스와 벌인 악티움 해전에서 큰 패배를 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를 상(上)이집트의 홍해 연안에 있는 항구인 베레니케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꼬임에 빠져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근친혼   
    http://blog.naver.com/nonamegi75/140006106689

       고대 이집트의 창조신화에 보면, 남신 슈와 여신 테프네트 사이에 두 남매 게와 누트가 태어났다고 한다. 대지의 신인 게브는, 천사의 신이자 자신의 누이누트와 결혼하여,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를 낳았다.

     

      이들 가운남신인 오시리스와 세트는 각각 자신들의 동생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아내맞이하였다. 특히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결합으로 태어난 호루스는, 이집트 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시스,

    오시리스와 함께 3대 신으로 추앙받다.

     

      호루스는 고대 이집트 왕들이, 자신을 '살아있는 호루스' 라고 할 정도로 배받았던 신이었다. 파라오는 자신이 호루스가 상징하는 태양신 라의 자손이고 하였다.

     

     

     

      예로부터 이집트인들은 현재의 파라오는, 태양신 호루스의 현현으로 보았고, 은 파라오는 죽은 자의 신인 오시리스가 현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재왕비와 죽은 파라오의 왕비는, 생명을 주는 이시스 신의 현생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이집트인들의 사고방식을,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아래와 같은 명확한 삼단논법으로 표현하였다.

     

     

          '아버이인 신과 아들인 신이 존재성과 영원성을 함께 가진다면, 신의 어머니는 신의 아내이기도 하 다. 고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의 아내이다'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누이와 노골적으로 혼인한 사례는 많지 않다. 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파라오가 자신의 누이와 결혼한 예가 가끔 있었다.

     

       근친혼의 예를 보자면, 18왕조의 파라오 아모스가 자신의 누이인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고, 투트모세 2세가 이복자매인 하트세프수트와 결혼하였다.  투트모세 3세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계모인 하트세프투스는 투트모세 3세가 어른이 될 때까지, 섭정이 아닌 완전한 파라오로 통치했다. 이는 하트세프투스가 '신의 아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파라오의 왕비는 남편인 파라오가 죽어도 이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신성이 사라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왕조의 이런 사고방식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그대로 스며들어, 클레오파트라 1세, 베레니케 3세, 아르시노에 3세, 베레니케 4세, 클레오파트라 7세 등과 같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공동통치를 하거나, 부친의 부재중에 왕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근친혼의 이유는, 신성을 부여 받은 사람은 신이기 때문에, 일반인과 결혼할 없다는 사고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신과 직접 사을 나누게 되면, 그 뜨거운 불꽃에 타버린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신성의 재와 인간이 결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진 왕이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신성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의 형제, 자매 밖에 없다는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이집트에서 신화를 통해 하나의 의식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이집트를 계승한 이방인들이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 부터였다.

     

       이집트를 통치하게된 그리스인들은, 이 나라의 파라오법을 통해서, 왜 자신들이 근친혼을 할 수 밖에 없는가를 최소한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근친혼은 파라오의 신성을 계승하고 이어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가계도(家係圖)를 보면, 근친혼의 모습을 한 눈에 파악할 수 다. 그런데 근친혼도 초기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까지는, 어떤 유형존재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파라오는 2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와 4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만이 누이와 결혼한 반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게스테스,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는 이방의 여성과 결혼하였다. 이런 교차적인 혼인은, 근친혼에 따른 어떤 폐해를 막아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 이후의 이 왕조 근친혼의 가계도는, 사람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고 하면 근친상간을 연상하게되는가를 보여고 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올챙이라는 뜻)은 형인 프톨레마이오

    스 6세 필로메토르가 사망하자, 그의 누이이자 형의 부인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아들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 네오스필로파토르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조카의 즉위식과 자신의 결혼식을 함께 거행한 다음, 제일 처음 한 일이 방금 제위에 오른 조카를 살해하는 일이었다. 그러자 새로운 파라오는, 삼촌이며 의붓 아버지인 피스콘의 칼을 피해 자신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 2세의 품으로 달려갔지만, 생명을 연장는데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왕을 죽인 피스콘은, 다시 형수이며 자신의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이혼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이며 의붓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였다.

     

       이 둘 사이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둘 사이에서 후일 프톨레마이오스 9세 소테르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부부간의 의무는 어느정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의 지배권과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한 이집트 파라오의 근친혼 제도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이후 왕권을 승계기 위한 야심가들의 편법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이집트인들이 고래로부터 지녀온 '파라오 법'의 근본 정신인, 신적인 결합을 통해 신적인 통치력을 계승한다는 핵심적인 정신은 사라지고, 외형적인 형식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실제로 왕권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던 파라오의 근친혼이, 략적 이용으로 변질됨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5세 이후 이집트의 정정이 불안정하되는 커다란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