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후계자 전쟁[디아도코이]과 헬레니즘

영국신사77 2006. 7. 29. 20:24
          
      

  

                                        디아도코이 [Diadochoi]
요약
그리스어()로 ‘후계자들’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본문

   역사상으로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대왕의 유족들이 무력한데다가 대왕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대왕의 유장()들은 각기 자기가 후계자라고 자칭하여 서로 싸웠는데, 이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가리켜 디아도코이라 부른다.

 

   즉, 안티고노스 1세, 안티파트로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뒤를 계승한 제2대를 ‘에피고노이’라 부른다.

 

   그들 상호간의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은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약 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디아도코이 시대’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유장들은 각각 왕이라 호칭하였는데, BC 301년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등 4명의 연합군이 안티고노스를 공격하여 패사()시킴으로써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 4왕국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실은 세계 통일제국의 건설이라는 대왕의 의사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디아도코이 시대를 여기까지로 보는 설도 유력하지만, 그것을 더 연장하여 BC 298년 카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와 그 일족이 마케도니아에서 세력을 회복하고, 셀레우코스가 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키고 유럽까지 그 세력을 넓힌, 이른바 3왕국의 정립 때까지를 이 시대의 하한()으로 보는 설도 타당하다.

 

 

 

 

 

 

                      디아도코이 (diadochoi)

요약

원래 <후계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갑자기 죽은 뒤 제각기 대왕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그가 남긴 영토를 차지하려고 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가리킨다.

설명

원래 <후계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갑자기 죽은 뒤 제각기 대왕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며 그가 남긴 영토를 차지하려고 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을 가리킨다. 또한 그 항쟁을 디아도코이전쟁(BC 323∼BC 280년경)이라고 부른다. 항쟁은 우선 중심세력이었던 페르디카스 및 에우메네스,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안티고노스 1세 사이에 되풀이되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영토의 일체성을 보전하려고 하는 이념(통일파)이 강했다. 이 무렵에 대왕의 아우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태후 올림피아스가 시해되었다. 이어서 항쟁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에게 리시마코스·카산드로스·프톨레마이오스 1세·셀레우코스 1세 등의 분리파가 대항, BC 301년 소아시아전쟁에서 이들이 승리하여 옛 제국(帝國)을 보전하려는 꿈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동안에 대왕의 비(妃) 록사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가 독살되어 대왕의 왕통이 끊어지자, BC 306년 이후 디아도코이들은 모두 후계자로서의 왕호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 왕조형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항쟁은 또 분리파 상호간에 치열하게 계속되고 BC 281년 크루페디온(소아시아 서부)에서 리시마코스가 패하여 과도적인 트라키아왕국은 멸망하였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노스 2세의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1세의 시리아라는 헬레니즘 3국이 확정되었다.

 

 

 

 

 

 

 

                    알렉산더 사후 헬레니즘의 상황   
 
출처 : mindllove님의 블로그
타락이라고 한다는것이 무엇하고요 알렉산더의 죽음이후의 상황은 어쩌면 서로의 야심으로 둘러싼 권신간의 대립으로 보셔야 될듯합니다.

전에 카페에 기고한 글이 있기에 올렵봅니다. 이 글은 "역사속의 전쟁사"라는 카페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은 지 14년 내에, 그의 적자인 알렉산더 4세와 그의 서자인 헤라클레스가 모두 암살당하였다.

그의 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3세는 7년도 채 통치하지못하고 기원전 317년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요청에 따라 살해당하였다.

알렉산더의 아들 알렉산더 4세는 기원전 311년까지 통치하다가, 그 해에 아버지의 장군중의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알렉산더의 서자인 헤라클레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해보았지만 기원전 309년에 살해당하였다.그래서 알렉산더왕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되었던것이다.

기원전 301년쯤에는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세운 거대한 제국에서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카산드로스장군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리시마코스장군은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리카토르 1세에게는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가 돌아갔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 즉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더가 세운 하나의 위대한 왕국에서 네 개의 그리스왕국이 생겨나게 되었다.

네 개의 그리스 왕국중에서, 카산드로스의 통치가 가장 짧았는데...
카산드로스는 권력을 잡은 지 몇년후 그의 다음후계자가 없었으며, 기원전 285년에 리시마코스가 카산드로스의 그리스 제국의 유럽지역을 장악하게 되므로 카산드로스장군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4년 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그에게 아시아 영토의 반 이상이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된다.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태조로 시리아제국을 형성한다. 그는 시리아에 안티오크를 창건하여 그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암살당하였지만, 그가세운 왕조는 기원전 64년까지 계속 권력을 잡았는데, 그 해에 시리아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족주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나뉜 네 왕국 중에서 가장 장수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05년에 왕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를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왕 즉 마케도니아출신의 파라오 1세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즉시 도시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추진한 가장 위대한 건축 공사 중 하나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프톨레 마이오스는 이 웅대한 공사를 감독하도록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저명한 학자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오스를 데려왔서 건축의 전임을 맞겨 계속 진도를 높여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 1세기에 그 도서관은 100만개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함락될 때까지 계속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자세한 부분은 다음카페 "역사속의 전쟁사(http://cafe.daum.net/historywar)"를 찾아가 보셨으면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시대는 알렉산더 대왕이후 4명의 왕들이 헬레니즘 국가를 만드는것에 기초를 두고있습니다.

k0193 (2004-07-07 )
알렉산더의 4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리시마쿠스, 카산드로스가 알렉산더대왕 사후 4개의 지역,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를 차지하면서 헬레니즘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그들간의 세력경쟁이 일어났는데 이중에 첫째로 무너진 왕국이 카산드로스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지역이었습니다. 그는 자손하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기때문에 그 지역을 기원전(B.C.) 281년에 리시마쿠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두고 시리아를 담당했던 셀레우코스와의 전쟁으로 리시마쿠스가 가지고있던 소아시아지역을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와 시리아지역 사이에는 커다란 사막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서로간에는 마찰이 없다가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왕조가 통합이 되면서 역사에서 말하는 시리아 전쟁이 있게됩니다.

시리아 전쟁은 단순 몇년에 걸친 전쟁이 아니었고 수십에서 백수십년을 이어오는 지루한 전쟁이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이집트가 시리아를 이기질 못하자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죠...

이렇게 해서 시리아와 로마간의 전쟁으로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등장과 함께 시리아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맹과 옥타비아누스간의 전쟁이 나면서 결국 헬레니즘의 마지막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로마의 속주로 변하면서 헬레니즘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때가 기원전 30년입니다.

 

 

 

 

 

                    [헬레니즘 시대]

 

 

 

제목 : 
헬레니즘 세계

출처 :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설명 : 
헬레니즘 세계(BC 188경)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부터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를 가리킨다.
 
   로마의 이집트 정복은, 고대 그리스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적 요소와 비그리스적 요소의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헬레니즘의 형용사형 헬레니스틱(Hellenistic)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의 고대 그리스 문화를 가리키는 형용사 헬레닉(Hellenic)과는 다른 용어이다.

 
  
                 후계자 전쟁(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그리스 세계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대왕에 비하면 그야말로 피그미족처럼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혈통은 중시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일한 피붙이인 이복 동생과 유복자가 함께 왕위에 올랐다. 필리포스 왕의 서자(庶子)는 정신병자였지만,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BC 358경~317) 왕으로 선언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BC 323년 6월에 세상을 떠난 뒤 록사네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도 알렉산드로스 4세(BC 323~310)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두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는 안티파트로스가 한동안 권력을 장악했고, 바빌론에서는 고위 관리인 페르디카스(BC 365경~321)와 크라테로스(BC 370경~321)가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추진하던 계획은 만장일치로 중단되었다. 그의 휘하 장군들은 군사적으로 명성을 얻을 가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총독 자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애꾸눈 안티고노스(BC 382경~301)는 안티파트로스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을 당시 바빌론에 없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프리지아를 다스리면서, 용감한 군인이자 유능한 행정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확고한 태도와 임기응변의 재능은, 그리스 도시에서 인기가 높았다.
 
   바빌론에 있던 장군들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BC 367/366경~283)는 처음부터 마케도니아 제국이 통합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이집트 총독 자리를 얻은 그는, 이곳에 독립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명성을 높였다.
 
   리시마코스(BC 360경~281)는 이집트보다는 이익이 덜한 트라키아를 다스렸다. 개인적 기량도 뛰어나고 훌륭한 무예를 갖춘 것으로 유명한 레온나토스와 셀레우코스는 때를 기다렸다. 국내 행정의 책임을 맡은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는 군인들에게는 과소평가받았지만, 그는 사실상 어느 누구보다도 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후 20여 년 동안 벌어진 음흉한 권력 투쟁은, 놀라우리만큼 복잡했다. 우선, 에우메네스의 지지를 얻어 두 왕의 이름으로 제국을 다스리던 페르디카스가 개인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암살당했다. 군대는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를 부지휘관으로 삼아 아시아 지역 주둔군을 장악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에서 확고한 지위를 굳혔다. 바빌론 총독 셀레우코스와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는 계속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케도니아인은 아니지만 막대한 재산가였던 에우메네스는, 두 왕을 대신해 장군과 총독들의 야심을 견제할 능력이 있었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고, 폴리페르콘이라는 무능한 정치인이 뒤를 이어 섭정이 되었다. 그는 본토의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새 포고령을 발표해,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 결과 아테네인들은, 새로 얻은 자유를 이용해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처형했다. 훌륭한 인물이지만 타협적이던 포키온도 이때 처형당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 에우메네스는 폴리페르콘과 손잡고 안티고노스에게 도전해 바빌론을 확보했지만, BC 316년에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다. 폴리페르콘은 입지가 약화돼, 얼마 후 유능하고 정력적인 카산드로스에게 쫓겨났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카산드로스는 테베를 재건하고,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신봉자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에게 아테네를 맡겼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3세를 제거했으나, 그녀는 카산드로스에게 죽음을 당했으며, 록사네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카산드로스의 보호 또는 감시를 받았다.

 
   안티고노스는 이제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및 리시마코스는 연합전선을 결성해 그에게 대항했다. 4년 동안(BC 315~311)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정력적이고 임기응변의 재치와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상대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주요변화는, 셀레우코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빌론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는 것뿐이었다.
 
   BC 311년 네 지도자는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안티고노스는 아시아를,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얻었으며,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가 성년이 되는 BC 305년까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 추구 과정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은 곧 무시당했다. 카산드로스는 BC 310년 록사네와 어린 알렉산드로스를 죽였다.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쳐부수려고 했지만, 셀레우코스는 파괴된 바빌론과 동부의 속국들을 완강히 지키며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만은 인도 왕 찬드라굽타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안티고노스는 '영리한' 아들 디미트리오스(BC 336~283)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폴리오르케테스(포위공격자)라는 별명을 가진 디미트리오스는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를 추방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으며, 결국에는 코린트 동맹도 재건했다. 아테네인들은 신에게 바치는 경의로써 그를 찬양했고, 파르테논 신전을 그의 궁전으로 내주었다. 디미트리오스는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하고 키프로스와 에게 해를 확보했지만, 유명한 로도스 포위작전(BC 305~304)에서는 실패했다.

 
   안티고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이제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잇는 공동 왕을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이집트를 손에 넣지 못했고, 다른 통치자들 역시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프톨레마이오스는 동맹을 맺어 안티고노스 및 디미트리오스와 맞섰는데, BC 301년에 연합군은 셀레우코스가 인도에서 데려온 코끼리 부대의 도움을 얻어,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군대를 물리치고 그를 죽였다. 그러나 디미트리오스는 도망쳐 티로스와 시돈을 계속 다스렸다. 리시마코스는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셀레우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사실상 점령한 남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부 지역으로 만족했지만, 그뒤 병에 걸려 셀레우코스에게 투항했다.

 
   디미트리오스가 몰락한 후 프톨레마이오스가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천수를 누렸고,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308~246)가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첫 아내가 낳은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안티파트로스의 손자)는 '벼락'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리시마코스의 주위에 계속 파문을 일으켰고, 리시마코스는 곧 지지를 잃었다.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 군대를 쳐부수고 그를 죽였으며, 이집트를 제외한 옛 마케도니아 왕국을 거의 손에 넣을 단계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그는 리시마코스 군대의 지지를 받은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BC 281). 셀레우코스의 아들이 그뒤를 이어 안티오코스 1세(BC 324~261)가 되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영리한 디미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BC 320경~239)와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였다.

 
   BC 3세기 중엽에 3대 세력중심지는 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였지만, 통치자들의 권력은 사실상 아직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셀레우코스가 죽은 뒤, 이미 공격을 시작해 밀레토스를 확보해 두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다스리는 시리아를 얻으려고 BC 276년 새로이 공세를 폈지만, 시리아군에게 격퇴당했다. 서쪽에서는 피로스가 에페이로스로 돌아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그리스 남부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스파르타 점령에 실패했고 아르고스에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지붕 위에서 구경하던 한 여인이 던진 타일에 맞아 죽었다.

 
   북부에서는 안티고노스의 권력에 만만찮게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아테네가 크레모니데스(the handsome Chremonides)의 지휘를 받으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과 연합해 그에게 맞섰다. 이 동맹은 이집트의 후원을 받았고 에페이로스에서도 약간의 지원을 받았다. 4년 동안(BC 266~262) 치열한 전쟁을 벌였으나 동맹은 깨졌으며, 아테네의 정치 권력도 마침내 무너졌다. 그러나 아테네는 문화 중심지로 살아 남았다. 안티고노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에 자신이 선정한 참주를 두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는 BC 261년에 죽었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2세(BC 287~246)는, 안티고노스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맞섰다. 제2차 시리아 전쟁(BC 259~255)에서 안티오코스는 아나톨리아 해안과 페니키아를 대부분 되찾았으나, 해전에서 승리한 안티고노스는 해상을 장악했다. 그러나 BC 246년 안티오코스 2세가 죽자 시리아에서는 새로운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이듬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84경~221)는 혼란에 빠진 시리아 영토 안으로 깊숙이 진격할 수 있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BC 265경~225)는 간신히 국내안정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땅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BC 3세기에 그리스 본토에서는 동맹 내부에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동맹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동맹은 아카이아 동맹이었다. 전에도 존재했던 이 동맹은 BC 280년 재건되었으며 수많은 도시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아카이아 동맹은 제한된 지역에서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존속했지만 도시 국가들의 다양한 성격을 넓은 견지에서 통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동전에 지역적으로 한정된 신, 즉 코린트에는 아프로디테, 아르고스에는 헤라를 새겨넣었으나, 이 무렵 동전에는 이들 대신 좀더 널리 섬겨졌던 제우스 호마기리오스와 데메테르 파나카이아가 새겨졌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말에 따르면, 아카이아 동맹 동안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거의 하나의 도시 국가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 당시(BC 3세기)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 섬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를 계속 잠식하고 있었다. 타렌툼 시(市)는 로마를 두려워해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에게 원조를 청했다. 시라쿠사에서는 피로스를 지지하는 히에론(BC 306경~215)이 BC 269년 왕이 되어 권력을 잡은 뒤 54년 동안 시라쿠사를 다스렸다. 그는 한두 해 동안 로마에 대항한 뒤에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으며, 로마가 카르타고와 싸울 때 로마를 도왔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마살리아(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는 그리스 세계의 변경으로서,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동시에 독자적인 강력한 해군과 안정된 과두 정부를 유지했다.

 
   BC 220년대말 3대 강대국인 시리아·이집트·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운 군주들이 왕위에 올랐다. 대왕이라고 불리며 형 셀레우코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BC 242경~187)는 처음부터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그는 제4차 시리아 전쟁(BC 219~216)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이집트 영토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박트리아를 손에 넣었고, 인도의 북서쪽 국경 지방과 페르시아만 건너편에서 인상적인 양동(陽動) 작전을 벌였다. 그는 유럽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싸운 뒤 곧 전력을 회복한 로마의 방해를 받았다. BC 188년에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에 따라 그의 영토는 아시아 지역으로 한정되었지만, 이는 상당히 넓은 영토였다.
 
   이집트에서는 BC 221년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44경~205)가 이집트 군인들과 함께 라피아에서 시리아를 격퇴했다. 그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남부지방을 다스리던 누비아족 통치자들과 이집트 원주민의 권력이 강해진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BC 205년 다섯 살짜리 아들 하나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5세(BC 238~179)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안티오코스와 마찬가지로 팽창주의적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평민에게 인기가 높았고 전쟁터에서는 유능했지만, 판단력과 안정성이 부족했다.

 
   로마는 BC 229~228년과 BC 219년 일리리아 해적 소탕 작전을 벌였다. 그뒤 BC 218년~202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과 싸우는 데 몰두해 자원을 다 소모했다. 그런데도 로마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를 쳐부수어 패권을 입증했다. 그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는 필리포스 5세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물리쳤고,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도 물리쳤지만, 로마는 한 뼘의 땅도 합병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배하던 과두정의 지도자들은 다른 영토를 병합해 그곳의 행정까지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 행정 책임이 무거워지면 그만큼 권력자의 수를 늘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는 적들의 인정대로 1마리의 용이었으나 ,그것은 되도록 충돌을 피하고 싶어하는 소극적인 용이었다.

 
   BC 175년 집권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215경~163)는 왕국 통합을 위해 그리스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에피파네스(神의 現身)라는 칭호에도 나타나 있듯이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는데, 이스라엘 신의 절대권을 신봉하는 정통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안티오코스는 유대교 예배를 금지하고 유대교 신전 제단에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유다 마카베오(로마인들과 '우호 연합동맹'을 결성한 인물)의 지도로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 투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동안 시리아의 통치자들도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자세한 투쟁 내용은 매우 복잡하지만, 사실상 1세기 동안 유대 민족은 상당히 많은 독립성을 누렸다.

 
   BC 146년경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불안정한 상태를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과 동시에, 카르타고도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에 있는 비옥한 들판에 속주를 건설했다. 마케도니아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군대를 일으켜 테살리아를 침략하자 로마군은 그를 패배시켜 처형했으며, 마케도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했다. 로마에 예속된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과 충돌했고, 그들의 애국심은 높아졌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테베를 다룬 방식 그대로 코린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동맹이 해체되었고, 민주주의는 폐지되었으며, 권력은 부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BC 2~1세기 이집트와 시리아 왕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격한 불화와 싸움이었다. 이집트 왕가에서는 남매의 근친 결혼이 자주 이루어졌고, 통치자들은 대부분 평범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부유했으며 영토도 남쪽으로 팽창을 계속했다. 시리아에서는 내란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으나,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BC 159경~129)가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메디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뒤 얼마 간은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BC 130~129년 다시 결집한 파르티아인들은 왕을 죽였고, 그가 되찾은 땅을 모조리 다시 빼앗았다. 그후 시리아 왕국은 약해지고 분열되었으며, 이웃 나라들에게 끊임없이 국경을 유린당했다. BC 256년경부터 그리스계(系) 왕조의 통치를 받은 동쪽 끝의 박트리아는, BC 1세기 중엽에 이르자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도 서부에서는 인도의 전설적 영웅인 메난드로스가 권력을 잡았다. 간다라 지역(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부)의 예술에는 그리스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BC 67년 로마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大폼페이우스:BC 106~48)는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가 이끄는 흑해의 해적들을 조직적으로 분쇄함으로써 평화로운 교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미트라다테스는 폰투스 왕국에서 쫓겨나 BC 63년 자살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린 셈이다. 폼페이우스는 유명한 동방 정벌을 시작해 시리아를 로마 속주로 병합하고, 유대를 평정했으며, 로마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후 그리스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BC 48년에 테살리아의 파르살루스에서 대결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트라키아의 필리피에서 브루투스 및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대결했다.
 
   이집트의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조의 마지막 왕 클레오파트라 7세(BC 69~30)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권력 정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세계를 지배하려면 로마를 정복해야 했으며,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구든 로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매혹시켰고, 뒤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엉뚱한 사람을 후원한 셈이었다. 세계의 지배권을 얻기 위한 권력 투쟁이 2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리스에서 벌어진 세번째 충돌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해전의 승자는 뒤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BC 63~AD 14)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던 마지막 왕국 이집트는 마침내 로마에 정복당했다.

 

                                                                  Macropaedia| 金碩禧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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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레니즘;동서문화의 교류

 

   동서문화의 교류의 역사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을 살펴보려면 우선 서양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에 한창 일어나고 있던 동서문화의 교류 ,이른바 헬레니즘문화를 들 수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그리스의 내부의 만성적 항쟁과 정치적 혼란은 그리스의 자멸을 초래하였고,이 때 북방의 마케도니아왕국의 필리포스 2세(359~336B.C)는 폴리스 문화세계를 정복 지배하고, 중앙 집권제의 왕국을 건설하는 동시에 페르시아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암살되었다.그의 유업은 아들 알렉산더 대왕(336~323B.C)에 의해 계승되었다.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걸출한 인물로서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헬라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에 올라 먼저 소아시아,페니키아,이집트를 정복,나일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이어 페르시아제국을 멸하고,동진해서 인더스강을 넘어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알렉산더 제국을 건설하였다.알렉산더 대왕은 지중해 정복의 웅지를 펴 보지 못한 채 바빌론에 개선한 다음 해(323B.C)에 병사하였다.그러나 알렉산더가 건설항 대제국은 서로는 마케도니아,동으로는 인더스 하구,남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하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영역이었다고 한다.이 때 동양에 포함되는 오리엔트 세계는 서방 세력에 정복되어 이후 지배는 로마몰락까지 계속되어 서양문화가 이지역에 형성된 것이다.여기에서 오리엔트(Orient)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일출’,‘해뜨는 지방’,‘동방’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그리고 문화사에서 오리엔트라 하면 오늘날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 문명권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양하 지방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서남아시아)를 합쳐서 통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오리엔트는 옥시덴트(Occident:서양)에 대한 말이나 현대 사회에서 ‘동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의미와 특색을 살펴보자. 알렉산더 대왕의 여러 정책은 그의 후계자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도처에 그리스식 도시가 건설되고 많은 그리스인이 식민되어 그리스어와 그리스식 생활 양식이 퍼졌다. 이리하여 그리스 문명이 널리 동방 세계에 퍼져 여기에 그리스 문명과 동방문명이 융합되어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를 Hellenism이라 한다.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그리스에서 동방으로 옮아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페르가몬, 로도스 등이 그 중심지로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민족적 차이를 초월하고 인류를 다 갈은 동포이며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세계동포주의가 유행하고 이와 동시에 국가, 민족보다 개인을 더 존중하는 개인주의가 유행하였다. 헬레니즘 문화는 실로 이 세계주의와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 문화에 여러 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


 

 

 

 

 

                            올림피아스

Olympias

BC 375경~316.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내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

열정적이고 전제적인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편과 아들이 죽은 뒤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피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인 그녀의 본명은 미르탈레였으나 ,후에 필리포스가 BC 356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올림피아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필리포스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것이 올림피아스의 지위를 위협하게 된 것은 BC, 337년 그가 마케도니아 명문 태생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올림피아스는 이피로스로 물러나 있다가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뒤 돌아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젖먹이 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시아로 원정을 간 처음 몇 년 동안 ,마케도니아 섭정 안티파트로스와 거듭 싸웠고, 마침내 BC 331년경 다시 이피로스로 물러났다.

 

   BC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죽자(알렉산드로스는 BC 323년에 죽었음), 그를 계승한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에게 그녀의 어린 손자 알렉산드로스 4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BC 317년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정신박약자 필리포스 3세(아리다이오스)를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세우자, 폴리페르콘의 청을 받아들였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그녀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올림피아스는 카산드로스의 형제와 100여 명의 그의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필리포스 3세인아리다이오스와 그의 아내도 처형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올림피아스가 있던 피드나를 봉쇄하고, BC 316년 봄 올림피아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카산드로스의 병사들은 이를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살해당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록사네
 
 

Roxane

Roxana라고도 씀.

?~BC 310경 트라키아 암피폴리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내.

 

   박트리아족의 추장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아시아 원정중이던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혀 BC 327년 그와 결혼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뒤, 그의 둘째 부인인 스타테이라(바르시네)를 죽였으며,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알렉산드로스 4세)을 낳았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그녀의 아들을 백치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형제)와 공동 왕으로 받아들였다.

 

    BC 319년 에페이로스에서 시어머니 올림피아스와 연합했으나, BC 316년 마케도니아에서 카산드로스(뒤에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함)에게 붙잡혔다.

 

   카산드로스는 그녀를 암피폴리스에 투옥했다가 ,BC 310년에 그녀의 아들과 함께 처형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 디미트리오(Dimitrios of Phaleron, (영)Demetrius)

                                 

                                                    BC 350경 아테네 근처 팔레론~?

 

   아테네의 웅변가·정치가·철학자.

마케도니아 장군 카산드로스에 의해 아테네 통치자로 임명되었다(BC 317). 귀족계급 편을 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초기 정치이론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BC 307년 민주정치가 부활하자 테베로 도피했고, 그후에는 이집트로 가서 웅변가로 높은 명성을 누리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명사가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알렉산더 제국의 역사     
출처 : 세계사의 진실

 

 

   위의 그림은 알렉산더 사후에 알렉산더 부하들의 세력도입니다. 일부는 후에 나오는 세력도 집어넣어봤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뒤 그의 뛰어난부하들은 그의 알렉산더제국을 분할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뒤 그의 유족들은 힘이 없었고,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했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서로를 대왕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켜서 디아도코이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안티고노스1세, 셀레우코스1세, 프롤레마이오스1세,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등입니다.

   이들의 전쟁은 알렉산더 사후 40여간이나 지속됩니다.


   BC301년 카산드로스그리스, 프롤레마이오스이집트, 셀레우코스시리아, 리시마코스트라키아 의 연합군은, 안티고노스마케도니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를 입수수 전투에서 패사시킴니다. (색깔글씨는 세력기반입니다.)

 

   이로써 알렉산더대왕사후 5개의 세력은 4개의 세력으로 줄어들고, 안티고노스마케도니아 왕위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4년뒤인 BC298년 카산드로스가 죽음을 틈타,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1세마케도니아에서의 세력을 회복하였고, 시리아셀레우코스트라키아리시마코스를 패사시키고 트라키아까지 세력을 넓힙니다.

 

   그리하여 4개였던 세력은 다시 3개의 세력으로 최종적으로 줄어들게됩니다.


  

    디오도투스1세(???~BC228?) 박트리아

 

   디오도투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1세와 2세 밑에서 박트리아 총독을 지내다 ,BC256년 시리아가 혼란한틈을 타 박트리아왕을 칭하였지만 , BC246년 셀레우코스2세의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시리아와 우호를 다짐니다. 또한 파르티아와는 늘 적대관계였습니다.


   

            아르사케스1세 파르티아

 

   시리아의 박트리아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가 다스리던 지역의 총독이었던 아르사케스1세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서쪽으로 도망간뒤, 시리아와 이집트의 전쟁을 틈타 파르티아를 세우고, 박트리아와 경쟁하고 결국 박트리아를 멸망시킵니다.

 

   후에 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건설되는 폰투스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왕족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이렇듯 알렉산더 사후 로마와 파르티아에 의해 오리엔트세계가 정리되기전까지,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세력들로 군웅할거 합니다.

 

   입수스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안티고노스세력의 중심이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옮겨지게되고, 세력이 마케도니아로 국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뒤를 이어 강성해지는 셀레우코스의 시리아... 또 셀레우코스1세를 살해하고 에게해와 키프로스 유대지역 키레나이카로 전성기를 맞는 프톨레마이오스세력... 알렉산더의 정복기나 그후에 이야기가 확장팩으로 나와도 꽤 재밌을것 같습니다.

 

 

               .

  

 

 
                      입소스 전투 [Battle of Ipsos]
요약
BC 30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사이에 프리기아의 입소스에서 벌어진 전투.
본문

   BC 32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자 그의 후계 지명을 받았다고 자칭하는 후계자들은 20여 년간 싸움을 계속하였는데, 입소스전투는 그 오랜 분쟁상태에 결말을 짓게 하였다.

   프리기아를 다스리고 있던 애꾸눈 독안왕() 안티고노스 1세와 그의 아들 공성자() 데메트리오스는 다른 후계자들의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안티고노스는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마케도니아·시리아·이집트의 3왕국으로 분립되었다.

 

 

 

                 입소스 전투(Battle of Ipsos)
 

   프리지아의 입소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 '후계자들'(디오도코이) 사이에 벌어진 전투(BC 301).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제국이 와해되는 과정을 촉진시킨 권력투쟁의 일환이었다.

 

   302년에 트라키아(트라케) 왕 리시마코스와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를 대표하는 연합군이 소아시아 왕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와 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치기 위해 나섰다.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연합군은 병력 면에서 안티고노스의 보병 7만과 기병 1만보다 다소 열세였지만, 코끼리 부대의 우세에 힘입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디미트리오스는 적군의 기병대를 격파한 뒤, 지나치게 멀리 추격했다가 코끼리 부대에 가로막혀, 아버지를 구원하러 돌아오지 못했다.

   안티고노스는 살해당하고 디미트리오스는 달아났으며, 소아시아는 리시마코스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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