偉人*人物

그리스 남북왕조의 패권기

영국신사77 2006. 8. 24. 01:50
                   <<그리스 남북왕조의 패권기>>

 

 

 

                       프톨레마이오스셀류코스제국

프톨레마이오스 1세
(BC 323-285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BC 285-246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
(BC 246-221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
(BC 221-203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
(BC 203-181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애굽이 로마제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BC 30년)되기까지 로마 지배하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셀류코스 1세
(BC 312-280년)

안티오쿠스 1세
(BC 280-262년)

안티오쿠스 2세
(BC 261-246년)

셀류코스 2세
(BC 246-226년)
셀류코스 3세
(BC 226-223년)
안티오쿠스 3세
(BC 223-187년)

 

셀류코스 4세
(BC 187-175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BC 175-163년)

안티오쿠스 5세
(BC 163-162년)

데메트리우스 1세
(BC 162-150년)

 

 

 

 

              로마군 VS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헬레니즘의 중무장 보병을 로마군이 이겼던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때보다 창의 길이와 무장이 더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때의 무장 때와 비교해본다면 헬레니즘 국가들의 군대는 민첩성과 기동성이 많이 떨어졌다....

  알렉산더 대왕의 서방진출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전쟁사가 역사에 남아있다. 그것은 피로스왕의 로마원정이 되겠다...당시 무리한 조건에서도 피로스의 군대는 지형적인 우세함을 입은 로마를 이기게 된다..흔히 피로스의 승리로 이야기되는것이 그것이 되겠다.. 당시 피로스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강을 건너다 입은 피해일뿐 전투시에 입었던 피해는 아니었다.

 

  피로스 대왕의 서방원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군대형식이라 볼수있겠다.

  병법 천재라고 불리우는 피로스도 그러할찐데, 알렉산더의 재능으로 로마군을 쳐서 쓰러 뜨린다는 것이, 단순하게 약한 군대로 맞추기엔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항상 원정중에 공학,수학,건축,지리와 관련된 박사들을 줄줄이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그것은 전투에 항시 사용하기 위한 지리, 수학적 계산, 적 성채의 허약점, 그 성에 대응할 수 있는 공성 장비등을 마련하기위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로마가 아무리 서방의 강국이라 해도, 경무장속에서 민첩성과 기동성이 살아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두번째의 승리조건은. 기병의 전술에 있겠다. 로마에 비해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소규모 전투에서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전략적인 요소를 누르는것...반면 로마는 전투적인 요소에서만 사용했다는것을 들 수 있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적의 중요점을 공략하는데 기병을 썼다면, 로마의 경우는 대 기병전에서 기병을 상대로 활약했다는것이겠다.

 

  가우가멜라 전투당시 알렉산드로스의 헛점을 찌르는 기병의 공격은, 결국 페르시아의 패망을 가져왔다. 이것은 당시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의 체계 때문에 활용성에서 뛰어나게 된 것인데, 기병에 대처하는 문제는 이미 페제타로이들의 장창 병대로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병의 활용도는 높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적재적소를 노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로마의 군대와 전투중에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핵심을 향해 돌격 주요인물들을 제거했다면, 로마의 뿌리는 상당히 흔들렸을 것이라는 점은, 로마와 알렉산드로스간의 전쟁의 양상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반면 안티오쿠스 3세와 헬레니즘 중무장 보병의 관계는 지대하다고 볼 수 있는데, 안티오코스의 군제개혁을 통해 알렉산더가 만들었던 군대의 면모가 상당수 퇴색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시리아 전쟁은 200년 이상을 끌어왔다. 그것은 같은 마케도니아식 군대에서 탈피할수없다는 점과 유사하였기때문에, 안티오쿠스는 보다 중무장화 ,보다 장창의 역할을 위해, 나름대로의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효과를 본 것이다.

  어쩌면 알렉산더의 전술을 이해하지 못한 이후의 헬레니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전쟁만 생각하다보니, 오히려 창길이늘 늘리는가 하면, 무장을 더욱 견고하게 하여, 민첩성과 기동성을 죽이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로마와의 전쟁이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3세는, 그러한 군제개혁이 결국 우물안 개구리의 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낄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한니발도, 어리석음으로 꺽지 못했던 이탈리아 동맹건이다. 이탈리아 동맹에 대한 문제를 알렉산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니발은 그것이 깨지기 만을  원했기 때문에 로마시민 만을 공격했고, 나중에 그  문제로 인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로마인 이야기에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한니발의 의도를 간파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겠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어떻게 했을까?...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던 지역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 나라를 정복하고 그 도시를 폐허를 만든후, 그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던 그곳의 주민들은 살아 있더라도 그곳의 지역을 담당했던 집권층은 죄다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그 자리를 마케도니아의 관리가 대치를 하게된 점은,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지에 대한 개념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다....

  알렉산더가 로마로 갔다면, 하나의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을 폐허로 만든 후 그리스식 건축물이 들어서게 했을 것이며, 자신의 점령지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단언한다...

  한니발의 최대실수 중에 하나로 꼽히는 이탈리아 분열에 관련된 것을, 알렉산더 대왕은 그렇게 해결을 보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블로그 > 시대의 문명
                                                                                         원본 http://blog.naver.com/k0193/140017619239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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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고 난 후 그의 제국은 그의 후손에 돌아가않았다.

 

  그의 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3세는 7년도 채 통치하지 못하고, 기원전

317년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한다. 알렉산드

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기원전 311년까지 통치하다가, 그 해에 아버지

장군중의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의 손에 암살을 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서자인 헤라클레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통치하려고 해보았

지만, 기원전 309년에 암살당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스 왕조는 끝나게 되었으며, '그의 지배권'은 그의 가족을 떠나게 되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은 지 14년 내에, 그의 적자인 알렉산더 4세와 그의 서자인 헤라클레스가 모두 암살당하였다.

 

  기원전 309년부터(정확하기 기원전 320년경부터)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세운 거대한 제국에서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휘하에 있던 여러장군이 자기들끼리 영토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애꾸눈 장군 안티고노스 1세는 알렉산더의 제국 전체를 자신이 적임자라 생각

하여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고, 나머지 4장군들 즉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

스, 리시마쿠스, 카산드로스 또한 자신의 영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안티고노스는 무력행사를 하게된다. 하지만 그는 프리지아

의 입소스에서 벌어진 전투중에 죽으면서 그또한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기원전 301년쯤에는, 알렉산더의 장군 네 사람이 자기들의 사령관이 정복한 거

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리시마코스는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를,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는 메소포타미

아와 시리아를, 프톨레마이오스 라고스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더가 세운 하나의 위대한 왕국에서 네 개의 그리스왕국이 생겨

나게 되었다.

  네 개의 그리스 왕국중에서, 카산드로스의 통치가 가장 단명하였다. 카산드로

스는 권력을 잡은 지 몇년후 그의 남성혈통이 끊겼으며(카산드로스에겐 배다른

이복형제가 있었다. 그중에 첫째가 왕위계승에서 반란으로 밀려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기원전 285년에 리시마쿠스가 그리스 제국의 유럽지역을 장

악하게 되었다.

  4년 뒤,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그에게

소아시아의 주요 거점들을 빼앗기면서 셀레우코스의 왕조는 튼튼한 기반을 닦게된다.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에 안티오크를 창건하여, 그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81년에 암살당하였지만, 그가 세운 왕조는 기원전 64년

까지 계속 권력을 잡았는데, 그 해에 시리아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나뉜 네 왕국 중에서 가장 장수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05년에 왕의 지위에 올라, 이집트를

다스리는 마케도니아 왕 즉 마케도니아 파라오 중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즉시 도시 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그가 추진한 가

장 위대한 건축 공사 중 하나는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축 공사이다.

  프톨레 마이오스는 이 웅대한 공사를 감독하도록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저명한

학자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오스를 데려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기원 1세기에

그 도서관은 100만개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함락될 때까지, 계속 이집트를 통

치하였다.

 

 

 

                                      최후의 국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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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시대의 문명

   카산드로스가 권력을 잡은 지 몇년 안되어 사망하였고, 뒤를 이을 후계자 또한 없었다. 아니 후계자는 있었지만, 그 자리를 이을 아들들은 죽거나 �겨 났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카산드로스의 아들은 이복 형제(배다른 형제)가 있었다. 카산드로스의 장남이 그 대권에 머물러야 했지만, 둘째의 반역을 통해 국외로 도망친 장남은 결국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와 그리스의 공성자라고 불리웠던 데메테리우스에게 지원을 알렸다.

 

  초반에는 데메테리우스와 피로스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었다. 두 왕의 전쟁은 승패의 갈림길을 걸어가면서 휴전과 협정을 하다, 피로스가 데메테리우스의 시리아 원정을 틈타 테살리아인을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킨후, 데메트리우스의 원정군을 공격하여 괴멸시켜버린다.

 

  이 사건을 계속 지켜보던 리시마쿠스는, 이 때를 틈타 피로스를 공격한다. 피로스군의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고, 이어서 그리스인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스인이라는 자부심을 충동질했다. 이로인해 결국 피로스는 에페이로스로 퇴각하게되고, 마케도니아는 리시마쿠스가 흡수하게된다.

 

  리시마코스 장군은 페르가뭄을 군사기지로 만든 후,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사령관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를 이곳의 성주로 만든 후,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물려 받은 9,000 탤런트의 금화를 필레타리우스에게 맡겼다. 사실 필레타리우스는 평민으로 집안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런 그를 리시마쿠스는 자신의 곁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무관이라는 자리를 준다.

 

  그러한 은혜도 몰랐던가! 필레타리우스는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와 내통하여, 그가 리시마쿠스를 공격한다면 리시마쿠스가 자신에게 맡겼던 보물을 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반역의 뜻을 밝힌다.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필레타리우스는 리시마쿠스가 맞긴 돈이 탐이났거나, 아니면 그 요새 주변의 땅을 탐냈을 것이라고...그 말은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 그것은 리시마쿠스 이후에 그의 행동이 셀레우코스도, 리시마코스도 아닌,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을것이다.

 

  어쨌거나 필레타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드린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쿠스의 영지를 넘으면서 리시마쿠스와의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해 졌고, 기원전 281년초부터 일어난 전쟁에서 셀레우코스의 기습전은 결국 기원전 281년 가을에서 겨울로넘어가는 시점에서, 리시마쿠스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된다. 결국 리시마코스의 제국 중에 아시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기원전 276년에는, 알렉산더의 한 장군의 손자인 안티고노스 고타나타스 2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좌에 올랐다. 왕좌에 올랐지만 ,자신의 왕국인 마케도니아와 시리아간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과 안티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려움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시리아와 소아시아 및 에게 해 지역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배를 확대하는 한편,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에서도 영향력을 주장했다.


  이집트가 인도와 로마에까지 사절단을 보낸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정치적·상업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가를 반영한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왕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크레모니데아 전쟁(BC 268 ?~261)은,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2세 및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연합 세력과 맞서 싸운 제2차 시리아 전쟁(BC 260경~253)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한 속주가 되었다.

 

  네개의 그리스 왕국중, 단지 두개의 왕국만 뚜렷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와 프톨레 마이오스왕조가 그것이다.,

 

  셀레우코스 1세는 시리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면서, 여러도시와 건축을 단행하였는데 그중에 수도인 안티오크와 셀레우키아 항구가 그 대표적인 건물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게 되는데, 이 왕조는 네 왕조중에 가장 오래 남게 된 제국이었다. 기원전 305년부터 시작된 왕조는 기원 30년 로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함락될 때까지, 이집트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제국 전쟁 그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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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제국을 손에 넣은 셀레우코스1세는, 기원전 281년 소아시아 일부를 리시마코스로부터 장악하던 그 해에 암살당하게 된다. 그의 대를이어 안티오코스1세 때까지 시리아제국의 모든 기반을 이룩하기에 그지 없었고, 또한 서로간의 불화 또한 없었던것이다.

 

   하지만 셀레우코스의 손자대에 가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제국의 대립은 손자 대에 가서 남쪽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와 커다란 불화를 맺게 된것이다.

 

   기원전 260년에서 253년까지 치뤄진 제2차 시리아 전쟁으로, 시리아제국과 이집트 제국간에는 커다란 불화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되어 서로간의 평화협정을 이룩하게 된다. 군사작전의 실패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외교 수완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우선 마케도나아의 안티고노스를 부추겨 강화조약(BC 255)을 맺은 다음, 딸 베레니케를 자신의 적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시집 보내는 방법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제국과 이집트의 전쟁을 끝냈다.

 

  그런데 당시 안티오코스2세는 라오디케란 여자와 결혼하여 셀레우코스 2세를 낳은 상태였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는 베레니케라는 성년이 된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안티오코스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의 딸과 결혼하기 전에, 전처인 라오디케를 쫓아내야 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입김 아래, 딸인 베레니케에게서 나온 아들을 전처였던 라오티케에게서 나온 아들을 제치고 다음 왕권의 상속자로 만든 후, 적개심에서 해방되어 이집트 경제가 제공하는 재물의 뒷받침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그리스 공략에 전념하여,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다시 맞서 싸우라고 그리스를 부추기게 된다.

 

   마케도니아군이 그리스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에게 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거듭 발휘하여 크레모니데아 전쟁 때 당한 패배를 설욕을 하게 된다.

 

   하지만 기원전 246년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죽자, 안티오코스 2세는 다시 베레네케와 이혼하고 라오디케와 다시 결혼하게 되었고, 라오디케에게서 나온 아들 셀레우코스 2세를 다시금 후계자로 지정하게 된다.

 

   그러나 뒷일에 대해 안심을 못하던 라오디케는, 자신을 몰아냈던 베레네케 모자를 암살하게 된다. 또한 베레네케와 같이 이집트에서 온 시종들도 전부 살해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라오디케는, 과거의 일 때문에 자신의 남편인 안티오코스 2세도 독살하게되는데, 아마도 향후 후계자 자리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라는 의문과, 자신이 �겨났을때의 앙갚음이라는 설이 대두 되고 있다.

 

   베레네케에 대한 소식은 다음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3세(BC 246~221, 25년간)에게 긴급하게 들어갔다. 이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베레네케의 오라비였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난 후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이후 시리아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승승장구하며 올라왔다. 시리아의 어느누구도 그의 군대를 막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는 말이 더 나을듯싶다. 여러 성부터 시작하여 시리아의 도시인 안티오크의 요새들도 부분적으로 점령해갔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침략은 안티오크의 함락으로 끝을 맺는다. 셀레우코스 2세는 간신히 도망하여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만, 셀레우코스 2세의 어머니인 라오디케만은 달랐다. 그녀는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이집트 병사에게 발각되어,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결국 누이동생의 복수를 하게된 것이다. 

   시리아을 침략할 당시의 명분으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다시한번 칼을 들게 되었다. 아니 뽑은 칼을 다시 제자리에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안티오크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벨론을 약탈하였고, 계속해서 인도까지 진격하였다.

   그중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과거 페르시아의 왕도였던 수사를 약탈하는 일이 있었는데, 수사는 옛날 페르시아의 수도였었기 때문이다. 200년전에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의 신을 자신의 나라로 가져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바빌론과 페리시아 지역을 정복, 수사를 약탈하면서 빼앗겼던 신들을 되찾아 갔고, 당시 수사에 있던 신들과 수많은 전리품 또한 이집트로 가져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로 인해 그는 앞으로의 통치에서 구세주로 인기가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공격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셀레우코스 2세는, 시리아에 있던 병력을 추스려서 이집트로 밀고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집트의 왕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왕가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였기 때문에, 반란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 또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멀리 포진하고 있는 상태에서, 셀레우코스 2세의 군대는 양동 공격에 패배의 쓴잔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기원전 242년, 소수 밖에 남지 않은 패잔병을 이끌고 안티오크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셀레우코스 2세는 어머니의 복수를 후손에게 맡기고 죽게 된다. 이후 셀레우코스 3세가 정권을 잡게되었지만, 3년만에 암살 당하게 된다. 결국 복수전을 치루는것은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223~187, 재위 36년)의 손에
맞겨지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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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시대의 문명

   새롭게 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셀레우코스 3세(BC 226~223, 재위 3년)였다. 하지만 그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왕권 유지 뿐이었다. 결국 그는 측근의 야심속에 암살 당하게 된다. 이어 그의 동생이 왕좌에 오르니, 그가 바로 안티오코스 3세(안티오쿠스 대왕, BC 223~187, 재위 36년)로, 나중에 안티오코스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는 사람이다.

   안티오코스 3세는 과거 셀레우코스 2세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치욕을 씻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하고 병력을 계속 보충하게된다. 그는 '때가오면'이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그가 원하던 때는 짧은 순간에 다가오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죽음과, 신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BC 221~203, 재위 18년)의 등극으로, 이집트 관리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훈련된 병사들을 이끌고 페니키아의 소도시들 하나하나 공략하며 이집트의 영역을 취해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승승장구하여 당시 잃어버렸던 셀레우키아 항구, 코엘레 - 시리아속주와 페니키아의 도시인 티레와 프톨레마이스 그리고 인근의 소도시들을 탈환하고 정복하게 되었다.

 

   한편 왕권을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어두웠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시리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유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두 나라간의 새로운 전쟁, 즉 서로간의 복수전이 된 이 전투의 승리자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주어졌다.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두 군대가 충돌하여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급작스럽게 퇴각하였고,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의 지역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게 된다.

   안티오코스 3세는 승리와 아울러, 불안해진 점령지를 바로 잡기위해 프톨레마이스에서 머물다, 기원전 217년에 도시 프톨레마이스에서 안티오크로 옮겨가게 된다. 이후 패배의 설욕을 부르짖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7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와, 안티오코스 3세가 점령한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략하게 된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도 6만 8천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반격에 나서게 된다. 두 군대는 이집트에서 별로 멀지않은 곳인 해안도시 '라피아'에서 대치하게 된다. 라피아 전쟁, 흔히 4차 시리아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시리아군대는 뜻밖에 쓰디쓴 고배를 마시게 된다.

   시리아 보병 1만명과 기병300명의 피해, 4000명의 시리아군을 포로로 잡히는 큰 패배를 당하고, 두 나라는 시리아측에 불리한 조약을 맺으므로써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시리아의 항구 셀레우키아 이외의 도시인 페니키아와 코엘레-시리아는 이집트로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세는 이렇게 불합리한 조약에 대해, 또한 패배의 쓴잔에 모든 것을 포기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기위해 그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무리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이후 여러 분야에서 공적을 세워 불안하고 피폐해졌던 나라를 다시금 부강하게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일으키게 될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을 키우므로, 그의 야심과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만들게 된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승리에 도취된 상태에서 변화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방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사정은 계속 피폐해지기만 할뿐이었다.

   결국 쾌락에 빠져있던 이집트의 왕은 5살난 아들을 곁에 두고 죽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5살난 아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3~181, 재위 22년)였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선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나라를 돌보지 않고 쾌락에 빠진데다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섭정인이었던 아카토클레스가 이집트 사람들을 오만하게 대하는 바람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북쪽으론 시리아부터 남쪽으론 이집트까지, 그들이 다스리던 속주국가들의 반란은 계속 되었고, 유대 또한 그 반란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한편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안티오코스 3세는 항상 이집트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불안해진 정세를 계속 주시하던 시리아의 왕은, "때는 이때다. 제우스는 우리를 돌아 보신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는 움직일 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과거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않은 시리아의 왕은, 자신의 대군 이외에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로 남하하게 된 것이다. 안티오코스 3세는 파네아스(카이사레아 빌립보)에서 이집트의 명장 스코파스와 그의 1만 정예병을 물리치고, 페니키아의 도시 시돈까지 밀고 가게 된다.

   시돈은 공략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막강한 성체를 가진 곳이었지만, 포위공격인 "누벽(壘壁)"'을 서둘러 세워, 기원전 198년에 페니키아 항구를 점령하였다. 이후 팔레스타인 및 유대지역까지 점령하였지만, 유대만큼은 쉽게 하지 못했다. 결국 유대와의 관계는 안티오코스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와의 기나긴 전쟁으로 연결돼 버리게 된다.

   시리아와 마케도니아 연합군은 결국 이집트 지역까지 내려와 이집트를 위협하게된다. 위협으로부터의 타개점을 찾던 어린왕과 그의 섭정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할수있는 최대의 외교를 이룩했다. 이른바 로마와의 동맹이 그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섭정인들은 로마로 가서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결국 로마와 동맹결성을 이룩하게된다. 동맹국인 로마는 이미 2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부터 승리를 이룩하여 신흥강대국으로써 입김이 생기기 시작데다, 그리스의 요청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 대한 문제를 다루던 때였기에, 이집트의 요청을 수락했던 것이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 협박을 했다. 결국 로마의 강요에 못이겨,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맺게 되면서, 4차 시리아 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시리아와 로마 그리고 명장 한니발 
   로마로부터 강요된 중재로 인해, 시리아와의 조약을 맺은 이집트의 조약내용은 이러하였다.

  "로마가 요구한 데로 정복한 지역들을 내주는 대신, 자기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킨다."

  안티오코스 3세는 명의상으로만 양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유대를 비롯한 몇몇 속주를 신부 지참금으로 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 1세(유명한 클레오파트라 아님)를 정략결혼으로 자신의 심복을 세우려 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넘어가 아버지의 의도대로 되진 않았다.

  그것을 알려주는 단적인 예가, 기원전 191년에 벌어진 그리스와 로마간의 전쟁인것이다. 아버지인 안티오코스 3세가 당했을 때도,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따라 로마의 편에 섰던 것이다.

  로마와 대립을 하게 된 문제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간의 전쟁을 들 수 있다. 기원전 197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아니, 자신을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란 생각을 품었던 것이 맞을 듯하다.

  그리하여 그리스를 공략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쪽에서는 이미 강국이었던 마케도니아를 막을 힘이 없었고, 대신 상대해줄 나라였던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게된다. 로마측에서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착때문에 나서게 되었고, 마케도니아 또한 그리스의 한 국가였기때문에, 아니 알렉산더대왕이 살아서 제국을 통치한 메카였기 때문에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 중부에 살면서 마케도니아 왕국과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이톨리아인은, 기원전 197년에 마케도니아와 강화를 맺을 당시부터 불만이 높았다. 그들은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고스란히 놓아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것 같다.

  그것은 로마군에 참가하여, 함께 싸운 자기들에 대한 로마의 배신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마케도니아를 당해낼수 없었기때문에, 시리아에 군사요청을 하게된다.

  안티오코스 3세도, 마케도니아 세력이 쇠퇴한 지금이야말로 오랜 경쟁자인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고, 그리스에 자국의 세력을 진출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동료의 힘이 약해지자 마자 당장 그 기회를 이용하는 것은 헬레니즘 국가들이 늘 써먹는 방식이었던데다, 이무렵 시리아에는 한니발이 있었다.

  기원전 202년 자마회전에서 패해 도망을 나온 한니발을 기쁘게 받아준 나라가 시리아였던 것이다. 한니발과 안티오코스 3세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마케도니아및 그리스에대한 공략과 전략을 계획하게 된다.

  한니발에게 100척의 군선과 1만보병 및 1천기병을 제공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목표로 공략키로 하고, 안티오코스는 그리스 및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을 공략할 것을 계획한다. 또한 한니발은, 자신의 나라였던 카르타고와의 외교를 통해, 지원 요청까지 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6만에 이르는 병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의 문제가 한니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전에 얻은 젊은 왕비로 인하여, 긴급성을 깨닫지 못했던 안티오코스는 로마와의 외교를 했던것이다.

  로마에서는 이미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다시금 그리스쪽으로 지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로 해결하려 하였던 것이다. 로마에서는 3명의 원로원을 파견하게 돼는데, 그중의 한명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였다.

  시리아와 로마간의 대면은 소아시아에 위치한 에페수스에서  이루어졌다. 시리아측의 한니발과 로마측의 스키피오의 대면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누가 최고의 장수인가'를 물어봤다고 한다. 어쨌건 두나라의 외교전은 아무런 성과없이 끝을 맺게 되었다. 때는 기원전 191년, 시리아군대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91년, 그리스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안티오코스 3세는 그리스로 가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시리아 왕의 시도를 불쾌하게 여긴 로마는, 그에게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로마와 시리아간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블로그 > 시대의 문명
                                                                                          원본 http://blog.naver.com/k0193/140018100417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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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91년,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3세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6만대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

 

다. 더 이상 그리스국가에 대한 전쟁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

 

았던 로마도,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민회에 군대파병의 요청

 

을 하였다. 



  그리고 군대의 식량을 위해, 각국에  사절을 보내 군량을 요청하

 

게 된다. 카르타고는 밀을 팔 것을, 그리고 이집트에서는 식량공급은

 

물론, 그리스까지의 수송까지 맡아서 처리하게 된다. 안티오코스 3세

 

의 믿었던 딸 클레오파트라 1세는, 결국 로마의 편에 서 버렸다.



   누미디아에서는 로마에 동조하여, 기병 500명과 20마리의 코끼리를

 

로마측에 보냈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6세까지도 로마측에 호응하

 

여 병력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조를 받기도 전에, 로마군은

 

나톨리아와 연합한 시리아군과 조우하여 승리해 버렸다. 그것도 병

 

력의 1/3밖에 돼지않았는데도, 로마는 기동 전술로 시리아를 물리친

 

것이다.



  로마는 이러한 가능성을 보고 진격했고, 시리아 연합군도 진격하여

 

테르모필레에서 마주치게 된다. 수만 믿고 있던 시리아군은, 안티오코

 

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궤멸하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시리아로 도망쳤고, 로마는 시리아 공략의 필요성

 

을 깨닫고, 시리아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기원전 190년,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필두로 로마군을

 

재편성하여, 그리스에 주둔한 2만과, 새로 편성한 1만 3천의 보병과,

 

500의 기병, 그리고 군선 50척을 투입시킨다. 스키피오는 소아시아로

 

움직일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지원으로 2000명을 더 증원시켜, 총병

 

력 1만 5천 5백의 병력으로 출발하게된다. 



  시리아 측에서는 소아시아에서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8만명

 

병력을 만들어 대비하였다. 



  한편 스키피오는 에트루리아와 마케도니아및 그리스지역들을 차례로

 

돌면서, 외교에 전념하였다. 후방을 안전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전쟁의 시작은 바닷길의 확보를 두고 벌어졌다. 에게해가 두 나라를

 

경유하고있기 때문에, 해전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로마의 후원자였던

 

도스 해군과 합류한 로마함대는 시리아 함대와 충돌하게 되었는데,

 

리아 함대를 책임지고있던 사람은, 과거 로마를 유린했던 명장 한니

 

발이었다.



  양측 다 100여척의 군선이었기에, 숫적인 우월과는 무관한 전투였다.

 

그러한 점에서 한니발 또한 자신감으로 해전을 벌였으나, 유감스럽게

 

도 한니발도 지상전에서만 유명했지, 해전에선 전혀 힘을 쓰지못하는

 

장군이었다. 결국 그의 해군은 패퇴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분개한 안티

 

오코스는 한니발을 멀리 변방으로 보내고, 그자리를 다른 장군에게 맡

 

겨버렸다. 


 


  어쩌면 한니발에 대한 안티오코스 3세의 생각이, 그저 명장이면 모

 

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니발은 시리아 군선의 1/3을 바다에 수장

 

시켜 버렸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장군의 지휘아래, 시리아 해군은 다시 한번 해전을 벌렸

 

지만, 역시 패전을 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군선들은 바다에 수장돼 버림

 

으로써, 에게해의 주도권은 로마로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에게해를 지

 

나는 모든 육지가 로마군의 상륙로가 된 것이다.



  한편 해전의 승리와 함께, 로마의 지상군은 헬레스폰토스해협을 넘어

 

소아시아로 진격하자 ,시리아에선 사절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게

 

된다.



  해전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가 가지고 있던 속주들에게 군사원조를요

 

청하고 있었다. 그중에 흑해연안에 있는 비티니아의 왕에게는 더욱 각

 

별한 내용을 담았으나, 이러한 것을 먼저 간파한 로마의 스키피오는 비

 

티니아와의 평화조건으로 이미 외교를 벌여, 시리아의 군사요청을 무

 

산 시켜 버렸다.

 



  비티니아와의 외교가 좌절되자 ,안티오코스 3세는 싸울 힘을 잃게 되

 

었고, 그전에 병으로 인한 상태 또한 나쁘게 되자 로마에 대한 강화를

 

이야기 했다. 그런 시리아를, 로마는 강화조건을 통해 여러 모로 제재

 

를 가하자, 시리아측의 사람들은 강화를 중단하고 지도자간의 회담으

 

로 연결시킨다.



 

 

 

                 시리아의 몰락의 징조 마그네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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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시대의 문명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시리아의 사절이 왔을 당시 와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의 사절을 보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리아의 사절들은 스키피오와의 대면을 요구했고, 이어서 병상에서 보게 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의 대면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전편에 스키피오가 총사령관이라고 한 것은 바로 잡을 필요가 있겠다.

  스키피오가 집정관에 당선된 것은 기원전 194년이었다. 로마에서는 집정관이 되고 10년이 지나야, 집정관을 다시 출마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키피오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리아는,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알렉산더의 분할된 제국 중에 제일 큰 나라였고, 군사력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로마로 보자면, 그리스는 상당히 까다로운 나라였기 때문에, 스키피오란 인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스키피오는, 루키우스가 당선되면 자신도 참모의 자격으로 그리스로 갈 것이라고 공언을 해 놓고 있은 데다가, 그 해 집정관으로 루키우스와 라일리우스(스키피오의 오른팔)가 뽑혔던 것이었다.

  그의 형이었던 루키우스가 총사령에, 동생 아프리카누스는 참모격으로 갔으나, 형이 한 일은 전투에서 싸웠을 뿐, 나머지 일들 즉 외교와 아울러 전쟁에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스키피오가 처리하였다. 그렇기때문에 사령관을 스키피오라고 한 것이다.

    또한 루키우스가 주재하던 회의에, 병 때문에 못나간 스키피오를 시리아 사절이 찾았다는 것을 보면, 분명 시리아측에서도 사령관을 스키피오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시리아의 사절은, 에게해를 둘러싼 해전에서 생포한 아프리카누스의 친아들을 풀어 주겠다는 이야기로, 아프리카누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였다. 그런 후, 바로 전 강화 협정에서 자신들이 치뤄야 할 조건을 완화시켜 줄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러한 조건으로, 상당량의 돈을 줄 것도 제시하게 된다.

   이에 아프리카누스는 시리아 측의 성의에 감사를 전하고는, 전쟁보다는 전에 제시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시리아측의 사절들은 시리아로 돌아갔고, 왕인 안티오코스 3세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게 된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그러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계속 전쟁을 할 것이란 고집만 내세웠다.

   사절들이 시리아로 돌아간 며칠후, 로마군은 소아시아에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한다. 안티오코스 3세 또한 남하해오는 로마를 맞이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게 된다. 두 나라의 군대는 마그네시아 평원을 마주하고 대치하게 된다.

   우리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다시한번 만나서 전쟁을 치를 줄 알았던 명장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이상한 문제에 엇갈려 서로 마주쳐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니발은 해전에서의 패배로 변방으로 가게 된데다, 스키피오는 시리아 사절이 오기 전부터 걸렸던 병에,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두나라의 명장은 등장하지 못하고, 명장은 아니지만 그 나름데로 전술을 쓸 줄아는 사람들이 나서게 되었다.

   마그네시아에서 만난 두 군대는, 로마측에서는 스키피오와 함께 보충받았던 15,500명과, 전에 테르모필레에서 치뤘던 전투에 참가한 연합군과 합세하여 3만 4천명과, 루미디아에서 보급된 16마리의 코끼리였고, 시리아측은 훈련된 병력 6만에, 코끼리 54마리를 투입하였다.

   시리아에서는 안티오코스 3세의 지휘아래, 알렉산더가 썼던 기본 전술인 6미터 창을 이용한 팔랑크스 대형으로 로마를 맞았다. 이에 한니발 전쟁으로 시작된 스키피오식 전술을 배운 로마 장교들은, 기동력과 민첩한 행동으로 시리아군을 맞았다.

 알렉산더였다면 모르겠으나, 로마의 상대는 최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리아군의 최대 약점은 엄청난 무게의 중무장에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 때보다 더욱 증가된 무장때문에, 시리아군은 양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로마군을 막지 못했다.

 결국, 3만 3천의 사상자를 내고 시리아측의 패배로 끝이 난다. 반면 로마에서는 300이 조금 넘는 사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시리아의 왕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사르데스까지 도망치게 된다. 병력의 대부분을 잃은 시리아의 왕은, 그저 로마의 처분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전후 처분을 담당한 사람은 로마의 명장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앞에서, 전쟁전에 했던 강화협상 그대로를 요구했다.

   그리고 로마는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의 철수를, 또 시리아측에선 유럽쪽에서 완전한 철수를, 시리아와 유럽을 횡단하는 타우루스 산맥을 기점으로 서로 경계를 긋고 불가침 할 것을, 그리고 로마에서 선택한 시리아 청년 20명을 인질로 줄 것, 마지막으로 한니발을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지도자 3명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전쟁 배상금조로 1만 5천 탈렌트(한화로 1500억정도)를 배상할 것도 들어 있었다. 한편 강화가 끝나자 안티오코스 3세는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크로 돌아갔고, 기원전 187년에,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에 있는 한 신전을 강탈하려다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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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와의  마지막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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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블로그 : 시대의 문명

   마그네시아에서의 전쟁으로 시리아는 점점 쇠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갚을 수도 없는 배상금 때문에, 안티오코스 3세는 점점 약탈자로 변해갔으며, 기원전 187년 페르시아의 엘리마이스에 있는 한 신전을 강탈하다 처참하게 죽게 된다. 뒤를 이어 셀레우코스 4세가 왕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4세(BC 187~175, 재위 12년)는 과거 클레오파트라 1세의 신부지참금조로 자기에게 왔어야 했던 속주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독살로 유야무야 흐려지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왕이 진 로마에 대한 배상금 때문에, 예루살렘의 성전에 대한 강탈을 생각한다.

 

   예루살렘의 신전에는 막대한 양의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셀레우코스 4세는,  재무관인 헬리오도로스를 파견하여 보물을 강탈해 올 것을 명령하지만, 헬리오도로스는 자신에게 맡겨진 군권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셀레우코스 4세를 죽이고 왕좌에 앉게 되었다.

 

   시리아의 불안한 정국이 시작되는 시기가 이 시기로 본다는 학자들이 다수가 있는데, 이때부터 시작되는 헬리오도로스의 반란이후, 마카베오 가문에 의한 통한 유대 독립까지의 기간은 시리아의 위기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듯하다.

 

   왕좌를 탈취한 헬리오도로스는 시리아에 대한 야망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그 야망도 얼마를 못넘기고 좌절되고 만다. 셀레우코스 4세의 동생이었던 안티오코스 4세는, 시리아의 패배로 인해 14년동안 로마에 인질로 잡혀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외교를 통해 페르가몬의 유메네스왕의 지원을 약속받고, 시리아로 진군하게 된다.

 

   페르가몬은 로마에 속해있는 그리스의 소국가로서, 소아시아에 대한 입지를 강하게 생각하던 나라였다. 페르가몬은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강화시키고, 소아시아지역의 패자로써 군림하기 위해, 시리아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약속한다. 페르가몬의 유메네스왕과 동생 아탈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들어가, 헬리오도로스와 그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안티오코스 4세를 왕좌에 앉힌다.

 

   이렇게 불안정한 시국에 왕이된 안티오쿠스 4세는, 앞으로 전란을 몰고 올 한명의 선동자이자, 한명의 신앙심 깊은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 안티오쿠스 3세가 신부 지참금조로 일으킨 전쟁을 이용하여, 이집트를 다시금 침공하게 되었고,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 스스로를 시리아와 이집트의 왕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에 구원 요청을 하게 되었다. 이미 이집트는 시리아를 상대할 만한 능력도, 그만한 힘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간절하였다. 

 

   한편 이집트의 사절들을 맞이한 로마에서는, 시리아의 영토가 계속 늘어나는것을 좋아하지 않은데다 ,로마에서 부르짖던 팍스 즉 평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동맹국으로서의 이집트를 살릴 필요를 느꼈기에, 이집트의 요청을 수락하게 된다. 이리하여 '가이우스 포피릴우스 라이나스'를 사령관으로, 시리아에 대한 정벌을 목적으로 병력을 파견한다.

 

   라이나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의 왕권을 포기하고 그 나라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한다. 서로의 군대는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엘레우시스에서 맞닥 뜨리게 되는데, 안티오오쿠스 4세는 로마와의 싸움에서 참패한 때의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포로 생활 때의 로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계속 머뭇거리는 헤프닝을 보여주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는 고문관들과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라이나스는 그 왕 주위에 원을 그려놓고서, 대답을 해야만 원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강력한 발언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결국 시리아의 왕은 로마에 대한 강한 좌절감 때문인지, 아니면 로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이러한 굴욕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아무 소리 못한 채 로마의 요구에 응하여 ,기원전 168년 시리아의 안티오크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시리아와 이집트의 관계는 끝이 나게 된다. 이로인해 이집트와의 전쟁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종결된다.

 

 

 

 

 

 

                                   유대 왕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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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를 물리치고 나서는 그만 자만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함으로써, 이집트는 부강했던 나라 사정과는 달리 속주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이 그자리를 대신하지만, 어린 나이의 왕과 섭정인이었던 아카토클레스의 오만함 때문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집트 속주의 반란이 심했는데, 그러한 속주 반란에는 유대가 어느 나라들보다 유명하였다. 이후 유대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의 복수전 때 시리아측을 지지하게 되어, 예루살렘에 주둔한 이집트군을 잡아 시리아에 바쳐서 시리아로부터 신임을 얻기까지 하였다.

 

   그 댓가로 안티오코스 3세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고, 신정정치를 부활시킬 수 있도록 성전 건축을 허락해주고, 율법에 따라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혜택을 받는 유대인 지도자 사회는, 아무 저항 없이 헬라화 정책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대와의 관계는, 기원전 190년부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한 시리아는, 기원전188년 아파메아에서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자기영토의 상당 부분을 내어줌과 동시에, 전쟁 손해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 당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인데다가, 또한 전쟁 배상금을 낼 여력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속주들을 강탈하는 일과, 외부나라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배상금을 충당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길은 유대쪽까지 밀려오게 되어, 유대민족에게 베풀던 세금 면제 등의 특혜가 없어지고, 반대로 성전을 약탈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약탈중에 사망하고, 이어서 그의 장자였던 세레우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그 기미는 변하질 않았다. 그런 셀레우코스 4세가 그의 재무관이었던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되고, 안티오코스 4세가 14년간의 로마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서 왕이 되었기에, 그들은 과거 로마의 법령과 혜택을 기억하고, 어느정도의 자유가 허락될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4세는, 시리아의 생활부터 로마의 생활까지 그리스신화에 심취했던 인물로써 유명하였다. 그런 그에게 종교의 자유에 대한 혜택은, 어쩌면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안디오코스 3세가 이스라엘을 장악하기 전부터, 이미 친 시리아파가 형성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그들은 대제사장직과 성전의 재정권을 둘러싸고 친 이집트파인 정통파에 맞서, 동족간에 크게 반목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의 충성에 비해 정통파의 저항을 유대교 때문이라고 판단, 개혁파의 호응을 받으며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종교탄압을 시작한다.

 

   율법을 지키는 일, 신생아에게 할례를 베푸는 일, 성경을 소유하는 것 등 모든 유대교적인 종교행위들이 금지되었고, 위반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 시리아 관리들이 전국토를 감시했다. 위반자가 발각되면 사형이나 화형에 처해졌다. 유대교의 본산지인 예루살렘 성전은 제우스 신전으로 바뀌었고, 사마리아 성전도 제우스신에게 바쳐졌다.


   기원전 167년 겨울, 제우스와 관련된 석상과 아울러, 제단이 개혁파들의 손에의해 만들어지면서 그 열기는 더해갔다. 열흘 후쯤 제우스에 대한 희생이 바쳐지게 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신성 모독으로 돌리어 봉기를 시작하는데, 이른바 마카베오 가문의 독립전쟁의 효시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대 왕국과의 관계 그리고 하시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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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왕국에서는 안티오코스 4세와 개혁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그리스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일련의 것들이 유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체육학교를 개설하고, 모든 젊은이들과 제사장들까지 나체로 운동을 시키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을 사게되었다.

 

   한편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사독가(家)출신 대제사장 시몬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  3세가 대제사장 직책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는 친 이집트 세력인 보수파에 동조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안티오코스 4세의 눈에 가시와 같았기 때문에, 기원전 175년 결국 축출되었으며, 대제사장  직책은 그의 형제인 '야손'이 안티오코스 에게 거액을 주고  매수하였다. 야손은 자기 형과는 반대로 개혁파에 동조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식 도시로 재건한 후, 시리아의 수도를 본받아 안티오크로  개명할 것을 건의해 허락을 받게되었다.
 
   기원전 172년 성전관리인 시몬의 형제인 '메네라오스'가 ,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게 되었다. 결국 야손 또한 축출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유대주민들의 반발 속에서, 보수파에 의해 '아크라'라는 그리스식 요새에 감금당해버린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러한 행동을 반란의 신호라고 단정해버리고, 시리아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군시킨다. 시리아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닥치는대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추방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 퇴역군인들 및 시리아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재개발 한 후, 아폴로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총독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그리스의 신 제우스와, 그의 동료신들(아테나와 디오니소스)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제우스신을 섬기며,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 당하였으며, 거부하는 자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당했다. 

 

   이와같은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화 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은, 당연히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건'을 의미하는데, 이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회개운동' 이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티오코스 4세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시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주위에 울타리를 칠 것을 주장했다. 일몰에서 시작해서 일몰로 끝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일몰 몇시간 전부터 안식에 들어가고, 다음 일몰 몇시간 이후까지 안식을 취했다.
 
   하시딤 운동에 참가한 자들은, 안디오코스 4세의 칙령에 따라 무참하게 살해됨으로, 수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견디다 못한 하시드 대다수가 유대 사막지대로 피신했다. 그러자 시리아 관리들은 하시드들의 은거지를 색출하여 잠복해 있다가, 안식일에 처들어가 학살을 단행했다. 하시드들은 안식일을 지키기위해, 습격을 당해도 도망도, 저항도 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따라서 공격자들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위반자들을 쉽게 처형할 수 있는 잇점을 살리려고, 안식일을 택해 공격을 가하곤 했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1천여명을 살해한 기록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 어머니의 일곱 아들이 모두 하시딤운동에 가담했다가, 전원이 순교를 당한 사례도 발견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시드파 ,즉 하시딤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사람들, 즉 율법학자들을 하시드라고 한다. 이 하시드들이 나중에 분열이 일어나, 여러 분파로 나뉜다.

 

   성경에서 흔히들 바리세인과 사두게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다 하시드파에서 발생한 것으로, 율법에 이어서 정통성을 결합시켜 버림으로써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의 빈자들에게 많은 고초를 주었다.

 

  이들과 분리원칙을 따지던 계파로는 에세네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묵시주의적인 페쇄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삶을 살았다.

 

 

 

 

                                       마카베오 전쟁 
그라쿠스(k0193) http://cafe.naver.com/historywar/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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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하면 유대독립전쟁이 기억난다.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도 '유대고대사'를 통해 마케베오전쟁을 알려주었으며, 성경의 외경에 속하는 마카베오 전,후서를 통해 마카베오전쟁의 사실을 알려준다. 그럼 마카베오전쟁은 유대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하시딤 운동에 직접 참여 하지는 않으면서도, 율법에 충실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여기 저기에 많이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제사장직을 가진 '맛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서북쪽에 위치한 '메디안' 이라는 지방에 사는 '하스몬'가문의 우두머리였다.

 

 맛디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가띠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 다씨라는 별명을 가진  시몬, 마카베오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 아와란 별명을 가진 엘르아살, 아푸스란 별명의 요나단이었다. 어느날 시리아의 관리 한 사람이 메디안에 나타나서, 주민들로 하여금 제우스 신에게 희생제를 드리도록 강요했다. 그 관리는 마을의 우두머리인 맛디아에게 의식을 진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맛디아는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자,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제우스신의 제단에 희생제를 드렸다. 이것을 본 맛디아는 격분하여 제단으로 뛰어 올라가서  희생제를 드린 마을사람을 살해한 다음,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한 시리아 관리도 죽여버렸다.

 

  맛디아의 이와 같은 행동이 의거의 신호가 되어, 공개적인 봉기사건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168년 맛디아 일가는 추종자들과 더불어 유대 사막 지방으로 피신하게 되고, 거기서 하시드들과 합류하게 된다.

 

  맛디아 일행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다가 대 학살을 당하는 참변을 목격하고, 하시드들을 설득한다. 그 결과, 그들은 정책을 바꾸어서 안식일이라고 해도 적이 쳐들어오면 대항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리아에 동조하는 자들을 기습 공격하고, 제우스 제단들을 파괴하고, 할례를 실시하는등 철저하게 저항운동을 펴 대부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기원전 166년 맛디아가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그의 아들 중에서 마카베오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가 승계하여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건장하고 교활한 데가 있어, 시리아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카베오는 산발적이던 저항 세력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하여 전력을 강화한 후, 적을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결과 다음해인 주전 165년 12월 25일에는, 3년전 바로 그 날에 점령당해 더렵혀졌던 성전을 탈환하여 청소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렇게해서 그들은 먼저 종교적인 자유를 어느정도 확보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수전절(하누카)이라고 부르며 명절로 지켜오고 있다.

 

  이렇게 되자 하시드들은 그들의 목표가 성취된 것으로 믿고, 마카베오당을 후원하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하시드들의 목표는 정치적인 독립이 아니요, 종교적인 자유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카베오당의 목표는 종교적인 자유에 국한되지 않았다.

 

  문화적,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거부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시로 재개발하려는 그리스화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최종 목표는,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기원전 163년, 안티오코스 4세가 파르티아와 전쟁 중 사망한다. 그는 죽으면서 친구 필립포스를 섭정자로 임명한다. 그러자 왕위를 계승한 어린 안티오코스 5세의 스승인 리시오스와, 섭정자 필립포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기원전 162년 마카베오당을 토벌하던 리시오스는, 유리한 입장에 있던 예루살렘 정벌을 포기하고, 마카베오당과 평화 협정을 맺은 후 본국으로 돌아간다. 필립포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
 
  이때 로마는 국력이 점점 강화되어, 시리아까지 넘겨다 보기 시작 했다. 그들은 잡혀와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던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 테메트리오스를 탈출할 수 있도록 방관한다. 돌아온 테메트리오스는 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아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기원전 160년 테메트리우스는, 마카베오당의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바쿠스를 총독으로 파견한다. 바쿠스의 병력이 너무 우세한 탓으로, 이를 맞아 싸우던 마카베오당의 두목 유다가 알라사 전투에서 전사한다.

 

  #성경의 외경중 하나인 마카베오 전,후서를 보면, 마카베오의 성전(聖戰)을 약간 신화적으로 꾸민 느낌이 든다.

 

 

 

 

                            마카베오 전쟁(하스몬 왕조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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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60년 유다 마카베오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요나단이 저항군의 총수가 되어 유대 저항군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하시드들은 종교적인 자유만으로 만족하고 저항 세력을 떠나간 관계로, 마카베오당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다시 사막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전법으로 저항운동의 명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대 저항군이 사막으로 피신해 있는동안, 시리아에서는 데메트리오스와 발라스간의 왕권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난다. 이 두 세력에서 최대의 관건은 마카베오당의 포섭이었다.

  요나단은 왕위 경쟁자 중의 하나인 데메트리어스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합법적인 통치자로 행세할 수 있게 되었고. 발라스에게서는 요나단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요구대로 메네라우스가 처형된 후 공석으로 남아있던 대제사장직을 넘겨주게된다.

  이와같은 정치적 전환점을 잘 이용한 요나단은 ,기원전 152년 이스라엘의 왕 겸 제사장직을 맞게되었으며, 실질적인 나라로 임명하게 된다. 그것은 대제사장 제도의 일대 변천이었다. 제도면에서 세습제가 임명제로 바뀌었다. 자격면에서 사독계열이 비사독계열로 바뀌었다.

  주체가 사두개파에서, 이방 통치자로 바뀌었다. 그 결과 하시드들과 동조세력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떠나, 사독가문 출신 제사장인 '의의 교사'의 지휘아래 쿰란지방으로 은둔한다. 거기서 그들은 묵시주의적인 페쇄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소위 말하는 에쎄네파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일어났던 내란은, 기원전 150년 발라스가 데메트리오스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다. 요나단은 그에게서 분봉왕이란 칭호를 얻어냈다. 하지만 완벽한 토벌을 이루지 못한 발라스는, 기원전 145년에 패배한 데메트리어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2세가 발라스를 타도하자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어 시리아의 황제가 된다.

  요나단은 이 새 통치자에게도 호의를 얻어, 사마리아 남부지방의 통치권을 얻는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마도 이점이 아닐까 생각한다.....요나단은 치밀한 권모술수와 외교정책을 통해, 그의 입지를 굳건하게 하는데 상당한 면모를 지녔음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수가 있다. 

  오래지 않아 발라스의 아들이 안티오코스 6세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서, 데메트리오스 2세와 대결을 벌였다. 그러자 요나단은 데메트리오스 2세가 자신의 요구를 더 이상 들어주지 않는데에 불만을 품고, 안티오코스 6세에게 접근한다.

  한편 로마는 시리아의 정책에 실력행사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요나단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점은 시리아에 상당한 불리함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로마와의 교섭과 외교정책은, 시리아의 두 경쟁자들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버리면서, 하스몬의  요나단을 위험인물로 지정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 시발점은 데메트리오스 2세가 유다에 대한 외교정책을 비난하였고, 이후 외교단절이라는 행동으로 결국 유대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되는 싯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동맹자였던 안티오쿠스 6세는 협약이라는 미명아래, 요나단을 끌어들여 결국 기원 143년에 암살을 하였다.

  요나단이 사망하자, 그의 형 시몬이 동생의 직책과 직위를 이어 받는다. 그는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붙어서 그의 허락을 받아,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위대한 대제사장, 전략가, 유대인의 맹주' 라고 자칭하고, 독립된 통치자로 다른 왕들처럼 자신이 통치하기 시작한 해부터 연대를 계산하도록 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명실공히 유대를 독립국으로 선포한다. 이 때가 주전 141년이다.

  이듬해 시몬은, 대다수의 제사장들, 유대 지도자들, 그리고 장로들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았다. 이렇게 해서 시몬은 왕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유대인의 왕과 대제사장으로서, 하스몬왕조를 형성했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과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반면에, 그는 스파르타나 로마와 같은 강대국들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시몬의 집권 초기에 트리폰이 원정길에 나섰으나 실패하게되는 시기에,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 포로생활을 하던 데메트리오스 2세의 동생 시데테스가, 탈주하여 안티오코스 7세 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트리폰을 꺽은 후 시몬을 공격했으나, 모데인에서 시몬의 두 아들, 유다와 요한에게 격퇴 당한다. 이로 인해 유대의 독립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러나 나라가 독립하자 마자, 하스몬왕조에서도 왕조의 왕위 쟁탈전이 전개된다. 기원전 134년, 시몬은 그의 두 아들 및 부인과 함께, 자신의 사위 프톨레미에게 암살 및 살해 당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암살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피신했던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가, 프톨레미를 물리치고 대제사장직과 왕권을 찾는 사건이 일어났다.

 

  히르카노스는 또한 영토확장에 대한 열의를 보여, 바벨론 포로 이전의 영토를 되찾으려고 군대를 일으켜 진군하였다. 하지만 시리아의 안티오코스7세의 압력을 받으면서, 그 계획은 좌절되어 버린다.  결국 히르카노스는 부친인 시몬이 정복한 모든 영토를 시리아에 반환하고, 조공까지 바치기로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127년, 시리아의 안티오코스7세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 후 시리아는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자 시리아의 위협과 내정간섭에서 벗어난 히르카노스는, 이스라엘 전역과 그 주변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결국 그의 야심은, 장차 올 것이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볼수있다.

  기원전 126년, 사마리아의 수도 세겜도 정복하였다. 그리심산의 성전이 파괴되고, 사마리아 주민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권위에 종속되었다. 다른 점령된 도시 주민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도록 강요당했다.

  그것은 그리스화를 저지하고, 유대주의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스몬왕가도, 헬레니슴적 관습과 언어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었다. 요한 히르카노스도 자신의 세 아들 유다, 맛다디아, 요나단을 그리스식이름으로 개명하여, 아리스토불로스, 안티고노스, 알렉산더로 불렀다.

  여러 도시를 평정하였던 히르카노스는 기원전 104년경 그의 생을 마감하였고, 하스몬 왕가는 다시 왕위 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유다 아리스토불러스가 부친의 계승자로 예정된 자기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여 버림으로써 권력을 장악하고, 국제적인 대외관계를 고려하여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는 일로 시작하여, 주화에 '대제사장 요한'으로 새기게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 왕권을 이어받을 야심에 차 있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지 1년만인 기원전 103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좌절되었고,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남편의 동생 알렉산더 요나단을 왕으로 추대한 후, 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면서 왕권이 바뀌게 되었다. 결국 왕위를 물려받은것은 야심에 찬 형이 아닌 동생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더 요나단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거의 버금갈 정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잠재해 있던 하스몬가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공동체로부터 표출되어, 심한 갈등을 격고 있었다.

  기원전 96년에는 바리새인들이 선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란이 일어나, 6년간 계속되었다. 요나단은 반란군과 그들을 지원하러 온 시리아 왕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물리치고, 반란군 지휘자 800명을 나무기둥에 박아 공개 처형을 하였다.

  기원전 76년 알렉산더 요나단이 사망하고,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위에 오른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는, 알렉산더 요나단 시대에 충돌이 심했던 바리새인들과 화친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증가하게 되어,이때부터 바리새파가 중요한 종파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는, 하시딤 운동가들 중에서 에세네파를 따라가지 않고 남은, 비 제사장 계열의 평신도들이다. 그들은 율법을 중심으로 행동하며, 그것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율법학자들이다.

  기원전 67년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다시금 그녀의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난다. 살로메의 장남 히르카노스 2세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집권할 당시에 대 제사장직을 맡아 가지고 있었지만, 군권에 대한 점에서는 동생보다 못한 듯싶다.

 

  결국, 히르카노스 2세가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의 여리고 전투에서  패하여 항복을 강요받은 다음, 대제사장 자리까지 동생에게 내어주면서 내란은 종지부 찍는다.

  유대를 장악한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기원전 67년에 대제사장직과 왕권을 동시에 부여받고 통치하게 되지만, 그의 통치도 결국 로마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압력으로, 결국 기원전 63년에 종말을 고하면서  하스몬왕조의 멸망을 가져오게 된다.

 

 

 

 

                                        그동안 이집트에선...   
그라쿠스(k0193) http://cafe.naver.com/historywar/181
출처블로그 : 시대의 문명

  과거 시리아의 안타오코스 4세의 이집트 침입에 맞서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의 원군을 요청하였던 일이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시리아의 존재가 그리 달갑지 않은 상태였던데다, 이집트에 대한 목적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라이나스를 파견하여 이집트를 돕게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고 몇년후 유대와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리아와 유대간의 전쟁중, 이집트에선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치열한 경쟁이 있게 되었다. 

  이집트의 왕권과 관련된 관계를, 로마에서는 더욱 더 북아프리카에 진출할수있는 계기로 보고, 중재를 하게 되었다. 그후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후의 프톨레마이오스 9세)이 키레네로 가면서, 왕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정리되었다.

  기원전 145년, 피스콘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죽자, 키레네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피스콘이 돌아와 있는 동안, 다시한번 내란이 발생하였다.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는, 자신도 왕의 권리에 대해 내세우면서 피스콘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었다.

 

  기원전 133년에서 시작된 이러한 내란은 기원전 130년까지 진행되었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정권이 일부 넘어가면서 결론짓게 되었지만,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든 이집트는 다시금 일어설 수도, 그렇다고 일어나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내란에 승리를 했지만, 그의 통치도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결국, 피스콘은 기원전 116년에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이집트를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시리아와 유대가 서로 싸우고 있을 무렵의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고, 로마의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당시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반면 이 시기의 로마는, 해외 영토가 거의 없었고,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 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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