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스크랩] 클레오파트라

영국신사77 2006. 8. 27. 18:11
BC.304년 알렉산더 대왕의 디아도코스('후계자'란 뜻으로, 알렉산더의 후계를 다룬 장군들)로서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를 세운 사람은 라고스의 아들 소테르(구제자),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이다.
그는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선조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전에도 클레오파트라(아버지의 영광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가 여섯 명이 더 있었다.
이 어린 딸의 증조모는 페르시아 혈통의 시리아 공주인 셀루키데스로 바르바르(야만족)이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 혈통을 이어받았다. 곧 이어 아르시노에라는 딸과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14세가 될 아들 둘이 더 태어나지만, 가족 간의 유대는 전혀 없었다.
이전의 많은 이집트 왕가처럼 이 집안도 음모와 야심의 질투로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여인들의 가문 내 역할도 적극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라지드 왕조가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매간의 결혼을 통한 여인들의 왕위계승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죽은 파라오의 장남과 장녀는 결혼을 통해 파라오 부부가 된다.
클레오파트라 이전에 걱정될 만한 두 명의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페레니케와 클레오파트라 6세이다. 이들은 프롤레마이오스와 그의 누이인 트리파이어(향락의 여인이라는 뜻)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BC.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아울레테스)는 자신의 장녀인 클레오파트라와 장남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유언한뒤 죽음을 맞았다. 18세의 클레오파트라는 라지드법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와 형식적인 결혼을 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통치의 전권을 부여맏았다. 이리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남부와 북부 전역을 통치하는 '두 땅의 여왕'이 된다.
특히 관례에 따라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는 '필로파토르(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파라오의 어마어마한 권한을 두 손에 쥔 그녀는 '살아있는 법'이 된것이다.
명령, 영화, 가신과 토지를 보장받는 왕권의 신성함이 이집트의 사제들과 그리스의 성직자들이 올리는 종교의식으로 인준되었다.
왕가의 규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클레오파트라는 조금 자라자 수세기 동안 파라오의 딸들에게 행해져 온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형제이자 남편인 왕곁에서 나라를 통치하게 되어 있는 딸들이 받는 교육은 남자들이 받는 교육과 아를 바가 없었다. 교육과정은 매우 다양했다.
파라오는 전통적으로 교육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해 왔는데,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그 전통을 이어받아 교육을 더욱 강조했다.
모든 그리스 계통의 왕조들이 그랬듯 이들도 '엔쿠클레이오스 파이데이아(백과사전)', 즉 폭넓은 지식과 일반 교양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이집트 전역에 걸쳐 초중등 교육기관은 물론, 토착 이지브인을 통치할 그리스인 엘리트 양성을 위한 왕립학교의 설립이 장려되었다. 클레오파트라으 지적인 자질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녀의 외국어에 대한 소질은 천부적이었다. 그녀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에티오피아어, 아랍어, 헤브루어, 시리아어, 메디아어, 파르티아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가에서 이토록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클레오파트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처럼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를 바탕으로 외교적인 흥정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출처 : 국사*사회 길들이기^^
글쓴이 : 박하사탕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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